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4. 21:5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33쪽
내과와 외과를 구분 짓는 이유가 무엇이든, 외과를 업으로 삼는 우리의 일상은 갈라지고 짓이겨진 살과 부서진 뼈와 장기들, 끊어진 신경과 어긋난 조직, 솟구치는 핏물 속에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는 수술이 좋았고 수술방에 감도는 서늘한 감촉을 사랑했다.
181쪽
늘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난 그 개별적인 죽음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221쪽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극도로 나쁠 때 의사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환자가 살아나도 공은 제 몫이 되지 않고, 환자가 명을 달리하면 그 책임은 마지막까지 환자를 붙들고 있던 의사가 오롯이 져야 한다. 그것이 이 바닥의 오랜 진리다. 석 선장이 살 가능성은 희박했고, 최악의 경우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301쪽
사람을 죽이고자 한 칼이 살을 가르고 들어간 끝에, 사람을 살리려는 칼이 닿지 못하면 수술은 깨끗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환자는 죽는다. 자상의 범위와 깊이가 심해 기관지를 뚫으면 그 역시 환자의 숨은 쉽게 달아나고 만다.
344쪽
탈락 소식이 있은 다음 날 한 보직교수가 나를 불렀다. 보직교수의 굳은 표정 위에 낭패와 침통함이 흘렀다. 이마의 미세한 주름에는 노기가 서려 이었다. 아주대학교병원의 탈락은 그의 임기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무의미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탈락'이 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나는 듣기만 했다. 창가에 늘어진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는 높이가 맞지 않았다.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회식빛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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