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침묵을 즐기는가.

2018. 1. 29. 22:5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어릴때부터 몸이 야위었다. 명절때마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말랐느냐'며 '밥 먹었냐'보다 더 식상한 인사말을 건넸다. 대꾸는 하지 않고 멋쩍게 웃기만 했다. 마른게, 뭐, 대수라고, 어른들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것일까, 어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마른 몸은 그대로였다. 마른 몸이 싫었다. 마른 몸 때문에 사람 자체도 가볍게보였다. 그때부터인가보다. 말을 줄이고, 언어의 무게를 생각했던 때가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가벼운 언어는 쉽사리 무거워지지 않았다. 불쑥 튀어나오는 쓰레기 같은 언어들이 나를 표현할 뿐이었다. 언어의 무게를 생각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입을 더 굳게 다물기 시작했다.  

반응형

김주혁의 죽음, 그리고 한국시리즈.

2017. 11. 1. 23:33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기아는 두산을 7대 6으로 이겼고, 그들은 통합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날 배우 김주혁은 운전 중 심장질환이 발생하여 앞차와 몇 번 추돌한 후 도로를 이탈하여 벽면을 향해 돌진했고 차는 전복되었다. 손 써볼 틈도 없이 김주혁은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아직 정확한 사망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 명의 인생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는 한국시리즈에 열광했다. 김주혁이 네이버 검색순위 1위를 차지하였을 때, 2위는 한국시리즈 5차전 9회에서 송구 실책을 저질렀던 김주형이었다. 김주형의 송구 실책으로 5차전의 결과는 뒤집힐 수 있었다. 그러하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내일의 인생을 알 수 없다면, 아니, 단 1분 후의 인생도 알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지금도, 아직도, 계속하고 있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정말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인지 더욱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반응형

가족, 그 존재만으로 힘이 됩니다.

2017. 1. 21. 22:22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나간 날들이 있습니다. 타인의 삶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과 연민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해란 위선으로 들이닥치는 당신들에게 대체 무엇을 아느냐, 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는 내가 아닙니다' 면전에 정확한 발음으로 지껄이고 싶었지만, 그저 쓴웃음만 보여줬습니다. 당신이 나이기를 바랄 때 나는 당신들을 거부했습니다. 

  


무료한 일상을 지내다 부모님을 뵈러 경주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집에서 부모님을 뵙고, 또 며칠은 누나 집에서 지냈습니다. 일주일간 그들은 무엇을 이해하려고도, 위로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다고 해야할까요. 나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아버지, 엄마, 누나가 새삼 눈물나게 고마웠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바라볼 때 마음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에 많이 지쳐 있었나봅니다. 주변인들의 잦은 간섭에 짜증 났었나 봅니다.  나이에 따라 갖춰야 할 정형화된 규칙이 존재하는 사회니까요. 그렇다고 사회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시 힘을 얻었으니 서서히 나아가면 되리라 믿습니다.




반응형

나는 육상부 선수 출신이다 _ 자주 달렸고, 지금도 달린다.

2016. 11. 19.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초등학교 시절, 학교로 가는 오르막 길은 가팔랐다. 학교 근처에 살았던 탓에 늦게 일어나기 일쑤였고 오르막 길을 자주 뛰어올랐다. 재미 삼아 시간을 정해놓고 오르막 길을 뛰고 또 뛰었다.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점점 빠져도 오르막 길을 자주 뛰어다녔다. 어릴때부터 뛰고자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초등학교 육상부 80m 단거리 선수였다. 친구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때, 나는 스파이크를 신고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장거리를 뛰어도 장거리 선수들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심폐지구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승부욕은 누구 못지않게 강했다. 학교에서 나보다 빠른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은 나와 달리기 시합을 하길 원했고 나이 어린 내가 종종 이겼으며, 선배들은 후배의 빠름에 놀라곤 했다. 운동회에서 항상 반 대표 마지막 주자로 뛰었고, 다른 반 친구들을 가벼이 제치고 1등으로 결승선을 밟은 적이 많았다. 운동회때마다 나는 '영웅'이었다. 



