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8. 19:4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고등학교 시절, 원치 않았던 친구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난 후 난 오랜세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살았다. 나를 때린 그 친구와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학교에 대한 불만에 가득찬 시선으로 세상를 살았다. 그 사건에 대한 피해자를 나로 규정하고 그들을 탓했지만, 결론적으로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삶은 늘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웠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우리의 삶을 갉아먹어 결국 우리를 무너지게 만든다.
우리는 각자 한 두가지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피해의식을 통해 남을 탓하면서 자기를 변호하거나 정당하다는 것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피해의식 자체는 우리에게 절대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피해의식의 악순환을 끊고, 피해의식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피해의식의 심리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앞으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책이다. 저자는 1부에서 피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며, 그렇게 형성된 피해의식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고 있다. 2부에서는 형성된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한다. 우리의 삶에서 피해의식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고, 감정을 표출하느냐에 따라서 누구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히게 되고, 또 어떤 이는 그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될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형성된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발생한 피해의식은 비슷한 경험에서 또 다시 유발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다시 확인하여 무의적으로 발현되는 감정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의식을 겪는 우리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시작점이다.
고통과 아픔은 흔히 생각하듯 영혼과 정신이 병들었다거나 성격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싶어한다는 외침이다
166쪽
자신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생길뿐 아니라 정서가 풍부해질 수 있다. 긍정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피해의식을 심겨준 과거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발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엄격하고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의 기준과 규칙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피해의식을 고착화시키는 고정관념을 찾은 다음, 내면에서부터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그 과정은 어느 누구도 해줄 수 없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불행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될 점은 목표를 세우고 더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피해의식은 단순하게 없앨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끊임없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책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두가지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문장]
23쪽
피해의식은 대개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받았거나 크게 상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생긴다. 언제 어떠한 경험을 했느냐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이를수록, 즉 어린 나이의 상처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 크고 오래간다. 그만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응력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4쪽
갓난아이일 때는 가까운 주변 세계와 그 나머지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크게 울거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자기를 둘러싼 온 세계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 시기에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 그 자체'이다. 어머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음으로써 신체적인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익숙해지고, 누군가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역할도 배운다. 또한 이런 체험을 통해 공간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주변의 의견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 내적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다.
30쪽
부모가 아이의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려면 먼저 자신의 욕구를 알아야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랑을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되고 싶고 자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도 자녀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줄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 부모들이 많다.
31쪽
어른들은 아기들이 원래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위험한 생각을 한다. 사실 아이들은 잘 잊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들을 근거로 자기만의 직감적인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아기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질서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쌓는다.
41쪽
어떤 경험을 한 후, 그 결과를 나와 동일시하고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힘으로 인정하면 고정관념이 된다. 고정관념은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숨어 있다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영향을 미친다.
42쪽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자책하며 날마다 말과 생각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면, 누군가 우리에게 사랑을 주려고 해도 불신하고 의심하게 된다. <중략> 어렵지만 우리는 자신을 살아하는 법을 배우고 고정관념들을 바꾸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61쪽
자신을 비하하거나 시기심을 감추려는 헛된 노력보다는 그것을 계기로 자신도 비슷한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정적인 성격이 자아실현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중략>
내면의 어두운 면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인간의 결정에는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함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라. 밝음과 어두움은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두 힘이다. 우리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62쪽
무언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고 바로 역공을 가하거나 도망을 친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의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사적인 공간을 지키기 위한 반응이다.
67쪽
만약 내면의 어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개인적 자아 성취욕구와 집단적 자아 성취욕구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규범에 따른 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71쪽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혹은 다른 자학적 태도 등 파괴적인 행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자기 징계는 '난 그럴 자격이 없어' 라는 식의 생각이나 '자기 부정'을 통해 나타난다. 이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시기심과 파괴적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가 유사한 종류의 감정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나면 활발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이 포기했던 것을 누군가가 요구하는 모습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폭발해 말이나 감정표현, 또는 몸짓을 통해 분노와 시기심이 드러난다.
81쪽
상처받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번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받은 상처는 아무리 뛰어난 심리치료사라도 흔적 없이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부정적인 기억을 되돌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93쪽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런 감정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해 내면의 어둠 속에 몰아넣고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그런 감정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비하한다.
113쪽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지크베르트의 무력하고 체념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또한 거의 강제적인 방식으로 자유를 누리려는 모습에서 공격적이고 고집스러운 면을 볼 수 있다. 카탸의 공격성은 상대방에게 시간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는 무력하고 체념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그들이 외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다르지만, 마음속의 생각에는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들 모두 갈등의 해결은 상대방의 태도 변화에 달려 있고, 자신은 상대방으로부터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망한다.
불펜의 시간 _ 김유원 (0) | 2021.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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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감정 _ 김용태 (0) | 2021.01.24 |
은밀한 세계관 _ 스티븐 윌킨스, 마크 샌포드 (0) | 2021.01.10 |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_ 허지원 (0) | 2021.01.02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_ 수 클리볼드 (0) | 2020.12.27 |
2021. 1. 10. 19:40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세계관은 신념, 곧 마음의 근본적인 방향이다.
