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켈러의 부활을 입다 _ ‘이미와 아직’ 사이, 그 긴장 가운데 우리가 소망하는 것

2024. 4. 10. 12:37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팀켈러의 부활을 입다 _ ‘이미와 아직’ 사이, 그 긴장 가운데 우리가 소망하는 것

 

 사람들은 각자 믿는 바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돈의 위력을 믿는 사람은 부자가 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고, 권력의 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온 힘을 쏟을 것이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기독교 신자(信者)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을 얻어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부활 생명으로 살아난 자는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부활에 대한 해석을 통해 현재의 삶과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여 살아가도록 돕는다. 이 책은 총 4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설명하고 2부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자 신자의 삶을 이끌어 가는 원리임을 고찰한다. 3부에서는 베드로, 바울, 도마 등의 성경 인물을 통해 부활 신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알려주며 4부에서는 삶의 여러 가지 영역에서 부활이 신자에게 주는 의의에 대해 살펴본다.

  저자는 빈 무덤, 목격자의 증언, 부활한 예수님의 특성,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에서 출발해서 실제 우리의 삶에 영적 부활이 가지는 실제적 의의까지 확인함으로써 신자가 이 땅에서 마땅히 “희망하고 확신하는 자원”이 부활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또한, 이 책은 부활 생명이 구원의 삶과 능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집중하기 때문에 부활을 믿고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유익하다.

  책의 기본 전제는 예수님의 부활로 미래의 새로운 창조 세계가 현재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현재 속에서 미래를 산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이 낯설겠지만, ‘이미와 아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미 도래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신자는 그 긴장 가운데 “첫 열매(고전 15:20)”이시고 “먼저 나신(골 1:18)”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의 부활도 확신하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강조한다. ‘이미’의 하나님 나라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현실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를 기대하게 되는데, 현실은 여전히 어려움과 고난이 존재하기에 낙심하게 된다. 반면에 ‘아직’의 하나님 나라에 몰두하여 ‘이미’를 망각한다면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새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복을 충분히 누리되, 현실의 어려움 가운데 부활 소망으로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확신해야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복음을 설명하는 단어의 선택이다. 책에서 구원과 연관 지어 인간의 죄성을 설명할 때 연약함, 나약함, 결핍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단어는 죄악으로 전적 타락한 인간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고, 오히려 인간적 연약함을 부각시킬 수 있다. 오해의 여지 없이 말하자면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죄에 대한 속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며, 그 죽음에 대한 대반전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부활 생명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우리의 몸은 아직 부활하진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이 새롭게 됨으로써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능력을 얻게 된다. 결국 책을 통해 부활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이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목표임을 깨닫게 해준다. 신자는 이미 영적 부활을 맛본 자로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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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_ 김호연

2022. 3. 20. 09:00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출처: yes24

 자취생활을 할 때 가장 유용한 곳이 집 앞 편의점이다. 할인매장보다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1인용 음식들이 많고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만 거의 다 살 수 있는 편의점은 점점 개인화되어가는 이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의 첫장을 읽었을때 편의점 이야기로 어떻게 이어질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전개를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김호연 작가의 글은 흡인력이 있었다. 웬만하면 소설은 잘 읽지 않지만, 첫 장을 읽고나서 이 소설은 '흥미롭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이야기는 염 여사가 파우치를 잃어버린 데서 시작된다. 염 여사는 서울역에서 파우치를 잃어버렸고, 그 파우치를 '독고'라는 노숙자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염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그 파우치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염여사가 잃어버린 파우치를 찾아준 독고에서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데려간 곳이 그녀가 운용하는 always 편의점이었다. 그렇게 편의점 이야기는 시작된다. 알바생 시현, 오 여사, 성필씨, 그리고 편의점을 찾는 고객들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다. 편의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독고가 있다. 초라한 행색에 말도 어눌한 탓에 사람들이 기피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각박해진 이 시대의 산물인 편의점과 사람 냄새 나는 독고가 묘하게 얽혀있다. 독고는 과거 충격적인 일과 지나친 음주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냥 자신의 원칙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하다. 결국 독고는 편의점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과거도 알게된다. 과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생의 의미를 되찾아 새로운 삶을 내딪게 된다.   

 소설의 중심에는 독고가 있지만 각 챕터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각자의 삶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는 시작점이 독고의 행동과 말인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는 것. 각박한 이 시대의 산물인 편의점에서 온기를 전해주는 독고의 캐릭터가 소설 전체에 관통하는 이미지다. 아무리 시대가 개인화되고 삭막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타인의 아픔이 나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다면 그 아픔은 방관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사람과 사람 간의 정이지 않을까 싶다. 독고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염 여사의 호의 때문이었으니까. 염 여사의 호의가 독고의 마음 열게 했고, 마음을 연 독고는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본다.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 <불편한 편의점>, 140쪽-


15쪽

 다른 노숙자들에게 맞아가면서까지 파우치를 지킨 것부터, 주인에게 잘 돌려주기 위해 꼼꼼하게 확인을 한 것까지, 사실 어지간한 책임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47쪽

 느릿느릿 일어나 경찰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독고 씨의 커다랗고 듬직한 등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고개를 돌린 독고 씨가 그녀를 향해  찡그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웃는 그의 얼굴은 눈가에서부터 흘러내린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독고 씨는 아랑곳없이 피 묻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229쪽

 사장님의 제안을 수락한 뒤 술을 끊고 편의점 일을 시작한 것은, 아마 내 안의 마지막 생존 본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임신한 길고양이가 불쑥 사람의 집에 들어와 새끼를 낳듯이, 나 역시 살아 있어야 할 최후의 이유가 있어 알코올중독마저 잠 재우고 이 피난처를 찾은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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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_ 김유원

2021. 10. 4. 12:4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인생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만으로 점철된 삶을 꿈꾸겠지만, 막상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실수와 실패로 가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실패 앞에서 마냥 축 늘어져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 실패가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실패속에서 교훈을 배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작은 성공이다.
김유원 작가의 <불펜의 시간>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친구의 질문에 한이닝만 던지는 계투로 살고 싶다는 대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성공적인 삶은 아니지만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내는 삶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은 크게 세 인물로 나뉜다. 중학교까지 야구를 하다가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일반 고등학교 진학해 대기업에 입사한 준삼, 유망한 야구선수였으나 자신의 승부욕으로 죽은 동료의 환상때문에 부진하다가 결국 자신만의 리그에서 야구하는 혁오, 어릴때 야구부를 했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야구부로 진학하지 못하고 야구 기자로서 살아가는 기현. 세명 모두 야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승자의 삶을 살진 못한다. 승자이길 원했지만 패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기현이 그랬고, 승자였지만 승자이기를 포기했던 혁오의 삶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았고, 그 자그마한 희망으로 다시 삶을 이어간다. 그러함에도! 살아가는 세 인물을 보면서 하나의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방향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러함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그 삶의 승패를 판단할 수는 없다. 각자의 삶이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인생인 것이다.


