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하게 머리가 아프다.

2016. 6. 23. 23:57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출처 : it.dreamstime.com>




고시원의 자그마한 창문으로 무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잠이 깼다. 더워진 날씨 때문인지 한동안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했다. 한참동안 침대에서 뒤척이다 모든 이들이 떠난 시간에 눈을 겨우 떴다. 그런데 오늘은 무더위 덕분에 눈을 떴다. 잠이 깼을 때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은 많이 잤는데, 머리는 둔탁하게 아팠다. 



새벽녘 낯선방에서 들려온 한 남성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화들짝 잠이 깼기 때문일까. 그 남자는 "XX놈아 잠 좀 자자!"라고 소리 질렀고, 난 잠이 깼고, 한동안 멀뚱하게 천장만 바라봤다. 왜 새벽에 지랄이야... 하지만 다닥다닥 붙어있는 1.5평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익명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말이다. 적막했다. 길가 술주정뱅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창문으로 흘러들었고 새벽의 아득함에 다시 잠들었다. 그리 아침이 밝았고, 새로운 아침은 내게 두통을 안겼다. 글을 쓰고 있는 저녁에도 아침이 안겨준 두통을 앓고 있다. 지긋지긋한놈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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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_ 김경미

2016. 6. 18. 21:2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Source : www.toonvectors.com> 




냉장고 



                        김경미




1. 


어느 날 문을 열자 

뜨거움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열쇠가 눈에 띈다 


입이 얼어붙은 열쇠였다 



2. 


다음 날 

또 열쇠를 잊고 

불같이 화를 냈다 


곧 후회했지만

이미 수치가 재앙이 된 뒤였다



3. 


신선한 달걀에게도 끝내 곰팡이를 선사하는 힘

생선을 새까만 까마귀로 바꾸는 힘 


항상 날짜를 읽어내는 힘 


문을 열어 열쇠와 머리를 함께 집어넣고 


차가운 짓을 그만할지 

뜨거운 짓을 그만할지 의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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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_ 김경미

2016. 6. 13. 16:20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t9t9.com>




수첩



                                         김경미




도장을 어디에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똥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도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도 남기고 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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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마침표.

2016. 6. 13. 16:1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출처: brunch.co.kr>



 당신과 나 사이에 쉼표를 찍기에는 우리사이가 너무 멀어졌습니다. 마침표를 찍듯이 우리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 서로의 독립성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독립성을 확보하겠습니다. 마침표을 찍고,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눠 문맥의 연관성은 유지하되 문장의 독립성은 보존하듯이 말입니다. 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자아와 분리된, 관계성이 없는 '타자'로 규정하고 당신의 어떠한 일에도 감정을 내어주지 않는건, 흔한일이니 말입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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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토목기사 _ #1 토목기사 필기 준비 및 공부(독학)

2016. 6. 13. 16:00 자료공유/취업


관련포스팅
[자격증] 토목기사 _ #2 토목기사 실기 준비 및 공부: kangsy85.tistory.com/653






 

1. 토목기사 개요


- 자격명: 토목기사(Engineer Civil Engineering) 


① 시 행 처 : 한국산업인력공단

② 관련학과 : 대학 및 전문대학에 개설되어 있는 토목공학, 농업토목, 해양토목 관련학과

③ 시험과목 - 필기 1. 응용역학 2. 측량학 3. 수리학 및 수문학 4. 철근콘크리트 및 강구조 5. 토질 및 기초 6. 상하수도공학             

                 - 실기 : 토목설계 및 시공 실무

④ 검정방법 - 필기 : 객관식 4지 택일형 과목당 20문항(과목당 30분)

                - 실기 : 필답형(3시간)

⑤ 합격기준 - 필기 : 100점을 만점으로 하여 과목당 40점 이상, 전과목 평균 60점 이상

                - 실기 : 100점을 만점으로 하여 60점 이상

 



2. 토목기사 필기 준비 


1) 공부 교재: 김창원 외 5명, 2015 12차 개정판 토목기사과년도문제해설 단기완성(10개년), 한솔아카데미, 2015


- 6과목의 핵심개론(응용역학/측량학/수리학 및 수문학/철근콘크리트 및 PSC강구조/토질 및 기초/상하수도)과 10개년도 기출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Tip. 전공자라면 굳이 과목별로 나눠져 있는 책을 살필요는 없다. 기출문제집에도 과목별 핵심개론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그 내용이 빈약하지 않다. 고로, 기사 필기준비는 기출문제집 한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출처: www.gosimart.co.kr>



 
2) 공부 방법:


 필기 시험전까지 남은 일수를 고려해서 공부방법을 정하는 것이 좋다. 시간이 많다면 기출문제와 개론 공부를 병행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해도 된다. 하지만 단기간 내 필기시험을 준비해야한다면 일단 개론공부를 배제하고 기출문제를 최대한 많이 풀어볼 것을 권장한다. 즉, 문제풀이의 '반복'과 '숙달'에 중점을 두고 공부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응용역학과 수리학은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한 응용문제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핵심개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토목기사의 필기 100문제는 객관식이다. 따라서 먼저 기출문제를 통해 각 과목별로 문제유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10개년도 문제를 최소 2회 정도는 풀어보면 자연스럽게 문제의 유형들을 익힐 수 있다. 


  문제유형을 익힌 후 자주 틀리는 문제를 정복하는 것도 관건이다. 같은 유형의 문제라도 문제풀이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오답노트를 만들어 과목별로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을 모은 다음, 각 문제들마다 차이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면 문제를 푸는 시간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각 과목 40점 미만이면 과락이며, 전체 과목 평균 60점 미만이면 시험탈락이다. 따라서 오답노트를 통해 자신이 어느 과목에 취약한지 파악해서 공부시간을 잘 분배해야 한다.   