이것은 실재의 기본적인 구조에 관해
우리가 주장하는 이야기나 일련의 전제로 표현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살고 행동하며 존재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제임스 사이어
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는 관점이다.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신자가 일관성 있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염된 세계관을 살아갈 위험성에 처해있다. 우리가 접하는 세상속의 여러가지고 요소나 대중문화로 인해 우리는 다른 세계관을 의도치않게 받아들여서 살아갈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개인주의자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24쪽)'이다.
세계관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행동이라는 거울에 우리의 확신을 끊임없이 비춰 봐야 한다. 고백하는 신념과 행동하는 신념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올바른 신조를 인용하고 타당한 교리를 인정하며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그 속에 내포된 원칙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25쪽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신중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백하는 신념(곧 지적인 차원으로만 머물러 있는 생각)과 확신하는 신념(곧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념)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지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말과 행동을 통합하는 것이 「은밀한 세계관」의 목표이기도 하다.
책에서 선정한 여덟가지의 은밀한 세계관은 개인주의, 소비주의, 국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종교가 된 심리 치료이다. 우리 살아가는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내용들을 파악하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검토해야한다. 이와 더불어 책을 통해 우리가 고백하는 신념과 확신하는 신념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더 나아가 두 신념간의 간극이 메워져서 하나의 신념으로 통합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좋은 문장]
23쪽
우리는 종종 어떤 일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충분한 시간이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24쪽
이 책의 중요한 전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내용이나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개인주의자처럼 살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고쳐야 한다. 아마 세계관에 대한 신중한 평가가 그런 수정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24-25쪽
세계관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행동이라는 거울에 우리의 확신을 끊임없이 비춰 봐야 한다. 고백하는 신념과 행동하는 신념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올바른 신조를 인용하고 타당한 교리를 인정하며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그 속에 내포된 원칙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만 언행이 불일치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과학적 자연주의자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보편적 도덕 기준이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살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삶을 성찰하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신중하게 살피지 않으면 이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말과 행동을 통합하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28쪽
신앙과 삶을 성공적으로 통합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 가지를 실천했다. 우선, 그들은 기독교적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멘토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둘째, 그들은 기독교적 삶을 사는 데 깊이 헌신된 동료와 정기적으로 만났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대학을 떠난 후 당면하는 유력한 다른 세계관들의 도전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30쪽
결국 세계관은 온전하고 다차원적인 실제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다. 또한 어떻게 삶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세계관은 비록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궁극적으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2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개인주의
33쪽
개인주의는 하나님이 각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는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매우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기독교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한다.
37쪽
개인주의자들이 자신의 도덕적 행동에 대해 다른 삶이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할 때, 이것은 흔히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적절히 이해한다면, "내가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게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는 권위는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개인주의가 옳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기준을 내게 부과하도록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은 나의 목적과 가치관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학법칙으로 시를 판단하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내가 자신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권위의 원천임을 보여 준다.
41쪽
가장 건전한 개인주의는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개인주의는 우리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힘들에 자주 굴복하고, 우리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과 조직들이 그 의무를 종종 이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어떤 변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고유한 목적이 내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면, 나는 궁극적으로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48쪽
사실 우리는 타고난 사회적 존재이며 심지어 개인주의자들의 자기 이미지도 다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된다. 내 삶의 의미가 나의 성취에 의해 평가된다면-기존 사회제도 안에서의 성공이든, 사회제도와 맞서서 이룬 성공이든 간에-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나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기준을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49쪽
개인주의는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 전 신앙수련회 때 나는 이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신약학자인 강사가 경건회를 인도하면서 히브리서를 인용했다. 그는 히브리서를 25년 동안 연구한 후에야,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이 서신의 모든 명령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중략> 그는 우리 문화에서 흡수한 개인주의적 태도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명령을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추정했던 것이다.
50쪽
우리가 세계관에 대해 물어야 할 우선적인 질문은, "누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가"이다. 개인주의는 우주의 중심에 개인을 놓음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위치에 놓으려고 한다.
51쪽
개인주의적 세계관에서 잘못된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내가 우주에서 일차적인 실재라고 주장할 때, 이것은 다른 사람을 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나 나의 중심적 위치를 노리는 경쟁자로 보게 한다. 다른 사람은 다만 효용적 가치만 있거나(그들은 나에게 도움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내 개인적인 사업과 목적의 장애물일 뿐이다. <중략> 따라서 하나님 왕국에 참여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내용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이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런 이해 때문에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충돌한다.
가짜 감정 _ 김용태 (0) | 2021.0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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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2. 21:25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코로나19로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홀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지며, 직장에서는 쫓겨나거나 사업이 망하기도 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더욱 나빠지면서 사회적 우울감은 더 증가한다. 마음이 무너지거나, 무너진 마음의 병이 악화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지금의 힘든 상황이 언제 나아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단.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빠지게 할 경향이 크다. 코로나로 인한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도 우리는 언제나 불안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한발 더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는 임상심리전문가가 낮은 자존감과 우울감 때문에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의 측면에서 그 생각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전하는 이야기다.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든,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든, 그 과거가 현재의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당신의 미래는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히 그 과거를 뛰어넘고 또 다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당신의 과거는 당신의 미래가 아닙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과거가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과거의 일이나 그 일로부터 비롯된 감정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당신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조금씩 할 수 있을만큼만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면 그만인 것이다.
[좋은 문장]
20쪽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어 오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심리학 영역으로 끌어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이때 자존감을 '성취 수준을 개인의 목표치로 나눈' 비율 공식으로 정의했습니다.