16쪽
영문은 상관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시장이 묵묵함의 미덕까지 알아봐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문의 묵묵함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의 아내뿐이었다.

20쪽
영문은 한방을 믿었다. 타이푼은 그 믿음에 보답하듯 종종 9회 말에 역전했다. 영문이 가장 감동했던 역전승은 8회 초까지 9점 차로 뒤지고 있던 날의 경기였다. 그날은 점수 차가 너무 커서 잠시 고민하다가 입장했는데, 영문이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타자들이 볼넷과 안타로 줄줄이 출루하더니, 5번 타자와 1번 타자가 만루 홈런으로 승리를 일궈냈다. 영문은 그날 주차장에서 돌아서지 않은 자신을 오랫동안 대견해했다.

24쪽
그리고 그날부터 3년 동안 야구부를 하면서 준삼은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람과 한편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하나씩 경험해갔다.

37쪽
혁오의 엄마 현숙은 고등학교 때까지 배구선수였다. 모든 걸 결과로 판단하는 스포츠의 생리를 잘 알았던 그는 아들의 타고난 재능을 칭찬하지 않았다. 대신 당부했다. 인생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고, 경기에서 이기면 기뻐하되 우월감을 느끼거나 상대를 얕잡아보진 말라고, 노력해서 얻은 승리라 해도 뽐내지는 말라고 했다. 혁오가 기념할 만한 승리를 할 때마다 반복해서 말하며 아들의 미래를 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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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감정 _ 김용태

2021. 1. 24. 19:3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몇 해 전 교회와 갈등이 생겼을 때 나의 감정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감정의 원인을 찾고자 심리상담가를 찾아갔다. 상담가와 여러가지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감정의 원인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긍정적인 감정은 그대로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특정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스스로 그 감정을 부인하거나 모른 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표출되거나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언젠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감정이든 잘 받아들이고 적극 표현할 필요가 있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인정하며 그 감정들을 잘 표출해야 한다. 

 

감정은 억압하거나 회피하는 것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51쪽

 

「가짜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려준다. 감정의 발생원인과 근원에 대해서도 쉽게 알려준다. 더욱이, 부정적인 감정을 잘 조절하는 방법들을 알려주어 우리의 삶이 좀 더 편안해지게 돕는다. 먼저, 감정을 조절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야 한다. 자신이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면 그때 자신의 상태가 어떠인지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두번 째 할 일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때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느낀 감정을 감정을 일으킨 사람에게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173쪽).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는 대상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단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부단히 노력하고 과거의 자신과 싸워야 한다. 그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책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표현하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158쪽

연민이 많은 사람들은 밝고 명랑한 사람들과는 관계를 잘 못한다. 이런 사람들과 있으면 자신이 못나 보이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왠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것 같아 피한다. 

 대신 자신보다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잘한다. 불쌍한 사람들은 도와주는 대부 역을 자처한다. 때론 가해자들을 향해 대신 분노를 터뜨려주기도 한다. 이러 관계를 지배적 의족이라고 한다. 

 

179쪽

사람들이 하는 주된 오해 중의 하나가 감정은 꼭 그 감정을 일으킨 상대방에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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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심리학 _ 야야 헤릅스트

2021. 1. 18. 19:4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고등학교 시절, 원치 않았던 친구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난 후 난 오랜세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살았다. 나를 때린 그 친구와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학교에 대한 불만에 가득찬 시선으로 세상를 살았다. 그 사건에 대한 피해자를 나로 규정하고 그들을 탓했지만, 결론적으로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삶은 늘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웠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우리의 삶을 갉아먹어 결국 우리를 무너지게 만든다. 

 

 우리는 각자 한 두가지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피해의식을 통해 남을 탓하면서 자기를 변호하거나 정당하다는 것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피해의식 자체는 우리에게 절대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피해의식의 악순환을 끊고, 피해의식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피해의식의 심리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앞으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책이다. 저자는 1부에서 피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며, 그렇게 형성된 피해의식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고 있다. 2부에서는 형성된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한다. 우리의 삶에서 피해의식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고, 감정을 표출하느냐에 따라서 누구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히게 되고, 또 어떤 이는 그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될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형성된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발생한 피해의식은 비슷한 경험에서 또 다시 유발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다시 확인하여 무의적으로 발현되는 감정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의식을 겪는 우리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시작점이다.  

 

고통과 아픔은 흔히 생각하듯 영혼과 정신이 병들었다거나 성격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싶어한다는 외침이다
166쪽

 

 자신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생길뿐 아니라 정서가 풍부해질 수 있다. 긍정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피해의식을 심겨준 과거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발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엄격하고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의 기준과 규칙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피해의식을 고착화시키는 고정관념을 찾은 다음, 내면에서부터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그 과정은 어느 누구도 해줄 수 없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불행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될 점은 목표를 세우고 더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피해의식은 단순하게 없앨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끊임없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책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두가지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문장]

 

23쪽

피해의식은 대개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받았거나 크게 상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생긴다. 언제 어떠한 경험을 했느냐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이를수록, 즉 어린 나이의 상처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 크고 오래간다. 그만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응력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4쪽

갓난아이일 때는 가까운 주변 세계와 그 나머지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크게 울거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자기를 둘러싼 온 세계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 시기에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 그 자체'이다. 어머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음으로써 신체적인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익숙해지고, 누군가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역할도 배운다. 또한 이런 체험을 통해 공간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주변의 의견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 내적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다. 

 

30쪽

부모가 아이의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려면 먼저 자신의 욕구를 알아야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랑을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되고 싶고 자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도 자녀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줄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 부모들이 많다.

 

31쪽

어른들은 아기들이 원래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위험한 생각을 한다. 사실 아이들은 잘 잊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들을 근거로 자기만의 직감적인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아기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질서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쌓는다. 

 

41쪽

어떤 경험을 한 후, 그 결과를 나와 동일시하고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힘으로 인정하면 고정관념이 된다. 고정관념은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숨어 있다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영향을 미친다. 

 

42쪽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자책하며 날마다 말과 생각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면, 누군가 우리에게 사랑을 주려고 해도 불신하고 의심하게 된다. <중략> 어렵지만 우리는 자신을 살아하는 법을 배우고 고정관념들을 바꾸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61쪽

자신을 비하하거나 시기심을 감추려는 헛된 노력보다는 그것을 계기로 자신도 비슷한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정적인 성격이 자아실현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중략>

내면의 어두운 면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인간의 결정에는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함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라. 밝음과 어두움은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두 힘이다. 우리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62쪽

 무언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고 바로 역공을 가하거나 도망을 친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의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사적인 공간을 지키기 위한 반응이다. 

 

67쪽

 만약 내면의 어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개인적 자아 성취욕구와 집단적 자아 성취욕구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규범에 따른 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71쪽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혹은 다른 자학적 태도 등 파괴적인 행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자기 징계는 '난 그럴 자격이 없어' 라는 식의 생각이나 '자기 부정'을 통해 나타난다. 이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시기심과 파괴적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가 유사한 종류의 감정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나면 활발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이 포기했던 것을 누군가가 요구하는 모습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폭발해 말이나 감정표현, 또는 몸짓을 통해 분노와 시기심이 드러난다. 

