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_ 막스 베버

2020. 10. 31. 20:47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해제 9쪽

이 "자본주의 정신"은 16세기와 17세기에 영국과 네델란드와 식민지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칼뱅주의, 감리교, 침례교, 메노파, 경건주의, 퀘이커교 등과 같은 개신교가 지니고 있던 "윤리"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12쪽

시장에서 재화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환, 기업 활동과 가사 활동의 분리, 복잡한 회계방식의 발달, 노동과 작업장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근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자유민이고, 조직된 기업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상시적으로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15쪽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개개인들만으로는 이 거대하고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동력에 의해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고 노동과 자본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지적한다. 

 

17쪽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을 "종교"에서 찾은 것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한 번 시도해 본 것이 결코 아니었고, 도리어 당시 독일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던 견해, 즉 종교적인 신념은 삶 전체는 물론이고 노동 습관과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19쪽

중세 가톨릭은 상인과 기업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기보다는 이윤 추구를 통한 부의 축적을 더 중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위태롭게 한 자들이었고, 형제애를 명하는 기독교 윤리를 어기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상인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중략>

루터는 하느님은 개개인의 삶과 소명을 미리 확고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서 재화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죄악된 것이라고 보았다.

 

20쪽

청교도는 체계적인 노동, 부의추구, 덕 있는 행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활동이 아니라 섭리적인 활동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노동을 신성시한 것이었다.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노동이 삶의 목적이라고 설파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유명한 청교도 성직자였던 리처드 백스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공리로 받아들여서, 노동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일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노동이 아니라 일생 동안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행하는 노동을 하느님이 "명령했다"고 설파했다. 또한, 직업 노동은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고, 모든 이기적인 욕망도 다스려 줌으로써, 삶 속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의 실천에도 큰 유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예정론에 수반되는 지나친 의심과 불안과 도덕적인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고, 자신이 구원받은 자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직업 노동은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22쪽

 16세기와 17세기에 금욕주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예정론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있는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지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예정이 아무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자신이 구원으로 예정한 자들에게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베풀고 도울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구원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다음과 같은 것들을 구원을 표지들로 규정하게 되었다. 

 첫 번째 구원의 표지는 "조직적인 노동"이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이미 아주 중요하고 신성한 것으로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신자가 "택함 받은 자"로서 구원으로 예정된 자임을 보여주는 표지와 관련한 논의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보장받았다. 조직적인 노동이 구원의 표지라는 사상은 불안감에 어쩔 줄 모르는 신자들을 지도해야 했던 목회자들이 직면한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생겨났다. 직업 노동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해내게 위해서는 비상하고 극단적인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었는데,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신앙을 갖고 있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단한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는 노동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략>

 두 번째 구원의 표지는 "부의 축적과 성공적인 이윤 획득"이었다. 청교도 성직자였던 벡스터는 "부의 획득이 직업 소명 안에서의 노동의 열매일 때는 하느님의 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손길이 경건한 자들에게 역사해서 만들어 낸 열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임을 보여주는 표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역사해서 열매를 맺은 것이라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런 이유에서 당연히 사업가나 상인인 신자들은 이윤 추구를 통해 물직적으로 성공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신이 택함 받은 자라를 것을 확인받고자 했다. <중략>

 세 번째 구원의 표지는 "성화된 삶과 덕 있는 행실"이었다. "덕 있는 행실"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죄에 끌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어려운 일임이 분명했다. 육체의 욕망들을 다스려서 변함없이 하느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절제가 요구되었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하느님을 기쁘게 할 만한 "덕 있는 행실"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미 예정된 구원이나 멸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스터를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그러한 "덕 있는 행실"로 이미 예정된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런 행실을 하려면 하느님의 은혜와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런 행실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구원 받은 자가 틀림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명령들에 따라 자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지족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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