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3. 18:05 신앙/감사(感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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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감사(6~8월) (0) | 2020.08.28 |
일상의 감사(3월) (0) | 2020.03.24 |
일상의 감사(2020년 1-2월) (0) | 2020.02.26 |
2019년 7월 4째주 감사 제목 (0) | 2019.07.25 |
2020. 4. 19. 16:37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구속받는 것을 싫어한다.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설명해야 되나. 신앙심이 두터워지기 시작하면서 세워놓은 삶은 목표와 기준치는 꽤 높았다. 신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측면에서 꽤 높은 기준을 세웠다. 목표 지향적인 인간인지라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나아간다. 그러하다 보니 '높은 신앙심을 가진 좋은 사람'이라는 틀에 나 자신을 구겨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나를 옥죈 탓도 있으리라.
모든 것에 이유는 있을 수 있다만, 이유를 명확하게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구속받으면 되레 틀을 부수고 나오려는 성향은 권위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유분방함 때문이지 잘 분간이 되진 않는다. 삶을 되돌아보건대 기본적으로 개인으로서의 자유는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자유분방하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자유는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삶의 주체로서의 자유다. 아마도, 개인의 선택과, 그에 따른 자유와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내게 미친 영향이지 않을까, 잡념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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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8. 23:0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누나는 내게 참 고마운 존재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분명 부모님의 보살핌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누나의 든든한 후원과 보살핌이 있었다. 삶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보다 우리 누나가 먼저 떠오른다. 늘 책을 붙들고 있는 누나를 따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나의 노트에 적힌 시를 보면서 시를 읽는 재미를 깨달았다. 누나가 쓴 수려한 글을 보고 글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어줍잖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영어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도 누나가 다니던 영어 학원을 소개해줬기 때문이다. 대학교 신문사도 누나의 권유로 시작했고, 선교단체로 누나가 하라고 해서 잠시 참석했던 것이다. 삶의 여정을 되새겨보면 누나가 했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라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새삼 느끼는 건 누나가 내게 끼친 영향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늦은 나이까지 맘 놓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누나가 사회인으로서 일찍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우리집안 형편상 누나의 학비까지 마련해야하는 상황이었다면 대학원 공부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누나는 좋지 않는 집안 형편에도 바르게 잘 컸다. 내가 사고를 쳐서 집안을 시끄럽게 한 적은 많지만 누나가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일은 없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공부를 곧 잘했고, 아니, 공부를 엄청 잘했고, 다른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때가 많았다. 음악, 미술, 운동,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고 대학생이 되어 직장인이 될 때까지 한번도 어그러지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재다능한 누나를 시기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어렸을 때는 무엇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별로 없었던 터라 누나는 나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지, 전혀 다른 수준의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누나는 내가 비교할 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우리 누나'와 같은 누나를 보지 못했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정말 우리 누나처럼 동생을 잘 챙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세월이 지나 누나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누나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줄었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져서 왕래가 더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누나의 존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은 아직도 유효하다. 누나한테 받은 것이 많은데 아직 제대로 해준 게 별로 없다. 기회가 될때마다 조금씩 더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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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6. 23:2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한번 휘청거리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담담해지는 시간이 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해 누구도, 어떤 환경도 탓하지 않고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단해지는 기분이기도 하다. 정말 단단해졌는지는 다시 어려운 일을 만나봐야 알겠지만, 이번 일은 잘 거쳐왔다는 생각이 크다. 아팠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누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나 자신이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신념을 흩트리지는 말아야 한다, 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게, 나다운 모습이란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Good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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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5. 17:3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삶을 진지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진지하고도 사소하며 유치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자가 더 편했던 것 같다. 나의 예민함을 감성적인 여자들이 더 받아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난 여자들이 더 편했다. 20대 시절, 이성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시간 지나고 우리가 결혼 적령기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결혼했을 때, 친구였던 우리의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란 질문과 함께 말이다. 멀어지는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며 나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내 아내가 아무리 친구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친하게 지내면 어떨 것인가... 나는 마음이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지극히 나의 관점이긴 하다만, 내가 싫어하는 건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생각 끝에 결론 내린 것은 결혼한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결혼한 후의 관계는 나름대로 정해놓은 적정선 이후로 반드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와의 약속이라면 깰 수 있다만, 관계가 얽힌 약속이라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키는 법이다. 그렇게 많은 이성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과거 관계의 무게는 축의금으로 대신했다. 참, 이해타산적이지만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은 높이 살만하다고 늘 생각한다.