 

81쪽

상처받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번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받은 상처는 아무리 뛰어난 심리치료사라도 흔적 없이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부정적인 기억을 되돌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93쪽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런 감정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해 내면의 어둠 속에 몰아넣고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그런 감정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비하한다. 

 

113쪽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지크베르트의 무력하고 체념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또한 거의 강제적인 방식으로 자유를 누리려는 모습에서 공격적이고 고집스러운 면을 볼 수 있다. 카탸의 공격성은 상대방에게 시간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는 무력하고 체념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그들이 외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다르지만, 마음속의 생각에는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들 모두 갈등의 해결은 상대방의 태도 변화에 달려 있고, 자신은 상대방으로부터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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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세계관 _ 스티븐 윌킨스, 마크 샌포드

2021. 1. 10. 19:40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세계관은 신념, 곧 마음의 근본적인 방향이다.
것은 실재의 기본적인 구조에 관해
우리가 주장하는 이야기나 일련의 전제로 표현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살고 행동하며 존재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제임스 사이어



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는 관점이다.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신자가 일관성 있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염된 세계관을 살아갈 위험성에 처해있다. 우리가 접하는 세상속의 여러가지고 요소나 대중문화로 인해 우리는 다른 세계관을 의도치않게 받아들여서 살아갈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개인주의자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24쪽)'이다.

세계관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행동이라는 거울에 우리의 확신을 끊임없이 비춰 봐야 한다. 고백하는 신념과 행동하는 신념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올바른 신조를 인용하고 타당한 교리를 인정하며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그 속에 내포된 원칙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25쪽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신중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백하는 신념(곧 지적인 차원으로만 머물러 있는 생각)과 확신하는 신념(곧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념)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지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말과 행동을 통합하는 것이 「은밀한 세계관」의 목표이기도 하다.

책에서 선정한 여덟가지의 은밀한 세계관은 개인주의, 소비주의, 국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종교가 된 심리 치료이다. 우리 살아가는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내용들을 파악하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검토해야한다. 이와 더불어 책을 통해 우리가 고백하는 신념과 확신하는 신념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더 나아가 두 신념간의 간극이 메워져서 하나의 신념으로 통합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좋은 문장]
23쪽
우리는 종종 어떤 일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충분한 시간이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24쪽
이 책의 중요한 전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내용이나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개인주의자처럼 살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고쳐야 한다. 아마 세계관에 대한 신중한 평가가 그런 수정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24-25쪽
세계관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행동이라는 거울에 우리의 확신을 끊임없이 비춰 봐야 한다. 고백하는 신념과 행동하는 신념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올바른 신조를 인용하고 타당한 교리를 인정하며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그 속에 내포된 원칙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만 언행이 불일치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과학적 자연주의자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보편적 도덕 기준이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살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삶을 성찰하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신중하게 살피지 않으면 이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말과 행동을 통합하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28쪽
신앙과 삶을 성공적으로 통합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 가지를 실천했다. 우선, 그들은 기독교적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멘토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둘째, 그들은 기독교적 삶을 사는 데 깊이 헌신된 동료와 정기적으로 만났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대학을 떠난 후 당면하는 유력한 다른 세계관들의 도전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30쪽
결국 세계관은 온전하고 다차원적인 실제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다. 또한 어떻게 삶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세계관은 비록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궁극적으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2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개인주의

33쪽
개인주의는 하나님이 각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는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매우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기독교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한다.

37쪽
개인주의자들이 자신의 도덕적 행동에 대해 다른 삶이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할 때, 이것은 흔히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적절히 이해한다면, "내가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게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는 권위는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개인주의가 옳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기준을 내게 부과하도록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은 나의 목적과 가치관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학법칙으로 시를 판단하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내가 자신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권위의 원천임을 보여 준다.

41쪽
가장 건전한 개인주의는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개인주의는 우리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힘들에 자주 굴복하고, 우리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과 조직들이 그 의무를 종종 이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어떤 변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고유한 목적이 내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면, 나는 궁극적으로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48쪽
사실 우리는 타고난 사회적 존재이며 심지어 개인주의자들의 자기 이미지도 다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된다. 내 삶의 의미가 나의 성취에 의해 평가된다면-기존 사회제도 안에서의 성공이든, 사회제도와 맞서서 이룬 성공이든 간에-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나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기준을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49쪽
개인주의는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 전 신앙수련회 때 나는 이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신약학자인 강사가 경건회를 인도하면서 히브리서를 인용했다. 그는 히브리서를 25년 동안 연구한 후에야,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이 서신의 모든 명령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중략> 그는 우리 문화에서 흡수한 개인주의적 태도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명령을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추정했던 것이다.

50쪽
우리가 세계관에 대해 물어야 할 우선적인 질문은, "누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가"이다. 개인주의는 우주의 중심에 개인을 놓음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위치에 놓으려고 한다.

51쪽
개인주의적 세계관에서 잘못된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내가 우주에서 일차적인 실재라고 주장할 때, 이것은 다른 사람을 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나 나의 중심적 위치를 노리는 경쟁자로 보게 한다. 다른 사람은 다만 효용적 가치만 있거나(그들은 나에게 도움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내 개인적인 사업과 목적의 장애물일 뿐이다. <중략> 따라서 하나님 왕국에 참여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내용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이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런 이해 때문에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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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_ 허지원

2021. 1. 2. 21:25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코로나19로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홀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지며, 직장에서는 쫓겨나거나 사업이 망하기도 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더욱 나빠지면서 사회적 우울감은 더 증가한다. 마음이 무너지거나, 무너진 마음의 병이 악화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지금의 힘든 상황이 언제 나아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단.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빠지게 할 경향이 크다. 코로나로 인한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도 우리는 언제나 불안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한발 더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는 임상심리전문가가 낮은 자존감과 우울감 때문에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의 측면에서 그 생각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전하는 이야기다.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든,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든, 그 과거가 현재의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당신의 미래는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히 그 과거를 뛰어넘고 또 다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당신의 과거는 당신의 미래가 아닙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과거가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과거의 일이나 그 일로부터 비롯된 감정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당신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조금씩 할 수 있을만큼만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면 그만인 것이다. 

 


[좋은 문장]

20쪽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어 오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심리학 영역으로 끌어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이때 자존감을 '성취 수준을 개인의 목표치로 나눈' 비율 공식으로 정의했습니다. 

 

22쪽

'스스로 자각하는' 본인의 자존감, 자기가치감이 낮을수록 정신건강 문제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경향성은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자기평가에 기반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럭저럭 대충'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가 느끼면 됩니다. 

