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2020. 4. 5. 17:3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삶을 진지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진지하고도 사소하며 유치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자가 더 편했던 것 같다. 나의 예민함을 감성적인 여자들이 더 받아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난 여자들이 더 편했다. 20대 시절, 이성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시간 지나고 우리가 결혼 적령기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결혼했을 때, 친구였던 우리의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란 질문과 함께 말이다. 멀어지는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며 나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내 아내가 아무리 친구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친하게 지내면 어떨 것인가... 나는 마음이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지극히 나의 관점이긴 하다만, 내가 싫어하는 건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생각 끝에 결론 내린 것은 결혼한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결혼한 후의 관계는 나름대로 정해놓은 적정선 이후로 반드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와의 약속이라면 깰 수 있다만, 관계가 얽힌 약속이라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키는 법이다. 그렇게 많은 이성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과거 관계의 무게는 축의금으로 대신했다. 참, 이해타산적이지만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은 높이 살만하다고 늘 생각한다.

 

 결혼한 이성 친구 중에 연락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있긴 하다. 허나, 내가 먼저 연락하는 법은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나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친구를 잃어갈수록 감당해야 할 고독함이 증가한다만, 선택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늘 생각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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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020. 3. 11. 22:0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지독한 어려움을 겪고 나면 웬만한 어려움은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다.

 

 지난 며칠간 골머리를 앓게 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시간을 내어 생각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일이긴 했는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맘이 내키지 않았다. 시작하면 나름대로 세워둔 기준을 맞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내심 싫었다. 깐깐한 나를 알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는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고단함 말이다.

 

 마냥 내버려 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일을 시작했고 일이 잘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대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발발 동동 구르다가 새벽 공기를 맞으며 기숙사로 힘없이 되돌아갔던 무의미한 날들이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인생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던, 그 고달팠던 연구원 시절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일이 같잖아 보이기도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지나왔던 고단한 시절에 비하면 지금 이따위 어려움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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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축가

2020. 2. 29. 18:23 삶을 살아내다/당신과 함께

2019년 11월 16일

# 수연이 결혼식 때 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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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1)

2020. 2. 29. 18:13 삶을 살아내다/하나님의 섭리(攝理)

 

#1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 : 71

 

 

고등학교 3학년 수능 100일 전 순간의 혈기로 일으킨 싸움이 내 인생을 나락으로 끌고 갈지,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친구와 싸워서 많이 맞았고 코뼈가 두 동강 났다. 부러진 뼈로 인해 한쪽 콧구멍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기 힘들었다. 코막힘이 두통으로 이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든 건 수치심이었다.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어떻게 수능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하기까지 약 4년간 한 번의 실수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았다. 내가 저지른 사건이기에 그에 관한 결과도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임에 짓눌린 인생은 가벼울 수 없다. 인생에 대한 불만과 패배감, 그리고 상대적 열등감이 자주 나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상황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고 내가 서 있던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만, 인생의 사건을 해석할 지혜는 없었으니 인생에 대한 회의나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러한가'란 질문으로 시작하여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비관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 어찌 인생이 즐거울 수 있었겠는가. 더 불행한 것은 의지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생길 즈음, 내가 믿고 있는 신을 생각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붙잡아 보기로 했다. 

 

학교 앞에 있던 교회에 찾아가 날마다 오후 10시부터 1시간씩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였다. "나를 도와달라,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고집스럽게 한 달 동안 부르짖기만 했었다. 기도의 방법이나 기도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부르짖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아 33:2-3

 

 

무식하게 부르짖기만 했으나,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인생의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어주셨고, 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심적으로 위로해주셨다. 감정적인 부분이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무너진 마음이 회복되고 나서 지난날의 잘못은 이제 더는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흉터로 남아서 내게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 감정을 동요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 방안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결단할 수 있는 의지도 허락하셨다. 결국,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고 수술비 지원을 받아 수술을 진행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수술하고 나서도 육체적 고통이 계속 남아 있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혔던 육체적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만약 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 싸워서 친구에게 맞지 않았더라면, 과연 나는 하나님은 절실하게 찾았을까?" 이 사건이 아니었으면 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의 원하는 길을 따라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난 고통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만한 지혜는 없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내 인생이 이끌어 오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나, 하나님은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신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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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2020. 2. 27. 20:1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 박준, <당신이라는 세상> 중에서 -

 

 

