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일과 영성(Faith&Work) _ 팀 켈러

2020. 12. 20. 17:2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 

 

 

직장인은 일주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데 사용한다.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로서 우리가 땀흘려 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적 일뿐만 아니라 세속적 일을 포함한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교 신학의 원류는 모든 노동의 존엄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류를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라고 본다. 
23쪽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고 그것을 지켜보셨다.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인간에게 일을 부여하셨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라.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45쪽

 

 창조때에 아담이 했던 우아한(?) 일에 비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하찮고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일을 해도 세상이 전혀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원하던 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이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수도 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각광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하는 것 자체로, 또는 그 일의 성공과 실패로서 신자로서 일의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

 신자로서 일을 할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선에서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다. 결국, 신자에게 일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저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신앙 공동체와 일터에서)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지 늘 탐색해야 한다. 
275쪽

결국,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 자체를 하찮게 여기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이 드러날 수도 있다. 다만,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

 

20쪽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는 「마음의 습관」이란 기념비적인 책에서 우리의문화의 응집력을 갉아먹어 버린 것을 콕 찍어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lalism)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표현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함께 공유하는 삶이라든지 사회 구성원 전체를 한데 묶는 지배적인 진리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게 했다.

 

21쪽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이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36쪽

톨킨이 기독교 신앙에서 위로와 자유를 찾고 다시 작품을 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하자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경이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 왜 일하고 싶어 하는가?(만족스러운 살믕 사는 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 왜 그토록 일하기가 어려운가?(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

-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 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47쪽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림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52쪽

"일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특히 노동이 죄의 대가로 임한 저주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75쪽

창세기 2장 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창조주는 어째서 손수 작명하지 않으시는가? 창세기 1장에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던 전례에 비춰 보면 짐승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이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켰다. 인간 본성과 기질의 폭을 최대한 확장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문명을 건설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인간은 일을 통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창조 패턴을 활용하며, 공동체를 조직한다. 

 

81쪽

벨라는 일에 담긴 '소명'이라든지 '부르심'의 개념을 회복하며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권력욕이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억할 게 있다. 한쪽에서 명령하고 이편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그 일을 해낼 때에 비로소 소명이나 부르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격이 가르치는 노동관이다. 

 

83쪽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이어야 한다. 

 

87쪽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짓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107쪽

현대 서구문화는 죄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되짚어 볼 생각조차 않으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만 안간함을 쓰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유년기의 경험이 쓸데없는 수치심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을 빚어낸다고 해석한다. 갖가지 즐길 거리들을 잠시나마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선행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란 정체성을 갖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본질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116쪽

직업을 선택하면서 품었던 큰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분야를 잘못 선택했다든지, 그쪽으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든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완벽한 일거리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하게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손 쳐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154쪽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지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현재 직장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위치가 은혜의 소산이라는 얘길 들으면 펄쩍 뛰면서 아무개 학교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고, 학생 때는 물론이고 신입 사원 시절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며, 동기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올렸는지 따위를 침이 마르도록 나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달란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제힘으로 열지 않은 기회의 문들을 통과했다. 열쇠를 쓴 게 아니라 그저 활짤 열린 틈으로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가진 건 하나같이 은혜의 소산이며, 우리 각자에게는 그렇게 수중에 들어온 힘을 마치 제 능력을 사용하듯 활용하여 섬길 자유가 있다. 

 

164쪽

루터는 피조물 가운떼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능력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5쪽

루터는 우상을 세우는 마음가짐과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깨달았다. 

 

174쪽

과학이 발전하고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사회는 종교니, 부족이니, 전통인, 하는 우상들을 끌어내리는 대신 이성과 경험, 개인의 자유 따위를 세계관 전반을 지배할 궁극적 가치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181쪽

하이데거와 닥스뿐만 아니라 자크 엘룰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은 과학기술과 불확실성, 시장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 따위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동조할 수 없으므로 가진 건 오로지 '수단'이나 기술뿐이다. 건전한 인생이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없으므로 저마다 권력을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경쟁만 남는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저리가 없기 때문이다. 

 

182쪽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상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시장 상품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광고 회사의 순진한 먹잇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진단한다. 허다한 작가들도 시장의 가치(소비 지상주의와 비용 대비 효과 같은)가 가족을 포함해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었다고 확신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재화와 용역을 분배하는 유용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5쪽

상품이 주는 유익을 홍보하는 데서 소비자들에게 정체성을 세워 주고 질 높은 삶을 약속하는 라이프스토리를 전하는 방향으로 전반적인 흐름이 바뀌고 있다.

<중략>

예일대학 철학과 니콜라스 윌터스토프 교수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두고 현대 문화는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 따위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잘 사는(경험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케팅과 홍보 일을 하는 이들로서는 상품이 멋지게 작동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187쪽

둘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이러한 성경의 개념은 단순한 일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알든 모르든 다른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노동에 관해 가르치는 신학 원리를 정확하게 깨달은 크리스천들은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기꺼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다른게 일할 방법을 찾는다. 

 

193쪽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195쪽

스토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오락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내러티브는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요소인지라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좌우한다. '벨탠샤우웅'에서 파생된 세계관이란 말은 현실을 해석하는 토대가 되는 포괄적인 시각을 뜻한다. 하지만 몇 가지 철학적으로 중요한 항목들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거대 서사, 즉 a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b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c 그걸 다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스토리다. 