 

23쪽

최근에는 상태 자존감state self-estee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삶의 맥락과 고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자기가치감을 뜻합니다. 또한 이말은 우리 모두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하는 유동적인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5쪽 각주 

자존감의 문제와 별개로, 어떤 상황에도 자꾸만 겸손을 떠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애narcissism가 굉장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저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겸손할 수준도 안 되는 사람의 겸손은 건방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왜 사람들이 존경르 표하지 않지?' 하는 식의 과도한 자기애와 욕망을 드러내면 이는 너무 위험하니, 이를 정반대로 표현하는 반동 형성이라는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이 겸손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겸손을 표해도 될 만큼 뭔가를 정말도 해내고 나서 그때 겸손해지면 됩니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사소한 성취에 대한 사소한 칭찬은 그냥 받아들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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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_ 수 클리볼드

2020. 12. 27. 22:3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부모는 자기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기가 낳아 기른 아기라도 전혀 모르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다.

됐지만 누가 사이코패스 거짓말쟁이인지 부모도 나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 350쪽-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이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듯,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의 가해자인 수 클리볼드의 회고록이다. 책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들의 총기난사와 자살을 이해하기 위한 발버둥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키워온 아들이 악마의 모습으로 비극적인 사건을 저질렀으니, 부모로서는 도저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사건을 바라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 아들의 범죄가 부모 탓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부모는 비난할 거라는 점은 불보듯 뻔하다. 이것이 평생 부모를 괴롭힐 거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 고단한 그 삶을 살아온 그녀의, 한 엄마의 지리멸렬했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그녀가 글을 쓴 이유는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알게된 점을 통해 누군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콜럼바인의 호된 시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도움이 된다면 다름 사람과 나누는 게 나의 도덕적 의무다. 입을 열기는 두렵지만, 그게 옳은 일이다
25쪽

 

 어떤 부분은 너무 솔직하고 사실적이어서, 그녀의 감정이 내게도 전달되는듯 했다. 가끔 그 압도되는 감정이 책장이 넘기지 못하게 했다.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녀가 이 사건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견뎌왔는지, 그리고 견뎌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슬픔에도 수명이 있다
7년 정도 지나자 안개 속에서 조금씩 나올 수 있었다고 나에게 말해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랬다. 2006년이 되자 조금씩 나아졌다. 딜런이 그리운 것은 여전했지만, 단 한 시간도 딜런의 손에 죽은 이들과 가족들을 고통스럽고 슬프게 떠올리지 않고 보낼 수는 없었지만, 날마다 울지는 않았고 좀비처럼 넋을 잃고 떠돌아다니지도 않았다
427쪽

 

서평 중에 책을 다 읽고나면 남는 것은 한명의 엄마라고 이야기했다. 맞다. 이 책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은 지리멸렬하고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비틀거리면서 한발씩 나아간 한명의 엄마, 수 클리볼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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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일과 영성(Faith&Work) _ 팀 켈러

2020. 12. 20. 17:2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 

 

 

직장인은 일주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데 사용한다.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로서 우리가 땀흘려 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적 일뿐만 아니라 세속적 일을 포함한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교 신학의 원류는 모든 노동의 존엄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류를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라고 본다. 
23쪽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고 그것을 지켜보셨다.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인간에게 일을 부여하셨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라.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45쪽

 

 창조때에 아담이 했던 우아한(?) 일에 비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하찮고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일을 해도 세상이 전혀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원하던 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이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수도 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각광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하는 것 자체로, 또는 그 일의 성공과 실패로서 신자로서 일의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

 신자로서 일을 할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선에서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다. 결국, 신자에게 일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저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신앙 공동체와 일터에서)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지 늘 탐색해야 한다. 
275쪽

결국,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 자체를 하찮게 여기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이 드러날 수도 있다. 다만,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

 

20쪽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는 「마음의 습관」이란 기념비적인 책에서 우리의문화의 응집력을 갉아먹어 버린 것을 콕 찍어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lalism)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표현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함께 공유하는 삶이라든지 사회 구성원 전체를 한데 묶는 지배적인 진리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게 했다.

 

21쪽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이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36쪽

톨킨이 기독교 신앙에서 위로와 자유를 찾고 다시 작품을 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하자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경이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 왜 일하고 싶어 하는가?(만족스러운 살믕 사는 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 왜 그토록 일하기가 어려운가?(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

-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 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47쪽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림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52쪽

"일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특히 노동이 죄의 대가로 임한 저주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75쪽

창세기 2장 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창조주는 어째서 손수 작명하지 않으시는가? 창세기 1장에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던 전례에 비춰 보면 짐승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이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켰다. 인간 본성과 기질의 폭을 최대한 확장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문명을 건설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인간은 일을 통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창조 패턴을 활용하며, 공동체를 조직한다. 

 

81쪽

벨라는 일에 담긴 '소명'이라든지 '부르심'의 개념을 회복하며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권력욕이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억할 게 있다. 한쪽에서 명령하고 이편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그 일을 해낼 때에 비로소 소명이나 부르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격이 가르치는 노동관이다. 

 

83쪽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이어야 한다. 

 

87쪽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짓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107쪽

현대 서구문화는 죄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되짚어 볼 생각조차 않으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만 안간함을 쓰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유년기의 경험이 쓸데없는 수치심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을 빚어낸다고 해석한다. 갖가지 즐길 거리들을 잠시나마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선행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란 정체성을 갖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본질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116쪽

직업을 선택하면서 품었던 큰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분야를 잘못 선택했다든지, 그쪽으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든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완벽한 일거리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하게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손 쳐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154쪽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지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현재 직장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위치가 은혜의 소산이라는 얘길 들으면 펄쩍 뛰면서 아무개 학교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고, 학생 때는 물론이고 신입 사원 시절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며, 동기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올렸는지 따위를 침이 마르도록 나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달란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제힘으로 열지 않은 기회의 문들을 통과했다. 열쇠를 쓴 게 아니라 그저 활짤 열린 틈으로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가진 건 하나같이 은혜의 소산이며, 우리 각자에게는 그렇게 수중에 들어온 힘을 마치 제 능력을 사용하듯 활용하여 섬길 자유가 있다. 

 

164쪽

루터는 피조물 가운떼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능력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5쪽

루터는 우상을 세우는 마음가짐과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깨달았다. 

 

174쪽

과학이 발전하고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사회는 종교니, 부족이니, 전통인, 하는 우상들을 끌어내리는 대신 이성과 경험, 개인의 자유 따위를 세계관 전반을 지배할 궁극적 가치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181쪽

하이데거와 닥스뿐만 아니라 자크 엘룰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은 과학기술과 불확실성, 시장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 따위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동조할 수 없으므로 가진 건 오로지 '수단'이나 기술뿐이다. 건전한 인생이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없으므로 저마다 권력을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경쟁만 남는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저리가 없기 때문이다. 

 

182쪽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상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시장 상품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광고 회사의 순진한 먹잇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진단한다. 허다한 작가들도 시장의 가치(소비 지상주의와 비용 대비 효과 같은)가 가족을 포함해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었다고 확신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재화와 용역을 분배하는 유용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5쪽

상품이 주는 유익을 홍보하는 데서 소비자들에게 정체성을 세워 주고 질 높은 삶을 약속하는 라이프스토리를 전하는 방향으로 전반적인 흐름이 바뀌고 있다.

