2016. 11. 19.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초등학교 시절, 학교로 가는 오르막 길은 가팔랐다. 학교 근처에 살았던 탓에 늦게 일어나기 일쑤였고 오르막 길을 자주 뛰어올랐다. 재미 삼아 시간을 정해놓고 오르막 길을 뛰고 또 뛰었다.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점점 빠져도 오르막 길을 자주 뛰어다녔다. 어릴때부터 뛰고자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초등학교 육상부 80m 단거리 선수였다. 친구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때, 나는 스파이크를 신고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장거리를 뛰어도 장거리 선수들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심폐지구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승부욕은 누구 못지않게 강했다. 학교에서 나보다 빠른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은 나와 달리기 시합을 하길 원했고 나이 어린 내가 종종 이겼으며, 선배들은 후배의 빠름에 놀라곤 했다. 운동회에서 항상 반 대표 마지막 주자로 뛰었고, 다른 반 친구들을 가벼이 제치고 1등으로 결승선을 밟은 적이 많았다. 운동회때마다 나는 '영웅'이었다.
육상부에 전학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고,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으며, 키는 컸고 체격은 다부졌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전학생은 도 대회 입상 경력이 있다고 했다. 육상부 감독은 전학생과 나의 경쟁 의식을 키웠고, 결국 나는 원하지 않던 시합을 하게 됐다. 우리 둘은 출발선에서 준비 자세로 시작 총소리만을 기다렸다. 총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내가 먼저 치고 나갔다. 30m를 지나고 있을 때 전학생은 무서운 속도로 격차를 줄이며 따라왔다. 격차는 점차 좁혀졌고 전학생은 나를 제치고 결승선에 먼저 도착했다. 전학생의 뒷심은 놀라웠다. 도 대회 입상은 소문이 아니었다.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처참한 패배였다. 그뒤로 육상부에서 씁쓸하게 탈퇴했다.
하지만 혼자, 자주, 달렸다. 수능을 마친 후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자주 동네를 달렸다. 달릴 때 숨 차오르는 쾌감이 좋았다. 달리기 시작하면 달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지금도, 나는 달린다. 화가 날 때, 미치도록 화가 날 때, 미치도록 운동장 트랙을 달린다. 달리는 행위에 모든 것을 맡긴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차올랐던 화는 점점 사라진다. 달려야 살기 때문에 달린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오늘도 화가 많이 났고 다시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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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9. 16:2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재밌네...,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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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7. 14:31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32년의 역사를 어떻게 써 내려갈까 고민이다.
하루 하루가 역사의 과정이니까,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개인의 역사를 잘 써내려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리라 생각한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항상 좋을 수도, 항상 나쁠 수도 없다.
올라감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감이 있고, 내려감이 있으면 다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흥망성쇠"
대한민국은 내리막을 걷고 있는데,
곧 다가올 33년 개인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될지 궁금하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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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3. 22:2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어려운 시간속에서 홀로 이 꽉 깨물고 견뎌내면 내 안의 성은 더욱 견고해진다. '인생은 고해다'라는 문장이 더욱 선명하게 새겨진다. 감정이 무뎌진다. 웃지 않고 울지 않으며, 더욱이 공감하지 않는다. 손 내밀지 않고 내민 손 붙잡지 않는다. 차가워지는 인생이 두려울뿐이다. 다만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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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2. 23:06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중학교 동창의 결혼식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16년전 아무 이해관계 없이 웃고 떠들고 사고쳤던 그들과 추억 속으로 돌아갔다. 잃어버린 16년을 서로 알진 못하지만, 과거 기억의 편린속에서 퍼즐맞추기하듯 하나씩 회상했다. 그들의 16년 인생이 궁금했으나, 내 성격상 그 인생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볼 마음은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의 대부분의 대화는 과거 속에 머물렀지만, 결국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나는 서울에서, 그들은 대구에서. 누군가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고, 누군가는 외제차를 타면서 성공이라 부르짖었고, 어떤 친구는 삶의 고난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또 누군가는 밑바닥 인생을 살기도 했다. 결혼한 친구는 미혼인 친구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살라고 진담처럼 이야기했고, 미혼인 친구는 결혼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동조했다. 왜냐면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고 그런, 유치한 이야기 속에서 잃어버린 친구들을 생각했다. 중학교 동창 중에 연락하는 친구는 한명뿐이고, 고등학교 동창들과는 연락하지 않는다. 지난 세월동안 스스로 관계를 버려왔기 때문에 후회나 미련 따위는 남지 않는다만... '인생을 제대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몇몇 친구들과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아무 의미 없는 짓거리일 수 있지만, 다시 연락이 닿는다면 기억 속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 반가웠다,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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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2. 01:17 신앙/말씀 묵상(默想)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 언약적 측면과 행위 언약적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구약 시대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나라가 성립될 것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언약이다. 이를 시작으로 구약에서 모세언약과 다윗 언약으로 계승되며,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에서 예언된 새 언약이 성취된다.
