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7. 11:07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약속한 술집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지.
스며들다가 내가 젖어버린 먼 길.
젖어버린 나이여, 오랜 기다림이여,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날들은 모여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리니
이 밤길이 내 끝이라도 후회는 없다.
거칠고 메마른 발바닥의 상처는
인파에 밀려난 자책의 껍질들,
병든 나그네의 발에 의지해 걸어도
개울물 소리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은 추위마저 안심하고 인사하는
구수한 밤의 눈동자가 빛난다.
편안한 말과 얼굴이 섞여 하나가 되는
저 불빛이 우리들의 술집이겠지.
가진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미련의 극치라고 모두들 피하는데
그 세련된 도시를 떠나 여기까지 온
내 몸에 깊이 스며드는 신설동의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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