결혼한 이성 친구 중에 연락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있긴 하다. 허나, 내가 먼저 연락하는 법은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나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친구를 잃어갈수록 감당해야 할 고독함이 증가한다만, 선택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늘 생각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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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5. 16:09 책과 글, 그리고 시/영작(英作)
I used to feel nervous when I meet a new person. At that day, I had been feeling nervous since morning. I prepared to go out for a blind meeting. I went out 1 hour before an appointment, and I arrrived at the restaurnat where we met 30 minutes before the appointment. I would rather arrive early for the appointment than on time.
I was sitting idly with a little nervous. After 20 minutes, a woman who took a mask was walking into the restaurant. I thought that the woman was the very one I waited for. She gave me a simple image at first. As time went, I has got that she had a big smile. We could talk about interesting subjects that we were familiar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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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3. 08:06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이재만 역
고요한 확실성 안에서 편히 쉬어라
다시 읽는 행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읽는 행위에 더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많은 정보들이 나를 대변해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정보의 축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시간들이 있었다. 분명,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긴 했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가장 큰 유익은 사고하는 힘이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맞추어 보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저자에게는 큰 공감을 얻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저자에게서는 다른 관점의 통찰력을 얻었다.
습득한 것을 별다른 노력 없이 유지하는 것과, 단순히 일시적인 시작점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토대 위에 지식을 견고하게 쌓아가는 것은 아주 다르다.
책을 읽는 행위는 공부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지의 표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부하는 삶》은 다시 책을 읽을 동기를 부여했다. 공부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 되새겼다. 무엇을 위해 공부했는가. 무엇을 위한 지식 습득이었는가. 과연 나는 지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찮은 생각들은 머리만 아프게 하지만, 의미 있는 생각들은 나를 성장시킨다. 책을 읽음으로써 떠오르는 생각들은 분명 유의미하다. 공부하는 자의 삶을 계속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만, 지성인은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함 속에서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으나, 고립과는 무관된 일이다.
고립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 자신의 위대함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감을 느끼면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고 익히는 자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습득한 지식이 단편적인 하나의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맞닿아 실질적인 결과물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11쪽
세르티앙주는 저술에 필요한 노트를 동일한 크기의 메모지에 적어두고, 각각의 메모지에 주제에 상응하는 번호를 매기고, 같은 번호가 매겨진 메모지들을 클립으로 묶어서 분류하라고 조언한다.
13쪽
세르티앙주는 공부를 위해 절제하고, 신체를 돌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27쪽
당신이 빛을 운반하는 사람으로 지명된다면, 신께서 당신이 운반하기를 기대하는 그 어슴푸레한 빛이나 불꽃을 감추면서 가지 마라.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가져오는 삶의 열매를 사랑하라. 공부에, 그리고 공부를 유익하게 쓰는 데에 당신이 가진 시간과 마음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바쳐라.
36쪽
공부를 하도록 소명을 받아 성스러워진 지성인은 결코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지위가 무엇이든, 혼자 있든 은둔해 있든 지성인은 개인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고독은 활력을 불어넣지만, 고립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메마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69쪽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은 자기 신체의 적이기에, 머지않아 자기 영혼의 적이 된다. 금욕은 공부에 꼭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도 그라트리 신부가 말한 '선명한 시야의 상태'에 우리를 이르게 할 수 있다. 육욕에 복종한다면, 정신이 되어야만 하는 당신은 육체가 되는 길 위에 서는 것이다.
75쪽
시간과 사유, 자원, 역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과의 그물에 뒤엉키지 마라. 관습을 고분고분 따라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안내자가 되어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 지성인의 신념은 그가 달성하려는 목표와 일치해야 한다.
