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_ 마종기

2016. 8. 25. 20:0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uecys.tistory.com>




기적



                             마종기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고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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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골증 _ 마종기

2016. 8. 23.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http://m.blog.naver.com/fliesbegone/90194182193>



골다골증 



                           마종기 




1


당신의 골수를 열 달이나 받아먹고

어머니, 내가 생겨났습니다. 

동생들도 당신 뼈에 구멍만 뚫어 

해 지난 갈대같이 속 빈 육신, 

골다골증으로 늙으신 어머니. 

당신 뼈가 얼마나 가벼워졌으면

바람까지 들락거리는 큰길 사이로 

먼 데 어디 날아가실 준비까지 하시는지. 



2


     나는 덱사 스캔과 간단한 숫자 계싼으로 수많은 

골다골증을 진단해주고 돈을 벌었다. 당신의 뼈에는

5천 개의 구멍, 당신의 살에는 8천개의 구멍. 당신은 

구멍 난 풍선이나 타이어처럼 매일 몸이 줄어들고 목

숨의 생기도 빠져나간다. 정신이 누추해져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뼈들은 답답해서 자기 가슴에 구멍을

뚫고, 신산한 세상살이의 대못과 시달림. 아파서 못을 

뺀 자리에 남아도는 피투성이 구멍들.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 나도 모든 것을 덮을 때가 되었다. 

돌아보면 구멍 많은 당신도 가엾고

바닥 터진 내 지난날도 가엾다. 

숨지 마라, 죄지은 지상의 모든 구멍들

암, 다시 보면 세상에 가엾지 않은 게 없지. 



벌거벗은 뼈들이 추위를 더 느끼는가. 

의과대학 해부학 시간 사람의 뼈들

동맥도 정맥도 더 이상 도착하지 않고

내 마른 손바닥만 핏빛으로 적시던

미세해진 그대 몸의 온기 속에서 

빈 뼈가 서로 만나 불 지피던 날들. 



뼈가 운다. 운율 맑은 피리 되어 

비 내리는 어두움에 외톨이로 운다. 

얅고 가늘어진 뼈 대책 없이 부러지고 

안타까웠던 집착도 형별만으로 기억될 뿐, 

더 기다릴 명분도 신음 소리 하나로 떠나고 

뼈를 태워 재가 되어 내가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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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일기 2-파티마 성지에서 _ 마종기

2016. 8. 23. 19:0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og.naver.net/limestreet11>



포르투갈 일기 2

- 파티마 성지에서 


                                 마종기 



기적이 보고 싶어 

찾아간 것은 아니다.

희고 밝은 호흡의 감촉이 

내게는 벌써 기적들이었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광장에서 무릎을 꿇었다. 

뜨겁고 두려웠던 모든 열정이 

긴 사연을 간곡히 말하기에

내가 켠 촛불은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 숙인 내 부끄러움의 비명, 

당신밖에 들은 사람은 없다. 



젊어서는 아무나 좋아했고

나이 좀 들어 조국을 떠난 뒤부터는

왠지 하나씩 자꾸 잃기만 했다. 

주위가 추워지고 창백해지면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 여기 왔다가 간다. 

의지와 표상의 세상은 벌써 가뭄에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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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꿈 _ 마종기

2016. 8. 9. 23:0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ackjack0919.deviantart.com>




개꿈

- 친구 김치수의 부음을 들은 뒤 


                                          

                                        마종기 



가까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서둘러 문상 가는 길에 길을 잃었다. 

헤매 다니다가 날이 어느새 어둡고 

캄캄 칠흑 같은 밤에 길도 안 보이는데 

풀 죽어 내 쪽으로 오는 다른 친구를 만났다. 

좋은 글을 쓰는 말수 적은 이 친구는 

문상 대신 배를 타고 이민을 간단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 가방을 지고 있다. 

한밤에 더구나 비까지 내리는 이 시간에 

어디로 왜 이민을 가느냐고 막아섰더니 

친구들 하나 둘 죽고 돌아가며 아파서 

가슴이 시려 살기가 힘들어서 간단다. 

목이 답답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개꿈 속에서 개 모습으로 한숨을 쉰다. 




이민 가는 친구가 사라진 어두운 쪽에서 

눈에 익은 대머리 한 사람이 다가온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리운 내 아버지다. 

반가운 아버지는 나를 보자 매를 내리신다. 

젋었던 날 자주 맞았던 그 대나무 담뱃대로 

반가운 마음 때문인가, 매가 아프지 않다.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얼굴이지만 

밤새도록 매를 내려주셨으면 좋겠다. 

