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동 밤길 _ 마종기

2021. 4. 17. 11:07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약속한 술집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지. 

스며들다가 내가 젖어버린 먼 길. 

 

젖어버린 나이여, 오랜 기다림이여,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날들은 모여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리니

이 밤길이 내 끝이라도 후회는 없다. 

 

거칠고 메마른 발바닥의 상처는 

인파에 밀려난 자책의 껍질들, 

병든 나그네의 발에 의지해 걸어도 

개울물 소리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은 추위마저 안심하고 인사하는 

구수한 밤의 눈동자가 빛난다. 

편안한 말과 얼굴이 섞여 하나가 되는 

저 불빛이 우리들의 술집이겠지.

 

가진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미련의 극치라고 모두들 피하는데 

그 세련된 도시를 떠나 여기까지 온 

내 몸에 깊이 스며드는 신설동의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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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의 초상 _ 마종기

2021. 4. 3. 13:36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122/99362403/1

 

 

주위를 둘러보니, 어머니. 

모두들 잘 있습니다. 

무대도 조명도 객석도 잘 있고 

인간의 간절한 열정은 살아서 뛰며 

몸부림치는 영감의 현장이 되네요. 

새로운 첫번째만이 예술이라고 하신

당신의 어려운 주장이 무대를 채웁니다. 

 

삶이 어려워도 꿈은 기죽지 않고

기어이 당당하시던 당신의 발걸음. 

무용의 끝막은 인간이라며 온전히 

목숨을 태우며 춤을 만드시던

평생을 받아온 사랑의 결론입니다. 

어머니, 당신의 따뜻한, 

 

움직임의 파문은 사방에 살아 있고 한길 삶의 초점은 

섬세하고 강하다. 새로운 율동에 생명의 정수를 붓는다. 

세상의 모든 거짓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용기가 춤으로 

태어난다. 버려진 흥을 바로 세운다. 춤 속에 살고 있는 

자유, 가식과 수식은 수면 아래로 숨고 옷 벗은 자유가 

다른 이름의 자유를 만난다. 

 

 어머니, 고집스러운 외길의 자부심에 

 부드럽고 그리운 움직임이 눈부십니다. 

 버려진 몸과 말이 마침내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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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식 변명 _ 마종기

2021. 4. 1. 21: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다시 가게 된 것은 조바심 때문이었다.

나이는 들어가고 겁도 늘어나고 

돌아보아야 점점 좁아지는 세상에서 

높고도 더 높은 유정천의 하늘을 만나

보이는 것이 끝일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 

고집도 늘어가고 트집거리도 늘어가고

주위로 막아선 높은 벽들은 가슴을 조이고 

내 힘으로는 두들겨 깰 수도 없으면서 

무엇이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알고 싶었다. 

 

주위가 허전해져서 채근이라도 하고 싶었다. 

파타고니아의 정상은 화산 연기를 뿜어내며

나를 보지도 않고 화가 나서 묵묵부답인데 

무섭고 겁이 나도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다냐고, 여기가 다냐고 묻고 싶었다. 

 

매일 저녁 구워 먹었던 일곱 살짜리 양, 

내 손자보다 어린 양이 눈으로 조롱했다. 

인연의 끈들이 구름같이 다 풀어지는 

파타고니아의 하늘에서 내리는 굵은 빗줄기, 

올가미로 느껴지던 질긴 관계들을 끊어버린다. 

비를 맞으면 흐르는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를 헤집어 상처만 주는 주위의 풀잎, 

칼 같은 풀잎이 가슴까지 찌른다. 

아무도 거두지 않은 죽음들이 

오래 젖어서 천천히 일어서는 땅, 

지상의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도 잊고 

굵은 비에 가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시간, 

약속해준 그 용서만 나를 아프게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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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날 _ 마종기

2021. 4. 1. 21:33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갔다. 

저희들끼리 자라고 저희들끼리 

날아다니다가 짝을 찾아

여러 모양의 열매를 맺었다.

 

그 후에는 방문 두드리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들리다 말다 한 소리는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들이었다. 

모두가 필요 없다며 버린 인연들.

어느 날 저녁부터는 주위가 작아지고

흥얼거리는 박자인지, 누가 오는 건지 

밤새도록 속삭이는 음성이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밤과 눈을 부지런히 섞고 있었다. 

 

보이는 게 다 흐렸지만 고백하자면

그것이 바로 내 질긴 평생이었다. 

그래도 끝이 흰색이라는 게 좋았다. 