82쪽
은신처는 정신의 실험실이다. 내적 고독과 고요는 정신의 두 날개다. 세상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위업은 적막한 곳에서 준비되었다. 앎의 개척자, 영감을 받은 예술가, 평범한 사람, 신인, 이들 모두는 고독, 침묵의 삶, 밤에 찬사를 바쳤다.
85쪽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켐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항상 더 왜소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이 생각을 더 밀고 나아가면, 더 왜소한 인간이 되지 않더라도 자아가 더 왜소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군중에 섞일 경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전에 스스로를 붙잡아야 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다수의 이질적인 자아에 짓눌려 자기인식을 잃어버린다.
145쪽
당신은 당신 자신을 공부해야 하고, 당신 삶이 어떤지, 삶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을 촉진하고 배제하는지,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위해 삶이 무엇을 제안하는지 고찰해야 한다.
144쪽
무언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마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력을 다하고, 계속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정력적으로 하라. 반쪽짜리 공부와 반쪽짜리 휴식은 공부를 위해서도 휴식을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
195쪽
「고린토이늘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에서는 신앙이 제일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기도를 하다가 계시를 받았다면 조용히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관한 아퀴나스는 이렇게 성찰한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설령 아주 사소한 가르침이더라도 거부해선 안 된다." 이 성찰은 바울의 다음 조언과 호응한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서로 낫게 여기십시오" 어떤 순간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진리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 빛을 받는 사람이다.
213쪽
지나치게 읽는 정신은 양분을 공급받기는커녕 오히려 둔해지며, 서서히 성찰하고 집중하는 힘을 잃어버려 결국에는 산출하지 못한게 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정신은 내면을 향해 점점 더 외향적이 되고, 밀물 썰물처럼 흐르는 관념ㄴ과 내면의 이미지에 열렬히 집중하며 그것들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무절제한 기쁨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 기쁨은 지성의 기능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유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 혹은 단어, 문장, 장, 책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실려가는 것만을 허락한다.
242쪽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는 것이다. 우리 정신의 임무는 반복이 아니라 이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읽는 것을 '붙잡아야' 하고, 몸으로 흡수해야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 저자를 본받을 수도, 저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 그것을 다시 표현하도록 정신을 재촉해야 한다. 지식의 요지를 우리 자신의 쓸모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287쪽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또 쓰다보면 조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노력하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제와 글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써야 한다.
289쪽
앞에서 글 쓰는 기술은 일찌감치 익히기 시작해 오랫동안 익혀야 하며, 이것이 점차 정신의 습관이 되고 문체를 이룬다고 말했다. 나의 문체, 나의 펜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영원한 진리에 관해 이해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내 존재의 자질, 내면의 성향, 살아 있는 뇌의 기질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진화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다."
팀 켈러의 일과 영성(Faith&Work) _ 팀 켈러 (0) | 2020.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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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 ) _ 팀 켈러 (0) | 2020.12.13 |
철학이 필요한 순간 _ 스벤 브링크만 (0) | 2020.03.28 |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_ 팀 켈러 (0) | 2020.03.26 |
다시, 책으로 _ 매리언 울프 (0) | 2020.03.25 |
2020. 3. 28. 16:5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스벤 브링크만 지음 / 강경이 옮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왜 뭔가를 바라거나 행해야 하는가? ······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나를 기다리는 필연적인 죽임이 앗아 가지 못할 그런 의미 말이다'
- 톨스톨이 -
철학은 막연하게 어렵고 재미없게만 느껴진다. 중·고등학생 때 윤리 수업 시간에 고대 철학자들의 복잡한 사상과 이념을 공부하면서 ‘이 사람들의 사상과 개념이 내 삶에 무슨 소용인가’라는 불만과 푸념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철학은 과연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의 저자 스벤 브링크만은 철학은 우리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은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삶에는 어떤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더 실존적인 의미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놀이, 사랑, 윤리 같은 가치는 쓸모없을 때, 그러니까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일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22쪽).