육상부에 전학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고,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으며, 키는 컸고 체격은 다부졌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전학생은 도 대회 입상 경력이 있다고 했다. 육상부 감독은 전학생과 나의 경쟁 의식을 키웠고, 결국 나는 원하지 않던 시합을 하게 됐다. 리 둘은 출발선에서 준비 자세로 시작 총소리만을 기다렸다. 총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내가 먼저 치고 나갔다. 30m를 지나고 있을 때 전학생은 무서운 속도로 격차를 줄이며 따라왔다. 격차는 점차 좁혀졌고 전학생은 나를 제치고 결승선에 먼저 도착했다. 전학생의 뒷심은 놀라웠다. 도 대회 입상은 소문이 아니었다.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처참한 패배였다. 그뒤로 육상부에서 씁쓸하게 탈퇴했다. 



하지만 혼자, 자주, 달렸다. 수능을 마친 후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자주 동네를 달렸다. 달릴 때 숨 차오르는 쾌감이 좋았다. 달리기 시작하면 달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지금도, 나는 달린다. 화가 날 때, 미치도록 화가 날 때, 미치도록 운동장 트랙을 달린다. 달리는 행위에 모든 것을 맡긴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차올랐던 화는 점점 사라진다. 달려야 살기 때문에 달린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오늘도 화가 많이 났고 다시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차다. 





      


       

반응형

죄인의 고백 - 왜곡된 성(性)의 관념

2016. 11. 12. 00:10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왜곡된 성(性)의 관념은 어린 시절 접했던 음란물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와 친구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때마침 친구당시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에로 영화 '물 위의 하룻밤'을 어렵게 구해왔다. 나를 비롯한 친구 열댓명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벅차고 들뜨는 마음으로 친구집으로 향했다. 운좋게도, 친구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한 구석에 던져 밀쳐놓고, 비디오 테이프를 아주 조심스럽게 VCR에 넣고 숨죽이며 기다렸다. TV에 영화 제목이 나타나고 영화가 시작될 즈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그렇다. 우리의 담대했던 시도는 갑자기 나타난 친구의 누나로 인해 철저히 실패했다. 뻔뻔스럽게 비디오는 계속 재생됐고, 누나는 얼음이 되어버린 우리와 비디오를 번갈아가며 봤다. 친구를 버려두고 우리는 아주 재빠르게 그 집을 탈출했다.때가 음란물을 보려고 했던, 첫 시도였다. 

 

 

 

그 뒤로 중, 고등학교 시절 아무런 제재 없이 음란물을 접했다. 자극적이고 비정상적인 음란물을 시청함으로써 성장기에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할 성에 대한 관념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은 여자 친구와 성관계를 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우리는 귀기울여 들었다.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 가득했던 그 시절, 금기를 깨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탈이자 잘못된 욕구의 분출이었다. 청소년 시절 자주 접했던 자극적인 음란물의 잔상은 아직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축적된 이미지의 잔상들이 기억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뒤틀려버린 성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의 악순환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그러므로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성관계를 통해 자손을 번성하게 하셨다. 즉,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혼의 틀안에서 성은 믿음의 자손들을 이어가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창 1:28

 

 

성에 대한 관념을 올바르게 바꾸는 동시에, 나의 기억속에 잔존하는 죄악된 생각의 고리를 끊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잘못된 사고의 과정으로 인식된 기억 체계를 한순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왜냐면 기억 체계는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향이 뒤틀리면, 그 상황을 인지하고 뒤틀리기전에 생각을 끊어내야 한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철저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는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이나, 아직 육체를 입고 있는 자로서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 연약한 육체를 근거로 삼는다면, 그 인간은 스스로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의 참혹함과, 그리고 죄로 인한 결과의 엄중함을 분명히 깨닫게 해달라고 철저히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주여, 죄인에게 자비은총을 베푸소서!

 

 

 

 


 

 

 

 

반응형

다시, 삼성을 생각한다.

2016. 8. 2. 10:4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출처 :  iamnews.imbc.com>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과 관련된 영상이 뉴스타파에 의해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삼성은 "회장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여서 회사로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삼성은 이 사태와 관련하여 이건희를 삼성과 분리하여 한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국한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한다.