체세포에 묻은 인내는 무게만 있는 건지

한 발 두 발 걷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참는 법을 몰라 헤매던 날들을 떠났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후회들이 모여 눈이 되었겠지, 

맨몸을 감는 겨울밤이 오히려 정답다. 

겨울의 끝은 저만치에 오고 있지만 

그 뒤에 오는 날들은 누구의 진정인가, 

숨이 끝나도 한동안 귀는 열려 있다지. 

나이 든 후부터 자라난 힘든 물음들이 

다 되살아나 내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안에 나를 부르는 정든 목소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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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좀 추운 구석이 있다

2020. 3. 15. 23:3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젊은 날, 들개처럼 헤매며 살다가 낯선 땅에 쓰러진다 해도

내가 한때 강제로 잃었던 자유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유는 좀 추운 구석이 있다.

  아무 데나 적당히 기댈 수 없어서일까. 

 

- 마종기 시집 《마흔 두 개의 초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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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만남 _ 마종기, 루시드폴

2016. 10. 12. 00:05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출처: www.daum.net>




마종기 시인은 의사이다. 가수 루시드폴은 공학박사이다. 공존할 수 없는 두가지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 받았다. 루시드폴의 첫번째 편지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루시드폴이 마종기 시인의 시를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 그의 음악은 마종기 시인의 시와 닮아있다. 


나는 마종기 시인의 '첫날밤'을 읽고나서, 그의 그리움을 좋아했다. 그가 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쓸쓸함과 고독함이 편안했다. 오랜시간 그의 시를 좇아다녔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루시드폴도 그 정서에 빠져들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어쨌든 그는 용기내어 마종기 시인에게 첫번째 편지를 쓴다. 그리고 마종기 시인은 답장한다. 그렇게 2년간 서로 주고받은 57개의 편지를 엮어 만든책이 『아주 사적인, 긴만남』이다. 편지를 주고 받는동안 서로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마종기 시인은 루시드폴의 음악을 귀기울여 들었고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의 시를 자주 읽었다. 편지를 통해 예술과 과학, 고독과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나이와 지역을 초월한 우정을 엿볼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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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_ 마종기

2016. 8. 25. 20:0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uecys.tistory.com>




기적



                             마종기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고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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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골증 _ 마종기

2016. 8. 23.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http://m.blog.naver.com/fliesbegone/90194182193>



골다골증 



                           마종기 




1


당신의 골수를 열 달이나 받아먹고

어머니, 내가 생겨났습니다. 

동생들도 당신 뼈에 구멍만 뚫어 

해 지난 갈대같이 속 빈 육신, 

골다골증으로 늙으신 어머니. 

당신 뼈가 얼마나 가벼워졌으면

바람까지 들락거리는 큰길 사이로 

먼 데 어디 날아가실 준비까지 하시는지. 



2


     나는 덱사 스캔과 간단한 숫자 계싼으로 수많은 

골다골증을 진단해주고 돈을 벌었다. 당신의 뼈에는

5천 개의 구멍, 당신의 살에는 8천개의 구멍. 당신은 

구멍 난 풍선이나 타이어처럼 매일 몸이 줄어들고 목

숨의 생기도 빠져나간다. 정신이 누추해져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뼈들은 답답해서 자기 가슴에 구멍을

뚫고, 신산한 세상살이의 대못과 시달림. 아파서 못을 

뺀 자리에 남아도는 피투성이 구멍들.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 나도 모든 것을 덮을 때가 되었다. 

돌아보면 구멍 많은 당신도 가엾고

바닥 터진 내 지난날도 가엾다. 

숨지 마라, 죄지은 지상의 모든 구멍들

암, 다시 보면 세상에 가엾지 않은 게 없지. 



벌거벗은 뼈들이 추위를 더 느끼는가. 

의과대학 해부학 시간 사람의 뼈들

동맥도 정맥도 더 이상 도착하지 않고

내 마른 손바닥만 핏빛으로 적시던

미세해진 그대 몸의 온기 속에서 

빈 뼈가 서로 만나 불 지피던 날들. 



뼈가 운다. 운율 맑은 피리 되어 

비 내리는 어두움에 외톨이로 운다. 

얅고 가늘어진 뼈 대책 없이 부러지고 

안타까웠던 집착도 형별만으로 기억될 뿐, 

더 기다릴 명분도 신음 소리 하나로 떠나고 

뼈를 태워 재가 되어 내가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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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일기 2-파티마 성지에서 _ 마종기

2016. 8. 23. 19:0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og.naver.net/limestreet11>



포르투갈 일기 2

- 파티마 성지에서 


                                 마종기 



기적이 보고 싶어 

찾아간 것은 아니다.