<중략>

예일대학 철학과 니콜라스 윌터스토프 교수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두고 현대 문화는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 따위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잘 사는(경험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케팅과 홍보 일을 하는 이들로서는 상품이 멋지게 작동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187쪽

둘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이러한 성경의 개념은 단순한 일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알든 모르든 다른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노동에 관해 가르치는 신학 원리를 정확하게 깨달은 크리스천들은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기꺼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다른게 일할 방법을 찾는다. 

 

193쪽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195쪽

스토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오락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내러티브는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요소인지라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좌우한다. '벨탠샤우웅'에서 파생된 세계관이란 말은 현실을 해석하는 토대가 되는 포괄적인 시각을 뜻한다. 하지만 몇 가지 철학적으로 중요한 항목들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거대 서사, 즉 a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b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c 그걸 다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스토리다. 

 

197쪽

플라톤은 주로 육신과 그 연약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는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서 뱉어지는 욕구와 양심 사이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지적했다. 사르트르는 객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구속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198쪽

복음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01쪽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새삼 놀랍다.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208쪽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전이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대단히 강조하고, 설령이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이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209쪽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이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211쪽

다만 피조물 가운데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가짐은 복음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충동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타락과 부패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깨어짐의 결과라는 게 복음의 가르침이다. 복음이 들려주는 진실한 '스토리'는 구속과 갱신의 증거다. 복음적인 내러티브의 절정에는 방치와 태만에 관한 사연보다 희생과 인내의 이야기가 더 잘 들어맞는다. 

 

213쪽

놀랍게도 이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아이비리그 학교들으르 처음 세운 설립자들은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한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 누구도 제힘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며 부와 재능과 권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크리스천의 사상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능력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활개를 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223쪽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렌즈 삼아 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스토리라인이 주류를 이루는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가? 

- 무엇이 의미, 윤리, 기원, 숙명 같은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가?

- 무엇이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소망하고 또 무얼 두려워하는가?

- 현재 종사하는 직업 세계에서는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다시 해석해 들려주는가? 이야기 속에 직업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떤 부분이 본질적으로 복음과 일치해서 기꺼이 동의하며 거기에 맞출 마음이 드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어떤 점인가? 다시 말해서, 문화에 도전해야 할 대목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면 어떤 방식으로 그 스토리를 완성해 나갈 것 같은가?

- 지금 하고 있는 일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넓게는 사회에 봉사하며, 직업 세계 자체에 도움을 주고, 능숙함과 탁월의 모범이 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회가 있는가?

 

227쪽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29쪽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230쪽 

하나님의 섭리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서 노동의 가치에 낮은 비중을 두는 데서 생기는 더 심각한 위험은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이 이뤄 낸 선한 일들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온전하고 균형 잡힌 성경의 가르침은 오로지 크리스천이 한 일이나 전문직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며, 오히려 인간의 모든(특히 탁월하게 해낸) 노동에 하나같이 높은 가치를 둔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되는 통로로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선망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스스로 하는 일을 인정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능숙하게 해내는 일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상대가 예수님을 믿든 말든 가리지 않는다. 

 

237쪽

하나님의 지혜와 달란트, 아름다움과 재주를 은혜로, 다시 말해서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베푸신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환하게 밝히며, 잘 보존하기 위해 나눠 주시는 선사품인 셈이다. 원칙대로라면 죄를 범한 인류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가 현재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형편이 그토록 악화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일반 은총이라는 선물 덕분이다.

 

244쪽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주일 하루와 평일 저녁에 그것도 신앙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시간으로 국한된다. 주중에 어떤 핵심 가치에 따라 시간을 보내고 삶을 꾸려 가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볼 꿈초자 꾸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서' 일하며 생활하는 동안은 자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과학기술, 개인의 자유,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특성 따위를 포함해 현대 문화의 배경을 이루는 갖가지 가치 기준과 우상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원론의 첫 번째 유형이 세상과 나눠 가진 공통점의 중요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은 복음적인 세계관(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판을 복음에 비추어 새로 짜는)이 가진 차이점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다. 

 이원론의 대척점에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도 우상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252쪽

 크리스천들은 솔직하고,  따뜻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손익분석에 뿌리를 둔 윤리는 일반적으로 대가를 기대한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설계를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그런 처신 탓에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 하지만 성경학자 브루스 월키의 말마따나,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 하듯 하지 말라(골 3:23)

 

284쪽

 

 도로시 세이어즈는 유사 열정이 일의 동력이 있음을 알려 준다. 「신조인가, 혼조인가」(Creed or Chaos?)라는 책에서 글쓴이는 '해태'(acedia)를 비롯해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인습적인 죄를 열거했다. 해태는 흔히 '나태'(sloth)로 번역되는데, 세이어즈는 올바른 풀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으름(나태라는 단어에 담긴 통상적인 뜻)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작가는 해태란 '무엇이 내게 보탬이 될까?'만 생각하는 손익분석에 이끌리는 삶의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어디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야 할 까닭도 없기에 그저 살아 있을 따름인 죄다. 

 

287쪽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 보라).

 로마서 12장은 이 진리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라는 말로 서두를 연다. 여기에 쓰인 표현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이다. 사도는 제물을 들고 제사를 드리러 온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기르는 가축들 가운데 튼튼하고 흠이 없는 놈을 골라서 제물을 불태우는 번제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제가 가진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주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열정의 표현인 셈이다. <중략>

 본문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다. 첫째로, '열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래 '긴급'과 '성실'이 결합된 의미다. 초점과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급박한 마음만 남으면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긴박감이 없이 성실하기만 하면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서두르되 질서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열심을 품고"라는 말씀은 원문에 비춰 볼 때 "펄펄 끓는 심령으로" 쯤으로 직역할 수 있다. 따라서 감성과 훈련, 긴박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하는 일 속에서 산 제물이 되는 임무를 수행해 나가라는 뜻이다. 열정을 품고 살라는 주문이다.

