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8. 23:0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누나는 내게 참 고마운 존재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분명 부모님의 보살핌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누나의 든든한 후원과 보살핌이 있었다. 삶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보다 우리 누나가 먼저 떠오른다. 늘 책을 붙들고 있는 누나를 따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나의 노트에 적힌 시를 보면서 시를 읽는 재미를 깨달았다. 누나가 쓴 수려한 글을 보고 글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어줍잖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영어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도 누나가 다니던 영어 학원을 소개해줬기 때문이다. 대학교 신문사도 누나의 권유로 시작했고, 선교단체로 누나가 하라고 해서 잠시 참석했던 것이다. 삶의 여정을 되새겨보면 누나가 했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라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새삼 느끼는 건 누나가 내게 끼친 영향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늦은 나이까지 맘 놓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누나가 사회인으로서 일찍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우리집안 형편상 누나의 학비까지 마련해야하는 상황이었다면 대학원 공부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누나는 좋지 않는 집안 형편에도 바르게 잘 컸다. 내가 사고를 쳐서 집안을 시끄럽게 한 적은 많지만 누나가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일은 없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공부를 곧 잘했고, 아니, 공부를 엄청 잘했고, 다른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때가 많았다. 음악, 미술, 운동,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고 대학생이 되어 직장인이 될 때까지 한번도 어그러지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재다능한 누나를 시기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어렸을 때는 무엇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별로 없었던 터라 누나는 나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지, 전혀 다른 수준의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누나는 내가 비교할 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우리 누나'와 같은 누나를 보지 못했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정말 우리 누나처럼 동생을 잘 챙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세월이 지나 누나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누나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줄었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져서 왕래가 더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누나의 존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은 아직도 유효하다. 누나한테 받은 것이 많은데 아직 제대로 해준 게 별로 없다. 기회가 될때마다 조금씩 더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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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6. 23:2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한번 휘청거리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담담해지는 시간이 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해 누구도, 어떤 환경도 탓하지 않고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단해지는 기분이기도 하다. 정말 단단해졌는지는 다시 어려운 일을 만나봐야 알겠지만, 이번 일은 잘 거쳐왔다는 생각이 크다. 아팠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누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나 자신이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신념을 흩트리지는 말아야 한다, 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게, 나다운 모습이란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Good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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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5. 17:3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삶을 진지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진지하고도 사소하며 유치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자가 더 편했던 것 같다. 나의 예민함을 감성적인 여자들이 더 받아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난 여자들이 더 편했다. 20대 시절, 이성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시간 지나고 우리가 결혼 적령기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결혼했을 때, 친구였던 우리의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란 질문과 함께 말이다. 멀어지는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며 나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내 아내가 아무리 친구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친하게 지내면 어떨 것인가... 나는 마음이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지극히 나의 관점이긴 하다만, 내가 싫어하는 건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생각 끝에 결론 내린 것은 결혼한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결혼한 후의 관계는 나름대로 정해놓은 적정선 이후로 반드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와의 약속이라면 깰 수 있다만, 관계가 얽힌 약속이라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키는 법이다. 그렇게 많은 이성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과거 관계의 무게는 축의금으로 대신했다. 참, 이해타산적이지만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은 높이 살만하다고 늘 생각한다.
결혼한 이성 친구 중에 연락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있긴 하다. 허나, 내가 먼저 연락하는 법은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나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친구를 잃어갈수록 감당해야 할 고독함이 증가한다만, 선택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늘 생각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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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11. 22:0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지독한 어려움을 겪고 나면 웬만한 어려움은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다.
지난 며칠간 골머리를 앓게 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시간을 내어 생각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일이긴 했는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맘이 내키지 않았다. 시작하면 나름대로 세워둔 기준을 맞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내심 싫었다. 깐깐한 나를 알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는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고단함 말이다.
마냥 내버려 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일을 시작했고 일이 잘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대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발발 동동 구르다가 새벽 공기를 맞으며 기숙사로 힘없이 되돌아갔던 무의미한 날들이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인생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던, 그 고달팠던 연구원 시절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일이 같잖아 보이기도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지나왔던 고단한 시절에 비하면 지금 이따위 어려움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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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9. 18:23 삶을 살아내다/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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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9. 18:13 삶을 살아내다/하나님의 섭리(攝理)
#1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 : 71
고등학교 3학년 수능 100일 전 순간의 혈기로 일으킨 싸움이 내 인생을 나락으로 끌고 갈지,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친구와 싸워서 많이 맞았고 코뼈가 두 동강 났다. 부러진 뼈로 인해 한쪽 콧구멍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기 힘들었다. 코막힘이 두통으로 이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든 건 수치심이었다.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어떻게 수능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하기까지 약 4년간 한 번의 실수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았다. 내가 저지른 사건이기에 그에 관한 결과도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임에 짓눌린 인생은 가벼울 수 없다. 인생에 대한 불만과 패배감, 그리고 상대적 열등감이 자주 나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상황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고 내가 서 있던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만, 인생의 사건을 해석할 지혜는 없었으니 인생에 대한 회의나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러한가'란 질문으로 시작하여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비관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 어찌 인생이 즐거울 수 있었겠는가. 더 불행한 것은 의지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생길 즈음, 내가 믿고 있는 신을 생각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붙잡아 보기로 했다.