희고 밝은 호흡의 감촉이 

내게는 벌써 기적들이었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광장에서 무릎을 꿇었다. 

뜨겁고 두려웠던 모든 열정이 

긴 사연을 간곡히 말하기에

내가 켠 촛불은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 숙인 내 부끄러움의 비명, 

당신밖에 들은 사람은 없다. 



젊어서는 아무나 좋아했고

나이 좀 들어 조국을 떠난 뒤부터는

왠지 하나씩 자꾸 잃기만 했다. 

주위가 추워지고 창백해지면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 여기 왔다가 간다. 

의지와 표상의 세상은 벌써 가뭄에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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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꿈 _ 마종기

2016. 8. 9. 23:0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ackjack0919.deviantart.com>




개꿈

- 친구 김치수의 부음을 들은 뒤 


                                          

                                        마종기 



가까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서둘러 문상 가는 길에 길을 잃었다. 

헤매 다니다가 날이 어느새 어둡고 

캄캄 칠흑 같은 밤에 길도 안 보이는데 

풀 죽어 내 쪽으로 오는 다른 친구를 만났다. 

좋은 글을 쓰는 말수 적은 이 친구는 

문상 대신 배를 타고 이민을 간단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 가방을 지고 있다. 

한밤에 더구나 비까지 내리는 이 시간에 

어디로 왜 이민을 가느냐고 막아섰더니 

친구들 하나 둘 죽고 돌아가며 아파서 

가슴이 시려 살기가 힘들어서 간단다. 

목이 답답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개꿈 속에서 개 모습으로 한숨을 쉰다. 




이민 가는 친구가 사라진 어두운 쪽에서 

눈에 익은 대머리 한 사람이 다가온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리운 내 아버지다. 

반가운 아버지는 나를 보자 매를 내리신다. 

젋었던 날 자주 맞았던 그 대나무 담뱃대로 

반가운 마음 때문인가, 매가 아프지 않다.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얼굴이지만 

밤새도록 매를 내려주셨으면 좋겠다. 

친구 하나 살리지 못하는 네가 무슨 의사냐, 

이민 가려는 가까운 이를 말리지도 못하는 게 

무슨 벗이고 무슨 시인이더냐. 

아버지 말씀이 매보다 더 아프고 슬프다. 

매를 맞아도 아프지 않고 춥기만 하다. 

어느 틈에 아버지도 안 보이고 친구도 없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생각해보아도 모르겠다. 

모두가 떠난 것인가, 답답해 소리쳐본다. 

귀가 없어진 것일까,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 




어릴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어머니는 키가 자란다고 위로해주셨는데 

그게 사랑 안의 개꿈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머니가 안 계셔서인지 

요즘은 꿈을 꾸면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만나는 사람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개꿈도 많이 늙고 힘이 빠져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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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생애 _ 마종기

2016. 8. 9. 22: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chulsa.kr>




가을의 생애



                                마종기 



젊은 날 실패한 긴 언약이 

가을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던 

한바탕 구절초 꽃 더미로 왔다. 

오늘은 그새 나이든 꽃을 만나 

술 한잔 나누며 간청하리. 



어쩌다 절벽에 서서 센 척도 했지만

불길의 속내를 힘써 다듬기도 했다고 

내 증인으로 나서달라 애걸하리. 

화사했던 밤들도 허영만이 아니었고 

때때로 실수처럼 향기도 품었다고 

확실하게 증언해달라 부탁하리. 



서로를 뒤돌아볼 나이도 되었으니 

이제는 함부로 손댈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 묻어나던 은근한 향기, 

구절초도 회오리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키를 낮춘 

가을이 알려준다.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꽃, 

언덕이 비어 있어 떨고 있지만

네 살이 살아 있어 추운 거다.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예술만이 마지막까지 

죽음과 맞선다고……

한판 승부까지 간다고……



꽃이 가슴을 진하게 잡으며 

말을 남기려다 쓰러진다. 

꽃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었다. 

속사정 알고 있는 구절초 얼굴이 

두 겹 세 겹의 물결로 보이고 

친하던 수호천사가 미소하면서 

가을의 끝막에서 깨어난다. 