 신천지 교인들이 경북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아래 지방에 살고 있는 동생의 안부가 궁금했다. 걱정 담긴 카톡 문자를 보냈는데 맥락 없는 답장이 되돌아왔다. "형 신천지 아니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함께 지내온 세월의 무게만큼 나를 알아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다. 다만, 우리의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밑받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를 신천지라고 생각한다면, 뭐, 장난이라고 해도, 그 녀석에 대한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답장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에 신천지가 맞냐는 질문에 그러하다고 대답했고, 녀석은 재차 추궁했다. "신천지 어디 지파야?" 나는 말해줄 수 없다고 답장을 했고, 녀석은 그러면 이제 차단하겠다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어이없는 일이었다. 멍하게 앉아 있었다.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이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관계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지속되는 법이다. 녀석에 대한 이해 기반이 흔들렸고, '우리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가'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떠나는 사람을 굳이 잡지 않는다. 더욱이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함께 길을 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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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2020. 2. 15. 23:3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장염때문에 며칠간 앓아 누웠다. 의도치 않게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불쑥 다가온 36살을 생각했다. 나이의 무게에 걸맞는 삶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와 함께 떠올랐던 단어는 '어른'이었다. 나이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좋은 어른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했다.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격렬히 다투는 어른들 틈에 끼여 그들이 과연 어른이 맞는지 의구심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먼 발치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당신처럼 살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좋은 어른에 대해 생각했다. 먼저 떠오른 것은 좋은 어른이 가진 언어의 무게였다. 말의 힘이 있으려면 말의 근거가 되는 행동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좋은 어른이란 어른으로서 언어의 무게를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다. 불현듯 떠오른 것은 지난 세월 낭비된 나의 언어였다. 장난이란 명목하에 내버려진 언어들이 눈에 밟혔다. 좋은 어른이 되려면 먼저 언어를 낭비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결단이 약 기운과 함께 몸 전체에 퍼져갔다.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 아스라이 낭비된 언어들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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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2019. 12. 25. 23:3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굳게 닫고 있었는데, 왜 늦게 왔냐는 날 선 질문에 송곳 같은 대답이 나와버렸다. 당신이 무엇이관대 나의 삶에 관여하려고 하는가. 개인주의의 끝단에서 타인의 개입이 불쾌했다. 나의 삶에 대해 당신은 알 권리가 없다는 전제하에 내뱉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발언이었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이 나의 삶을 침범하지 못하는 그 지점에서 타인을 멍하니 바라본다. 타자와 나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각자 삶에 대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는 뿌리 깊게 박힌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다시 묻게 된다. 

 

 

"우리...  "

 

타인과 돈독한 관계임을 드러낼때 '우리'라는 단어로 친밀함을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자매에게 '우리'란 단어를 이름 앞에 붙여 불렀다. 그 '단어'는 좀 삼가달라는 말과 함께 자매의 표정은 꽤 낯설고 차가웠다.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의례적인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 의례적으로 미안하다는 것은 단어의 부적절성은 이해하겠으나 당신의 태도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언어이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물러선 지점에서 완전히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물러난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인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쓸데 없는 생각만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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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다

2019. 11. 23. 00:43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당신은 어찌해서 나한테 그러시는지요."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나와 같은 행동으로 일관하는 당신을 보면서, 당신은 그러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과 함께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 복잡한 감정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했다. 화가 났고 말이 나오지 않았으며 생각은 쳇바퀴처럼 돌고 또 돌아 한 곳을 맴돌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녁 끼니를 챙겨먹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어리석은 짐승이여.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다. 입장의 온도차로 인해 가끔 오해, 아니 다름을 확인하고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물러선 지점에서 무엇보다 두려운 건 나 자신이다. 10년지기 친구를 처음 만난 사람보다 더 못하게 대하며 모질게 밀어내려고 했던 나를 기억한다. 차갑다못해 얼어버린 냉랭한 가슴으로 일관했던 나를 기억한다. 다시 차가워진 모습으로 이번에도 사랑했던 이들을 등질까봐 내심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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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2019. 10. 5. 10:2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불명확한 것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명확한 기준과 정해진 규칙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며, 변화보다는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한다. 법과 전통을 고수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보수적이다. 그러나 기득권의 뻔뻔함과 무례함을 싫어하며, 기득권의 논리가 부당하다면 모든 절차에 이해와 설명을 요구한다. 해당 지위에 따른 권위는 인정하나, 그 권위로부터 행사되는 부당한 권력은 단호히 거부한다. 납득되지 않는 권위와 부당한 권력과 상당히 예민하다는 측면에서 나는 진보적이다. 결국, 말이 통하는 합리적 보수를 선호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위계질서 체계가 확립된 투명한 진보를 지향한다. 나는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20대 초반부터 중도를 자처했다. 그러한데, 지금 나의 말과 행동을 보자면 과연 정치적 성향에서 중도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해볼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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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파편들(2019년 8월)

2019. 8. 11. 21:11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1 실수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매사에 실수가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실수에 다시 민감해진 것일까. 며칠 전부터 말과 행동의 실수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실수하고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넘기면 가장 좋다만, 실수하고 나서 스스로 말과 행동을 규제하려는 시도가 나의 정서에 좋은 것인지 묻게 된다. 단, 나의 실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다면 당연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늘의 실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반성하고 고칠 필요가 있긴 하다. 성격상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가 극단을 치닫는다. 친하거나 아님 안 친하거나. 친한 사람을 골려주려고 장난으로 존댓말을 한 것이 실수의 발단이었다. 내게 있어 장난은 소통의 수단이긴 하지만, 장난의 정도가 지나치면 피차 곤란하다. 여러 번의 경험을 알고 있지만 요즘 정신을 놓고 살았던지라 무디게 반응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장난으로 시작된 말의 실수, 어차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찝찝했고, 아침부터 계속 마음에 쓰였다. 

