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이스트_친구들이 그립습니다.

2012. 5. 11. 12:11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타인과의 관계를 발전할 수 있는 토대는 서로간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믿음’이란 인간 자체에 대한 확신이라 생각한다. 한 사람의 현재상황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그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봐주며 같이 발맞추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가령, 노숙자나 정신질환자라도 말이다.

 #1

 영화 '솔로이스트'에서 LA타임즈 로페즈 기자는 노숙자 나테니얼을 좋은 칼럼대상으로 다가간다. 그의 우여곡절의 삶이 기자의 시선을 끈 것이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노력으로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했지만, 정신적인 혼란으로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노숙자 생활을 하는 그 속사정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다가 인생의 교차점에 들어선다.

 처음 만났을 때 나테니얼은 로페즈가 내민 손을 잡지 못했다. 자신의 허름한 차림에 대해서 사과하면서 부끄러워 뒷걸음질 쳤다.

"I apologize for my appearance. I've had a few setbacks." (내 옷차림 사과할게요. 좀 사연이 많아요)

 

#2

 로페즈는 특종기사를 쓰기 위해 나테니얼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기자로서 그의 부서져버린 음악에 대한 기억들을 회복시켜주려 노력한다. 그 노력이 '나테니얼'의 마음을 차츰 열게 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서로간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조건적인 것이었다. 기자 로페즈는 특종이 필요했고, 음악 천재 나테니얼은 친구가 필요했다. 로페즈에 대한 지나친 나테니얼의 기대는 로페즈를 자신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집착은 관계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러면서 나테니얼의 정신질환은 더욱 악화된다. 어긋난 관계회복을 위해 로페즈는 정식으로 나테니얼에게 정신질환 치료를 권유한다. ‘정신질환’이라는 진실이 구체적인 언어로 그들 사이에 거론되었고, 그 ‘진실’은 나테니얼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나테니얼의 치부를 대 놓고 건드린 셈이다. 치부가 드러난 것에 화가 난 나테니얼은 로페즈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치닫고 만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다시 각자의 길로 가게 된다.  

#3

         처음에 먼저 다가갔듯이, 다시 손을 내민 사람 역시 로페즈였다.

         그 손을 '나테니얼'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의 맞잡음이다.

                  "I am honored to be your friend"(당신의 친구가 돼서 영광이예요)

악수를 하면서 로페즈가 나테니얼에게 건넨 말이다. 이제 로페즈에게 노숙자 '나테니얼'은 없다. 아직 세상을 등졌지만 힘겹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인간 '나테니얼'만 존재할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나테니얼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도 그대로이지만 다행인 것은, 옆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진심으로 그를 돕는 기자, 아니 친구 로페즈가 있다는 것이다.

 너와 나의 경계선이 더욱 더 명확해지는 요즘,  멀리 떠나 간 내 친구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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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선교 간증문

2012. 5. 8. 19:02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무익한 종의 고백

 

선교는 누가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선교를 하는 것일까요? 아님 똑똑한 사람이 선교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이 선교를 하는 것일까요? 선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이 시킨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이 그에게 사례 하겠느냐?”며 종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당연히 종의 역할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탄자니아 선교를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하고, 제 호칭을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 불렀습니다. 맡은바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과 발 맞추어 함께 걷는 법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머리로는 ‘동행’이란 두 글자를 떠올렸지만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갓난아이가 걸음마가 익숙해질 때까지 자주 넘어지듯이,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의식적인 노력 없이 그 분의 뜻을 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건축사역이 시작되면서 건축현장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제게 맡겨진 잡일들을 담당하면서 마음속에 불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들 듯 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이런 잡일 하러 탄자니아에 온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은 않으시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를 섬기면서 살라 하면 그리 할 수 있겠니?저 또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을 계속 던지셨고, 하나님의 따뜻한 손으로 제 지친 마음을 만지시던 날, 전 거실땅바닥에 무릎 꿇어 그리하겠다면서 그저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교현장도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이들을 포용하면 좋겠지만, 저 또한 본성이 악한 사람인지라 맘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현지인들에게 불만을 표하면서 언성을 높였던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제가 감당치 못할 만한 일들이 밀려왔을 때, 그 일을 맞닥뜨려야 하는 고단함이 싫어서 한 발짝 물러서서 방관한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제멋대로인 저를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그 넓은 마음으로 그저 지켜 봐주셨습니다. 1년의 사역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했던 부분들 때문에 마음 한 켠이 많이 무겁습니다. 특히, 제가 맡겨주신 영혼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울 뿐 입니다. 요즘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써 일하고 계신 탄자니아 선교사님들을 자꾸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분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 삶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선교 1년은 하나님의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탄자니아에서의 실질적인 선교는 끝났지만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을 위해 다시 힘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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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되찾기

2012. 4. 30. 15:4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2년만에 돌아온 대학교정은 낯설다. 저마다 무리지어 다니는 곳곳에서 홀로 다시 교정을 걷고 있다. 밥도 혼자 먹은지 3달이 넘었다. 뭐, 그리, 나쁘진 않다. 견딜만 하다.

 내가 애용하는 과학도서관 4층에 화장실이 있다. 각층마다 다 있긴 하다. 그런데 대변을 볼 수 있는 4곳중 한 곳은 누수로 사용을 금지 시켜놨고, 또 다른 한 곳은 손잡이가 고장나서 사용할 수가 없다.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두 곳 뿐이다. 식사시간 전후로 화장실에 대변을 보려는 학생들이 몰리면 화장실 두칸은 턱없이 부족하다.


