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9. 17:1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이병률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과 애틋함이 깃든 글을 좋아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책을 사면 설레이는 맘으로 한 장씩 아껴가면서 읽는다. '끌림(2010)'이 그러했고, '내 옆에 있는 사람(2015)'도 그러했다. 한 번에 다 읽기에는 아까웠으므로, 조금씩 글을 곱씹으며 생각하며 읽었다.
이번에도 설레이는 맘으로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샀고, 아껴 읽을 요량으로 책을 폈다. 근데 어쩌냐. 글들이 잘 읽혀지지 않는다. 글을 읽고 싶었는데, 글이 읽혀지지 않는다, 짜증나게. 그만이 가지고 있는 글의 감성들이 읽혀지지 않는다. 글을 잘쓰는 것과는 별개로, 글을 공감할 수 있게, 나의 이야기인냥 몰입할 수 있게 쓰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병률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이번 책의 58개의 여행 에피소드 중에 쉽게, 물 흘러가듯이 읽혀지는 에피소드가 몇 개 되지 않는다.
글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병률 작가가 마감기한에 맞춰 글을 짜냈어야 했나,
자문하면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일념하에 꾸역꾸역 책을 읽다가 마지막 장을 넘겼다. 참, 재미없게 말이다. 건질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만 남긴다.
8# 나를 덮어주는 사람
이토록 많이 받아서 영영 받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굳어져 버리게 될까 두렵고 어려웠던 사람.
그렇게나마 내 허술한 빈 곳을 가릴 수 있으니 나에게는 축제 같았던 사람.
14# 묻고 싶은게 많아서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 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누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외롭고, 목이 마른 이유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당신이겠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45# 여행을 가서 토끼를 기르겠다고 토끼를 샀다.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토끼는 진한 회색이었다. 고급스런 털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 눈에 띄진 않았다. 토끼를 사고 사료를 사면서 당근도 조금 샀다. 이름을 '삼개월'이라 지을 수 없어 '삼월'이라고 지었다.
<중략>
문제는, 삼월이가 무척이나 외롭다는 생각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삼월이도 그럴 것이었으며, 그러니 내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결국 나는 두 번째 토끼를 또 사고 말았다. 말도 안되게 이번에 산 토끼는 수놈이었다. 좋아하는 11월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이름은 자동적으로 '십일월'이라고 지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전화를 거는데 전화가 먹통이었다. 이빨이 더 나려고 잇몸이 가려웠는지 전화선을 갉아먹은 거였다. "너희들이 끊어놔서 전화가 안 되잖아!"
<중략>
그래, 너희들끼리 잘 해봐라. 나는 그들에게 진정 잘 해주고 싶었으므로 그래 잘 해봐라, 했다. 나는 시 쓰기에 열중했다. 며칠 동안 잡히지 않는 시의 끄덩이를 물고 놓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당근 따위를 씹어 먹으며 지낸 어느 날, 뭔가가 내 발등에 올려졌다. 따듯한 무엇이었다. 몰캉한 무엇이었다.
<중략>
시를 쓰겠다고 며칠 동안 몰두하는 사이, 아무것도 먹을 것을 챙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게 며칠이 지났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49# 마음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 거기에 누가 손 잡아줄 이가 있나요.
<중략>
- 언제는 나에게 손 잘아줄 사람 있었겠습니까?
라고 까칠한 문자를 하려다
- 손 말고 모가지 묶어줄 사람 구합니다.
라고 허튼 문자를 하려다
- 네, 어떻게든 구해야지요.
라고 쓸쓸히, 안간힘을 보태 문자를 보낸다.
57# 이별이었구나
아, 이별이었구나.
나는 돌아와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느라 한 번도 뒷일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이별이 아팠구나. 미안하다. 나, 이토록 텁텁하게 살아서, 정말 미안하다. 음식을 만들면서도 음식에다 감정을 담는 것인데 하물며 나라는 사람, 이렇게 모른척 뻣뻣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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