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2. 01:10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고통의 심연,
찰나의 빛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요컨대 의미가 비워져가는 자리를 영화적 기표들의 활력이 채워가는 과정이 홍상수의 서사라면, 이창동의 서사는 오염된 의미들을 끝내 소진시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창동의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재현된 '나'의 손상된 육체나 일그러진 삶을 전시함으로써 가해자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김혜리가 말함 공범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이건 심각한 결단이다. 재현된 폭력을 접해온 우리의 관성으로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밀양」은 유괴도 신앙도 광기도 언급하지만 어느 것도 다루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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