22쪽
'스스로 자각하는' 본인의 자존감, 자기가치감이 낮을수록 정신건강 문제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경향성은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자기평가에 기반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럭저럭 대충'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가 느끼면 됩니다.
23쪽
최근에는 상태 자존감state self-estee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삶의 맥락과 고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자기가치감을 뜻합니다. 또한 이말은 우리 모두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하는 유동적인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5쪽 각주
자존감의 문제와 별개로, 어떤 상황에도 자꾸만 겸손을 떠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애narcissism가 굉장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저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겸손할 수준도 안 되는 사람의 겸손은 건방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왜 사람들이 존경르 표하지 않지?' 하는 식의 과도한 자기애와 욕망을 드러내면 이는 너무 위험하니, 이를 정반대로 표현하는 반동 형성이라는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이 겸손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겸손을 표해도 될 만큼 뭔가를 정말도 해내고 나서 그때 겸손해지면 됩니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사소한 성취에 대한 사소한 칭찬은 그냥 받아들입시다.
피해의식의 심리학 _ 야야 헤릅스트 (0) | 2021.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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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세계관 _ 스티븐 윌킨스, 마크 샌포드 (0) | 2021.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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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 00:06 프로필/연도별 기록
2020년을 마무하면서 2015년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일하시는 펜션에서 원치 않았던 노동을 마치고 2015년의 마지막 밤을 펜션에서 맞이했다. 부모님은 이미 고된 노동으로 잠드셨고, 나는 '이병헌과 삼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글을 적었다. 나의 사회적 위치와 취준생이란 상황을 비관하며 삐뚤어진 생각들을 내뱉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파렴치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회의였을까. 한해의 마지막 밤에 왜 그 글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늦은 밤 기어코 글을 다 적고 2016년 1월 첫날 새벽에 잠이 들었다. 담담하게 한해를 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새해를 맞이했던 해였다.
2020년도 담담하게 한해를 마무리하는 게 좋을듯하다. 올한해 개인적으로 기억할만한 많은 일들 가운데 주를 이루는 것은 만남과 이별이다. 코로나시대에 마스크를 쓰고 분주하게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갔으며,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만남에 대한 조급함도 분주한 일상에 한몫했던 것 같다. 사회가 정해준 기준이 나를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만남과 이별을 통해 관계를 배워나갔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유익이다.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아직 관계에 서툴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받아들이기보다는 물러서려하고, 이해하려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다고 단정지어버리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보았으니 다음 해에는 부족함을 조금씩 채워갈 수 있기를.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과거를 되돌아볼때 좋았던 한해로 기억되기를 바랄뿐이다.
2022년, 삶을 기록하다. (2) | 2022.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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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삶을 기록하다 (0) | 2022.03.01 |
2020년 1~8월, 삶을 기록하다 (0) | 2020.09.02 |
2019년을 되돌아본다 (0) | 2019.12.31 |
2019년 하반기, 삶을 기록하다 (0) | 2019.11.23 |
2020. 12. 27. 22:3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부모는 자기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기가 낳아 기른 아기라도 전혀 모르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다.
안됐지만 누가 사이코패스 거짓말쟁이인지 부모도 나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 350쪽-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이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듯,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의 가해자인 수 클리볼드의 회고록이다. 책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들의 총기난사와 자살을 이해하기 위한 발버둥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키워온 아들이 악마의 모습으로 비극적인 사건을 저질렀으니, 부모로서는 도저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사건을 바라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 아들의 범죄가 부모 탓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부모는 비난할 거라는 점은 불보듯 뻔하다. 이것이 평생 부모를 괴롭힐 거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 고단한 그 삶을 살아온 그녀의, 한 엄마의 지리멸렬했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그녀가 글을 쓴 이유는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알게된 점을 통해 누군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콜럼바인의 호된 시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도움이 된다면 다름 사람과 나누는 게 나의 도덕적 의무다. 입을 열기는 두렵지만, 그게 옳은 일이다
25쪽
어떤 부분은 너무 솔직하고 사실적이어서, 그녀의 감정이 내게도 전달되는듯 했다. 가끔 그 압도되는 감정이 책장이 넘기지 못하게 했다.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녀가 이 사건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견뎌왔는지, 그리고 견뎌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슬픔에도 수명이 있다
7년 정도 지나자 안개 속에서 조금씩 나올 수 있었다고 나에게 말해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랬다. 2006년이 되자 조금씩 나아졌다. 딜런이 그리운 것은 여전했지만, 단 한 시간도 딜런의 손에 죽은 이들과 가족들을 고통스럽고 슬프게 떠올리지 않고 보낼 수는 없었지만, 날마다 울지는 않았고 좀비처럼 넋을 잃고 떠돌아다니지도 않았다
427쪽
서평 중에 책을 다 읽고나면 남는 것은 한명의 엄마라고 이야기했다. 맞다. 이 책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은 지리멸렬하고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비틀거리면서 한발씩 나아간 한명의 엄마, 수 클리볼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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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7. 19:45 신앙/교회
2년전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의 안과밖의 경계선에서 떠날 채비를 했었다. 결국, 수많은 생각들과 고민끝에 교회에 남기로 결정했지만, 그 이후의 시간속에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있었는가 물어야 한다. 2018년 5월부터 시작된 고민이 공식적으로 9월에 끝났다. 그러고나서 다시 나와의 대화가 201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후로 나들이, 10주년 기념행사 등 교회의 굵직한 행사들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경계선에서 서성였다.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고해서 제3자로 방관했던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다시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했을뿐이다.