 

 

#2 쿨하게, 찌질하게.

엎어진 물이 아니었다. 외부의 약한 충격으로 조금 흔들렸을뿐이다. 요즘 말대로 '쿨'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간혹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있단 말이다. 어떤 행동과 말에 신경이 쓰인다거나 그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거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현재 시점으로는 상황 종료라고 하는 것이 맞을게다.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3 Never Do That Again!

지난날의 어두운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다. 감정을 정직하게 표출하는 것은 좋지만, 침울한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주위 분위기를 경직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답이 없는 질문을 생각하지 말 것. 둘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되 문제의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지 말 것. 셋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를 인정할 것. 나는 분명 약점이 있다. 약점을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취약한 환경에 내 약점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 모든 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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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더 내딛습니다

2019. 8. 5. 23:59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따로 시간을 내어 교회 지체를 만나러 가기는 오래만이었다. 뙤약볕 탓에 등줄기에 땀이 자주 흘렀고 숨 막히는 더위를 피해 그늘로 걸어 다녔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초행길이라 자주 길을 헤맸고 멍하니 지도를 들여다보곤 했다.  

 

지인 부부를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일상의 수다를 떠는, 다른 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의 연속이었다. 2살 배기 아이의 징징거림도 낯설지 않았다. 자주 일상의 특별함을 잊어버린다. 일상의 기억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진다면 삶은 충분히 더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하기에, 더 좋은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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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m down!

2019. 7. 29. 23:3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그건 아니죠"

 

불쑥 치고 들어갔다. 굳이 과장님의 말을 자를 필요까진 없었다. 몇 번의 말을 더 내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탓일까, 꽤 날카로워졌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거늘, 기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언어를 낭비했다. 아니, 언어의 낭비라기보다 날 선 언어의 향연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게다.

 

"Calm down!"

 

비판적인 시각과 날카로운 지적질. 오랜만에 마주한 본연의 내 모습에 새삼 놀랐다. '아, 나 이런 사람이었지.' 놀라기도 했지만, 모든 대화가 끝난 후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쓸데없이 날카로워진 내 모습이 마냥 웃겼다. 한동안 장난만 치던 삶에 예기치 못했던 날카로움은 일상의 작은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작은 파장이 참된 나를 찾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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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019. 7. 27. 22:4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뙤약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뭐 어쩌겠어" 

 

몇 가지만 간단하게 확인하고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이전 대화 때와는 다른 뉘앙스를 감지했다. 순간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언어의 일관성이 없다'.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꽤 깔끔한 성격 탓에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다. 나도 피곤하지만, 나를 대하는 상대방의 피곤함도 만만치 않으리라.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갔지만 결국, 서로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놈의 생각을 또 한다고', 마음의 소리가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례한 듯 보이지만 마지막까지 친절해야 한다.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피차 기분이 상하면 아니되지 않은가. 

 

돌아오는 길에 예민하게 반응한 내게 "왜 그랬어?"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뭐, 그럴 수도 있잖아. 괜찮아." 그래,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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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2018) - 복수극일까, 아님 화해극일까

2019. 6. 15. 01:42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감독 : 마틴 맥도나, 주연 : 프란시스 맥도맨드, 우디 해럴슨, 샘 록웰

 

 

1. 배경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주리 주 에빙이다. 에빙(ebbing)은 썰물(ebb)에 "ing"를 붙여서 만든 합성어로서, 썰물처럼 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황폐하고 후미진 가상의 도시를 의미한다.

 

2. 설정

 영화의 설정은 한 개인이 공권력을 상대로 싸워서 이겨내는 것이다(밀드레드 vs 윌러비).  주인공인 밀드레드 한 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영화는 밀드레드와 딕슨 두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밀드레드와 딕슨과 연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질문은 던져야 한다. "왜 딕슨은 처단의 대상이 아니라 처단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3. 반복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두번 반복된다. 3개의 billboard의 각 문구는 윌러비가 쓴 3개의 편지와 의미가 이어진다. Billboard 첫 번째 문구 "Raped while dying(강간당하면서 죽어갔다)"는 밀드레드 딸(여자)의 죽음을 의미이다. 처음으로 윌러비가 아내에게 쓴 편지는 자기 죽음에 대한 설명이다. 즉, 반복되는 첫 번째 내용은 "죽음"이다. 두 번째 문구 "No arrested(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는 두 번째 편지에 적혀있는 밀드레드가 체포되지 않은 이유와 이어진다. 세 번째 문구 "How come cheif willoughby(윌러비 서장은 왜 가만히 있는가?)"는 세 번째 편지에서 딕슨에게 묻는 질문과 같다. 

