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4. 10:26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왜 화가 났을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 이주 관리 팀장 때문이었을까. 싸움은 언제나 쌍방이다. 한쪽만 잘못해서는 큰 싸움이 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이주관리 팀장이 언성을 높였는지.
분노란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잘못 되었다고 느낄 때 적극 반대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그 일에 반대합니다"를 당신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78쪽 -
이주관리 팀장의 언성이 높아진 데는 내가 세대주에게 보상비를 지급하는 근거가 뭐냐고 몰아붙인 탓도 크다. 이주관리 팀장의 입장에서는 본인 이주 전문가이고 늘 해오던 일인데, 갑자기 근거를 이야기하라고 하니 기분이 언짢았을 수도 있다. 언성을 높인건 분명 잘못된 일이나, 그 과정에서 내가 잘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말투가 공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분노의 저변에 깔린 동기를 파악하고 싶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101쪽 -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이주 관리 팀장의 언성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무시하는 말투 때문일까. 감정의 발화 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무시하면서 가르치려는 말투가 나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동등한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이야기하기를 원했던 나로서 가르치려고 드는 태도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평가하는 본성은 다양한 형태의 분노에 존재하는데,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1.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고 '인지'한다.
2. 거기에 '반대 입장'을 치하고 불쾌해한다.
3. '행동'(말 또는 행위)를 취한다.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최소한 장차 행동으로 이어질 만한 암시가 있다.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80~81쪽 -
결국, 맘이 상한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언성을 높인 팀장에게 한 소리를 했다. 전화가 끝난 뒤 팀장은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 아까 일은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웬만하면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데, 오늘은 나도 불편해진 감정을 그래도 드러냈다.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고상하지 못하다, 또는 성숙하지 못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불편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생각이 드는 것은 팀장의 언성이 높아졌을 때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다른 이야기를 전개했으면 감정이 더 불편해질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조금 밀려온다. 어찌 되었든,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는 반복되기에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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