2019년을 지나 2020년을 맞이했다. 중국 우한으로부터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이 이어졌고, 3월부터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다. 온라인 예배가 장기화되면서 몸과 마음이 점점 교회와 멀어져가는 듯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서 다시, 마지막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2013년에 주님의교회로 발걸음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역사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백주년기념교회를 가는 길에 주님의교회은 생각나게 하셨고, 마침 2호선을 타고 있었던지라 신도림역에 내려서 주님의교회를 찾아갔다. 서울에서의 삶과 주님의교회 신앙 생활을 같은 시간속에서 흘러간다. 대학원 생활, 졸업, 취업준비, 그리고 취업.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속에 주님의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의 발자취도 함께 남아있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발자취를 같이 해왔다고 해서 앞으로 계속 같이 가야하는가이다. 궤도를 달리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생각의 시작점이 과연 불순한지 또는 악의적인지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교회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더 좋은 신앙생활을 위하여 교회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차악(次惡)으로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 묻고 싶다. 다른 교회에 가도 지금과 똑같은 행동으로 일관할 것인가...그건 다른 교회에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다시,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지만 생각의 쳇바퀴에 빠지지 않으려면 정답이 없는 질문을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 어찌되었든, 남아있을지 아니면 떠날지만 확실하게 정하고 그에 따라 지혜롭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분명히 믿는 것은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는 것이다. 그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안에 내 삶의 역사도 개입된다는 사실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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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6. 16:58 신앙/감사(感謝)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 전도서 11장 5절
1. 이별과 만남가운데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하심에
2. 직장 업무가운데 남탓하지 않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보게하심에
3. 지인을 통하여 많은 격려과 위로를 주심에
4. 부모님이 코로나 가운데 건강하게 지내게 하심에
5. 코로나 시대에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주심에
6. 회사 건물에 확진자가 나왔지만, 우리 회사 층에 추가 확진자가 나오지 않게 하심에
7. 일상 가운데 무너질 때가 있지만,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심에
8. 매주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게 하심에
9. 대구 오고가는 길 안전하게 지켜주심에
10. 반려 식물들이 잘 자라게 하심에
11.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심에
12. 출근길에 항상 말씀을 묵상하게 하심에
13. 인턴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건내게 하심에
14.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음을 다시 깨닫게 하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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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2. 22:23 신앙/기도(祈禱)
나의 모든 삶을 이끌어오신 하나님이여,
만물의 창조자되시고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나의 아버지여,
교만과 무지로 점철된 삶의 끝자락에서 다시 하나님앞에 나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현재 내 삶의 위치와 내가 걸어왔던 신앙의 길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어찌 나는 내 힘으로 여기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백성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가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다시 주님의 은혜앞에 완전히 엎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올 수 있지 않습니까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도 해결해주셨지만
현세의 삶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열어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1년의 선교, 약 2년의 대학원 생활, 그리고 길고 길었던 취업 준비 기간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낮추시고 하나님만을 붙잡게 하셨지 않습니까
때로는 흔들리고 휘청거렸지만,
결국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게 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선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다시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달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가장 큰 계명,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과 안식을 누리려고 했던 나의 죄된 모습을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이 나의 창조자이자 구원자이심을 온전히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으나
그러함에도 나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꿋꿋하게 일어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주의 길로 이끄시옵소서
하늘의 참새와 땅의 들풀도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의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삶을 온전히 돌보시옵소서
오늘도 주의 은혜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나의 생각와 마음을 지키시고 주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원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2) (0) | 2021.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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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1) (0) | 2021.01.24 |
[일상의 기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0) | 2020.11.15 |
[일상의 기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0) | 2020.11.11 |
[일상의 기도]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0) | 2020.11.09 |
2020. 12. 20. 17:2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
직장인은 일주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데 사용한다.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로서 우리가 땀흘려 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적 일뿐만 아니라 세속적 일을 포함한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교 신학의 원류는 모든 노동의 존엄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류를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라고 본다.
23쪽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고 그것을 지켜보셨다.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인간에게 일을 부여하셨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라.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45쪽
창조때에 아담이 했던 우아한(?) 일에 비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하찮고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일을 해도 세상이 전혀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원하던 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이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수도 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각광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하는 것 자체로, 또는 그 일의 성공과 실패로서 신자로서 일의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
신자로서 일을 할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선에서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다. 결국, 신자에게 일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저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신앙 공동체와 일터에서)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지 늘 탐색해야 한다.
275쪽
결국,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 자체를 하찮게 여기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이 드러날 수도 있다. 다만,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
20쪽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는 「마음의 습관」이란 기념비적인 책에서 우리의문화의 응집력을 갉아먹어 버린 것을 콕 찍어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lalism)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표현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함께 공유하는 삶이라든지 사회 구성원 전체를 한데 묶는 지배적인 진리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게 했다.
21쪽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이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36쪽
톨킨이 기독교 신앙에서 위로와 자유를 찾고 다시 작품을 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하자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경이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 왜 일하고 싶어 하는가?(만족스러운 살믕 사는 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 왜 그토록 일하기가 어려운가?(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
-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 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47쪽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림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52쪽
"일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특히 노동이 죄의 대가로 임한 저주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75쪽
창세기 2장 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창조주는 어째서 손수 작명하지 않으시는가? 창세기 1장에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던 전례에 비춰 보면 짐승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이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켰다. 인간 본성과 기질의 폭을 최대한 확장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문명을 건설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인간은 일을 통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창조 패턴을 활용하며, 공동체를 조직한다.