 



④ 대부분의 자격증 시험은 시험 일주일 전부터 시험당일까지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필기 시험 일주일 전부터는 새로운 문제들을 풀지말고, 최근 5개년 기출문제와 그간 작성한 오답노트만 풀면서 틀린 문제를 모두 맞추는 것을 목표로 공부한다. 결국, 문제의 '반복'과 풀이과정의 '숙달'이 당락을 결정한다.   

 
 

 


3. 토목기사 필기 결과: 합격

 

 


 다들 건승하시라!



관련포스팅 
[자격증] 토목기사 _ #2 토목기사 실기 준비 및 공부: kangsy85.tistory.com/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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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_금동반가사유상&목조반가사유상

2016. 6. 11. 17:52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그림1.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좌) 한국의 금동반가사유상(우)



Q. 반가사유상이란.

 

반가사유상은 '반가(半跏)''사유(思惟)'의 두가지 자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뺨에 대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Q. 세계 4대 반가사유상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계 4대 반가사유상은 한국의 국보 제 78,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의 주구사 목조 반가사유상, 교토 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이다.

 

 

Q. 이번 특별전시회에서는 무엇이 전시되는가.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기획된 이번 특별전은 한국의 국보 제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 나라 현() 주구 사(中宮寺)에 소장된 목조반가사유상이다.

 

 

 

Q. 두 조각품의 특징은 무엇인가.

 

1.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

 

  금동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금동반가사유상은 앉아 있는 자세를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형 비율을 흐트리지 않으면서 일정한 두께로 주조하였기 때문에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조각품의 특징은 화려하고 섬세하게 장식한 동시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먼저 허리에서 양쪽 의자로 흘러내리는 리본을 보면 양쪽을 똑같이 조각하지 않았다. 우측(관찰자 시점)의 리본은 여러선을 꼬아 놓은 것처럼 표현했고, 좌측은 옥구슬이 달린 것처럼 표현하였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입가에 옅고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표현은 뺨을 대고 있는 오른손 4, 5번째 손가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손가락의 관절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보다 손가락이 구브러지는 굴곡에 더 집중한 것이다. 굳이 섬세한 부분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조각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정교함은 마주편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리고 보는 시각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좌측(관찰자 시점) 45도에서 바라봤을 때 조각상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그림 2. 좌측에서 바라본 금동반가사유상

 <출처: senior.chosun.com>

 

2. 일본 국보 목조반가사유상

 

  목조 반가사유상은 쇼토쿠 태자[각주:1]가 세운것으로 알려지는 나라 현 주구사 소장의 작품이다. 특이한 점은 머리에 두개의 상투를 틀어 올린 것이다. 잘 살펴보면 여기에 못 자국이 있는데, 이를 통해 보관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편평한 귀, 균형잡힌 비율, 유려한 치맛주름 등의 특징을 통해 아스카 시대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녹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여러 나무 조각을 결합하여 만든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측 옆면에 앞면과 뒷면을 결합시킨 선이 드러나며 좌측(관찰자 시점) 어깨에 사유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약 2 cm의 나무가 삽입된 것을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반가사유상을 일본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 조각품이다







  1. 聖德太子(574-622) 일본의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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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모네, 빛을 그리다展 (컨버전스 아트) _ IMPRESSIONISM

2016. 6. 9. 19:09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모네, 빛을 그리다> IMPRESSIONISM: ART BEYOND ART 

- 전시기간: 2016년 5월 12일(목) ~ 7월 3일(일)

- 전시장소: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매표 및 입장마감:오후 5시), 월요일 휴관

- 도슨트: 평일 1일 3회, 오전 11시 / 2시 / 4시 *주말, 공휴일 도슨트 없음

- 관련 사이트: http://www.lovemonet.com/

 

Claude Oscar Monet (1840 - 1926)

 

<Source: https://trungdoan1309.wordpress.com/2013/12/02/claude-monet>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그는 인상파의 창시자로 불리우며, 그의 작품 《Impression: Sunrise》(1873)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는 1890년 초부터 건초더미, 포플러나무, 루앙대성당 등의 소재를 가지고 연작을 그렸다.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의 각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표현했다. 특히, 말년의 《Water lily》연작은 자연을 우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각주:1]

 

 

 이번 <모네, 빛을 그리다>은 컨버전스 아트(Convergence Art) 전시회로 모네의 작품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재해석한 것이다. 컨버전스 아트 전시회는 처음이라 생소했고, 시간차로 바뀌는 그림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전시회는 모네의 생애를 시간적 순서로 구성한 5개의 Ordinary part*와 특정한 주제로 구성한 3개의 Special part**로 구성된다. 본 포스팅에서는  Ordinary part 1, 2, 3, 5과 Special part 1, 3에 관련된 작품만 다루고자 한다. 

 

*Ordinary part

 Part 1이해의 시작: 모네 그리고 빛 (1840 - 1862년 이전) 

 Part 2영혼의 이끌림: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나의 색채 (1862 - 1872년)

 Part 3인상의 순간: <인상, 해돋이> 그 찰나로부터 (1872 - 1890년 이전)

    Part 4. 비밀의 정원: 아름다운 구속, 지베르니 (1890 - 1900년 이전)

 Part 5모네의 빛: 지금 그리고 영원까지 (1900 - 1926년 12월 5일 사망)

 

**Special part

 Special part 1. 사랑의 진혼곡: 카미유, 애틋함부터 애절함까지 

    Special part 2. 자연의 겨울: 수면위의 수련

 Special part 3. 루앙의 기도: 시간을 관통하는 빛 

 

 


 

 

 

Part 1. 이해의 시작: 모네 그리고 빛 (1840 - 1862년 이전)

