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6. 21:1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kr.freeimages.com
서 있는 종이
마종기
한밤에 잠자다 어둠 속에서 불현듯
화려한 시 몇 줄이 나를 흔들어 깨워
불도 켜지 않은 채 침상 종이에 썼던 글.
아침에 잠 깨어 밤새운 종이를 보니
설친 글자 하나 보이지 않는 백지였네.
죽어버린 볼펜이 억울해 눈여겨보아도
희마한 분홍색만 흩어진 자국으로 보인다.
그래, 이렇게 연한 색을 어디서 본 적이 있지.
그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던 때였나,
열심히 보면 피가 조금 밴 부끄러움의 색,
내가 더 살기로 한 곳에서 맴돌고 있던 색,
비굴한 계절이 말 걸어오면 주춤거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대다가 남아 있던 색.
그 색깔 번져 있는 온몸 투신의 시 한 줄,
어딘지도 모르고 입술 터진 길을 헤맨다.
빈 종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쓰고 남은 자리에도
무심히 지나간 이에게도 말해주어야겠다.
아무리 눌러 써도 이해되지 않는 종이에
숨어서 밤새워 응시하며 서 있는 종이에
얄팍한 의심 겨우 지탱해주는 녹슨 시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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