학교 앞에 있던 교회에 찾아가 날마다 오후 10시부터 1시간씩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였다. "나를 도와달라,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고집스럽게 한 달 동안 부르짖기만 했었다. 기도의 방법이나 기도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부르짖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아 33:2-3
무식하게 부르짖기만 했으나,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인생의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어주셨고, 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심적으로 위로해주셨다. 감정적인 부분이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무너진 마음이 회복되고 나서 지난날의 잘못은 이제 더는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흉터로 남아서 내게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 감정을 동요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 방안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결단할 수 있는 의지도 허락하셨다. 결국,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고 수술비 지원을 받아 수술을 진행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수술하고 나서도 육체적 고통이 계속 남아 있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혔던 육체적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만약 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 싸워서 친구에게 맞지 않았더라면, 과연 나는 하나님은 절실하게 찾았을까?" 이 사건이 아니었으면 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의 원하는 길을 따라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난 고통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만한 지혜는 없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내 인생이 이끌어 오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나, 하나님은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신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
2020. 2. 27. 20:1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 박준, <당신이라는 세상> 중에서 -
신천지 교인들이 경북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아래 지방에 살고 있는 동생의 안부가 궁금했다. 걱정 담긴 카톡 문자를 보냈는데 맥락 없는 답장이 되돌아왔다. "형 신천지 아니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함께 지내온 세월의 무게만큼 나를 알아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다. 다만, 우리의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밑받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를 신천지라고 생각한다면, 뭐, 장난이라고 해도, 그 녀석에 대한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답장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에 신천지가 맞냐는 질문에 그러하다고 대답했고, 녀석은 재차 추궁했다. "신천지 어디 지파야?" 나는 말해줄 수 없다고 답장을 했고, 녀석은 그러면 이제 차단하겠다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어이없는 일이었다. 멍하게 앉아 있었다.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이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관계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지속되는 법이다. 녀석에 대한 이해 기반이 흔들렸고, '우리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가'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떠나는 사람을 굳이 잡지 않는다. 더욱이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함께 길을 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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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5. 23:3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장염때문에 며칠간 앓아 누웠다. 의도치 않게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불쑥 다가온 36살을 생각했다. 나이의 무게에 걸맞는 삶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와 함께 떠올랐던 단어는 '어른'이었다. 나이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좋은 어른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했다.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격렬히 다투는 어른들 틈에 끼여 그들이 과연 어른이 맞는지 의구심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먼 발치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당신처럼 살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좋은 어른에 대해 생각했다. 먼저 떠오른 것은 좋은 어른이 가진 언어의 무게였다. 말의 힘이 있으려면 말의 근거가 되는 행동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좋은 어른이란 어른으로서 언어의 무게를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다. 불현듯 떠오른 것은 지난 세월 낭비된 나의 언어였다. 장난이란 명목하에 내버려진 언어들이 눈에 밟혔다. 좋은 어른이 되려면 먼저 언어를 낭비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결단이 약 기운과 함께 몸 전체에 퍼져갔다.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 아스라이 낭비된 언어들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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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5. 23:3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굳게 닫고 있었는데, 왜 늦게 왔냐는 날 선 질문에 송곳 같은 대답이 나와버렸다. 당신이 무엇이관대 나의 삶에 관여하려고 하는가. 개인주의의 끝단에서 타인의 개입이 불쾌했다. 나의 삶에 대해 당신은 알 권리가 없다는 전제하에 내뱉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발언이었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이 나의 삶을 침범하지 못하는 그 지점에서 타인을 멍하니 바라본다. 타자와 나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각자 삶에 대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는 뿌리 깊게 박힌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다시 묻게 된다.