친구 하나 살리지 못하는 네가 무슨 의사냐, 

이민 가려는 가까운 이를 말리지도 못하는 게 

무슨 벗이고 무슨 시인이더냐. 

아버지 말씀이 매보다 더 아프고 슬프다. 

매를 맞아도 아프지 않고 춥기만 하다. 

어느 틈에 아버지도 안 보이고 친구도 없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생각해보아도 모르겠다. 

모두가 떠난 것인가, 답답해 소리쳐본다. 

귀가 없어진 것일까,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 




어릴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어머니는 키가 자란다고 위로해주셨는데 

그게 사랑 안의 개꿈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머니가 안 계셔서인지 

요즘은 꿈을 꾸면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만나는 사람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개꿈도 많이 늙고 힘이 빠져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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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생애 _ 마종기

2016. 8. 9. 22: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chulsa.kr>




가을의 생애



                                마종기 



젊은 날 실패한 긴 언약이 

가을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던 

한바탕 구절초 꽃 더미로 왔다. 

오늘은 그새 나이든 꽃을 만나 

술 한잔 나누며 간청하리. 



어쩌다 절벽에 서서 센 척도 했지만

불길의 속내를 힘써 다듬기도 했다고 

내 증인으로 나서달라 애걸하리. 

화사했던 밤들도 허영만이 아니었고 

때때로 실수처럼 향기도 품었다고 

확실하게 증언해달라 부탁하리. 



서로를 뒤돌아볼 나이도 되었으니 

이제는 함부로 손댈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 묻어나던 은근한 향기, 

구절초도 회오리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키를 낮춘 

가을이 알려준다.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꽃, 

언덕이 비어 있어 떨고 있지만

네 살이 살아 있어 추운 거다.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예술만이 마지막까지 

죽음과 맞선다고……

한판 승부까지 간다고……



꽃이 가슴을 진하게 잡으며 

말을 남기려다 쓰러진다. 

꽃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었다. 

속사정 알고 있는 구절초 얼굴이 

두 겹 세 겹의 물결로 보이고 

친하던 수호천사가 미소하면서 

가을의 끝막에서 깨어난다. 



몇 줄의 언어가 머리를 털며 

홀연히 내 앞에서 빛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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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성을 생각한다.

2016. 8. 2. 10:4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출처 :  iamnews.imbc.com>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과 관련된 영상이 뉴스타파에 의해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삼성은 "회장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여서 회사로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삼성은 이 사태와 관련하여 이건희를 삼성과 분리하여 한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국한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한다.

 

 

"이건희를 삼성과 분리한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이 사태를 한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건희는 삼성 그룹이 성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를 만들어, 삼성 그을 세계적인 대열에 올려놓은 기업가이자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현재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회장이다. 그의 말 한마디가 삼성을 대표하는 말이 될 수 있으며, 그의 행보가 삼성 그룹의 전체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공인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할 몫이 있으며, 역할이 있다. 또한 그의 생활이라고 하지만 이번 사태는 성매매를 불법적으로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한 그룹의 총수로서 매우 부적절하게 행동했다. 이 일뿐이겠는가. 이번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이번사태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동영상에 촬영된 논현동 고급빌라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삼성그룹이 개입했던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뉴스타파>에서 보도된 사실에 의하면, 삼성 그룹의 계열사 사장이 고급빌라의 해당 호수 전세권 설정을 했다. 또한 고급빌라의 전세금 13억원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몇가지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바탕으로 삼성그룹이 개입여부를 판단하기는 쉽진 않지만, 그를 삼성과 분리해서 한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킬수 없다. 

 

 

그렇다. 그는 공인으로서 분명히 적절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불법을 자행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이상하다. <뉴스타파>의 "이건희 성매매 의혹"과 관련된 영상이 보도된 뒤, 다른 언론사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보도된 다음날에서야 MBC와 KBS에서 한 차례 보도하였고, 다른 언론사들도 아주 간략하게 사태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런 언론사들의 태도는 박유천의 성폭행 사건때와 비교했을때  매우 대조적이다. 박유천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났던 언론사들은 왜 이리도 얌전해졌을까. 이들의 이중잣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다들 알겠지만, 굳이 답하자면,  돈과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은 박유천이 기존에 쌓아놓았던 모든 이미지를 무너뜨렸다. 그는 배우로서, 가수로서 생존불가능할수도 있다. 박유천의 행동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언론사들의 태도가 의아할 뿐이다. 그렇게 박유천한테 돈을 던지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다시, 삼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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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같은 세상이다.