다른 시대에 살았던 고대 철학자들의 10가지 관점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책에서 다루는 10가지 관점은 '선, 존엄성, 약속, 자기, 진실, 책임, 사랑, 용서, 자유, 죽음'이다. 단어만 봐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저자는 각 관점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대표적인 명언과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실용적인 교훈을 전달해준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철학적 사고의 기반을 마련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다시 읽어볼 문장들
저는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한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은 구원이라는 종교적 목표를 자아실현으로, 또 고해성사와 성직자의 조언을 치료와 코칭으로 바꾸었지요.
제가 심리학을 비판항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다양한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자기 자신을 찾고 계발하도록 돕는 일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을 윤리적, 사회적으로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중략> 심리학은 우리가 자기 계발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 적어도 심리학의 일부는 우리 사회의 도구화 현상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더 나아가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을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합니다.
19세기 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종교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진 '신의 죽음'이라는 현상과, 그로 인한 의미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응답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1강.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효용성과 즐거움을 토대로 한 우정은 진정한 의미의 우정이 아닙니다. 오로지 도구적인 관점에서만 그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고귀한 우정은 효용성이거나 즐거움 같은 이익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달리 말해, 고귀한 또는 진짜 우정은 그 자체로 좋습니다.
윤리적인 삶이 이윤만 좇는 삶보다 더 옳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성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이지요(생각해볼 점: 근거가 무엇인지...)
2강.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존엄성이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내가 자유의지를 발휘애 처음 할 행동은 자유의지를 믿는 일이 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존재가 당신의 도덕법칙 안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3강.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발달심리학은 타인에게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사살이 아이를 책임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4강.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우리는 자아발달 과정에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반성적 자아가 기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기 성찰만 해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성적 관계로서의 자기 개념이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여기에 자기 관계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강조한 테일러의 의견까지 결합하면, 우리는 자아의 도구화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방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의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미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5강.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이었지만 놀랍게도 개인적으로는 악마 같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으며, 자신은 그저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동기는 악의가 아니라 사유 없는 복종이었던 것입니다.
6강.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로이스트루프가 '도덕적 요구'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는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근원적인 윤리적 요구에서는 그 어떤 사법적, 도덕적, 인습적 규칙도 끌어낼 수 없다. 그것은 침묵한다···. 사법 절차나 도덕, 인습은 윤리적 요구가 통과해 퍼져나가는 프리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인습은 윤리적 요구를 보여주는 동시에 굴절시킬 수 있다. "
7강.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세상을 헐벗고 의미 없는 '즉자존재'와 인간의 의식을 가리키는 '대자존재'로 분리했습니다. 즉자존재란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는 존재를 말하고, 대자존재란 대상을 의식하고 그렇게 의식하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는 존재 방식을 뜻합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하는데요. 우리가 즉자존재로서 이미 정해진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대자존재로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삶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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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_ 하완 (0) | 2019.02.19 |
2020. 3. 26. 22:09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팀 켈러 지음 / 최종훈 옮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초기에는 중국과 몇몇 나라의 문제로 국한되는 듯했지만,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내몰고 있다. 과학과 기술로 인해 인간의 삶은 진보했지만, 백신 하나도 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현 상황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절실히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이처럼 뿌리 깊은 “내면의 욕구”가 있으므로, 어떤 문화든 구성원들이 고난에 맞서게 돕든가, 아니면 신뢰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든가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 한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는 고통의 문제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고, 그 시대마다 세계 위대한 사상가들과 신앙가들은 고난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고난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은 여러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윤리적 관점에서 고난은 인생에 대한 그릇된 행실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하게 살면 고난은 자연스레 줄어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자기 초월적 관점에서 고난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본다. 고난에서 해방되려면 이 세상과 덧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초월적인 관점으로 고난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다. 또 다른 관점은 숙명론적인 관점이다. 고난은 운명이기 때문에 거를 수도 없다. 고난이란 절망적인 운명에 맞서 물러남 없이 당당하게 싸우는 것은 미덕이자 영광이다.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관점에서 고난은 우연의 산물이다. 고난을 통해 제각기 삶의 의미를 창출함과 동시에 고난을 통해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난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는 세속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고난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p. 53). 고난의 의미와 목적이 있긴 하지만, 고난을 당하는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고난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기 필요한 기독교 네 가지 교리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다. 첫째, 전능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발적인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사실은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르게 잡아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난을 다 받으신 후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유익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첫째, 고난을 견디어 이겨낸 경험은 다른 고난을 이겨내는 근간이 될 수 있다. 둘째, 고난을 통해 주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수 있다. 셋째, 고난을 통해 삶의 우선순위와 철학을 바꿀 수 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진정으로 슬퍼하지만, 소망 가운데 깊이 잠깁니다.”