"우리... "
타인과 돈독한 관계임을 드러낼때 '우리'라는 단어로 친밀함을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자매에게 '우리'란 단어를 이름 앞에 붙여 불렀다. 그 '단어'는 좀 삼가달라는 말과 함께 자매의 표정은 꽤 낯설고 차가웠다.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의례적인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 의례적으로 미안하다는 것은 단어의 부적절성은 이해하겠으나 당신의 태도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언어이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물러선 지점에서 완전히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물러난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인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쓸데 없는 생각만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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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3. 00:43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당신은 어찌해서 나한테 그러시는지요."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나와 같은 행동으로 일관하는 당신을 보면서, 당신은 그러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과 함께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 복잡한 감정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했다. 화가 났고 말이 나오지 않았으며 생각은 쳇바퀴처럼 돌고 또 돌아 한 곳을 맴돌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녁 끼니를 챙겨먹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어리석은 짐승이여.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다. 입장의 온도차로 인해 가끔 오해, 아니 다름을 확인하고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물러선 지점에서 무엇보다 두려운 건 나 자신이다. 10년지기 친구를 처음 만난 사람보다 더 못하게 대하며 모질게 밀어내려고 했던 나를 기억한다. 차갑다못해 얼어버린 냉랭한 가슴으로 일관했던 나를 기억한다. 다시 차가워진 모습으로 이번에도 사랑했던 이들을 등질까봐 내심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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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5. 10:2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불명확한 것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명확한 기준과 정해진 규칙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며, 변화보다는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한다. 법과 전통을 고수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보수적이다. 그러나 기득권의 뻔뻔함과 무례함을 싫어하며, 기득권의 논리가 부당하다면 모든 절차에 이해와 설명을 요구한다. 해당 지위에 따른 권위는 인정하나, 그 권위로부터 행사되는 부당한 권력은 단호히 거부한다. 납득되지 않는 권위와 부당한 권력과 상당히 예민하다는 측면에서 나는 진보적이다. 결국, 말이 통하는 합리적 보수를 선호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위계질서 체계가 확립된 투명한 진보를 지향한다. 나는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20대 초반부터 중도를 자처했다. 그러한데, 지금 나의 말과 행동을 보자면 과연 정치적 성향에서 중도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해볼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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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1. 21:11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1 실수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매사에 실수가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실수에 다시 민감해진 것일까. 며칠 전부터 말과 행동의 실수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실수하고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넘기면 가장 좋다만, 실수하고 나서 스스로 말과 행동을 규제하려는 시도가 나의 정서에 좋은 것인지 묻게 된다. 단, 나의 실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다면 당연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늘의 실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반성하고 고칠 필요가 있긴 하다. 성격상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가 극단을 치닫는다. 친하거나 아님 안 친하거나. 친한 사람을 골려주려고 장난으로 존댓말을 한 것이 실수의 발단이었다. 내게 있어 장난은 소통의 수단이긴 하지만, 장난의 정도가 지나치면 피차 곤란하다. 여러 번의 경험을 알고 있지만 요즘 정신을 놓고 살았던지라 무디게 반응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장난으로 시작된 말의 실수, 어차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찝찝했고, 아침부터 계속 마음에 쓰였다.
#2 쿨하게, 찌질하게.
엎어진 물이 아니었다. 외부의 약한 충격으로 조금 흔들렸을뿐이다. 요즘 말대로 '쿨'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간혹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있단 말이다. 어떤 행동과 말에 신경이 쓰인다거나 그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거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현재 시점으로는 상황 종료라고 하는 것이 맞을게다.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3 Never Do That Again!
지난날의 어두운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다. 감정을 정직하게 표출하는 것은 좋지만, 침울한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주위 분위기를 경직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답이 없는 질문을 생각하지 말 것. 둘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되 문제의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지 말 것. 셋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를 인정할 것. 나는 분명 약점이 있다. 약점을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취약한 환경에 내 약점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 모든 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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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5. 23:59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따로 시간을 내어 교회 지체를 만나러 가기는 오래만이었다. 뙤약볕 탓에 등줄기에 땀이 자주 흘렀고 숨 막히는 더위를 피해 그늘로 걸어 다녔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초행길이라 자주 길을 헤맸고 멍하니 지도를 들여다보곤 했다.
지인 부부를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일상의 수다를 떠는, 다른 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의 연속이었다. 2살 배기 아이의 징징거림도 낯설지 않았다. 자주 일상의 특별함을 잊어버린다. 일상의 기억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진다면 삶은 충분히 더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하기에, 더 좋은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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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29. 23:3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그건 아니죠"
불쑥 치고 들어갔다. 굳이 과장님의 말을 자를 필요까진 없었다. 몇 번의 말을 더 내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탓일까, 꽤 날카로워졌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거늘, 기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언어를 낭비했다. 아니, 언어의 낭비라기보다 날 선 언어의 향연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게다.
"Calm down!"
비판적인 시각과 날카로운 지적질. 오랜만에 마주한 본연의 내 모습에 새삼 놀랐다. '아, 나 이런 사람이었지.' 놀라기도 했지만, 모든 대화가 끝난 후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쓸데없이 날카로워진 내 모습이 마냥 웃겼다. 한동안 장난만 치던 삶에 예기치 못했던 날카로움은 일상의 작은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작은 파장이 참된 나를 찾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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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27. 22:4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뙤약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뭐 어쩌겠어"
몇 가지만 간단하게 확인하고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이전 대화 때와는 다른 뉘앙스를 감지했다. 순간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언어의 일관성이 없다'.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꽤 깔끔한 성격 탓에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다. 나도 피곤하지만, 나를 대하는 상대방의 피곤함도 만만치 않으리라.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갔지만 결국, 서로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놈의 생각을 또 한다고', 마음의 소리가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례한 듯 보이지만 마지막까지 친절해야 한다.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피차 기분이 상하면 아니되지 않은가.
돌아오는 길에 예민하게 반응한 내게 "왜 그랬어?"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뭐, 그럴 수도 있잖아. 괜찮아." 그래,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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