2016. 7. 9. 10:3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출처 : biz.heraldcorp.com>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했다. 탈퇴를 지지하던 주요층은 소득이 적거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들이었다. 유럽연합을 통해 영국으로 물밀듯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은 저소득, 저교육층의 일자리를 위협했다. 그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만해도 정부는 느긋했다. 결국, 그들이 일을 저질렀다. 정부는 갈곳을 잃고 허둥지둥하고 있다. 영국사회는 현재 '멘붕'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유럽연합 탈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책임진다'는 말이 '사퇴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던 안철수 아저씨도 '이수민 리베이트'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바 없다. 삼류 정치가 쉬워보인다. 박근혜 누나는 또 낙하산이다.  



<출처 : www.youtube.com>



술집여성들이 박유천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고소했다. 그 사건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다. 허나, 첫번째 술집여자가 박유천을 고소한 후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첫번째 술집여성은 고소를 취하했다. 아마, 돈으로 입을 막았으리라. 그 사건 후 세명의 술집여성이 연달아 고소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원한 것은 돈이 확실했다. 그들은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들의 기막힌 고소가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아니, 굳이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20-30대 청년들의 눈을 가렸다. 국민들이 진정 관심을 두어야 할 정치, 사회, 경제와 관련된 모든 이슈는 당사자들의 논리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 검사는 자살했다. 갑의 횡포가 을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 'ㅋㅋㅋㅋㅋㅋㅋ죽고싶다ㅋㅋㅋㅋㅋㅋ' 동기검사에서 보낸 카톡 메시지의 'ㅋ'은 의미없는 한낱 자음이건만 '죽고싶다'는 그의 심정을 맨살로 드러나게 한다. 죽고싶어서 그는 죽었다. 서글픈 헬조선이다. 살고 싶었던 구의역 청년도 죽었다. 청년도 갑의 횡포와 갑의 논리에 압사했다. 매년 한건씩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행사가 되어버린 현실, 그는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출처 : news.sbs.co.kr>



어찌됐든, 지랄 같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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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 _ 김사인

2016. 7. 7. 22:2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thewritingant.wordpress.com>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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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_ 김경미

2016. 6. 18. 21:2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Source : www.toonvectors.com> 




냉장고 



                        김경미




1. 


어느 날 문을 열자 

뜨거움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열쇠가 눈에 띈다 


입이 얼어붙은 열쇠였다 



2. 


다음 날 

또 열쇠를 잊고 

불같이 화를 냈다 


곧 후회했지만

이미 수치가 재앙이 된 뒤였다



3. 


신선한 달걀에게도 끝내 곰팡이를 선사하는 힘

생선을 새까만 까마귀로 바꾸는 힘 


항상 날짜를 읽어내는 힘 


문을 열어 열쇠와 머리를 함께 집어넣고 


차가운 짓을 그만할지 

뜨거운 짓을 그만할지 의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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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_ 김경미

2016. 6. 13. 16:20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t9t9.com>




수첩



                                         김경미




도장을 어디에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똥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도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도 남기고 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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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종이 _ 마종기

2016. 6. 6. 21:1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kr.freeimages.com






서 있는 종이 



                                        마종기 




한밤에 잠자다 어둠 속에서 불현듯

화려한 시 몇 줄이 나를 흔들어 깨워

불도 켜지 않은 채 침상 종이에 썼던 글. 

아침에 잠 깨어 밤새운 종이를 보니 

설친 글자 하나 보이지 않는 백지였네. 

죽어버린 볼펜이 억울해 눈여겨보아도

희마한 분홍색만 흩어진 자국으로 보인다. 



그래, 이렇게 연한 색을 어디서 본 적이 있지. 

그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던 때였나, 

열심히 보면 피가 조금 밴 부끄러움의 색, 

내가 더 살기로 한 곳에서 맴돌고 있던 색, 

비굴한 계절이 말 걸어오면 주춤거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대다가 남아 있던 색. 

그 색깔 번져 있는 온몸 투신의 시 한 줄, 

어딘지도 모르고 입술 터진 길을 헤맨다. 



빈 종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쓰고 남은 자리에도 

무심히 지나간 이에게도 말해주어야겠다.

아무리 눌러 써도 이해되지 않는 종이에 

숨어서 밤새워 응시하며 서 있는 종이에 

얄팍한 의심 겨우 지탱해주는 녹슨 시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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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바다 _ 마종기

2016. 6. 1. 22:3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myblueday.tistory.com





알렉산드리아의 바다 



                                  마종기 




단 하루뿐이었다. 

지중해의 가벼운 물이 나를 둘러싸고 

해안에 기댄 호텔로 안내한 저녁, 

빛바랜 천 년 소음이 먼지에 젖어 

눅눅한 도시가 절반 정도만 보였다. 