 

 

"이건희를 삼성과 분리한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이 사태를 한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건희는 삼성 그룹이 성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를 만들어, 삼성 그을 세계적인 대열에 올려놓은 기업가이자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현재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회장이다. 그의 말 한마디가 삼성을 대표하는 말이 될 수 있으며, 그의 행보가 삼성 그룹의 전체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공인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할 몫이 있으며, 역할이 있다. 또한 그의 생활이라고 하지만 이번 사태는 성매매를 불법적으로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한 그룹의 총수로서 매우 부적절하게 행동했다. 이 일뿐이겠는가. 이번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이번사태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동영상에 촬영된 논현동 고급빌라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삼성그룹이 개입했던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뉴스타파>에서 보도된 사실에 의하면, 삼성 그룹의 계열사 사장이 고급빌라의 해당 호수 전세권 설정을 했다. 또한 고급빌라의 전세금 13억원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몇가지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바탕으로 삼성그룹이 개입여부를 판단하기는 쉽진 않지만, 그를 삼성과 분리해서 한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킬수 없다. 

 

 

그렇다. 그는 공인으로서 분명히 적절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불법을 자행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이상하다. <뉴스타파>의 "이건희 성매매 의혹"과 관련된 영상이 보도된 뒤, 다른 언론사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보도된 다음날에서야 MBC와 KBS에서 한 차례 보도하였고, 다른 언론사들도 아주 간략하게 사태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런 언론사들의 태도는 박유천의 성폭행 사건때와 비교했을때  매우 대조적이다. 박유천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났던 언론사들은 왜 이리도 얌전해졌을까. 이들의 이중잣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다들 알겠지만, 굳이 답하자면,  돈과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은 박유천이 기존에 쌓아놓았던 모든 이미지를 무너뜨렸다. 그는 배우로서, 가수로서 생존불가능할수도 있다. 박유천의 행동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언론사들의 태도가 의아할 뿐이다. 그렇게 박유천한테 돈을 던지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다시, 삼성을 생각한다.

 

 


 

 

반응형

지랄 같은 세상이다.

2016. 7. 9. 10:3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출처 : biz.heraldcorp.com>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했다. 탈퇴를 지지하던 주요층은 소득이 적거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들이었다. 유럽연합을 통해 영국으로 물밀듯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은 저소득, 저교육층의 일자리를 위협했다. 그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만해도 정부는 느긋했다. 결국, 그들이 일을 저질렀다. 정부는 갈곳을 잃고 허둥지둥하고 있다. 영국사회는 현재 '멘붕'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유럽연합 탈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책임진다'는 말이 '사퇴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던 안철수 아저씨도 '이수민 리베이트'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바 없다. 삼류 정치가 쉬워보인다. 박근혜 누나는 또 낙하산이다.  



<출처 : www.youtube.com>



술집여성들이 박유천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고소했다. 그 사건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다. 허나, 첫번째 술집여자가 박유천을 고소한 후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첫번째 술집여성은 고소를 취하했다. 아마, 돈으로 입을 막았으리라. 그 사건 후 세명의 술집여성이 연달아 고소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원한 것은 돈이 확실했다. 그들은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들의 기막힌 고소가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아니, 굳이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20-30대 청년들의 눈을 가렸다. 국민들이 진정 관심을 두어야 할 정치, 사회, 경제와 관련된 모든 이슈는 당사자들의 논리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 검사는 자살했다. 갑의 횡포가 을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 'ㅋㅋㅋㅋㅋㅋㅋ죽고싶다ㅋㅋㅋㅋㅋㅋ' 동기검사에서 보낸 카톡 메시지의 'ㅋ'은 의미없는 한낱 자음이건만 '죽고싶다'는 그의 심정을 맨살로 드러나게 한다. 죽고싶어서 그는 죽었다. 서글픈 헬조선이다. 살고 싶었던 구의역 청년도 죽었다. 청년도 갑의 횡포와 갑의 논리에 압사했다. 매년 한건씩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행사가 되어버린 현실, 그는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출처 : news.sbs.co.kr>



어찌됐든, 지랄 같은 세상이다. 





반응형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_ 추가설명

2016. 3. 8. 12:37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필자가 작성한 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http://kangsy85.tistory.com/590)"의 문장이나 단어에 대한 질문이 있어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출처: http://m.blog.daum.net/apologist/13

 

 

 

1.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수 있는 가능성'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이며, 절대로 우리의 공로나 행위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주의자들과 성경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성을 사용하여 '종교적 진리'는 물론 역사와 우주를 취급하는 성경을

탐구할 수는 있다"

 

- 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 p. 67 -

 

 