 

197쪽

플라톤은 주로 육신과 그 연약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는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서 뱉어지는 욕구와 양심 사이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지적했다. 사르트르는 객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구속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198쪽

복음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01쪽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새삼 놀랍다.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208쪽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전이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대단히 강조하고, 설령이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이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209쪽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이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211쪽

다만 피조물 가운데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가짐은 복음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충동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타락과 부패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깨어짐의 결과라는 게 복음의 가르침이다. 복음이 들려주는 진실한 '스토리'는 구속과 갱신의 증거다. 복음적인 내러티브의 절정에는 방치와 태만에 관한 사연보다 희생과 인내의 이야기가 더 잘 들어맞는다. 

 

213쪽

놀랍게도 이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아이비리그 학교들으르 처음 세운 설립자들은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한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 누구도 제힘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며 부와 재능과 권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크리스천의 사상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능력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활개를 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223쪽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렌즈 삼아 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스토리라인이 주류를 이루는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가? 

- 무엇이 의미, 윤리, 기원, 숙명 같은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가?

- 무엇이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소망하고 또 무얼 두려워하는가?

- 현재 종사하는 직업 세계에서는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다시 해석해 들려주는가? 이야기 속에 직업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떤 부분이 본질적으로 복음과 일치해서 기꺼이 동의하며 거기에 맞출 마음이 드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어떤 점인가? 다시 말해서, 문화에 도전해야 할 대목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면 어떤 방식으로 그 스토리를 완성해 나갈 것 같은가?

- 지금 하고 있는 일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넓게는 사회에 봉사하며, 직업 세계 자체에 도움을 주고, 능숙함과 탁월의 모범이 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회가 있는가?

 

227쪽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29쪽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230쪽 

하나님의 섭리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서 노동의 가치에 낮은 비중을 두는 데서 생기는 더 심각한 위험은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이 이뤄 낸 선한 일들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온전하고 균형 잡힌 성경의 가르침은 오로지 크리스천이 한 일이나 전문직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며, 오히려 인간의 모든(특히 탁월하게 해낸) 노동에 하나같이 높은 가치를 둔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되는 통로로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선망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스스로 하는 일을 인정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능숙하게 해내는 일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상대가 예수님을 믿든 말든 가리지 않는다. 

 

237쪽

하나님의 지혜와 달란트, 아름다움과 재주를 은혜로, 다시 말해서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베푸신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환하게 밝히며, 잘 보존하기 위해 나눠 주시는 선사품인 셈이다. 원칙대로라면 죄를 범한 인류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가 현재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형편이 그토록 악화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일반 은총이라는 선물 덕분이다.

 

244쪽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주일 하루와 평일 저녁에 그것도 신앙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시간으로 국한된다. 주중에 어떤 핵심 가치에 따라 시간을 보내고 삶을 꾸려 가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볼 꿈초자 꾸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서' 일하며 생활하는 동안은 자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과학기술, 개인의 자유,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특성 따위를 포함해 현대 문화의 배경을 이루는 갖가지 가치 기준과 우상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원론의 첫 번째 유형이 세상과 나눠 가진 공통점의 중요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은 복음적인 세계관(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판을 복음에 비추어 새로 짜는)이 가진 차이점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다. 

 이원론의 대척점에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도 우상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252쪽

 크리스천들은 솔직하고,  따뜻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손익분석에 뿌리를 둔 윤리는 일반적으로 대가를 기대한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설계를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그런 처신 탓에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 하지만 성경학자 브루스 월키의 말마따나,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 하듯 하지 말라(골 3:23)

 

284쪽

 

 도로시 세이어즈는 유사 열정이 일의 동력이 있음을 알려 준다. 「신조인가, 혼조인가」(Creed or Chaos?)라는 책에서 글쓴이는 '해태'(acedia)를 비롯해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인습적인 죄를 열거했다. 해태는 흔히 '나태'(sloth)로 번역되는데, 세이어즈는 올바른 풀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으름(나태라는 단어에 담긴 통상적인 뜻)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작가는 해태란 '무엇이 내게 보탬이 될까?'만 생각하는 손익분석에 이끌리는 삶의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어디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야 할 까닭도 없기에 그저 살아 있을 따름인 죄다. 

 

287쪽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 보라).

 로마서 12장은 이 진리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라는 말로 서두를 연다. 여기에 쓰인 표현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이다. 사도는 제물을 들고 제사를 드리러 온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기르는 가축들 가운데 튼튼하고 흠이 없는 놈을 골라서 제물을 불태우는 번제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제가 가진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주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열정의 표현인 셈이다. <중략>

 본문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다. 첫째로, '열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래 '긴급'과 '성실'이 결합된 의미다. 초점과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급박한 마음만 남으면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긴박감이 없이 성실하기만 하면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서두르되 질서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열심을 품고"라는 말씀은 원문에 비춰 볼 때 "펄펄 끓는 심령으로" 쯤으로 직역할 수 있다. 따라서 감성과 훈련, 긴박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하는 일 속에서 산 제물이 되는 임무를 수행해 나가라는 뜻이다. 열정을 품고 살라는 주문이다.

 

298쪽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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