 

 클로드 모네는 어린시절, 유명인사나 도시의 시민들을 풍자해서 자주 그렸다. 이로 인해 그는 고향 르아브르에서 풍자화가로 유명했다. 유명세를 타자는 그는 자신의 그림에 사인을 더해 문방구 표규상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표구상에서 화가 외젠 부뎅[각주:2]을 만나게 되는데, 부뎅은 모네에게 풍자화만 그리지 말고, 자연을 배경으로 풍경화, 정물화 등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또한 그는 모네에게 외광파의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모네가 부뎅을 만나 그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진정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시회 스크린을 통해 유년시절 모네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Claude MonetCaricature of Léon Manchon, 1855-1856년

 

Claude Monet, Caricature of Jules Didier, 1860년경

 

Claude Monet, Auguste Vacquerie, 1854

 

 

Part 2. 영혼의 이끌림: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나의 색채 (1862 - 1872년)

 

 그는 군복무를 마친 1860년 초에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바지유, 시슬레, 르누아르를 만나게 된다. 모네와 친구들은 정기적으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모네는 1864년에 바지유, 부뎅과 같이 옹플뤄르에 가서 노르밍디 해안을 작품을 1865년 관립에서 주최하는 살롱에 출품하여 입선하게 된다. 그 뒤, 1863년 큰 반향을 일으켰던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Le Déjeuner sur l’herbe의 영향을 받아, 1865년 똑같은 제목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Edouard Manet, Le Déjeuner sur l’herbe. 1863[각주:3]

 

 

Claude Monet, Le Déjeuner sur l’herbe. 1865[각주:4] 

 

 이후에도 모네는 자연의 여러가지 풍경을 그려나가는데, 그에게 있어 물은 추상적인 의미였다. The River, Bennecourt(1868)에서는 수표면에 비친 대상물을 색면으로 분할하여 그림에 리듬감을 부여했다. 또한 수면을 이용하여 대상의 공간적 특성을 제거하여 대상물 없는 추상적인 회화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Claude MonetThe River, Bennecourt, 1868[각주:5]

 

 1868 - 1869년에는 눈의 효과를 다른 《까치를 주제로 그려서 낙선했고, 1869년에는 세느 강변으로 이사를 와서 근처 술집인 "개구리 연못"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개구리 연못La Grenouillére의 작품에서 드러난 모네의 특징은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구도를 유지하면서 화면의 넓이와 공간적 깊이를 조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즉 긴장감을 주변으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Claude Monet, La Grenouillére, 1869[각주:6]

 

 모네는 위의 작품에서 전원적인 전통을 따르지 않고 군중들의 소란스러운 모습에 집중하면서 근대적인 일상을 묘사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비평가와 대중에게 외면을 받게 되었고, 카미유과 결혼을 반대하던 집에서는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린다. 또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모네의 가족들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오랜시간 굶주리면서 가난하게 살아가야했다.   

 

 

Part 3. 인상의 순간: <인상, 해돋이> 그 찰나로부터 (1872 - 1890년 이전)

 

 

Claude Monet, Impression: Sunrise, 1872.[각주:7]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모네를 비롯한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협회를 설립하고 단체전을 연다. 이때 모네는 《Impression: Sunrise을 전시했으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얻지 못했고 비평가들로부터 혹평만 받는다. 이때 프랑스 비평가 루이 르루아가 『르 샤르바리』지에 모네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인상주의'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대상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불규칙하고 느슨한 붓질과 터치로 빛과 그림자의 의미를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시회 내 이 작품이 걸려 있기는 하나, 원작은 아니다. 아마 국내 화가가 원작을 보고 따라 그리지 않았나 싶다. 

 

 

 

Part 5모네의 빛: 지금 그리고 영원까지 (1900 - 1926년 12월 5일 사망)

 

 모네는 인생 말년에 아내와 아들, 그리고 시력까지 잃게 된다. 그로 인해 잠시 그림을 그리지 않을때도 있었지만, 그의 기념비적 작품인 수련 벽화를 완성한다. 

 1908년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고, 1911년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그 아픔을 이겨내기도 전에 카미유의 첫째 아들 장의 죽음소식까지 접하게 된다. 그때 모네 작품 애호가였던 클레망소가 모네에게 국가에 기증할 수련 연작을 제안한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림를 그린다는 것 자체로 위안을 얻고 다시 수련 벽화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1926년 모네가 죽기 전까지 수련 연작은 그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Claude Monet, The Water Lilies - Clear Morning with Willows, 1914-1926[각주:8]

 

 

 

 


 

 

Special part 1. 사랑의 진혼곡: 카미유, 애틋함부터 애절함까지 

 

 

Claude Monet, The Woman in the Green Dress, Camille Doncieux, 1866[각주:9]

 

 모네는 카미유를 모델로 처음 만나게 되어, 첫눈에 반하게 된다.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The Woman in Green Dress》(1866)은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게되고, 모네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 뒤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모네의 부모는 카미유가 모델이라는 천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 둘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면서 첫째 아들 장까지 낳긴 하지만, 결국 결혼식은 올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모네는 아내와 아들을 모델로 삼은 그림들을 그렸는데, 《Woman with a Parasol-Madame Monet and Her Son》(1875)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시회 내 원작을 그대로 베껴서 그려놓은 작품이 전시회 마지막 부분에 걸려있다.    

 

Claude MonetWoman with a Parasol-Madame Monet and Her Son, 1875[각주:10]

 

Claude Monet, Woman with a Parasol, facing right, 1886[각주:11]

 

 

 하지만 카미유를 향한 모네의 사랑은 식어갔고, 약 1873년부터 잦은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나서 카미유는 둘째를 출산한 후 1879년 32살의 나이가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모네는 카미유의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바로, 그 작품이 아래의 《Camille Monet on her Deathbed》(1879)다.