나이 들수록 오래 생각하지 말라고

너무 길면 걷기가 힘들어진다고 

그 여왕은 해변을 걸으며 말해주었지.



잠을 잘 자야 잊는 힘도 생긴다. 

모래 위에 남겨둔 운명은 밀물이 지우고 

수줍게 고개 숙인 해안의 석양도 

잔잔하게 번지는 핏빛의 소식이 될 뿐, 

외로운 자만이 쉽게 털고 떠날 수 있다. 



지중해는 그 옛날부터 기다렸지만

이번에 만난 도시와 바다 사이에는 

불투명한 역사가 쓰레기 되어 병들고 

낡은 돌층계에서는 노래가 갈라지고 

호텔의 틈새 그림자만 마른 인사를 한다. 



목요일 그 하루저녁만이었다. 

늦더위와 파도 소리와 그 앞을 지나는

이집트의 허름만 중년들만 살아 있고 

기원전의 등대나 지진으로 무너진 도서관은 

역사의 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챙긴다. 

추억인 양 한숨 쉬는 먼 알렉산드리아, 

아직도 답신은 도착하지 않고 

그해의 밤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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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심장 _ 마종기

2016. 5. 28. 23:4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www.pixelstalk.net




봄날의 심장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면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사는 소식조차 

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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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사막 2 _ 마종기

2016. 5. 28. 22:46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runch.co.kr 






고비사막 2



                             마종기 



왜 그런지 멀어지기만 한다. 

떨어져 있는 우리 사이가 사막이 되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작게 보인다.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늙고 나른한 모래언덕들이 

허리 굽어 쇠잔한 걸음걸이까지 

부르럽게 안아준다. 내가 

사막에서 무너지며 네게 기댄다. 



초면인데도 옆에 마주 서서 

사막의 남은 온기를 잠옷으로 준다. 

몸의 구석구석이 벌써 포근하게 졸린다. 

자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고비 사막을 덮고 긴 잠에 든다. 



견고한 형식은 마을로 가버리고 

만져도 확실하게 쥐여지지 않는 땅, 

공기까지 가벼워 마음 편히 만날 수가 없다. 

서쪽에는 끝없이 큰 노을이 퍼져 있어 

아무리 기다려도 밤이 오지 않는다. 



주위를 돌아보니 뭐가 그리 바쁜지 

모두들 말없이 떠나고 말았다. 

가고 또 사라지기만 하는 고비 사막에서는 

누구나 혼자라는 것 어차피 알게 되는구나. 

하늘은 끊어지지 않아 춥기만 하고

별은 너무 많아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이러다 죽으라는 말이 환청으로 들린다. 

고개 들어 무작정 멀리 바라보니 

그래도 살아가라는 말이 또 뒤쫓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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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회복 _ 마종기

2016. 5. 9. 18:1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www.online-instagram.com

 

 

 

 

 

국적 회복

 

 

                                마종기

 

 

 

1

 

그해에 나는 처음으로 젊었었다.

계절이 갑자기 끝나버린 그 여름,

군가도 더위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동기 군의관들이 힘들게 면회 와서

감방에서 나보다 먼저 울었다.

내게 다시는시원한 날이 안 올 듯

한여름에 겨울옷을 놓고 갔다.

 

 

숨어 사는 쓰레기 소각장에서

남은 시도 다 태우고 풋정도 함께

끝없는 연기로 태웠다. 냄새까지 감춘

연기가 억울하다고 내게 속삭였다.

그 초라함과 삼켜도 안 넘아가는 모욕을

차가운 침묵의 태연한 재로 만들고

가볍고 이승의 바깥으로 나를 버렸다.

미련을 남기지 않는 고결한 변신,

나도 그쪽으로 가리라 각오했었다

입술을 깨물며 맛도 색깔도 변한 피를 삼켰다.

 

 

 

2

 

내가 미워했던 고국이여,

잘못했다. 긴 햇수가 지나도

계속 억울하고 서러웠다 .

치욕의 주먹이 미칠 것 같은

머리와 목덜미를 치고

내 앞길에 대못을 박았다.

더 이상은 선택이 없었다.

 

 

그 사이에 내가 늙고

기다려주리라는 꿈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한 묶음의 세월이 지나도

산과 강이 옷을 벗어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흘러갔다.

가다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믿었다.

물고기는 물고기끼리

낙타는 낙타끼리

나비는 나비끼리

그리고 사람은 사람끼리

언젠가는 서로 화해한다.

그 따뜻한 속내만을 믿었다.

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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