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고 싶다 _ 신영복

2016. 11. 5. 23: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 단상메모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 독방에 앉아서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객관적 상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주관적 감정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 니토위에 쓰는 글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고,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 생각을 높이고자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는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첩경을 찾는 낭비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버림과 키움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 피서의 계절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 저마다의 진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떤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 닫힌 공간, 열린 정신 

잠겨 있는 옥방 안에서도 시계는 잘 갑니다. '막힌 공간에 흐르는 시간'......, 흡사 반칙 같습니다. 

 팔목에 시간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간에 각박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차피 무기징역은 유유한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 장기 망태기 

결벽증과 정돈벽이 남보다 덜하지 않았던 제가, 결코 자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징역살이라는 '장기 망태기' 속에서 부대끼는 사이에 어느덧 그것을 버리고 난 지금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정신적 여유와 편안함마저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고'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 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우리들로 하여금 형식을 깨뜨리고 본질에 도달하게 하며 환상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운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 작은 실패 

도대체 역의 오의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는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 계수님의 하소연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그 여인은 "그이와 함께라면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와 일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 나는 걷고 싶다 

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누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 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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