 

Claude MonetCamille Monet on her Deathbed, 1879[각주:12]

 

 

 

Special part 3. 루앙의 기도: 시간을 관통하는 빛 

 

Rouen Cathedral Series

<Source: http://www.kartenn.es/timelapse-de-google>

 

 

 연작 '루앙 대성당'의 시리즈는 모네가 르아브르 지역에 방문했다가, 그 지역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것 으로 알려져 있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 근처에 방을 얻어 성당의 서쪽 정면에 비치는 그림자와 햇빛의 움직임을 연구했다. 그는 1892년 2월에서 4월, 1893년 2월 4월, 두 차례에 걸쳐 작업을 진행했으며, 마지막에는 그린 그림들을 지베르니로 가져와서 완성했다. 1894년 5월 갤러리 뒤랑 뤼엘에 20점의 연작을 전시하여 그 시대 화가들과 방문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전시회에서는 연작 시리즈 중 《루앙 대성당, 서쪽 피사드, 햇빛》을 3D 맵핑기법을 이용하여 햇빛의 각도에 따라 건물에 비취는 색의 변화를 재현하였다. 3D 맵핑기법은 스크린으로 사용되는 벽이나 물체의 재질, 색감, 배열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하여 새로운 증강현실[각주:13]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래는 전시회에서 루앙 대성당 시리즈를 디지털로 재구현한것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이외에 모네의 다른 연작인 《Gare Saint-Lazare》(1877),《Poplar》(1982),《Haystack》(1888-1894),《Seine》(1896-1897),《Giverny Waterlilies》(1900),《House of Parliament》(1904) 들을 디지털 형식으로 구성하여 벽면에 전시하였다.     

 

Claude Monet, La Gare Saint-Lazare, 1877[각주:14]

 

Claude Monet, Arrival of the Normandy Train, Gare Saint-Lazare, 1877[각주:15]

 

Claude Monet, Grainstacks in the Sunlight, Morning Effect1890-91[각주:16]

 

Claude Monet, Grainstacks, end of day, Autumn, 18901891[각주:17]

 

 

 

 

"주제는 나에게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대상물과 나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려 한다."

 

 

-클로드 모네-

 

 

 

참고문헌 

1. 이연행, 『빛과 수련의 화가 모네』, 아트블루, 2009

2.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클로드 모네』, 김주원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5

3. 주드 웰턴, 『명화 이야기 시리즈-모네』, 김 택 옮김, 디자인하우스, 1997

 

 

※ 참고사항

- 본 포스팅에 사용된 이미지는 각주의 사이트나 출처에서 다운로드 받았으며, 출처없이 무단사용하거나 불법적으로 사용하였을 경우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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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이버 지식백과. "클로드 모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391&cid=40942&categoryId=40464 [본문으로]
  2. 프랑스의 화가. 고향인 옹프륄의 풍경에 정이 들어 해변의 풍경화만을 그렸고 주로 북 프랑스의 노르망디나 브르타뉴지방, 네덜란드의 해변을 테마로 삼았다. 해변의 밝은 대기를 즐겨 묘사하여 빛나는 외광(外光)을 신선한 색채감으로 표현한 그의 화풍은 인상파 화가에 영향을 끼쳐 인상파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젠 부댕 (두산백과) [본문으로]
  3. 구글. "Luncheon on the grass". 출처: http://a1reproductions.com [본문으로]
  4. 구글. "Lucheon on the grass", http://www.aurlaea.com/gallery_viewer.html?i=114 [본문으로]
  5. 구글. "The River, Bennecourt",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1/Monet_-_An_der_Seine_bei_Bennecourt.jpg?uselang=ko [본문으로]
  6. 구글. "Monet",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Claude_Monet_La_Grenouill%C3%A9re.jpg [본문으로]
  7. 구글. "sunri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laude_Monet,_Impression,_soleil_levant.jpg [본문으로]
  8. 구글. "mornin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laude_Monet_-_The_Water_Lilies_-_Clear_Morning_with_Willows_-_Google_Art_Project.jpg [본문으로]
  9. 구글. "Camille",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Claude_Monet_-_Camille.JPG [본문으로]
  10. 구글. "Monet",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Claude_Monet_-_Woman_with_a_Parasol_-_Madame_Monet_and_Her_Son_-_Google_Art_Project.jpg [본문으로]
  11. 구글. "Monet", https://en.wikipedia.org/wiki/Woman_with_a_Parasol_-_Madame_Monet_and_Her_Son#/media/File:Monet-woman-with-a-parasol-right.jpg [본문으로]
  12. 구글. "Camille on her deathbed",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Claude_Monet,_1879,_Camille_ sur_son_lit_de_mort,_oil_on_canvas,_90_x_68_cm,_Mus%C3%A9e_d%27Orsay,_Paris.jpg [본문으로]
  13. 실세계에 3차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 [본문으로]
  14. 구글. "Monet",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La_Gare_Saint-Lazare_-_Claude_Monet.jpg [본문으로]
  15. 구글. "Monet",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Arrival_of_the_Normandy_Train,_ Gare_Saint-Lazare_1877_Claude_Monet.jpg [본문으로]
  16. 구글. "Monet",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Claude_Monet,_Grainstacks_in_ the_Sunlight,_Morning_Effect,_1890,_oil_on_canvas_65_x_100_cm.jpg [본문으로]
  17. 구글. "Monet",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media/File:1270_Wheatstacks,_1890-91,_65.8_x_101_cm,_25_7-8_x_39_3-4_in,_The_Art_Institute_of_Chicago.jpg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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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_ (#2 디에고 리베라 작품)