 

298쪽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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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 ) _ 팀 켈러

2020. 12. 13. 16:09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 : 2~3

 

 

세상 사람이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그들 각자에게는 꼭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열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그 바라거나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만족으로 채워줄 거라고 믿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취업준비생에게는 들어가고자 하는 직장이 우상일 수 있으며, 연애를 갈망하는 자에게는 연애 상대자가 우상일 수 있다.  그것만 있으면 우리가 정말 행복해질거라는 착각속에서 우상을 쟁취하기 위해서 힘쓴다. 단언컨대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다. 과연 그 모든 것이 우리의 필요와 갈망을 채워줄까? 세상 사람들의 우상은 차치하고서라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우상의 문제는 과연 간단한 것일까?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우상에 관한 이야기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인 하나님으로만 진정한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하는 대상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23쪽). 저자는 신자가 숭배할 수 있는 우상으로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에 대해 설명한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형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생각하면서, 신자인 자신은 우상숭배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책에서 언급하는 우상은 구체적으로 눈에 잘 띄는 '표면적 우상'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은밀하게 원하고 갈망하는 '근원적 우상'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하지 못하며 다른 어떤 것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야곱에게도 라헬이 우상이었으며, 요나에게도 사역의 성공과 이스라엘의 국익이 우상이었다. 우상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지극히 복잡한 개념이라서 지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범주를 모두 아우른다. 우선 개인의 우상으로는 로맨틱한 사랑과 가정, 돈, 권력, 성취, 속한 분야의 인맥, 타인이 정서적으로 의존하기를 기대하는 것, 건강, 몸매, 탄력적인 외모 등이 있다. 
24쪽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245쪽). 저자가 가짜 신을 식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첫째,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속으로 기쁨과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둘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두고 있는 것에 돈을 쓰기 때문에 돈의 사용처를 점검해보면 우상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로는 독실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지녔으며 교회에 꾸준히 나가는 신자들에게 유용한 방법이다. 겉모습은 독실한 신자이지만,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지, 진짜 구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248쪽). 

 

하나님이 각 사람의 심령을 향해 던지시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네 마음의 신뢰, 몰두, 충절, 섬김, 두려움, 기쁨에 대해 사실상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나 뭔가가 있느냐? 사람의 우상체계는······질문을 통해 표면으로 일부 드러난다. '삶을 지속시켜 줄 안정과 안전과 수용을 얻고자 네가 의지하는 대상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인생에서 네가 정말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냐? 무엇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느냐? 무엇이 있으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겠느냐? 너는 어디서 권력과 성공을 찾고 있느냐? 이런 비슷한 질문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지 우상을 섬기는지, 구원을 그리스도께 바라는지 거짓 구주에게 바라는지 결국 알아낼 수 있다.
249~250쪽, 데이비드 폴리슨

 

우상을 발견했다면 그 우상을 해체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 우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책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좋은 문장]

 

14쪽

절망은 슬픔과 다르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달리 의지할 만한 대안이 없다. 그야말로 기운이 꺾인다. 

 

70쪽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76쪽

야곱이 바로 그랬다. 라헬은 그에게 단순희 아내가 아니라 '구세주'였다. 그녀를 어찌나 애절하게 원하고 필요로 했던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봣따. 그래서 라반의 속임수에 쉬이 넘어갔던 것이다. 

 

80쪽

우리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대개 성경을 일련의 단절된 이야기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각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일한 이야기다.

 

84쪽

사랑하는 상대를 그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흠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우려 한다. 자기 존재가 헛되지 않다고 정당화하려 한다. 다른 아닌 구원받으려 한다. 물론 상대는 인간이므로 이것을 줄 수 없다.

 

115쪽

우리 마음의 죄성은 동기적 욕구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우상숭배로 변질시킨다. 바로 이것이 '근원적 우상'이다.

 

198쪽

오늘날 초월과 의미에 대한 욕구는 개인의 자아와만 관계될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과는 모두 무관하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익 우선'의 옛 사고방식은 젊은이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제 삶의 관건은 공동체의 제약을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자아를 창출하는 데 있다. 

 

206쪽

결국 요나는 왜 도망갔을까? 답은 역시 우상숭배인데 이번에는 아주 복잡하다. 우성 요나 개인의 우상이 있다. 요나를 빚어낸 문화적 우상도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니느웨 사람들의 영적 유익보다 이스라엘의 국익을 앞세웠다. 끝으로 요나의 종교적 우상이 있다. 그는 무조건 자신이 도적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악한 이교도인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우월감을 느꼈고 그들이 구원받는 게 싫었다. 

 

225쪽

나는 우상으로 힘들 때면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진해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순복하신 그분을 떠올린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 앉으셨기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것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기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께 있음을 나는 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과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어도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다. 

 

245쪽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답은,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사람의 인정, 평판,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 <중략>

우상숭배란 단지 예배 의식의 한 형태가 아니라 유한한 가치에 기초한 정서와 생활 방식 전체이며, 피조물을 신처럼 절대화하는 일이다. 

 

252쪽

우상보다 예수님이 당신의 머릿속에 더 아름다워지시고 당신의 마음속에 더 매력 있어지셔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가짜 신이 대체될 수 있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 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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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_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2020. 4. 3. 08:06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이재만 역

 

 

고요한 확실성 안에서 편히 쉬어라

 

 다시 읽는 행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읽는 행위에 더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많은 정보들이 나를 대변해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정보의 축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시간들이 있었다. 분명,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긴 했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가장 큰 유익은 사고하는 힘이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맞추어 보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저자에게는 큰 공감을 얻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저자에게서는 다른 관점의 통찰력을 얻었다.

 

습득한 것을 별다른 노력 없이 유지하는 것과, 단순히 일시적인 시작점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토대 위에 지식을 견고하게 쌓아가는 것은 아주 다르다.  

 

 책을 읽는 행위는 공부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지의 표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부하는 삶》은 다시 책을 읽을 동기를 부여했다. 공부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 되새겼다. 무엇을 위해 공부했는가. 무엇을 위한 지식 습득이었는가. 과연 나는 지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찮은 생각들은 머리만 아프게 하지만, 의미 있는 생각들은 나를 성장시킨다. 책을 읽음으로써 떠오르는 생각들은 분명 유의미하다. 공부하는 자의 삶을 계속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만, 지성인은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함 속에서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으나, 고립과는 무관된 일이다. 

 

고립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 자신의 위대함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감을 느끼면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고 익히는 자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습득한 지식이 단편적인 하나의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맞닿아 실질적인 결과물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11쪽

세르티앙주는 저술에 필요한 노트를 동일한 크기의 메모지에 적어두고, 각각의 메모지에 주제에 상응하는 번호를 매기고, 같은 번호가 매겨진 메모지들을 클립으로 묶어서 분류하라고 조언한다. 

 

13쪽

세르티앙주는 공부를 위해 절제하고, 신체를 돌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27쪽

당신이 빛을 운반하는 사람으로 지명된다면, 신께서 당신이 운반하기를 기대하는 그 어슴푸레한 빛이나 불꽃을 감추면서 가지 마라.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가져오는 삶의 열매를 사랑하라. 공부에, 그리고 공부를 유익하게 쓰는 데에 당신이 가진 시간과 마음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바쳐라.

 

36쪽

공부를 하도록 소명을 받아 성스러워진 지성인은 결코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지위가 무엇이든, 혼자 있든 은둔해 있든 지성인은 개인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고독은 활력을 불어넣지만, 고립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메마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69쪽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은 자기 신체의 적이기에, 머지않아 자기 영혼의 적이 된다. 금욕은 공부에 꼭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도 그라트리 신부가 말한 '선명한 시야의 상태'에 우리를 이르게 할 수 있다. 육욕에 복종한다면, 정신이 되어야만 하는 당신은 육체가 되는 길 위에 서는 것이다. 