필자가 작성한 '가능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속성들을 아직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 타락, 구속은 각각 불연속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관성이 있는 연속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타락'이라 단어를 전체적인 틀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야한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절망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부분을 포함한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이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성이 왜곡되었긴 하지만, 동물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다. 손상된 관계도 여전히 하나의 관계이고, 잘못된 사고과정도 하나의 사고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타락한 창조 속에 선한 어떤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각주:1]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말살되지 않는다" 

-알버트 윌터스, 《창조, 타락, 구속》, p. 100 - 

 

 

 

2.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인한 '어느정도' 회복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말미암아 존재론적 관점에서 완전 회복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왜 '완전한 회복'이란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자유의지'란 주제와 함께 썼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 회복하지 않았다.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모두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고 있기에, 항상 올바른 선택만은 할 수 없는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의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9~20 

 

 


그러므로 이미(초림으로 이루어진)와 아직(재림으로 완성될)사이에 살아가는 신자는 연약한 육신을 입은 존재이기에 날마다 악과 단호히 맞서서 싸우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의 heart 표시를 눌러주세요.

더 많은 사람과 소통 & 공유 할 수 있습니다.

 

  1. 알버트 윌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홍병룡 옮김, IVP, p.100 [본문으로]
반응형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2016. 1. 20. 23:14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출처: freeview.org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하려면 먼저, 성경의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아래 본문 중 서론의 내용은 필자가 썼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서평(http://kangsy85.tistory.com/357)의 내용에서 발췌했다. 그럼 시작해보자. 





1. 창조, 타락, 구속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창조주(하나님)가 피조물(인간)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했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하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것들을 향유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을 향하게 되어있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딤전 4:4



안타깝게도, 창세기에 기록되었듯이, 간교한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게 한다. 그렇게 그들(아담과 하와)이 악을 행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타락한 존재가 된다. 모든 의지와 욕구가 자아를 충족시키는데 몰두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인간이 타락하긴 했지만,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은, 하나님의 지적체계를 이어받은 존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 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 -사랑, 온유, 기쁨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인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존재로서 살아가는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신자는 생각하는 방향이 불신자와는 다르게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2. 신자와 자유의지


새롭게 된 신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근원적인 죄악(아담의 죄)을 행함으로써 선과 악이 공존하는 육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하기에 신자도 이기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생각과 죄의 유혹 때문에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분명한 것은 신자는 불신자와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죄를 단호히 거부하고, 의지적으로 싸우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창조시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선을 행하게 하기위함이었지, 악을 위한 도구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의 창조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그러면 우리는 ‘신자가 자유의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 신자가 참된 신자라고 전제한다면, 참된 신자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그분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이끌어주시며 그 가운데 지혜를 주신다. 또한 참된 신자는 자신의 삶을 항상 성경에 비추어 볼 것이기 때문에, 그 신자는 자신의 행동이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애쓸 것이다. 이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의 잘못한 것을 제대로 깨닫고, 그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였는가 또는 순종하였는가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섭리측면에서 문제의 대답을 이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사역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에 개입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선한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방향으로 질질 끌고 가시진 않는다. 그리고 그 선한방향이라는 것은 우리의 측면에서 선하지 않은 방향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1) 우리가 인생전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2) 결국에는 하나님이 우리는 선한 길로 이끄신다는 믿음안에 거하며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하게 창조되었고, 죄로 인한 타락에 의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그 방향이 왜곡되었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뤄진 구속사역으로 선한방향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창조와 타락은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구속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라 하더라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아직 연약한 육체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죄와 싸워야 하는 존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의지를 사용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더해졌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Free will




공감하신다면, 아래의 heart 표시를 눌러주세요. 

더 많은 사람과 소통 & 공유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이병헌과 삼성을 생각한다.

2015. 12. 31. 23:30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출처: iamkorean.com



이병헌이 배우로서의 실력과 공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도덕성의 문제를 어떻게 연관지어 생각해야 하는가. 파렴치한 인간이었던 '이병헌'은 내부자들을 통해 연기로서 다시 한번 인정을 받으면서, 배우 이병헌으로 탈바꿈했다. 네이버에서 이병헌의 연관검색어는 내부자들과 관련된 단어로 거의 바꼈고, 구글(Google) 이미지에서 이병헌을 검색하면 이병헌과 다희, 그리고 이지연을 함께 볼 수 없다. 이병헌은 이미지 변신에 보란듯이 성공했다. 배우가 연로 승부해야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나, 공인으로서의 도덕성과 배우로서의 연기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출처: calfocus.com



이병헌을 보면서 삼성을 생각했다. 삼성은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여러가지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 특히, 삼성반도체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태에 대하여 방관하며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한다. 2007년 삼성업체 노동자가 죽었을 때 삼성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성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 공화국의 일원임을 고백한다. 삼성 제품은 타사에 비해 가성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a/s 체계도 잘 되어있어서, 제품을 고를때 고민없이 삼성을 선택한다. 기업의 도덕성과 그 기업 제품의 우수성은 별개이어야 한다는 논리하에 말이다.