2016. 6. 7. 15:19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 전시기간: 2016년 5월 28일 ~ 8월 28일

-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 관람시간: 오전 11시 - 오후 8시(매표 및 입장마감:오후 7시)

- 휴관일: 매월 마지막주 월요일 휴관일(6/27, 7/25)

- 도슨트: 평일 1일 3회 오후 1시 / 3시 / 5시 *주말, 공휴일 도슨트 없음


Diego Rivera



<출처: http://www.wikiart.org/en/diego-rivera>





 디에고 리베라(1886-1957)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벽화가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몽마르트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가 주도한 큐비즘(Cubism)의 영향을 받았다.[각주:1] 또한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후기 인상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멕시코 혁명 이후 1921년에 귀국하여 멕시코 토착문화에 기반을 둔 벽화를 주로 그렸으며, 대형 벽화 작품을 통해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자주 다뤘다. 프리다칼로는 그의 세 번째 아내이자 이념과 예술을 소통하는 동지이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가 죽은 뒤 34개월 뒤에 뇌일혈[각주:2]로 세상을 떠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의 전시회에 소개된 디에고의 작품들을 위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큐비즘의 영향



Diego Rivera, Young Man with a Fountain Pen, 1914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



Diego Rivera, Knife and Fruit in Front of the Window, 1917



 디에고는 1909년 세잔의 그림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나서 파리로 돌아와 큐비즘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큐비즘은 왜곡과 모독의 정신을 표방하고, [각주:3] 불변의 진리나 정적인 대상에 대한 공격적이었으며 공예와 건축을 미학의 대상으로 끌여들여 여러가지 양식들로 혼합했다. 큐비즘에서는 일상 생활의 물건(신문, 페인트통, 목재, 벽지)을 화가의 중요한 소재로 여겼다.[각주:4]

 

 


#2 벽화 



Diego Rivera, Emiliano Zapata and his horse, 1932

<출처: http://www.guidesumer.com/news/article.html?no=1388>



 1915년 이전에 디에고의 그림 중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 것은 단 한 작품도 없었다. 디에고가 유학을 마치고 1920년대 멕시코로 귀국했을 때, 시대상황은 혼란스러웠다. 그 상황에서 그는 부르주아 세력과 군부세력이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한 상황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벽화를 통해 멕시코의 인디오, 억압과 고통, 민중들의 삶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각주:5]

 《농민지도자 사파타Emiliano Zapata and his horse, 1932》는 쿠에르 나바카의 코르테스 궁전에 그린 멕시코 정복에서 사파타의 반란까지의 기억들》이라는 주제의 벽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벽화에 그린 것과 거의 똑같이 석판화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작품에서 사파타는 타도한 독재자 위에 인자하게 서 있는데, 이는 멕시코 혁명에 대한 디에고 리베라의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다.[각주:6]  이외에 민중을 다룬 《Boy with a Taco, 1932》, Fruits of Labor, 1932》의 석판화도 전시되어 있다. 

 



Diego Rivera, Boy with a Taco, 1932

<출처: http://www.lataco.com/el-nino-del-taco-diego-rivera>



Diego Rivera, Fruits of Labor, 1932 

<출처: www.pinterest.com>



#3 인생의 말년 



Diego Rivera, Sunset, 1956 

<출처: en.wahooart.com>



 디에고는 인생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악화됐지만, 멕시코 전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특히 해질 무렵의 광경을 많이 그렸다. 이번 전시회는 멕시코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에 소장된 총 24개의 《Sunset작품 중에 4개의 작품만 소개하고 있다. 



#4 마지막 유작



Diego Rivera, The Watermelons, 1957

<출처: https://www.pinterest.com/pin/210543351304950980>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지 3년 4개월 뒤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프리다 유작의 소재인 수박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생애 그녀를 더 사랑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기리며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림의 의도는 디에고만이 알겠지만 말이다. 



※ 전시관 내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며, 본 포스팅에 게재된 이미지는 이미지 아래의 출처에서 가져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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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ww.wikiart.org/en/diego-rivera [본문으로]
  2. 졸중, 동맥경화증으로 인해 뇌동맥이 터져서 뇌 속에 출혈하는 병증. [본문으로]
  3. 르 클레지오,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신성림 옮김, 다빈치, 2008, 40쪽 [본문으로]
  4. 벽을 그린 남자-디에고 리베라, 마이크 콘잘레스, 정변선 역, 책갈피, 2002, p. 86 [본문으로]
  5.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754896&memberNo=955022&vType=VERTICAL [본문으로]
  6. http://www.nocutnews.co.kr/news/45994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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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종이 _ 마종기

2016. 6. 6. 21:1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kr.freeimages.com






서 있는 종이 



                                        마종기 




한밤에 잠자다 어둠 속에서 불현듯

화려한 시 몇 줄이 나를 흔들어 깨워

불도 켜지 않은 채 침상 종이에 썼던 글. 

아침에 잠 깨어 밤새운 종이를 보니 

설친 글자 하나 보이지 않는 백지였네. 

죽어버린 볼펜이 억울해 눈여겨보아도

희마한 분홍색만 흩어진 자국으로 보인다. 



그래, 이렇게 연한 색을 어디서 본 적이 있지. 

그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던 때였나, 

열심히 보면 피가 조금 밴 부끄러움의 색, 

내가 더 살기로 한 곳에서 맴돌고 있던 색, 

비굴한 계절이 말 걸어오면 주춤거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대다가 남아 있던 색. 

그 색깔 번져 있는 온몸 투신의 시 한 줄, 

어딘지도 모르고 입술 터진 길을 헤맨다. 



빈 종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쓰고 남은 자리에도 

무심히 지나간 이에게도 말해주어야겠다.