- 키프리아누스 -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이 무수히 많다. 고난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또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개미가 인간의 생각을 엿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난을 해석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께 더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러하기에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건히 믿고 의지한다면 신자의 믿음은 분명히 성장할 수 있다. 신자라면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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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5. 21:3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디지털 기기로 글을 잘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의를 기울여 책을 읽어도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형식에 익숙해진 탓일까. 중요한 문서를 읽을 때는 항상 인쇄를 해서 줄을 그어가며 읽는다. 구태여 관련 서적을 사서 읽는다. 종이란 질감이 주는 편안함과 책을 소유했다는 만족감이 마냥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은 집이다. 당신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실재하는 물리적 사물이다
개인적 취향을 차치하고서라고 디지털 기기로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스마트 기기가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읽기 도구는 종이책에서 디지털 기기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무거운 종이 책을 가방에 꾸역꾸역 넣고 다니는 시대는 지나갔다. 디지털 기기에 무수한 디지털 문서를 넣고 다닐 수 있다. 편리함과 가벼움, 이 시대의 흐름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정말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주의는 보다 짧은 간격으로 쪼개지고 있으며, 이것은 아마 더 깊은 사고를 위해서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책이다>는 변화하는 우리의 읽기 방법에 대한 염려로부터 시작된다. 디지털 방식의 읽기에 익숙해진 뇌는 스크린 위의 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받아들이는 정보는 많을 수 있으나 글에 대한 이해력과 집중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지발달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유아기 시절에 디지털 기기에 노출된 아이는 상대적으로 집중력과 이해력이 낮아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의 흐름상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아이들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시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부모는 유아기 때부터 아이에게 직접 글을 읽어주어 아이의 언어 신경망을 폭넓게 활성화시켜주어야 한다. 이때 언어의 수용적 측면뿐 아니라 언어 학습의 표현적 측면의 뒷받침하는 뇌 영역에서도 변화가 함께 일어난다(p. 200). 그러면 디지털 기기의 사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양손잡이 읽기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디지털 방식의 읽기 방법은 뇌의 멀티태스킹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의 인지가 발달한 상태에서 뇌의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디지털 방식의 읽기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집중적인 읽기와 포괄적인 읽기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속도가 우리를 계몽으로 이끌고,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 바로 반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속삭이는 심히 유혹적인 환영 말이다. ˙˙˙˙˙˙ 읽기는 관조의 행동이다. - 데이비드 울린
온라인 읽기의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시 종이 책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깊이 있는 종이 책 읽기를 통해 우리의 사색능력을 강화시키고 비판적 사고를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갈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애하는 좋은 독자 여러분, 천천히 서둘러, 집으로 오세요.
성공을 빌며,
매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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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4. 23:16 신앙/감사(感謝)
1. 부서에 인력을 충원해주심에
2.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시간을 잘 사용하게 하심에
3. 다시 책을 집중해서 읽게 하심에
4. 다른 사람을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심에
5. 지역 식구들과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게 하심에
6. 맘에 드는 스피커를 구매할 수 있게 하심에
7.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하심에
8. 코로나19로 상황이 있지만 그 가운데 계속 일할 수 있는 직장을 허락하심에
9. 부모님과 누나 가정을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심에
10. 후배에게 친절하게 서무 업무를 가르쳐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심에
11. 다시 기도하게 하심에
12.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때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하심에
일상의 감사(6~8월) (0) | 2020.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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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감사(4~5월) (0) | 2020.06.03 |
일상의 감사(2020년 1-2월) (0) | 2020.02.26 |
2019년 7월 4째주 감사 제목 (0) | 2019.07.25 |
2019년 6월 2째주 감사제목 (0) | 2019.06.15 |
2020. 3. 15. 23:3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젊은 날, 들개처럼 헤매며 살다가 낯선 땅에 쓰러진다 해도
내가 한때 강제로 잃었던 자유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유는 좀 추운 구석이 있다.