81쪽
벨라는 일에 담긴 '소명'이라든지 '부르심'의 개념을 회복하며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권력욕이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억할 게 있다. 한쪽에서 명령하고 이편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그 일을 해낼 때에 비로소 소명이나 부르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격이 가르치는 노동관이다.
83쪽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이어야 한다.
87쪽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짓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107쪽
현대 서구문화는 죄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되짚어 볼 생각조차 않으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만 안간함을 쓰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유년기의 경험이 쓸데없는 수치심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을 빚어낸다고 해석한다. 갖가지 즐길 거리들을 잠시나마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선행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란 정체성을 갖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본질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116쪽
직업을 선택하면서 품었던 큰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분야를 잘못 선택했다든지, 그쪽으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든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완벽한 일거리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하게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손 쳐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154쪽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지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현재 직장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위치가 은혜의 소산이라는 얘길 들으면 펄쩍 뛰면서 아무개 학교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고, 학생 때는 물론이고 신입 사원 시절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며, 동기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올렸는지 따위를 침이 마르도록 나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달란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제힘으로 열지 않은 기회의 문들을 통과했다. 열쇠를 쓴 게 아니라 그저 활짤 열린 틈으로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가진 건 하나같이 은혜의 소산이며, 우리 각자에게는 그렇게 수중에 들어온 힘을 마치 제 능력을 사용하듯 활용하여 섬길 자유가 있다.
164쪽
루터는 피조물 가운떼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능력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5쪽
루터는 우상을 세우는 마음가짐과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깨달았다.
174쪽
과학이 발전하고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사회는 종교니, 부족이니, 전통인, 하는 우상들을 끌어내리는 대신 이성과 경험, 개인의 자유 따위를 세계관 전반을 지배할 궁극적 가치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181쪽
하이데거와 닥스뿐만 아니라 자크 엘룰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은 과학기술과 불확실성, 시장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 따위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동조할 수 없으므로 가진 건 오로지 '수단'이나 기술뿐이다. 건전한 인생이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없으므로 저마다 권력을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경쟁만 남는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저리가 없기 때문이다.
182쪽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상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시장 상품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광고 회사의 순진한 먹잇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진단한다. 허다한 작가들도 시장의 가치(소비 지상주의와 비용 대비 효과 같은)가 가족을 포함해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었다고 확신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재화와 용역을 분배하는 유용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5쪽
상품이 주는 유익을 홍보하는 데서 소비자들에게 정체성을 세워 주고 질 높은 삶을 약속하는 라이프스토리를 전하는 방향으로 전반적인 흐름이 바뀌고 있다.
<중략>
예일대학 철학과 니콜라스 윌터스토프 교수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두고 현대 문화는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 따위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잘 사는(경험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케팅과 홍보 일을 하는 이들로서는 상품이 멋지게 작동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187쪽
둘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이러한 성경의 개념은 단순한 일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알든 모르든 다른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노동에 관해 가르치는 신학 원리를 정확하게 깨달은 크리스천들은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기꺼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다른게 일할 방법을 찾는다.
193쪽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195쪽
스토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오락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내러티브는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요소인지라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좌우한다. '벨탠샤우웅'에서 파생된 세계관이란 말은 현실을 해석하는 토대가 되는 포괄적인 시각을 뜻한다. 하지만 몇 가지 철학적으로 중요한 항목들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거대 서사, 즉 a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b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c 그걸 다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스토리다.
197쪽
플라톤은 주로 육신과 그 연약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는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서 뱉어지는 욕구와 양심 사이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지적했다. 사르트르는 객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구속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198쪽
복음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01쪽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새삼 놀랍다.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208쪽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전이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대단히 강조하고, 설령이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이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209쪽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이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211쪽
다만 피조물 가운데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가짐은 복음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충동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타락과 부패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깨어짐의 결과라는 게 복음의 가르침이다. 복음이 들려주는 진실한 '스토리'는 구속과 갱신의 증거다. 복음적인 내러티브의 절정에는 방치와 태만에 관한 사연보다 희생과 인내의 이야기가 더 잘 들어맞는다.
213쪽
놀랍게도 이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아이비리그 학교들으르 처음 세운 설립자들은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한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 누구도 제힘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며 부와 재능과 권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크리스천의 사상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능력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활개를 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223쪽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렌즈 삼아 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스토리라인이 주류를 이루는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가?
- 무엇이 의미, 윤리, 기원, 숙명 같은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가?
- 무엇이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소망하고 또 무얼 두려워하는가?
- 현재 종사하는 직업 세계에서는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다시 해석해 들려주는가? 이야기 속에 직업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떤 부분이 본질적으로 복음과 일치해서 기꺼이 동의하며 거기에 맞출 마음이 드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어떤 점인가? 다시 말해서, 문화에 도전해야 할 대목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면 어떤 방식으로 그 스토리를 완성해 나갈 것 같은가?
- 지금 하고 있는 일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넓게는 사회에 봉사하며, 직업 세계 자체에 도움을 주고, 능숙함과 탁월의 모범이 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회가 있는가?