아무리 눌러 써도 이해되지 않는 종이에 

숨어서 밤새워 응시하며 서 있는 종이에 

얄팍한 의심 겨우 지탱해주는 녹슨 시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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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_ (#1 프리다 칼로 작품)

2016. 6. 4. 01:09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 전시기간: 2016년 5월 28일 ~ 8월 28일

-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 관람시간: 오전 11시 - 오후 8시(매표 및 입장마감:오후 7시)

- 휴관일: 매월 마지막주 월요일 휴관일(6/27, 7/25)

- 도슨트: 평일 1일 3회 오후 1시 / 3시 / 5시 *주말, 공휴일 도슨트 없음

 

 

 

 

 20대 초반에 책을 통해 프리다 칼로를 알게됐고, 우연찮게 여러 매체를 통해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접했다. 기회가 되면 프리다 칼로의 작품전에 꼭 가보고 싶었다. 며칠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 미술관에서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의 전시회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전시회를 보러갔다. 

 

 

이번 전시회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멕시코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의 콜렉션은 런던 데이트 모던,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이어져 온 대규모 전시회로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그들의 작품은 멕시코에서 국보급으로 취급하며 작품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럼 먼저, 도슨트의 설명을 바탕으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프리다의 작품에서는 진실을 직시하고, 잔인한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그 아픔을 감내해내는 여성 특유의 강인함이 잘 드러난다.

 

관련포스팅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_(#2 디에고 리베라 작품) : kangsy85.tistory.com/630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1 초기 자화상

 

Frida Kahlo, Self-portrait with Velvet Dress, 1926

<출처: blog.daum.net/mjchoi7163>

 

 

 이 그림은 프리다칼로의 초기 자화상 중에 하나로 남자친구인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에게 주기 위해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가 18살 되던 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후 알렉한드로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결국 알레한드로에게 전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자화상에서 길게 표현된 목은 마니에리스모의 양식 중 하나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각주: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주:2] 프리다의  초기 자화상은 후기 자화상보다 여성의 단아함과 부드러움이 더욱 드러난다.   

 

 

#2 인생의 두번째 큰 사건

 

Frida Kahlo, Portrait of Diego Rivera, 1937

<출처: http://imnews.imbc.com/n_newssas/n_relaxation/n_exhibit/3735111_16747.html>

 

 

 프리다가 디에고를 만난 것은 프리다 인생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만나서 결혼한 후 아내로서 디에고가 화가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내조역할만 했고,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만큼 디에고를 사랑했으며 그를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다는 디에고의 초상화를 단 하나밖에 그리지 않았다. 전시회에서 디에고의 작품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것이다." 

 

- 프리다 칼로- 

 

 

 

 

#3 유산의 아픔

 

Frida Kahlo, Henry Ford Hospital, 1932

<출처: www.pinterest.com>

 

 

 프리다 칼로는 유산을 두번 겪게된다. 두번의 유산을 겪은 후 그 아픔을 진실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Henry Ford Hospital이다. 이 작품은 프리다가 유산 후 느낀 고독함과 무력함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뒷 배경으로 그려진 삭막한 공장건물들이 고독한 감정들을 강화시키고 있다.[각주:3]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을 그린 후에 프리다는 여러 대작을 그렸다고 한다. 유산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4 사건의 연속, 그리고 삶의 고통

 

Frida Kahlo, The Broken Column, 1944 

<출처: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IIRz&articleno=2393015>

 

 

 프리다가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경전철과 충돌했을 때 척추와 골반이 부서지고 한쪽 발이 완전히 으깨졌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육체의 아픔을 평생 지니고 살아가야만 했다. 총 36번의 대수술을 거쳤지만 그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그러한 역경속에서 그녀는 아픈 내면을 그림으로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 작품은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하여 수술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을 몸의 성적인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비에로틱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작품적 특징은 1970년 미국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각주:4] 《The Broken Column 이번 전시회의 대표작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소망한다. 

고통을 품고, 

망가진 척추로 걷지도 못하고

드넓은 길에서 멀리본다. 

강철로 된 생명을 부지한다."

 

- 프리다 칼로 - 

 

 

#5 마지막 유작

 

 

Frida Kahlo, Viva La Vida, 1954 

<출처: http://m.blog.naver.com/uzumong/220237194747>

 

 

 

 《Viva La Vida》는 프리다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며, Viva La Vida는 "삶이여, 만세"라는 의미를 지닌다. 육체의 고통과 이별에 대한 아픔으로 점철된 삶이긴 했지만, 그녀는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외치는 '만세'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애착이지 않을까 싶다. Viva La Vida!  

 

 

 

 

    

 

 

 

 

※ 참고 

1. 소개된 작품은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의 전시회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2. 전시관 내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며, 본 포스팅에 게재된 이미지는 이미지 아래의 출처에서 가져왔음을 알립니다.

 


 

 

관련포스팅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_(#2 디에고 리베라 작품) : kangsy85.tistory.com/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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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탈리아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이며 조각가. 특정한 사조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폴 세잔, 야수파, 입체파, 아프리카 미술 등 다양한 미술양식에서 영감을 얻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을 특징으로 하며,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두산백과) [본문으로]
  2. 안드레아 케텐만, 프리다 칼로,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5, 7쪽 [본문으로]
  3. 앞의 책, 37쪽 [본문으로]
  4. 우성주, 프리다 칼로, 타자의 자화상, 이담, 2011, 234-23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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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hunger, 2008)_ 옳다고 믿는 것에 목숨을 걸수 있는가

2016. 6. 2. 17:01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감독: 스티브 맥퀸

주연: 마이클 패스밴더

 

 

 

