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The Call) _ 오스 기니스

2016. 10. 10. 19:4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소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지, 즉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찾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삶을 출발할 수 없다. 


부르신 이 없이 소명(부르심)만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소명을 붙잡고 사는 삶이 쉽지만은 않다. 왜나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작점이 개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자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공존할 수 없다. 나를 버리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부르심이 어떠한 대가를 치른 것인지', 확실하게 이해한다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명》은 소명의 정의를 바탕으로 포괄적인 범위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부르심에 마땅한 삶을 알려주고 있다. 소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자라면, 큰 유익이 있을 것 같다. 



  



1. 소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 땅에 살아 남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파괴하게 될 거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것(존재 목적을 찾는 일)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일기』-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이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경계하라. 그분에 대한 헌신의 최대의 경쟁자는 그분을 섬기는 활동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지 그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


 어떤 접근들은 영적인 은사와 천부적인 재능을 모두 발견하려고 시도하지만 재능의 발견을 예배와 귀기울임-이것이 소명의 본질인데-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린다. 그결과 재능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지만 그것이 청지기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이기심으로 흐르게 된다. 

<중략>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서든 좀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차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다."

-몽테뉴(Montaigne)-


"인생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북극성만을 기준으로 삼아 방향을 조정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코 사람의 호의나 미소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당신에게 미소 짓고 계시다면 사람의 미소나 찡그림에는 상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찰스 고든(Charles Gordon) -



12 소명의 공동체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 모든 현대적 추세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부르심은 불가피하게 공동체적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대중의 '회합'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세속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원은 '불러내어진'(called out)이란 의미가 있고 구약 성경의 관점으로는 '불러내어진 백성'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결국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그분께 속한 그분 백성의 회합이다.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따라서 독특하게 개인적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인 신자들의 무더기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한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교회의 공동체성은 기관을 통해 생존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간의 신비로운 연합의 문제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부름받은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교만에 특히 약한데, 그 이유는 군중의 인간적인 칭찬을 멀리하고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살려는 소원 때문이다. 

<중략>

 "진짜 사악하고 음흉한 교만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멸시하고 그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 C.S. Lewis -  


 우리 각자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죄, 즉 홀로 뽐내는 단단한 '자아'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런 은혜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나태함은 또한 무기력하게 소파에 파묻혀 있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나태함은 육체적인 게으름 이상의 것이다. 사실상 나태함은 무기력 상태로 쉽게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극단적인 활동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뿌리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 선, 미의 본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상태, 곧 노골적인 영적 낙담 상태를 의미한다. 나태함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내적으로 낙담한 상태로서, 결국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빠져들게 된다. 


 현대적인 나태함에는 세 가지 주요한 측면이 있는데, <중략> ... 첫 번째는 철학적인 측면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상태, 따라서 영원과 불멸에 대한 믿음도 상실한 상태는 삶 자체의 생명력 고갈로 치닫게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현대 세계의 세속화 과정을 '마법 풀기'라고 묘사했다.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되었던 삶의 마술과 신비가 조직적으로 축소되고 파괴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명에는 성/속, 고상한/저급한, 완전한/허용된, 관조/활동의 구별이 없다. 소명은 심지어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조차 없애 서로 평등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름심에 반응하여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삶을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3.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소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1546년경 미켈란젤로는 성지에 가까운 귀족 친구인 비토리아 콜로나(Vittoria Colonna)를 위해 연필로 "피에타"를 그렸다. 천사가 마리아의 발 앞에서 죽은 예수의 몸을 부축하고 있고, 마리아는 미켈란젤로의 다른 피에타 그림에서처럼 아들을 흔들어 재우는 대신 말없이 경이감에 싸여 두 눈과 손을 하늘로 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똑바로 선 십자가 기둥 위에 단테의 「천국」에서 따온 문장, "얼마나 많은 피를 대가로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를 새겨 넣었다. 이것이 이 그림의 묵상 주제다. 

 얼마나 많은 피가 대가로 지불되었는지, 누구의 피인지, 왜 흘렸는지 등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멈추어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래서 간음을 일삼던 여인은 용서를 받고는 입맞춤과 향수와 눈물로 온통 예수님의 발을 적셨던 것이다. 분수에 넘친 그녀의 헌신은 그보다 더 분수에 넘친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반응이다. 시몬드 베이유가 훌륭하게 표현했듯이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아무것도 당연시 말도록,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도록, 모든 것이 은혜로 넘치도록."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우스운 짓이며,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자기 보호를 포기하는 것은 부조리한 행위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은 신인이신 조롱받은 메시아의 제복을 입기 위해서 선택하는 명백한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은 기쁨도 없이 찡그린 얼굴을 한 금욕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쁨이 충만한 얼굴로 죽어간 사람, 고난받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찬송하며 살아 간 사람들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킨다. 



복음는 우리가 느긋해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대립(antithesis)이 있고,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제자도의 대가가 있으며, 우리가 은폐해서는 안 될 순종에 대한 도전이 있고, 우리가 결코 증발시켜서는 안 될 믿음에 대한 스캔들이 있다. 그러한 진리에 충실하다가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도 좋다. 



 우리는 타이밍에 대한 모든 주장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모든 시대는 도덕성이 타락하고 있다고 느낀다. 학자들은 자기 주장을 ' 큰 분수령'이라고 과정해서 말한다. '위기'는 현대의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항존하는 특징이자 상투어가 되었다. 흔들리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넘어지지는 않으며, 여러 가지 '미래의 만조'는 자그마한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다. 큰 소리로 '전환점'이라고 외쳐지던 것들이 대부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지 못하고, 전환점 운운하는 논의에는 함정이 즐비하다. 



 우리는 '부름받은 존재'다. 누가 감히 이 숭고한 비전에 반하여 우리를 '속박받는 존재'라고 모욕하며, '용기 있는 존재'라고 뻔뻔스럽게 말하거나 '타고난 존재'라는 숙명론을 제기하는가? 하나님의 음성은 들렸으나 형태는 보이지 않았던 그 장엄한 시작에서부터 최후의 부르심 때 그분의 모든 자녀를 향한 계획을 밝히실 절정에 이르기까지, 소명의 특성과 목적은 가장 귀가 멀고 둔감한 자를 제외한 모든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마음과 영혼을 전율케 한다. 

 이것을 깊이 숙고하라. 최후의 부르심이 우리 각자에게 올때 우리가 완전히 소명에 응답했고, 그 도를 좇았으며, 유종의 미를 거둔 모습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진리의 용사'(Valiant-for-Truth)와 같이 마지막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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