227쪽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29쪽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230쪽
하나님의 섭리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서 노동의 가치에 낮은 비중을 두는 데서 생기는 더 심각한 위험은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이 이뤄 낸 선한 일들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온전하고 균형 잡힌 성경의 가르침은 오로지 크리스천이 한 일이나 전문직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며, 오히려 인간의 모든(특히 탁월하게 해낸) 노동에 하나같이 높은 가치를 둔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되는 통로로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선망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스스로 하는 일을 인정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능숙하게 해내는 일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상대가 예수님을 믿든 말든 가리지 않는다.
237쪽
하나님의 지혜와 달란트, 아름다움과 재주를 은혜로, 다시 말해서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베푸신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환하게 밝히며, 잘 보존하기 위해 나눠 주시는 선사품인 셈이다. 원칙대로라면 죄를 범한 인류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가 현재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형편이 그토록 악화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일반 은총이라는 선물 덕분이다.
244쪽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주일 하루와 평일 저녁에 그것도 신앙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시간으로 국한된다. 주중에 어떤 핵심 가치에 따라 시간을 보내고 삶을 꾸려 가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볼 꿈초자 꾸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서' 일하며 생활하는 동안은 자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과학기술, 개인의 자유,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특성 따위를 포함해 현대 문화의 배경을 이루는 갖가지 가치 기준과 우상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원론의 첫 번째 유형이 세상과 나눠 가진 공통점의 중요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은 복음적인 세계관(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판을 복음에 비추어 새로 짜는)이 가진 차이점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다.
이원론의 대척점에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도 우상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252쪽
크리스천들은 솔직하고, 따뜻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손익분석에 뿌리를 둔 윤리는 일반적으로 대가를 기대한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설계를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그런 처신 탓에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 하지만 성경학자 브루스 월키의 말마따나,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 하듯 하지 말라(골 3:23)
284쪽
도로시 세이어즈는 유사 열정이 일의 동력이 있음을 알려 준다. 「신조인가, 혼조인가」(Creed or Chaos?)라는 책에서 글쓴이는 '해태'(acedia)를 비롯해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인습적인 죄를 열거했다. 해태는 흔히 '나태'(sloth)로 번역되는데, 세이어즈는 올바른 풀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으름(나태라는 단어에 담긴 통상적인 뜻)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작가는 해태란 '무엇이 내게 보탬이 될까?'만 생각하는 손익분석에 이끌리는 삶의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어디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야 할 까닭도 없기에 그저 살아 있을 따름인 죄다.
287쪽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 보라).
로마서 12장은 이 진리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라는 말로 서두를 연다. 여기에 쓰인 표현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이다. 사도는 제물을 들고 제사를 드리러 온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기르는 가축들 가운데 튼튼하고 흠이 없는 놈을 골라서 제물을 불태우는 번제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제가 가진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주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열정의 표현인 셈이다. <중략>
본문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다. 첫째로, '열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래 '긴급'과 '성실'이 결합된 의미다. 초점과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급박한 마음만 남으면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긴박감이 없이 성실하기만 하면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서두르되 질서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열심을 품고"라는 말씀은 원문에 비춰 볼 때 "펄펄 끓는 심령으로" 쯤으로 직역할 수 있다. 따라서 감성과 훈련, 긴박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하는 일 속에서 산 제물이 되는 임무를 수행해 나가라는 뜻이다. 열정을 품고 살라는 주문이다.
298쪽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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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3. 16:09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 : 2~3
세상 사람이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그들 각자에게는 꼭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열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그 바라거나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만족으로 채워줄 거라고 믿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취업준비생에게는 들어가고자 하는 직장이 우상일 수 있으며, 연애를 갈망하는 자에게는 연애 상대자가 우상일 수 있다. 그것만 있으면 우리가 정말 행복해질거라는 착각속에서 우상을 쟁취하기 위해서 힘쓴다. 단언컨대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다. 과연 그 모든 것이 우리의 필요와 갈망을 채워줄까? 세상 사람들의 우상은 차치하고서라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우상의 문제는 과연 간단한 것일까?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우상에 관한 이야기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인 하나님으로만 진정한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하는 대상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23쪽). 저자는 신자가 숭배할 수 있는 우상으로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에 대해 설명한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형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생각하면서, 신자인 자신은 우상숭배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책에서 언급하는 우상은 구체적으로 눈에 잘 띄는 '표면적 우상'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은밀하게 원하고 갈망하는 '근원적 우상'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하지 못하며 다른 어떤 것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야곱에게도 라헬이 우상이었으며, 요나에게도 사역의 성공과 이스라엘의 국익이 우상이었다. 우상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지극히 복잡한 개념이라서 지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범주를 모두 아우른다. 우선 개인의 우상으로는 로맨틱한 사랑과 가정, 돈, 권력, 성취, 속한 분야의 인맥, 타인이 정서적으로 의존하기를 기대하는 것, 건강, 몸매, 탄력적인 외모 등이 있다.
24쪽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245쪽). 저자가 가짜 신을 식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첫째,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속으로 기쁨과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둘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두고 있는 것에 돈을 쓰기 때문에 돈의 사용처를 점검해보면 우상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로는 독실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지녔으며 교회에 꾸준히 나가는 신자들에게 유용한 방법이다. 겉모습은 독실한 신자이지만,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지, 진짜 구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248쪽).