헝거(hunger, 2008)는 메이즈 교도소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는 한 남자, 바비 샌즈(Bobby Sands, 1954.3.9~1981.5.5)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실제 바비샌즈는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PIRA)의 조직원이었고, 교도소에서 정치범 지위의 회복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한 지도자이다.[각주:1] 제목 'hunger'는 단식투쟁을 의미하는 'hunger strike'를 줄여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헝거는 고정된 시각과 롱테이크 장면, 그리고 배경음악의 배제 등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술적 순수함을 회복시키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들이다.[각주:2] 

 

 

영화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부에서는 수감자들의 저항과 교도관들의 제압, 2부는 단식투쟁 선언, 3부는 단식투쟁 과정을 다루고 있다. 1부는 수감자들이 죄수복 착용과 샤워를 거부하면서 교도관들에게 격렬하게 맞서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바비 샌즈이지만 1부에서는 교도소의 교도관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영화의 교도관이 다친손을 세면대에서 씻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그 장면은 의아하기만 하다. 그가 누구인지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교도관의 다친손은 저항하는 수감자들을 제어하기 위한 '폭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초반 카메라는 줄곧 교도관을 따라다닌다. 이를 통해 느낀것은 저항하는 자들을 폭력으로 제압해야만 하는 교도관의 삶도 늘 긴장상태라는 것과, 어찌됐듯, 그들도 자신의 직업의 신념에 따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2부는 바비 샌즈와 신부의 16분간 이어지는 대화장면이다. 여기서 바비샌즈는 자신의 요구들이 권력자들에게 계속 묵살당하자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목숨을 건 단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신부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신념의 확고함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부의 모순된 삶을 지적한다. 이부분의 내용자체도 전체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고정된 시선으로 16분간 진행된 롱테이크 장면은 신선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지루했다. 16분간 영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술적 순수함을 회복시키는 위한 수단으로서 롱테이크 기법이 관객의 몰입도를 저하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과연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측면에서 효과적일까'라는 질문이 생기기도 했다. 어차피, 감독도 '영화'란 매개체를 통해 어떠한 주제를 관객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3부는 바비 샌즈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단식하는 과정이다. 그는 단신하면서 자신의 몸을 가눌 힘조차 없어지고,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다. 이 과정에서 대화는 거의 없으며, 주로 그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거나 듣는 장면들로 영화는 전개된다. 간간히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도 삽입되어 있다. 감독은 바비 샌즈가 단식하면서 겪는 과정, 즉 몸의 변화나 정신적 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촬영했다. '사실주의'의 극대화라고 할까.

 

 

무튼 예술영화를 많이 본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계속 전개되면서 집중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가했으며, 영화를 본 후 메시지가 명확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러했다.

 

 

 


  1.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B%B9%84_%EC%83%8C%EC%A6%88 [본문으로]
  2.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42800.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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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바다 _ 마종기

2016. 6. 1. 22:3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myblueday.tistory.com





알렉산드리아의 바다 



                                  마종기 




단 하루뿐이었다. 

지중해의 가벼운 물이 나를 둘러싸고 

해안에 기댄 호텔로 안내한 저녁, 

빛바랜 천 년 소음이 먼지에 젖어 

눅눅한 도시가 절반 정도만 보였다. 

나이 들수록 오래 생각하지 말라고

너무 길면 걷기가 힘들어진다고 

그 여왕은 해변을 걸으며 말해주었지.



잠을 잘 자야 잊는 힘도 생긴다. 

모래 위에 남겨둔 운명은 밀물이 지우고 

수줍게 고개 숙인 해안의 석양도 

잔잔하게 번지는 핏빛의 소식이 될 뿐, 

외로운 자만이 쉽게 털고 떠날 수 있다. 



지중해는 그 옛날부터 기다렸지만

이번에 만난 도시와 바다 사이에는 

불투명한 역사가 쓰레기 되어 병들고 

낡은 돌층계에서는 노래가 갈라지고 

호텔의 틈새 그림자만 마른 인사를 한다. 



목요일 그 하루저녁만이었다. 

늦더위와 파도 소리와 그 앞을 지나는

이집트의 허름만 중년들만 살아 있고 

기원전의 등대나 지진으로 무너진 도서관은 

역사의 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챙긴다. 

추억인 양 한숨 쉬는 먼 알렉산드리아, 

아직도 답신은 도착하지 않고 

그해의 밤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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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 군인이었다.

2016. 5. 30. 22:3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일병 강상율, 2006

 

 

 

군대시절을 되돌아볼때, 고집이 세고 모난 성격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선임한테 한 대도 맞지않고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대적 행운아라고 할 수 있겠다. 훈련병에 입대할 즈음 군내에서는 '녹색병영문화'라는 구호아래 폭력을 근절시키고 병사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군내 높은 지위를 가지신 분들이 하급부대로 녹색병영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명령들을 하달시켰다. 참 운좋게도, 나는 연대 본부에 배치를 받았고, 연대 본부의 특성상 상급자들의 명령에 신속하게 복종해야 했다. 고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녹색 병사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등병 강상율은 누워서 TV를 시청했고, 축구할 때 공격수로 뛰었으며, 중대장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가히 군대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군기가 덜 든 이등병은 사고를 치게 된다. 그 첫번째 사건은... 바로, 이등병이 TV 채널을 제멋대로 바꾼것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나는 1소대 이등병이었으며, 동기를 보기 위해 3소대로 향했다. 동기는 군기가 제법 들어 TV 앞에 각을 잡고 앉아있었다. 내가 3소대로 들어갔을 때, 3소대 선임들은 눈을 감고 자신의 관물대 아래에 누워있었다. 나는 그들이 자고 있을것이라고 '추정'했다. 내무반 턱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동기와 함께 리모콘을 보았고, 나는 리모콘을 얼른 잡아 동기 옆에 앉았으며, 그리고 리모콘의 채널버튼을 재빠르게 눌렀다. 물은 이미 엎어졌다...그 때 자고 있다고 '추정'했던 3소대 선임들의 입에서 욕들이 폭포수처럼 터지기 시작했고, 갈길을 잃은 맹렬한 욕들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나는 말그대로 얼어버렸다. 허나, 그날 이등병 강상율은 맞진 않았다. 전방위적이고 무자비한 쌍욕을 듣기 했지만 말이다. 