 중의적 단어도 사용된다. 밀드레드는 죽은 딸과 죽어가는 서장, 그리고 무모한 사슴에게 "baby"라고 부른다. 죽어가는 대상들에게 동일한 연민을 드러내는 밀드레드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딕슨의 행동에 반복되는 행동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시비를 거는 것이다. 난쟁이게 시비를 걸고 나중에 범인(밀드레의 딸을 죽인 자)을 저지는 남자에게 시비를 건다. 두 번째는 방화이다. Billboard 불에 탔는데, 방화를 한 것인 딕슨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지만 정황상 딕슨이라고 볼 수 있다. 방화에 대한 첫 번째 행동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경찰서에 불이 났을 때 딕슨은 범인에 대한 자료를 불속에 지켜낸다. 다시 말하면, 두 번째 행동은 첫 번째 행동에 대한 속죄이다. 

 

4. 결말 

영화의 결말은 밀드레드와 딕슨이 연합해서 범인을 잡으러 가는 것이다. 결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혈통적 가족인 아닌 윤리적 가족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마지막을 준비할 때, 혈육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절연) 혈육관계의 대체자로 서를 선택하는 것이다. 둘째, 세대 간의 결합이다. 딸의 어머니인 밀드레드와 노모의 아들 딕슨의 결합, 앞에서 말한 윤리적 가족의 연합이다. 여기서,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이다. 딸의 죽음 앞에서 밀드레드의 남편은 무력하다. 존재하지만, 쓸모없는 존재다. 딕슨의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영화는 결국 복수극인가? 질문할 내용은 많다. 그들은 공권력을 대신해서 자신들이 범죄자를 처단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정의를 위한 그들의 힘의 연합이 정말 정의로운가?" "누가 응징할 수 있으며, 응징의 자격은 무엇인가?

영화는 여러가지 질문은 남겨둔다. 결국 그에 대한 대답은 관객들의 몫이다.

 

 

* 이 글은 이동진의 라이브톡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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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살, 인생에 대하여

2019. 3. 10. 22:01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35살, 인생에 대하여

 

 

 

 

20대 후반, 아프리카에서 전문인 선교사로 사역을 하겠다는 인생 계획을 세웠다. 20대 후반부터 전문인 선교사 파송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서 35살에는 선교사로 나의 삶을 헌신하겠다는 큰 포부(?)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몇 가지 질문들이 생긴다. 나는 왜 그런 결심을 하고 선교사의 꿈을 꾸었을까? 그 마음의 중심이 무엇이었으며, 꿈의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과연 누구를 위한 꿈이었는가? 나 아님 하나님?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1절 후반~4절

 

 

나는 현재 35살이고, 경기도 소재 공기업에 취업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인생 계획과는 무관한 삶이다. 여유와 나태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지독한 개인주의에 빠져산다. '당신은 나와 다르다'는 명제를 자명한 진리로 믿으며 타인의 삶에 개입하기를 극도로 꺼린다.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을 얻고 난 후에 신앙의 방향을 잃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었는가...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은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 : 10

 

 

아프리카에서 1년동안 지낼 때 '무익한 종'이 되길 원했다. 맡겨진 일이 어떠하든 마땅히 감당해야 할 종의 모습으로 묵묵히 일만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원했던 것 같다. 제2 언어의 진보, 전문 선교사로서의 경력, 외국 경험... 불순한 동기로 시작된 선교사의 삶. 결국 1년만에 무너졌다.

 

1년의 선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방황했고, 다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거쳐 다시 목표를 잡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생활도 만만치 않았고, 마지막 학기에는 하나님의 침묵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며 반문했고, 인생은 제 힘으로 발버둥쳐야 한다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꾸역꾸역 졸업했지만, 암흑 같았던 취업 준비 기간들. 하나님을 찾기는 했지만, 그저 하소연 하기위한 대상이 필요했다. 자기연민에 빠진 수많은 날들.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지나간 삶에서 하나님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저 하나의 수단이었을까... 

 

과거에 매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자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하나님 섭리의 측면에서 나는 왜 여기 있는지,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작년 한 번의 큰 위기에 봉착했고,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궤도를 이탈할 뻔 했는데 다행히 하나님은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허락하셨다.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살아보니 나름 일리있는 일다. 그래서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남은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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