하나님이 각 사람의 심령을 향해 던지시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네 마음의 신뢰, 몰두, 충절, 섬김, 두려움, 기쁨에 대해 사실상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나 뭔가가 있느냐? 사람의 우상체계는······질문을 통해 표면으로 일부 드러난다. '삶을 지속시켜 줄 안정과 안전과 수용을 얻고자 네가 의지하는 대상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인생에서 네가 정말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냐? 무엇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느냐? 무엇이 있으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겠느냐? 너는 어디서 권력과 성공을 찾고 있느냐? 이런 비슷한 질문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지 우상을 섬기는지, 구원을 그리스도께 바라는지 거짓 구주에게 바라는지 결국 알아낼 수 있다.
249~250쪽, 데이비드 폴리슨
우상을 발견했다면 그 우상을 해체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 우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책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좋은 문장]
14쪽
절망은 슬픔과 다르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달리 의지할 만한 대안이 없다. 그야말로 기운이 꺾인다.
70쪽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76쪽
야곱이 바로 그랬다. 라헬은 그에게 단순희 아내가 아니라 '구세주'였다. 그녀를 어찌나 애절하게 원하고 필요로 했던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봣따. 그래서 라반의 속임수에 쉬이 넘어갔던 것이다.
80쪽
우리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대개 성경을 일련의 단절된 이야기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각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일한 이야기다.
84쪽
사랑하는 상대를 그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흠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우려 한다. 자기 존재가 헛되지 않다고 정당화하려 한다. 다른 아닌 구원받으려 한다. 물론 상대는 인간이므로 이것을 줄 수 없다.
115쪽
우리 마음의 죄성은 동기적 욕구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우상숭배로 변질시킨다. 바로 이것이 '근원적 우상'이다.
198쪽
오늘날 초월과 의미에 대한 욕구는 개인의 자아와만 관계될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과는 모두 무관하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익 우선'의 옛 사고방식은 젊은이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제 삶의 관건은 공동체의 제약을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자아를 창출하는 데 있다.
206쪽
결국 요나는 왜 도망갔을까? 답은 역시 우상숭배인데 이번에는 아주 복잡하다. 우성 요나 개인의 우상이 있다. 요나를 빚어낸 문화적 우상도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니느웨 사람들의 영적 유익보다 이스라엘의 국익을 앞세웠다. 끝으로 요나의 종교적 우상이 있다. 그는 무조건 자신이 도적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악한 이교도인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우월감을 느꼈고 그들이 구원받는 게 싫었다.
225쪽
나는 우상으로 힘들 때면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진해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순복하신 그분을 떠올린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 앉으셨기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것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기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께 있음을 나는 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과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어도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다.
245쪽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답은,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사람의 인정, 평판,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 <중략>
우상숭배란 단지 예배 의식의 한 형태가 아니라 유한한 가치에 기초한 정서와 생활 방식 전체이며, 피조물을 신처럼 절대화하는 일이다.
252쪽
우상보다 예수님이 당신의 머릿속에 더 아름다워지시고 당신의 마음속에 더 매력 있어지셔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가짜 신이 대체될 수 있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 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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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6. 15:51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우리의 행동은 습관의 연속이다. 하나의 행동에 일상의 습관이 배여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업무에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집에 와서 옷을 벗고 치우는 것도 미룰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일상의 효율이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좋은 습관이나 나쁜 습관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좋은 습관을 더 발달시키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는 네가지 법칙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만드는 방법과 나쁜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첫번째 법칙은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적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할 일은 자신이 일상을 점검하고, 현재의 습관에서 새롭게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퇴근 후 외출복을 벗는 것이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이라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외출복을 벗고 나서 바로 운동복으로 갈아 입는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미 매일 하고 있는 현재의 습관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그 위에 새로운 행동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 쌓기'다.
103쪽
두번째 법칙은 새롭게 하고 싶은 좋은 습관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방법은 원하는 것과 해야하는 것을 묶는 것이다. 예를 들면, SNS를 확인하고 싶은데 운동을 해야 한다면, 잠깐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치워두고 턱걸이나 팔굽혀 펴기를 10개나 20개 정도 하고 나서 SNS를 하는 것이다. 유혹 묶기 전략은 현재의 습관을 우리가 원하는 어떤 대상과 연결시켜 습관을 강화하는 방식이다(152쪽).
세번째 법칙은 새로운 습관을 만들때 접근하기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3번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고 싶을 때, 운동할 때마다 1시간씩 해야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면 1시간을 해야된다는 부담감때문에 운동 자체를 꺼리게 된다. 따라서 하루에 1분 운동이라는 목표를 잡으면 부담감 없이 실행할 수 있고, 실행하고 나면 성취감을 얻을 수있다. 이러한 성취감은 다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저자는 변화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2분 규칙'을 사용한다. 즉, 새로운 습관을 만들 때 그 행동을 2분 이하로 하라는 것이다(211쪽). 예를 들면, 매일 책을 읽는 습관을 만들고 싶으면, 책 한페이지부터 읽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듯이,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가야 한다. 첫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네번째 법칙은 만들고자 하는 습관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새로운 습관을 통해 만족이나 보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새로운 좋은 습관을 만드려고 할 때,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운동을 하루 했다고 해서, 몸이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다. 책을 하루 읽었다고 해서, 사고하는 힘이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좋은 습관을 긍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는데, 이를 과학자들은 '지연된 보상 환경'(delayed-return environment)이라고 부른다(238쪽). 그래서 좋은 습관을 만들 때, 그 행동 자체로 만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 꾸준하게 행동하고, 그 행동들을 기록하거나 표시함으로써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습관 추적은 ① 우리에게 행동을 일깨우는 시각적 신호를 만들어내고 ② 자신의 발전을 눈으로 보고 이를 되돌리고 싶지 않다는 내적 동기를 일으키며 ③성공적으로 습관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순간순간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아가 우리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 간다는 시각적 증거를 하나씩 쌓아나감으로써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본질적인 만족감을 준다.
