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_ 수 클리볼드

2020. 12. 27. 22:3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부모는 자기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기가 낳아 기른 아기라도 전혀 모르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다.

됐지만 누가 사이코패스 거짓말쟁이인지 부모도 나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 350쪽-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이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듯,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의 가해자인 수 클리볼드의 회고록이다. 책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들의 총기난사와 자살을 이해하기 위한 발버둥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키워온 아들이 악마의 모습으로 비극적인 사건을 저질렀으니, 부모로서는 도저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사건을 바라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 아들의 범죄가 부모 탓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부모는 비난할 거라는 점은 불보듯 뻔하다. 이것이 평생 부모를 괴롭힐 거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 고단한 그 삶을 살아온 그녀의, 한 엄마의 지리멸렬했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그녀가 글을 쓴 이유는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알게된 점을 통해 누군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콜럼바인의 호된 시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도움이 된다면 다름 사람과 나누는 게 나의 도덕적 의무다. 입을 열기는 두렵지만, 그게 옳은 일이다
25쪽

 

 어떤 부분은 너무 솔직하고 사실적이어서, 그녀의 감정이 내게도 전달되는듯 했다. 가끔 그 압도되는 감정이 책장이 넘기지 못하게 했다.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녀가 이 사건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견뎌왔는지, 그리고 견뎌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슬픔에도 수명이 있다
7년 정도 지나자 안개 속에서 조금씩 나올 수 있었다고 나에게 말해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랬다. 2006년이 되자 조금씩 나아졌다. 딜런이 그리운 것은 여전했지만, 단 한 시간도 딜런의 손에 죽은 이들과 가족들을 고통스럽고 슬프게 떠올리지 않고 보낼 수는 없었지만, 날마다 울지는 않았고 좀비처럼 넋을 잃고 떠돌아다니지도 않았다
427쪽

 

서평 중에 책을 다 읽고나면 남는 것은 한명의 엄마라고 이야기했다. 맞다. 이 책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은 지리멸렬하고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비틀거리면서 한발씩 나아간 한명의 엄마, 수 클리볼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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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일과 영성(Faith&Work) _ 팀 켈러

2020. 12. 20. 17:2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 

 

 

직장인은 일주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데 사용한다.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로서 우리가 땀흘려 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적 일뿐만 아니라 세속적 일을 포함한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교 신학의 원류는 모든 노동의 존엄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류를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라고 본다. 
23쪽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고 그것을 지켜보셨다.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인간에게 일을 부여하셨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라.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45쪽

 

 창조때에 아담이 했던 우아한(?) 일에 비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하찮고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일을 해도 세상이 전혀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원하던 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이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수도 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각광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하는 것 자체로, 또는 그 일의 성공과 실패로서 신자로서 일의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

 신자로서 일을 할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선에서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다. 결국, 신자에게 일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저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신앙 공동체와 일터에서)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지 늘 탐색해야 한다. 
275쪽

결국,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 자체를 하찮게 여기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이 드러날 수도 있다. 다만,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

 

20쪽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는 「마음의 습관」이란 기념비적인 책에서 우리의문화의 응집력을 갉아먹어 버린 것을 콕 찍어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lalism)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표현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함께 공유하는 삶이라든지 사회 구성원 전체를 한데 묶는 지배적인 진리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게 했다.

 

21쪽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이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36쪽

톨킨이 기독교 신앙에서 위로와 자유를 찾고 다시 작품을 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하자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경이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 왜 일하고 싶어 하는가?(만족스러운 살믕 사는 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 왜 그토록 일하기가 어려운가?(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

-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 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47쪽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림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52쪽

"일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특히 노동이 죄의 대가로 임한 저주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75쪽

창세기 2장 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창조주는 어째서 손수 작명하지 않으시는가? 창세기 1장에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던 전례에 비춰 보면 짐승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이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켰다. 인간 본성과 기질의 폭을 최대한 확장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문명을 건설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인간은 일을 통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창조 패턴을 활용하며, 공동체를 조직한다. 

 

81쪽

벨라는 일에 담긴 '소명'이라든지 '부르심'의 개념을 회복하며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권력욕이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억할 게 있다. 한쪽에서 명령하고 이편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그 일을 해낼 때에 비로소 소명이나 부르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격이 가르치는 노동관이다. 

 

83쪽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이어야 한다. 