 
 



삼성의 도덕성을 비난하긴 하지만, 그 파렴치한 행위가 나의 권리와 행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이 없는 지식은 죽은 것인데 말이다. 사회에서 개인을 먼저 분리하고, 그 다음 기업에서 도덕성과 그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을 따로 떼어 생각한다. 그리하며 삼성의 제품을 고르는 것은 사회의 악을 저지르는 한 기업의 행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개인의 기호에 따라 하나의 상품을 구매한 것 뿐이다, 라는 결론을 맺게된다.



그러하다면, 나는 이병헌이 열연한 내부자들을 볼 것인가, 2015년이 저물어가는 마지막 날에 다시 묻고 있다.  






모순: 창과 방패



반응형

자연주의-인간과 신을 바라보는 시선.

2015. 2. 11. 20:34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타락한 자아가,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의 욕구를 채우기에 위해 무한질주 한다. 본래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 불행이 인간에게 닥친 것인지. 한명의 인간, 아담이 죄악을 범함으로써 인간는 타락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인간들은 스스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존귀한 존재이며, 마땅히 사랑받아야 한다, 강조한다. 그러니 사회의 흐름에 편승한 왜곡된 기독교는 그저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는 그럴듯 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 - 십자가 죽음과 부활 - 이 빠진 사탕발린 소리만 하는 것이다. 왜냐면 성도가 곧 소비자이며, 소비자의 구매욕구(교회등록)을 맞추려면 그에 맞는 소리를 해야 하니까. 개혁주의에서 강조하는 전적타락을 생략하고 이야기하는 복음은 참된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독교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주의''사상'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이 세대의 흐름이 한 몫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은 그대가 되고자하는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는 조각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미국 자연주의 작가)-








이전 시대에도,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자연주의. 자연주의에서 말하는 바는, 모든 만물의 근원이 자연이며, 인간은 자연의 산물 중 하나 일 뿐이다. 신은 무엇이냐. 인간의 본질을 인간 밖에 투영한 하나의 허구적인 존재 일 뿐이다. 결국,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즉, 자연주의가 말하는 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이 자연이고 모든 것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자연'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장프랑수아 밀레(대표적인 사실자연주의 작가)이삭 줍는 여인들 (1857). Musée d'Orsay, 파리.

출처: http://blog.naver.com







그리고 자연주의는 현실 세계를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나눈다. 이성적으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부분을 과학의 범주라고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부분은 종교의 범주로 넣는다. 초자연적인 힘이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자연주의에서는 종교인 기독교를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세대의 흐름 속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지향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은 기독교를 더욱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반응형

이성친구간에 '우정'은 존재할까 - 아니, 그렇지 않다고 봐.

2014. 1. 13. 23:46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이성친구 관련 글

 

1. 이성간에 친구사이, 의심해봐야 할 때.
    http://kangsy85.tistory.com/191

 

2. 이성간의 우정은 존재하는가, 친구가 가능한 것인가.
   http://kangsy85.tistory.com/170

 

 


[반추]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함.



이성친구간에 '우정'의 존재여부에 대한 글을 쓰고 나서, 이 문제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이성간에 친구란 있을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짓고 있지만 자꾸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되묻게 된다. 제한된 소수의 인간관계에서 이성친구들의 존재감이 컸던 탓에, 그들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 행동양태



난, 이성친구에게 나이에 맞지 않게 짖궂은 행동과 다소 멍청해보이는 행동들을 하곤 한다. 어리광이라 하긴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편안함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잊어버리게 하여 꾸밈없는 순수함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연유는 그들의 반응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성친구간에 나의 행동이 부담스럽거나 못마땅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정색하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으며, 꾸짖지도 않았다. 내 모습 자체를 인정해준다는 생각에 난, 아무런 의심도, 계산도 하지 않았다. 