 

 4월 초순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도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이야기 중에 고장난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친구 1 왈: 어제 똥 누러 왔는데 4층에 사람 다 차서 3층갔는데, 또 다 차서 2층, 1층까지 내려갔다 아이가.

친구 2 왈: 나도 그런 적 많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왜 저학생들이 1층까지 내려가야 하나?'라는 질문을 하게 됐다. 고장난 두칸을 1달 반이 넘도록 그대로 방치했던 학교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리고 1층까지 내려가야 하는 불편을 그냥 감수하고 있는 공대생들의 태도에 할말이 없었다. 자신들이 누려야 하는 권리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학교 어느 부서에 전화해서 고쳐달라고 하면 될까?' 머리를 스치는 한 곳이 있었다. 총학생회를 통해 학교에 내 의사를 전달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홈페이지를 통해 총학 연락처를 찾아냈고, 바로 전화해서 4층 화장실 수리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수리 요청한 것을 깜박잊은 채 1주일이 지나갔다. 그리고서 다시 화장실의 고장난 두칸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안 고쳐졌잖아!',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바로 총학에 전화를 걸어 따질까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얻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성적인 글로 건의 하기로 했다. 아래는 내가 올린 전문의 일부다.    



4층 제 3열람실 화장실 


현재 과학도서관 4층 남자 화장실에 대변을 볼 수 있는 4곳중 한 곳은 누수로 사용금지 시켜놨고, 또 한 곳은 문 손잡이가 고장나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4층 제 3열람실 총 인원수가 505명인데, 공대생중에 남학생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300명이상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식사시간 전후로 화장실에 학생들이 몰리게 되면 대변을 볼 수 있는 곳을 사용하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대변 한 번 볼려고 4층에서 3층, 3층에서 2층, 2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지난주에 전화상으로 건의를 드렸었는데 아무조치가 없어서 글로 올립니다. 빠른 조치 부탁드립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있으나 일단 이것만 적도록 하겠습니다. 총학생회에서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소홀히 듣지 말아주시고,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찾을 수있도록 저희를 대변하며 학교측에 의사를 전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낮에 글을 올리고 저녁에 홈피에 다시 들어가서 확인했다. '집행위원장'이란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내 건의글에 여러 댓글을 달았다. 건의사항에 대해 빠른 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글투를 봐서는 나름 차분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났다. 그 날 저녁, 문고리가 고장났던 화장실 한 칸은 수리 되어 있었다. 잃어버린 권리를 다시 되찾았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에, 혼자 수리된 문고리를 보고 한참 서 있었다. 시험기간이 다가와서 누수에 대한 것은 시험끝나고 고쳐준다고 했는데 두고 볼일이다.

 공대생들은 학생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는 데 적극적이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아예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알고도 모른체 할 수도 있다.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난 마지막 1년동안 공대생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볼 참이다. 조금 번거롭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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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손'의 개입이 필요하다

2012. 4. 30. 14:5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관계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시스템이다. 소비자의 수요에 대한 공급은 기업들이 담당한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상품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시장개입을 최소화하고 기업들 간의 공정한 경쟁을 유발시켜 소비자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시장경제는 어떠한가?

 이명박 정부는 집권초기에 경제성장를 목표로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이에 대기업들은 신규 설립과 인수합병을 하면서 거대한 자본을 확보해나갔다. 현재 그 자본을 가지고 골목시장까지 점령해 나가고 있다. 문구점, 동네 빵집과 커피점은 물론 심지어 떡볶이, 순대까지, 대기업 계열사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골목 시장에서 영세업자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호텔신라가 운영해오다 최근 사업철수를 발표한 베이커리 카페 '아티제' 청계광장점 모습

 또한 대기업은 수요독점을 기반으로 하청 중소기업들에게 납품단가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중소기업들 간에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하청기업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대기업과 거래를 하는 것이다. 대기업 집단의 경제력 집중현상과 독과점은 한국경제의 가장 극적인 시장실패이다. 제 시장경제에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것이 아니라 '보이는 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첫째,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규제는 정부가 특정 분야에 대해 확장범위를 제한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확보해놓은 거대한 자본이 있기 때문에 신기술을 개발하거나 점포를 확장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영세업자들은 처지가 다르다. 일정기간 동안의 판매 매출을 통해 기술을 개발할 것이냐 아니면 점포를 확장할 것인가 등을 결정할 것이다.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영세업자들이 경쟁하는 것은 권투에서 라이트급과 헤비급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기업의 점포 확장 개수를 제한하거나 빵집이나 문구점 같은 특정 분야에 대해 진입하지 못하도록 법적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둘째, 현실에게 점점 커져만 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문제는 실제적인 제도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공정거래 위워회 등 정부기관의 독점 제소권 폐지, 징벌적 손해배상의 확대, 조사방해죄에 대한 실효성 있는 처벌 강화 등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가 중소기업에게만 적용되는 저금리 대출 정책을 마련해줌으로써 중소기업이 자력으로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정부의 개입을 통한 양극화 해소 정책의 핵심은 중소기업이 스스로 이룩한 정당한 성과를 공정한 거래를 통해 중소기업에게 귀속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대기업 수요독점에 따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와 경제력 집중현상은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대기업들이 수출을 주도하면서 이끌어 온 한국경제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다. 정부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들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야 할 거이다. 그리고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수요독점을 규제함과 동시에 중소기업과 영세업자들이 대기업과 동등한 조건에서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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