 

75쪽

시간과 사유, 자원, 역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과의 그물에 뒤엉키지 마라. 관습을 고분고분 따라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안내자가 되어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 지성인의 신념은 그가 달성하려는 목표와 일치해야 한다. 

 

82쪽

은신처는 정신의 실험실이다. 내적 고독과 고요는 정신의 두 날개다. 세상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위업은 적막한 곳에서 준비되었다. 앎의 개척자, 영감을 받은 예술가, 평범한 사람, 신인, 이들 모두는 고독, 침묵의 삶, 밤에 찬사를 바쳤다. 

 

85쪽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켐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항상 더 왜소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이 생각을 더 밀고 나아가면, 더 왜소한 인간이 되지 않더라도 자아가 더 왜소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군중에 섞일 경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전에 스스로를 붙잡아야 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다수의 이질적인 자아에 짓눌려 자기인식을 잃어버린다. 

 

145쪽

당신은 당신 자신을 공부해야 하고, 당신 삶이 어떤지, 삶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을 촉진하고 배제하는지,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위해 삶이 무엇을 제안하는지 고찰해야 한다. 

 

144쪽

무언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마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력을 다하고, 계속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정력적으로 하라. 반쪽짜리 공부와 반쪽짜리 휴식은 공부를 위해서도 휴식을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 

 

195쪽

「고린토이늘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에서는 신앙이 제일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기도를 하다가 계시를 받았다면 조용히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관한 아퀴나스는 이렇게 성찰한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설령 아주 사소한 가르침이더라도 거부해선 안 된다." 이 성찰은 바울의 다음 조언과 호응한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서로 낫게 여기십시오" 어떤 순간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진리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 빛을 받는 사람이다. 

 

213쪽

지나치게 읽는 정신은 양분을 공급받기는커녕 오히려 둔해지며, 서서히 성찰하고 집중하는 힘을 잃어버려 결국에는 산출하지 못한게 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정신은 내면을 향해 점점 더 외향적이 되고, 밀물 썰물처럼 흐르는 관념ㄴ과 내면의 이미지에 열렬히 집중하며 그것들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무절제한 기쁨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 기쁨은 지성의 기능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유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 혹은 단어, 문장, 장, 책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실려가는 것만을 허락한다. 

 

242쪽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는 것이다. 우리 정신의 임무는 반복이 아니라 이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읽는 것을 '붙잡아야' 하고, 몸으로 흡수해야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 저자를 본받을 수도, 저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 그것을 다시 표현하도록 정신을 재촉해야 한다. 지식의 요지를 우리 자신의 쓸모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287쪽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또 쓰다보면 조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노력하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제와 글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써야 한다. 

 

289쪽

앞에서 글 쓰는 기술은 일찌감치 익히기 시작해 오랫동안 익혀야 하며, 이것이 점차 정신의 습관이 되고 문체를 이룬다고 말했다. 나의 문체, 나의 펜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영원한 진리에 관해 이해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내 존재의 자질, 내면의 성향, 살아 있는 뇌의 기질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진화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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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순간 _ 스벤 브링크만

2020. 3. 28. 16:5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스벤 브링크만 지음 / 강경이 옮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왜 뭔가를 바라거나 행해야 하는가? ······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나를 기다리는 필연적인 죽임이 앗아 가지 못할 그런 의미 말이다'
- 톨스톨이 -

 

철학은 막연하게 어렵고 재미없게만 느껴진다. 중·고등학생 때 윤리 수업 시간에 고대 철학자들의 복잡한 사상과 이념을 공부하면서 ‘이 사람들의 사상과 개념이 내 삶에 무슨 소용인가’라는 불만과 푸념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철학은 과연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의 저자 스벤 브링크만은 철학은 우리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은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삶에는 어떤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더 실존적인 의미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놀이, 사랑, 윤리 같은 가치는 쓸모없을 때, 그러니까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일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22쪽).

 

 다른 시대에 살았던 고대 철학자들의 10가지 관점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책에서 다루는 10가지 관점은 '선, 존엄성, 약속, 자기, 진실, 책임, 사랑, 용서, 자유, 죽음'이다. 단어만 봐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저자는 각 관점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대표적인 명언과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실용적인 교훈을 전달해준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철학적 사고의 기반을 마련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다시 읽어볼 문장들 

 

저는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한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은 구원이라는 종교적 목표를 자아실현으로, 또 고해성사와 성직자의 조언을 치료와 코칭으로 바꾸었지요. 

 

제가 심리학을 비판항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다양한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자기 자신을 찾고 계발하도록 돕는 일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을 윤리적, 사회적으로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중략> 심리학은 우리가 자기 계발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 적어도 심리학의 일부는 우리 사회의 도구화 현상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더 나아가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을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합니다. 

 

19세기 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종교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진 '신의 죽음'이라는 현상과, 그로 인한 의미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응답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1강.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효용성과 즐거움을 토대로 한 우정은 진정한 의미의 우정이 아닙니다. 오로지 도구적인 관점에서만 그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고귀한 우정은 효용성이거나 즐거움 같은 이익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달리 말해, 고귀한 또는 진짜 우정은 그 자체로 좋습니다.

 

윤리적인 삶이 이윤만 좇는 삶보다 더 옳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성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이지요(생각해볼 점: 근거가 무엇인지...)

 

2강.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존엄성이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내가 자유의지를 발휘애 처음 할 행동은 자유의지를 믿는 일이 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존재가 당신의 도덕법칙 안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3강.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발달심리학은 타인에게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사살이 아이를 책임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4강.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우리는 자아발달 과정에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반성적 자아가 기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기 성찰만 해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성적 관계로서의 자기 개념이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여기에 자기 관계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강조한 테일러의 의견까지 결합하면, 우리는 자아의 도구화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방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의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미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5강.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이었지만 놀랍게도 개인적으로는 악마 같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으며, 자신은 그저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동기는 악의가 아니라 사유 없는 복종이었던 것입니다. 

 

6강.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로이스트루프가 '도덕적 요구'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는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근원적인 윤리적 요구에서는 그 어떤 사법적, 도덕적, 인습적 규칙도 끌어낼 수 없다. 그것은 침묵한다···. 사법 절차나 도덕, 인습은 윤리적 요구가 통과해 퍼져나가는 프리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인습은 윤리적 요구를 보여주는 동시에 굴절시킬 수 있다. "

 

7강.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세상을 헐벗고 의미 없는 '즉자존재'와 인간의 의식을 가리키는 '대자존재'로 분리했습니다. 즉자존재란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는 존재를 말하고, 대자존재란 대상을 의식하고 그렇게 의식하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는 존재 방식을 뜻합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하는데요. 우리가 즉자존재로서 이미 정해진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대자존재로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삶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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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_ 팀 켈러