난,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늦게 여는 편이다. 허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많은 것을 보여주고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가려 사귀고, 나의 마음이 맞는 사람에게 애정을 많이 깃들이고, 관심을 가지고 챙겨준다. 이러한 애정의 편차가, 친한 이성친구들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켰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감정상태] 



                                             출처http://www.mrwallpaper.com/i-miss-you-wallpaper/



친한 이성친구들과 멀리한 후, 솔직히 그들이 가끔은 그립고, 아쉽다. 진심을 다해서 이어가던 사람들을 잃는 것이 큰 아픔이다. 인간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다고, 관계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지만, 이번은 쉽지 않다



이성친구 관련 글

 

1. 이성간에 친구사이, 의심해봐야 할 때.
    http://kangsy85.tistory.com/191

 

2. 이성간의 우정은 존재하는가, 친구가 가능한 것인가.
   http://kangsy85.tistory.com/170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의 heart 표시를 눌러주세요.

더 많은 사람과 소통 & 공유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관계의 부재 - 인간관계는 늘, 내게 어렵다.

2014. 1. 8. 22:29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관계는 늘, 내게 어렵다.




나는 상대적으로 남자친구보다 여자친구가 많았다. 부연설명은 하기 싫으니, 착각은 하지말자.




출처: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psi0401




어느 날 '이성간에 친구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이성친구와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되었다. 이성간의 친구사이에서 '우정'이란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고, 그 감정의 가식을 알아챘다.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가면을 벗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이성친구들에게 의식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고 소통하던 친구들인데, 적정선 밖으로 완전히 밀어냈다. 








관계의 절단, 뚝. 뚝.








상경한지 1년째다. 이성친구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도 잦아들었다. 시간의 흘러감과 같이, 자연스레, 관계를 잃어가고 있다. 관계의 부재로 인해 사람들의 삶을 염탐하게 되고, 과거 나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학교-기숙사-교회의 동선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삶에서조차 내어줌과 받아들임이 없다. 가장 큰 벽은 쉬이 드러내지 않고, 내어주지 않는 나의 완고함이다. 




하나님앞에만 온전히 서 있으면 된다는, 하나님한테만 인정받으면 된다는, 그 교만함이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간과시키지 않을까.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는데 말이다. 이 불순한 종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는 중요시 여기면서,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직 신앙이 미성숙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튼, 인간관계는 늘, 내게 어렵다. 








반응형

이성간에 친구사이, 의심해봐야할 때.

2013. 12. 30. 02:22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이성친구 관련 글

 

1. 이성친구간에 '우정'은 존재할까.
   http://kangsy85.tistory.com/195

 

2. 이성간의 우정은 존재하는가, 친구가 가능한 것인가.
   http://kangsy85.tistory.com/170

 


과연 이성간에 친구가 존재할까.



필자의 경험으로 비추어, 이성친구간에 자신의 감정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경우를 몇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출처 : http://contents.auction.co.kr




1. 의미 있는 선물이나 손 편지를 주고 싶어진다.



이성친구를 친구가 아닌, 한명의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내 같은 경우에는 이성적인 호감이 생기면서 선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손으로 쓴 편지를 줬던 것 같다. 편지든 선물이든, 어떤한 것에 의미와 정성을 포함하게 될 때 이성친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시점이라 생각한다.






2. 이성친구에서 애인이 생겼다!?


이성친구에서 애인이 생겼는데 자신의 기분이 언짢거나 짜증이 난다면, 이성친구에 대한 자신의 감정상태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기분이 언짢거나 짜증와 같은 감정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너희들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많은 제 3자들이 이성친구간의 사이를 의심한다면 자신들이 감정상태와 행동들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성친구간에 너무 친하다보니, 습관처럼 서로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인양 행동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비가오면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것, 여행을 떠날 때 마중을 나가는 것, 밤에 자주 만나는 것, 상대방의 모든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다 아는 것 등 친구와 연인 사이의 경계선에서 애매모호한 행동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꾸 묻게 되는 질문이다. 이성친구간에 진정한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공감한다면, 아래의 손가락 표시를 눌러주세요. 

더 많은 사람과 소통 & 공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친구 관련 글

 

1. 이성친구간에 '우정'은 존재할까.
   http://kangsy85.tistory.com/195

 

2. 이성간의 우정은 존재하는가, 친구가 가능한 것인가.
   http://kangsy85.tistory.com/170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의 heart 표시를 눌러주세요.