 

 

그 사건을 시작점으로 여러가지(?) 사건들을 일으켰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무사히 이등병 시절을 지났다는 것이다. 신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이등병 시절은 하루하루가 '은혜'의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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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차] 티스토리 초대장 배포 (5장) - 참고사항 필독해주세요.

2016. 5. 30. 21:36 초대장 배포


Soli Deo Gloria


 

출처: itunes.apple.com




티스토리 블로그를 개설하고자 하는 모든 분들께.

 

안녕하세요티스토리 블로그(kangsy85.tistory.com) 운영자 Sharing입니다. 벌써 블로그를 운영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블로그에 써 내려온 제 삶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매 번 포스팅 할 때마다 적잖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 하나 하나의 글들이 모여 지금 제 블로그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습니다.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가거나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면 쉬이 사라지지만, 구체적인 글로써 기록하면 하나의 자산이 됩니다. 기록의 중요성, 블로그 운영을 통해 한번 더 깨닫습니다. 기록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블로그 운영을 권해드립니다.

 

 저는블로그 예찬론자 입니다예찬글(http://kangsy85.tistory.com/75)을 한 번 읽어보시면 블로그 운영을 통해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아시게 될것입니다그럼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티스토리 초대장을 배포 하도록 하겠습니다.

 

티스토리 초대장 5

 

신청 기간: 2016/05/30~2016/06/01(17:00 PM)

 

 

 

신청시 아래 사항을 참고하여 작성 부탁드립니다.

 

경 고

  다른 블로그에 초대장을 신청하신 분은 제발 신청하지 마십시오.

 

1. 초대 신청은 비밀 댓글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2. 블로그 개설 이유와 앞으로 운영해나가실 방향에 대해 적어주시길 바랍니다 

3.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시길 바랍니다.

▶ 초대장은 이메일을 통해 발송되므로이메일 주소를 적지 않으시면 초대장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신청기간이 끝나고 나서운영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5명을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5명보다 신청자가 적으면선정자 공지 후 바로 이메일로 초대장 배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티스토리 블로그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분들신청해주십시요.

 

그럼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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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에 대한 생각의 실타래 _ 무엇이 더 유익한가.

2016. 5. 30. 21:17 신앙/교회



조아진, 멍-생각의 실타래, 2013

53.1 x 65.3cm_mixed media <출처: http://blog.naver.com/31910z>





생각의 실타래를 풀자.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따라서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나눠, 교회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것 같다. 자, 시작해보자. 



1. 긍정적인 측면 


1) 제도


긍정적인 측면은, 무엇보다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교회를 목표로 교회의 한몸됨을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참된교회의 3가지 표지인 말씀의 순수한 전파, 성례(성찬식+세례식)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이행을 준수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회원 제도, 제한성찬, 권징과 치리가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주님이 피로사신 거룩한 교회를 보호하고 한몸된 교회를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회원제도는 현대교회의 무너진 세례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회원(일반적으로 준회원)의 1)신앙고백과 2)삶의 열매를 근거로 정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정회원의 자격여부는 목회자 및  직분자가 판단하며, 준회원이 정회원이 되는 기간은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 


2) 성도 


복음을 배우려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성도들이 많다는 점과 교회론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성경적 교회를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2. 부정적인 측면 


1) 제도 


정회원 제도로 인해 우려되는 점은 첫째, 정회원과 준회원, 그리고 방문자를 나눔으로써 각 회원의 역할과 참여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회원들을 주축으로 교회의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지며, 정회원의 특정한 모임에 준회원과 방문자는 참여할 수 없다. 이로 인해 회원간 위화감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회원에게 사역과 역할이 치중됨으로써 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둘째, 정회원이 정회원답게 행동하지 못함으로써 정회원과 준회원의 실제적 차이가 없어지게된다. 그럼으로 인해 정회원 제도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왜냐면 준회원이 정회원답지 못한 정회원의 행동과 삶을 직, 간접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정회원의 기준이 하향되고 그 삶 자체를 희망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안들을 무엇이 있는가. 

- 정회원의 기준을 상향조정한다.

- 정회원들에게 강제적 의무를 부과한다. 

- 정회원의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 자격을 박탈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들을 정회원제도가 시행된 후 도입할 경우에는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관계가 감시자와 피감시자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고 본다.  


현실에서 성경이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를 온전하게 이룰 수는 없다고 본다. 결국 쟁점은 성도 개개인이 한몸된 성경적인 교회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힘쓰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래, 결국 살아내느냐의 문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2) 교회의 방향성

교회마다 교회가 추구하는 사역의 방향성이 있다. 주로 담당 목회자의 신앙 가치관과 사역의 성향이 교회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된다.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가 집중하는 사역의 방향은 국내 목회자와 평신도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이 내가 추구하는 사역의 방향성(해외선교와 약자를 위한 목회)과 다르다. 여기서 고민되는 점은, 하나님 섭리의 측면에서 '현재의 교회로 부르신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삶을 방향성을 수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마음이 가는 사역의 방향성을 따라가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물음은 나를 현재의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더욱 유익한가. 나를 위한 유익인가, 아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유인인가. 모든 것이 가하다. 결국 내가 올바른 믿음안에서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하게 결정하는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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