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생애 _ 마종기

2016. 8. 9. 22: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chulsa.kr>




가을의 생애



                                마종기 



젊은 날 실패한 긴 언약이 

가을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던 

한바탕 구절초 꽃 더미로 왔다. 

오늘은 그새 나이든 꽃을 만나 

술 한잔 나누며 간청하리. 



어쩌다 절벽에 서서 센 척도 했지만

불길의 속내를 힘써 다듬기도 했다고 

내 증인으로 나서달라 애걸하리. 

화사했던 밤들도 허영만이 아니었고 

때때로 실수처럼 향기도 품었다고 

확실하게 증언해달라 부탁하리. 



서로를 뒤돌아볼 나이도 되었으니 

이제는 함부로 손댈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 묻어나던 은근한 향기, 

구절초도 회오리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키를 낮춘 

가을이 알려준다.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꽃, 

언덕이 비어 있어 떨고 있지만

네 살이 살아 있어 추운 거다.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예술만이 마지막까지 

죽음과 맞선다고……

한판 승부까지 간다고……



꽃이 가슴을 진하게 잡으며 

말을 남기려다 쓰러진다. 

꽃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었다. 

속사정 알고 있는 구절초 얼굴이 

두 겹 세 겹의 물결로 보이고 

친하던 수호천사가 미소하면서 

가을의 끝막에서 깨어난다. 



몇 줄의 언어가 머리를 털며 

홀연히 내 앞에서 빛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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