아무 데나 적당히 기댈 수 없어서일까.
- 마종기 시집 《마흔 두 개의 초록》 중에서 -
새벽에 우는 사람 _ 박진성 (0) | 2021.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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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_ 엘렌 바스 (0) | 2021.03.24 |
세상 끝 등대 3 _ 박 준 (0) | 2019.02.12 |
84p _ 박 준 (0) | 2019.02.11 |
미신 _ 박 준 (0) | 2018.11.21 |
2020. 3. 14. 18:46 책과 글, 그리고 시/독서 목록
인생의 과업으로서 글의 길과, 글을 알고 사랑하는 길은
사물의 정수로 가는 길인 동시에 앎의 정수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
앎인 사랑, 사랑인 앎에 필요한 것은 고요한 눈이다. - 존S. 던 -
- 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중에서 -
코로나19 확진자가 8,000명을 넘었다. 집 밖에 안전지대는 없다. 집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보고 듣고 읽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익한 것은 읽는 것이다. 며칠간 읽고 싶은 책을 줄줄이 주문했다. 책은 꼭 사서 읽어야 한다는 고집은 가난하던 대학생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막무가내 고집이었다. 밥은 못 먹더라도 책은 읽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일도 책을 사는 일이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서 손수 샀던 책을 고이 펴서 읽었던 추억은 책을 사랑하는 감정의 근간이다. 책은 내 삶의 기반이자 자양분이다. 아마도, 내 삶은 읽는 행위로부터 성장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간다. 새로운 책들이 하나씩 책장에 꽂힌다. 다시, 책이다.
사회과학
- 볼프강 울리히, 「모든 것은 소비다」, 김정근·조이한 역, 문예출판사.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역, 한길사.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문재 역, 현대지성.
인문과학
-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김경원 역, 원더박스.
- 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전병근 역, 어크로스.
- 김홍식, 「우리말은 능동태다」, 그림씨.
종교
-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최종훈 역, 두란노.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김태형·장혜원 역, 토기장이.
문학
-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역, 민은사.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역, 민음사.
경제
- 채상욱, 「다시 부동산을 생각한다」, 라이프런.
2023년 상반기 독서 목록(1~7월) (0) | 2023.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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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독서 목록 (0) | 2021.05.23 |
2019년 독서 목록 (0) | 2019.02.26 |
2018년 독서목록 (0) | 2018.02.01 |
2017년 독서목록 (0) | 2017.01.09 |
2020. 3. 11. 22:0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지독한 어려움을 겪고 나면 웬만한 어려움은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다.
지난 며칠간 골머리를 앓게 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시간을 내어 생각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일이긴 했는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맘이 내키지 않았다. 시작하면 나름대로 세워둔 기준을 맞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내심 싫었다. 깐깐한 나를 알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는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고단함 말이다.
마냥 내버려 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일을 시작했고 일이 잘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대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발발 동동 구르다가 새벽 공기를 맞으며 기숙사로 힘없이 되돌아갔던 무의미한 날들이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인생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던, 그 고달팠던 연구원 시절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일이 같잖아 보이기도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지나왔던 고단한 시절에 비하면 지금 이따위 어려움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누나는 내게 참 고마운 존재다 (0) | 2020.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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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0) | 2020.04.06 |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0) | 2020.02.27 |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0) | 2019.12.25 |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다 (0) | 2019.11.23 |
2020. 3. 4. 21:59 카테고리 없음
1. 업무 인력이 줄어들어서 상대적으로 업무량이 늘어났음에도 상황을 탓하지 않게 하심에
2.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를 허락하심에
3. 집에 오랜 시간 있으면서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심에
4. 언어의 무게를 생각하게 하시고 신중하게 말을 하게 하심에
5. 조금씩 업무를 배워가게 하심에
6. 더욱 기도하게 하심에
7. 평안히 머물 수 있는 숙소를 허락하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