252쪽
위에 말한 좋은 습관을 만드는 네가지 법칙을 반대로 적용하면 나쁜 습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표나 방향성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은 강화시키고, 나쁜 습관은 버리는게 맞다. 저자가 알려준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오늘부터 저녁을 먹고나서 2분 운동부터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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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5. 10:38 신앙/기도(祈禱)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 98:1~3
내게 부족함 없이 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앞에 나아갑니다.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나의 태생부터 돌보시고 입히시며 지키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원망하고 있었을겁니다.
또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모든 이기심과 정욕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쳤을 겁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며,
주가 보시기에 가장 선한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시어
나의 인생가운데 말씀하신 것들을 좇아갈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한해를 돌아볼 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연초부터 올바른 사람과 참된 신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시어,
말과 행동의 진중함을 다시 되찾아야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그러함에도 문제점을 인식하게 하시고 바꾸어 갈 의지를 허락하여 주신 것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올바른 사람과 참된 신자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세상은 여전히 세상의 것들로 유혹하지만, 세상의 것들은 유한하며 쉬이 사라지며,
종국적으로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시고 이별의 아픔을 알게 하시며 축복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나의 하나님, 기도하는 모든 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그리하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겸허히 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완전 무결하시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하늘의 새 한 마리, 땅의 들풀 한 포기까지 돌보시는데
어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인생을 이끄시옵소서.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 홀로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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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1. 22:46 신앙/기도(祈禱)
날마다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여,
주의 도우심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히 살 수 없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어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경작하는 사명과 지혜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사람의 범죄로 인해 선하기만 했던 창조세계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구원 계획을 다시 마련해주셨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 계획이 성취되었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믿을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바입니다.
이는 책임감에 따른 수동적인 반응이 아닌 기쁨으로 인한 자발적인 행동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히 칭찬받을 일이지만,
행동의 근본적인 이유가 상급을 받기 위함은 아니어야 합니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한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발적 순종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주시고자 했던 충만한 은혜와 기쁨을 먼저 되찾아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간절히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가 주신 일들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 일을 감당한 후에 어떠한 보상을 바라기보다는 그 일을 은혜로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엎드려 고백했던 것처럼,
'빛도 이름도 없이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나의 인생을 이끌어주시옵소서
오늘도 이주와 보상을 담당하는 가운데 부족함이 많았지만,
보상 담당 과장님의 조언을 듣게 하시고 해결할 방안을 찾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나의 어눌함과 어리석음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선한 결과를 얻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나의 하나님, 오늘 하루도 나를 온전히 지키시고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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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9. 21:45 신앙/기도(祈禱)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면 높은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 6장 6~8절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여,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가 다시 하나님에 나아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세계를 다시리시기에,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혜로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상황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가장 선한 뜻으로 그 일을 이끌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통지자이십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나의 일생 가운데 나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모든 원망과 불만을 토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묵묵히 삶을 이어나가는 것
또한 주의 자녀로서 마땅히 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인생이 다 다른 방향과 속도로 진행될터인데
상대적 비교로 인해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가지지 않게 하시며,
더욱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마음이 피폐해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건강검진 가고오는 길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지인의 도움과 격려로 염려하던 일을 진행하게 하시고, 좋은 만남을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
매 끼니를 허락하시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부모님께 평안한 거처와 일상을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와 우리 가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단 한가지 사실을 온전히 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할뿐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날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데 힘쓰는 하루 하루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나의 머릭카락 하나까지 지키시고 돌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찬양과 권세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일상의 기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0) | 2020.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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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8. 23:11 신앙/기도(祈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나의 목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 가운데 날마다 살아갑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아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완악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서 건져내시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이기적 본성과 인간적 나약함으로 쓰러지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 일어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생을 살아가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뿐입니다.
삶을 돌아보건대,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인생의 고통가운데 허덕일 때,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나를 왜 버리시냐고 불평과 불만을 토로했을 때, 모든 것을 체념하듯 하소연했을 때,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했던 그 청년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의 과정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온 지나온 모든 과정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겁니다.
그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내가 여기 이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는 내 앞길을 알지 못하오나
하나님은 나의 시작과 끝을 아시오며 모든 삶을 주관하시오니
주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길을 이끄시옵소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이땅 가운데 보여주신 그 인내와 사랑을 내게도 부어 주시옵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약한 자와 소외된 자와, 어둠에 처해 있는 자를 돕게 하시옵소서
간곡히 원하는 것은 나의 인생이 내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하셔서
나의 일생이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발걸음의 흔적들로 가득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의 중심을 아시오니 나를 주의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오늘도 온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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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기도제목] 함께 기도해주세요. (1) | 2015.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