2020. 3. 26. 22:09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팀 켈러 지음 / 최종훈 옮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초기에는 중국과 몇몇 나라의 문제로 국한되는 듯했지만,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내몰고 있다. 과학과 기술로 인해 인간의 삶은 진보했지만, 백신 하나도 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현 상황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절실히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이처럼 뿌리 깊은 “내면의 욕구”가 있으므로, 어떤 문화든 구성원들이 고난에 맞서게 돕든가, 아니면 신뢰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든가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 한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는 고통의 문제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고, 그 시대마다 세계 위대한 사상가들과 신앙가들은 고난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고난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은 여러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윤리적 관점에서 고난은 인생에 대한 그릇된 행실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하게 살면 고난은 자연스레 줄어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자기 초월적 관점에서 고난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본다. 고난에서 해방되려면 이 세상과 덧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초월적인 관점으로 고난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다. 또 다른 관점은 숙명론적인 관점이다. 고난은 운명이기 때문에 거를 수도 없다. 고난이란 절망적인 운명에 맞서 물러남 없이 당당하게 싸우는 것은 미덕이자 영광이다.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관점에서 고난은 우연의 산물이다. 고난을 통해 제각기 삶의 의미를 창출함과 동시에 고난을 통해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난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는 세속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고난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p. 53). 고난의 의미와 목적이 있긴 하지만, 고난을 당하는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고난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기 필요한 기독교 네 가지 교리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다. 첫째, 전능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발적인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사실은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르게 잡아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난을 다 받으신 후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유익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첫째, 고난을 견디어 이겨낸 경험은 다른 고난을 이겨내는 근간이 될 수 있다. 둘째, 고난을 통해 주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수 있다. 셋째, 고난을 통해 삶의 우선순위와 철학을 바꿀 수 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진정으로 슬퍼하지만, 소망 가운데 깊이 잠깁니다.” 
- 키프리아누스 -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이 무수히 많다. 고난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또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개미가 인간의 생각을 엿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난을 해석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께 더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러하기에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건히 믿고 의지한다면 신자의 믿음은 분명히 성장할 수 있다. 신자라면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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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_ 매리언 울프

2020. 3. 25. 21:3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디지털 기기로 글을 잘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의를 기울여 책을 읽어도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형식에 익숙해진 탓일까. 중요한 문서를 읽을 때는 항상 인쇄를 해서 줄을 그어가며 읽는다. 구태여 관련 서적을 사서 읽는다. 종이란 질감이 주는 편안함과 책을 소유했다는 만족감이 마냥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은 집이다. 당신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실재하는 물리적 사물이다

 

 개인적 취향을 차치하고서라고 디지털 기기로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스마트 기기가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읽기 도구는 종이책에서 디지털 기기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무거운 종이 책을 가방에 꾸역꾸역 넣고 다니는 시대는 지나갔다. 디지털 기기에 무수한 디지털 문서를 넣고 다닐 수 있다. 편리함과 가벼움, 이 시대의 흐름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정말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주의는 보다 짧은 간격으로 쪼개지고 있으며, 이것은 아마 더 깊은 사고를 위해서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책이다>는 변화하는 우리의 읽기 방법에 대한 염려로부터 시작된다. 디지털 방식의 읽기에 익숙해진 뇌는 스크린 위의 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받아들이는 정보는 많을 수 있으나 글에 대한 이해력과 집중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지발달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유아기 시절에 디지털 기기에 노출된 아이는 상대적으로 집중력과 이해력이 낮아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의 흐름상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아이들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시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부모는 유아기 때부터 아이에게 직접 글을 읽어주어 아이의 언어 신경망을 폭넓게 활성화시켜주어야 한다. 이때 언어의 수용적 측면뿐 아니라 언어 학습의 표현적 측면의 뒷받침하는 뇌 영역에서도 변화가 함께 일어난다(p. 200). 그러면 디지털 기기의 사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양손잡이 읽기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디지털 방식의 읽기 방법은 뇌의 멀티태스킹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의 인지가 발달한 상태에서 뇌의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디지털 방식의 읽기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집중적인 읽기와 포괄적인 읽기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속도가 우리를 계몽으로 이끌고,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 바로 반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속삭이는 심히 유혹적인 환영 말이다. ˙˙˙˙˙˙ 읽기는 관조의 행동이다. - 데이비드 울린

 

 온라인 읽기의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시 종이 책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깊이 있는 종이 책 읽기를 통해 우리의 사색능력을 강화시키고 비판적 사고를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갈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애하는 좋은 독자 여러분, 천천히 서둘러, 집으로 오세요.  

성공을 빌며, 
매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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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_ 하완

2019. 2. 19. 14:23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평점

책 한 줄평

책의 요지는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열심히 살되, 결과 지향론적 삶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삶을 살라는 것. 작가 왈 "버티는 삶을 버리고 즐기는 삶을 추구하겠다." 부담없이 읽기 좋은 책이다.

 

 

 

                                     죽일까? ㅎㅎㅎㅎㅎㅎ


책 속의 문장들


 P. 20 

열심히 노력했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P. 21 

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는지,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도 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괴로움을 줄이는 법을 안다. 분하지만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없을 수도,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괴로움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 

 

P. 26

뭔가 잘못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몸에 '독'이 잔뜩 쌓인 걸까? 분명 형편이 더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열심히 달리는데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경쟁에서 진 패배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지는 기분은 더럽다.


P. 37

"도대체 왜 결혼을 안 한다는 거에요?"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독신주의인 내게 누군가 아주 당당하게 그리고 무례하게 물은 적이 있다.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왜 안 하냐고, 이해할 수 없다고 묻는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악의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은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행해지는 폭력. 왜 안 따라? 설명해봐.


P. 49

내가 홍대를 갈망했던 이유는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어른들은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인생이 성공으로 끝나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다들 미대 중에센 홍대가 최고라며 입을 모았다. 홍대만 나오면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스카우트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바로 저기다. 저기만 들어가면 내 구질구질한 인생도 한 방에 바뀌겠지.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할 거야. 지금 내 상황에선 저곳만이 유일한 희망이야.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P. 72

잘하고 싶어서, 

틀리고 싶지 않아서, 


이런 마음 때문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간다는 건 경직된다는 것, 유연하지 않다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P. 86

욕망에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놀고 싶으면 놀아야지. 명분은 그다음에 찾자. 그렇게 놀면서 찾은 두 번째 명분은 바로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한 잠깐의 방황'이었다. 명분이 좋다. 그래,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설득력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고민하니까. 


어쩌면 지금 내 방황의 이유는 모두 놀기 위한 명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놀고 싶은 거다. 


P. 104

요즘 날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뭐랄까. 딱히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든가 같이 밥을 먹거나 카페에 가서도 굳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떼를 쓴다든가 하는데, 이거 아무래도 위로 같다. 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열심히 살지 않겠다"라는 선언이 사람들에겐 "인생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처럼 들린 모양이다. 언제부터 열심히 살지 않으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되어버린 걸까?


P. 158

3년의 공백기 동안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찾진 못했지만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사랑'과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사랑을 찾을 거야.'라면 찾아 나선다고 사랑이 찾아지는 게 아니듯, 진짜 하고 싶은 일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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