몇 줄의 언어가 머리를 털며 

홀연히 내 앞에서 빛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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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종이 _ 마종기

2016. 6. 6. 21:1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kr.freeimages.com






서 있는 종이 



                                        마종기 




한밤에 잠자다 어둠 속에서 불현듯

화려한 시 몇 줄이 나를 흔들어 깨워

불도 켜지 않은 채 침상 종이에 썼던 글. 

아침에 잠 깨어 밤새운 종이를 보니 

설친 글자 하나 보이지 않는 백지였네. 

죽어버린 볼펜이 억울해 눈여겨보아도

희마한 분홍색만 흩어진 자국으로 보인다. 



그래, 이렇게 연한 색을 어디서 본 적이 있지. 

그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던 때였나, 

열심히 보면 피가 조금 밴 부끄러움의 색, 

내가 더 살기로 한 곳에서 맴돌고 있던 색, 

비굴한 계절이 말 걸어오면 주춤거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대다가 남아 있던 색. 

그 색깔 번져 있는 온몸 투신의 시 한 줄, 

어딘지도 모르고 입술 터진 길을 헤맨다. 



빈 종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쓰고 남은 자리에도 

무심히 지나간 이에게도 말해주어야겠다.

아무리 눌러 써도 이해되지 않는 종이에 

숨어서 밤새워 응시하며 서 있는 종이에 

얄팍한 의심 겨우 지탱해주는 녹슨 시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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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바다 _ 마종기

2016. 6. 1. 22:3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myblueday.tistory.com





알렉산드리아의 바다 



                                  마종기 




단 하루뿐이었다. 

지중해의 가벼운 물이 나를 둘러싸고 

해안에 기댄 호텔로 안내한 저녁, 

빛바랜 천 년 소음이 먼지에 젖어 

눅눅한 도시가 절반 정도만 보였다. 

나이 들수록 오래 생각하지 말라고

너무 길면 걷기가 힘들어진다고 

그 여왕은 해변을 걸으며 말해주었지.



잠을 잘 자야 잊는 힘도 생긴다. 

모래 위에 남겨둔 운명은 밀물이 지우고 

수줍게 고개 숙인 해안의 석양도 

잔잔하게 번지는 핏빛의 소식이 될 뿐, 

외로운 자만이 쉽게 털고 떠날 수 있다. 



지중해는 그 옛날부터 기다렸지만

이번에 만난 도시와 바다 사이에는 

불투명한 역사가 쓰레기 되어 병들고 

낡은 돌층계에서는 노래가 갈라지고 

호텔의 틈새 그림자만 마른 인사를 한다. 



목요일 그 하루저녁만이었다. 

늦더위와 파도 소리와 그 앞을 지나는

이집트의 허름만 중년들만 살아 있고 

기원전의 등대나 지진으로 무너진 도서관은 

역사의 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챙긴다. 

추억인 양 한숨 쉬는 먼 알렉산드리아, 

아직도 답신은 도착하지 않고 

그해의 밤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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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심장 _ 마종기

2016. 5. 28. 23:4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www.pixelstalk.net




봄날의 심장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면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사는 소식조차 

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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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사막 2 _ 마종기

2016. 5. 28. 22:46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runch.co.kr 






고비사막 2



                             마종기 



왜 그런지 멀어지기만 한다. 

떨어져 있는 우리 사이가 사막이 되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작게 보인다.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늙고 나른한 모래언덕들이 

허리 굽어 쇠잔한 걸음걸이까지 

부르럽게 안아준다. 내가 

사막에서 무너지며 네게 기댄다. 



초면인데도 옆에 마주 서서 

사막의 남은 온기를 잠옷으로 준다. 

몸의 구석구석이 벌써 포근하게 졸린다. 

자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고비 사막을 덮고 긴 잠에 든다. 



견고한 형식은 마을로 가버리고 

만져도 확실하게 쥐여지지 않는 땅, 

공기까지 가벼워 마음 편히 만날 수가 없다. 

서쪽에는 끝없이 큰 노을이 퍼져 있어 

아무리 기다려도 밤이 오지 않는다. 



주위를 돌아보니 뭐가 그리 바쁜지 

모두들 말없이 떠나고 말았다. 

가고 또 사라지기만 하는 고비 사막에서는 

누구나 혼자라는 것 어차피 알게 되는구나. 

하늘은 끊어지지 않아 춥기만 하고

별은 너무 많아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이러다 죽으라는 말이 환청으로 들린다. 

고개 들어 무작정 멀리 바라보니 

그래도 살아가라는 말이 또 뒤쫓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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