모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다. 모세 언약을 두 가지 측면에 바라보자. 먼저 은혜 언약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이 모세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에는 제사제도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였을 때, 그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수단을 허락하신 것이다. '번제'를 통해 자신을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킨 다음, 그 동물을 완전히 태워서 자신의 죄를 사함받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피의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인 것이다. 죄를 짓고 사함 받을 수 있는 통로를 주셨다는 점에 모세 언약도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1천년 동안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내하시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 간간히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인해 죽기는 했다.
두번째 관점, 행위 언약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이방민족에 의해 처참히 멸망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의 악행과 완악함은 자신들의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구약시대의 모세 언약은 전체적으로 은혜 언약이지만, 행위 언약적 측면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행위 언약적 관점을 통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구원에 대해 철저하게 무능력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 세계 외부에서, 또는 인간 외 타자에 의해 제시된 방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역을 담당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십자가 사역을 통해 구약에 서 예언하신 새언약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또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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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2. 00:34 신앙/교회
교회적으로 살지 못하는 나에게, 누군가는 그 삶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배운바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한 것이, 뻔뻔하게 보였던 것일까. 그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났다. 나는 더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했고, '부끄러워 해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 성격상,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기에 말을함에 있어서 스스로 평가절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운 것과 삶의 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 잡을 수 있는 '격차'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괴리'라고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근데, 흔하게 '괴리'라고 설명했던 적이 많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교회적으로 살지 못하는 내 삶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교회와 지체를 위해 재정과 시간을 할애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교회적 삶의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의 기준에는 그리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지점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삶이 부끄럽냐, 아님 떳떳하냐는, 아무래도 내가 제일 잘 알테니,
다시 스스로에게 묻고 솔직하게 답해보자.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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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2. 00:10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왜곡된 성(性)의 관념은 어린 시절 접했던 음란물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와 친구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때마침 친구가 당시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에로 영화 '물 위의 하룻밤'을 어렵게 구해왔다. 나를 비롯한 친구 열댓명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벅차고 들뜨는 마음으로 친구집으로 향했다. 운좋게도, 친구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한 구석에 던져 밀쳐놓고, 비디오 테이프를 아주 조심스럽게 VCR에 넣고 숨죽이며 기다렸다. TV에 영화 제목이 나타나고 영화가 시작될 즈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그렇다. 우리의 담대했던 시도는 갑자기 나타난 친구의 누나로 인해 철저히 실패했다. 뻔뻔스럽게 비디오는 계속 재생됐고, 누나는 얼음이 되어버린 우리와 비디오를 번갈아가며 봤다. 친구를 버려두고 우리는 아주 재빠르게 그 집을 탈출했다. 이때가 음란물을 보려고 했던, 첫 시도였다.
그 뒤로 중, 고등학교 시절 아무런 제재 없이 음란물을 접했다. 자극적이고 비정상적인 음란물을 시청함으로써 성장기에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할 성에 대한 관념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은 여자 친구와 성관계를 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우리는 귀기울여 들었다.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 가득했던 그 시절, 금기를 깨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탈이자 잘못된 욕구의 분출이었다. 청소년 시절 자주 접했던 자극적인 음란물의 잔상은 아직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축적된 이미지의 잔상들이 기억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뒤틀려버린 성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의 악순환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그러므로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성관계를 통해 자손을 번성하게 하셨다. 즉,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혼의 틀안에서 성은 믿음의 자손들을 이어가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창 1:28
성에 대한 관념을 올바르게 바꾸는 동시에, 나의 기억속에 잔존하는 죄악된 생각의 고리를 끊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잘못된 사고의 과정으로 인식된 기억 체계를 한순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왜냐면 기억 체계는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향이 뒤틀리면, 그 상황을 인지하고 뒤틀리기전에 생각을 끊어내야 한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철저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는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이나, 아직 육체를 입고 있는 자로서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 연약한 육체를 근거로 삼는다면, 그 인간은 스스로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의 참혹함과, 그리고 죄로 인한 결과의 엄중함을 분명히 깨닫게 해달라고 철저히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주여, 죄인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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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7. 23:23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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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6. 22:27 삶을 살아내다/실수(失手)
실수에서 배우지 않으면 실수는 계속 반복된다.
1. 지체들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
치졸한 자는 약자 앞에 강하고 강자 앞에 약하다. 말을 함에 있어서 강자 앞에서는 할말은 해야하며, 약자 앞에서 겸손한 말투로 상대방을 무시해서는 아니된다. 허나, 나는 오늘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착한 지체들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 내가 말을 함부로 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착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그들이 착하고 여린만큼 그에 맞게 대해줄 필요가 있다.