더 많은 사람과 소통 & 공유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물과 기독교 (Water and Protestantism)

2013. 11. 30. 13:53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Q. What is the meaning of water in Protestant Bible?

 

First of all, Water is connected to life. Author of the Bible mentioned Jesus as living water in New Testament. Those who are spiritual thirsty should drink water for soul as it is natural for those who feel physical thirsty to need water.

 

Jesus answered, “Everyone who drinks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ave him will never thirsty.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John 4:13- 14)

 

Second, water is used as symbol of cleansing sins. Water baptism as a one of various baptisms has meaning of becoming ceremonially cleansed of sin in accordance with Old Testament Law.



 

Q. How is water described in Protestant Bible?

 

The Protestant Bible was written in 2 parts, the Old Testament (39 books) and the New Testament (27 books).  The books are divided into Chapters. The Chapters are divided into Verses. There are many Verses that contain water.

 

Water is mentioned first when God create earth. Before there was any element; air, light, sun and fire, there was only water. Now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 (Genesis 1:2) And God commanded the water to bring out an abundance of living souls. God said, “Let the water teem with living creatures, and let birds fly above the earth across the expanse of the sky.” (Genesis 1:20-21)

In some verses the element is similar to characteristics of God. God is compared with the rainwater.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As surely as the sun rises, he will appear; he will come to us like the winter rains, like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Hosea 6:3)


Water also brings life. For example, in Old Testament when the Israelites out of Egypt were dying of thirsty in desert, God saved them by giving water came out of the rock.  (cf. Exodus 15:23-35; 17:2-7; Isaiah 35:6-7; 58:11)


Water is a powerful purifying element (Ezekiel 36:25) and can destroy evil and enemies as in the stories of the Flood (Genesis 7:1-12) and the flight of Israel from Egypt (Exodus 14:15-31). According to Old Testament Law, it cleanses defilement (Leviticus 11:32; 14:8, 9; 22:6), and is used in sacrifices (Leviticus 1:9, 13; 6:28) Water as a healing element can be seen from the stories of Naaman the Syrian cured from his leprosy in the waters of Jordan (2 Kings 5:1-14), and the annual miracles at Bethesda in Jerusalem (John 5:1-4). Finally, as I said earlier John the Baptist used the waters of the Jordan to cleanse people’s sins. (Matthew 3:1-6; Mark 1:4-5; Luke 3:16; John 1:26-33).

 


Q. What is the tradition related to water?

 

Almost all of Churches use Baptism for a Christian rite of adaption and admission. Baptism may be mainly divided into two. One is water baptism by immersion; the other is baptism through laying on of hands with little water.



 Fig. 1 Baptism by immersion           

Fig. 2 Baptism through laying on of hands






Reference

 

BibleGateway (n.d.). “John 7 - IVP New Testament Commentaries” from http://www.biblegateway.com/resources/commentaries/IVP-NT/John/Jesus-Source-Living-Water-All

KENNETH COPELAND (n.d.) “UNDERSTAING WATER BAPTISM” From http://www.kcm.org/real-help/article/understanding-water-baptism

OrthodoxyToday (n.d.). “The Meaning of Water in Christianity” from

https://sites.google.com/site/waterinchristianity/

 

김성화 (1999), “성경에 쓰인의 구체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어문학교육v 21, pp. 45-96 1225-1704

 

장동일 (2004), “요한복음의 물의 의미와 기능”,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반응형
반응형

L'Étranger by kangsy85

Notices

Search

Category

First scene (1195)
프로필 (20)
삶을 살아내다 (406)
책과 글, 그리고 시 (255)
독서 목록 (8)
서평(書評) (57)
좋은 문장 (56)
작문(作文) (26)
영작(英作) (7)
시를 쓰다 (3)
시에 울다 (98)
산업단지 (13)
도시재생 (4)
토목직 7급 수리수문학 (8)
토목직 7급 토질역학 (8)
자료공유 (107)
편집 프로그램 (8)
신앙 (286)
초대장 배포 (55)

Statistics

  • Total :
  • Today :
  • Yesterday :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Recent Trackbacks

Copyright © Nothing, Everything _ Soli Deo Gloria All Rights Reserved | JB All In One Version 0.1 Designed by CMSFacto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