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0. 20:3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47쪽
실상은 답답하고 지루한 긴 호흡으로 환자를 살펴야 하고, 그런 중에 더없이 비루한 현실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외상외과의 일이다.
112쪽
나는 80미터 고도에서 장비를 짊어진 채 점 하나를 향해 뛰어내렸다. 중력과 하향풍에 의해 가중된 장비의 무게가 강하용 하네스를 감싼 벨트를 따라 어깨뼈로 파고들었다. 오른쪽 어깨가 비명을 질렀고, 통증은 어깨뼈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부서진 어깨를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 훈련을 시작해서는 안 됐다. 나는 머리끝과 발끝으로 번져가는 통증을 없는 것으로 삼았다. 내 뒤를 따라 김태연이 뛰어내렸다.
127쪽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다지기 위한 의과대학 시절의 교육 과정은 살인적이다. 학업의 양마저 주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에 의과대학 시절은 한계에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 값으로 삼아 겸손해져야 하는 때다.
190쪽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사하다는 반응은 기대하면서 외상외과 의사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위기에 빠진다. 그저 먹고살려고 하는 일일뿐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242쪽
의사라면 말술을 먹고 정신을 놓아도 다른 의사에게 함부로 욕하지 않는다. 거짓과 비방으로 가득 찬 그을 공개적으로 뿌려대는 짓 또한 하지 않는다. 의료계 바닥은 신문지 한 장 펼쳐놓은 것마냥 좁아서 그 같은 짓을 아무에게나 잘못하면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술기운은 술기운을 발휘할 만할 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기 좋은 상황에서 발휘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욕설을 들으며 내 비루한 위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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