2.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때,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말을 끊고 치고 나가서는 아니된다. 더욱이 상대방의 말을 경히 여기면서 내 말만 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대화의 기본은 듣는 것이다. 경청하는 것이 우선이다. 듣는 연습을 하자. 아주 귀기울여서 듣는 연습부터 하자.
3. 웃지 않았다.
상대방의 질문과 말에 아무런 웃음기 없이 건조하게 말했다. 상대방이 웃음으로 묻는다면 나 또한 웃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예의다. 기분을 속일 필요는 없지만 서로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잠시 제쳐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웃는 얼굴에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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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6. 00:09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자꾸 머리가 지끈거린다. 자고 일어나면 잠시 괜찮아졌다가 다시 왼쪽 뇌가 아파지는건 시간 문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지나가는 아픔일거라 믿는다. 다만 내게 부탁하고 싶은건 마냥 쓰러져 있지도 말고 아파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포기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아플수록 더 악착같이 해. 아파서 징징거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잖냐. 스스로 애처로워지면 더 힘만 빠질뿐이다. 다시 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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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5. 23: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 단상메모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 독방에 앉아서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객관적 상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주관적 감정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 니토위에 쓰는 글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고,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 생각을 높이고자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는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첩경을 찾는 낭비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버림과 키움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 피서의 계절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 저마다의 진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떤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 닫힌 공간, 열린 정신
잠겨 있는 옥방 안에서도 시계는 잘 갑니다. '막힌 공간에 흐르는 시간'......, 흡사 반칙 같습니다.
팔목에 시간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간에 각박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차피 무기징역은 유유한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 장기 망태기
결벽증과 정돈벽이 남보다 덜하지 않았던 제가, 결코 자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징역살이라는 '장기 망태기' 속에서 부대끼는 사이에 어느덧 그것을 버리고 난 지금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정신적 여유와 편안함마저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고'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 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우리들로 하여금 형식을 깨뜨리고 본질에 도달하게 하며 환상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운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 작은 실패
도대체 역의 오의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는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 계수님의 하소연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그 여인은 "그이와 함께라면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와 일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 나는 걷고 싶다
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누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 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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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5. 22:5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1. 말의 습관
1)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2) 누구에게 들은 말은 전하지 않는다.
3)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4) 타인을 비방하는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5) 근거가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2. 행동의 습관
1) 계획을 세우고 움직인다.
2)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을 일정하게 지킨다.
3) 카톡을 자주 확인하지 않는다.
4) 공부할때 전화를 받지 않는다.
5)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6)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다.
7) 쓸데없이 휴대폰과 컴퓨터를 하지 않는다.
8) 일주일에 두번은 신문(한겨레, 중앙)을 사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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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4. 18:06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누굴 탓할 거 없어. 경쟁에서 진다는 건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야. 다시 힘내서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 상황에서 누가 도와줄 수도 없는 거 아니겠니. 다시 입다물고 철저하게 준비하자. 다시, 동굴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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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3. 19:54 신앙/창세기 묵상
야곱이 에서를 만나고 난 후 35장 전까지 신자로서 마땅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의 자녀들은 세상의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악한 일을 당하게 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는다. 이때 야곱은 자식들의 악행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그런 상황을 보면, 분명히 야곱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야곱과 그의 자식들이 세겜에서 저지른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이들의 피를 보게되는 결과도 당연히 나쁘지만 그 과정 또한 올바르지 않았다. 악을 악으로 갚는건 절대 신자의 태도가 아니다. 죄에 대한 응당한 처벌은 하나님의 몫이다.
야곱은 창세기 35장에 이르러서야 그들 중에 있는 죄악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예배한다. 야곱도 영적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가야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도 다를바 없다. 하나님께 처음 엎드렸던 그때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들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살겠다고 했다. 빛도 이름도 없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근데 지금, 나는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옹졸하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시며 인내하셨다. 아니, 믿고 기다려주신거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때론 전적인 주권이 필요한 경우가 있긴하다. 날마다 그 약속들을 되새기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말씀을 통해 부어지는 은혜를 맛봐야 한다. 그 길만이 살길임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Soli Deo Gloria
창세기 32장 1-12절 _ 야곱의 기도 (0) | 2016.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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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장 1~18절 _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2) | 2016.07.25 |
창세기 19장 1~38절 _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인간의 죄악 (0) | 2016.07.25 |
창세기 18장 16~33절 _ 의인의 간구 (0) | 2016.07.25 |
창세기 16장 _ 아브람과 하갈, 그리고 이스마엘. (0) | 2016.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