 

87쪽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짓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107쪽

현대 서구문화는 죄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되짚어 볼 생각조차 않으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만 안간함을 쓰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유년기의 경험이 쓸데없는 수치심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을 빚어낸다고 해석한다. 갖가지 즐길 거리들을 잠시나마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선행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란 정체성을 갖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본질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116쪽

직업을 선택하면서 품었던 큰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분야를 잘못 선택했다든지, 그쪽으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든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완벽한 일거리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하게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손 쳐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154쪽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지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현재 직장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위치가 은혜의 소산이라는 얘길 들으면 펄쩍 뛰면서 아무개 학교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고, 학생 때는 물론이고 신입 사원 시절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며, 동기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올렸는지 따위를 침이 마르도록 나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달란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제힘으로 열지 않은 기회의 문들을 통과했다. 열쇠를 쓴 게 아니라 그저 활짤 열린 틈으로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가진 건 하나같이 은혜의 소산이며, 우리 각자에게는 그렇게 수중에 들어온 힘을 마치 제 능력을 사용하듯 활용하여 섬길 자유가 있다. 

 

164쪽

루터는 피조물 가운떼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능력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5쪽

루터는 우상을 세우는 마음가짐과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깨달았다. 

 

174쪽

과학이 발전하고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사회는 종교니, 부족이니, 전통인, 하는 우상들을 끌어내리는 대신 이성과 경험, 개인의 자유 따위를 세계관 전반을 지배할 궁극적 가치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181쪽

하이데거와 닥스뿐만 아니라 자크 엘룰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은 과학기술과 불확실성, 시장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 따위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동조할 수 없으므로 가진 건 오로지 '수단'이나 기술뿐이다. 건전한 인생이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없으므로 저마다 권력을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경쟁만 남는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저리가 없기 때문이다. 

 

182쪽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상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시장 상품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광고 회사의 순진한 먹잇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진단한다. 허다한 작가들도 시장의 가치(소비 지상주의와 비용 대비 효과 같은)가 가족을 포함해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었다고 확신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재화와 용역을 분배하는 유용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5쪽

상품이 주는 유익을 홍보하는 데서 소비자들에게 정체성을 세워 주고 질 높은 삶을 약속하는 라이프스토리를 전하는 방향으로 전반적인 흐름이 바뀌고 있다.

<중략>

예일대학 철학과 니콜라스 윌터스토프 교수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두고 현대 문화는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 따위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잘 사는(경험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케팅과 홍보 일을 하는 이들로서는 상품이 멋지게 작동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187쪽

둘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이러한 성경의 개념은 단순한 일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알든 모르든 다른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노동에 관해 가르치는 신학 원리를 정확하게 깨달은 크리스천들은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기꺼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다른게 일할 방법을 찾는다. 

 

193쪽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195쪽

스토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오락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내러티브는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요소인지라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좌우한다. '벨탠샤우웅'에서 파생된 세계관이란 말은 현실을 해석하는 토대가 되는 포괄적인 시각을 뜻한다. 하지만 몇 가지 철학적으로 중요한 항목들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거대 서사, 즉 a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b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c 그걸 다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스토리다. 

 

197쪽

플라톤은 주로 육신과 그 연약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는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서 뱉어지는 욕구와 양심 사이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지적했다. 사르트르는 객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구속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198쪽

복음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01쪽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새삼 놀랍다.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208쪽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전이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대단히 강조하고, 설령이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이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209쪽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이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211쪽

다만 피조물 가운데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가짐은 복음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충동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타락과 부패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깨어짐의 결과라는 게 복음의 가르침이다. 복음이 들려주는 진실한 '스토리'는 구속과 갱신의 증거다. 복음적인 내러티브의 절정에는 방치와 태만에 관한 사연보다 희생과 인내의 이야기가 더 잘 들어맞는다. 

 

213쪽

놀랍게도 이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아이비리그 학교들으르 처음 세운 설립자들은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한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 누구도 제힘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며 부와 재능과 권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크리스천의 사상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능력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활개를 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223쪽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렌즈 삼아 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스토리라인이 주류를 이루는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가? 

- 무엇이 의미, 윤리, 기원, 숙명 같은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가?

- 무엇이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소망하고 또 무얼 두려워하는가?

- 현재 종사하는 직업 세계에서는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다시 해석해 들려주는가? 이야기 속에 직업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떤 부분이 본질적으로 복음과 일치해서 기꺼이 동의하며 거기에 맞출 마음이 드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어떤 점인가? 다시 말해서, 문화에 도전해야 할 대목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면 어떤 방식으로 그 스토리를 완성해 나갈 것 같은가?

- 지금 하고 있는 일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넓게는 사회에 봉사하며, 직업 세계 자체에 도움을 주고, 능숙함과 탁월의 모범이 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회가 있는가?

 

227쪽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29쪽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230쪽 

하나님의 섭리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서 노동의 가치에 낮은 비중을 두는 데서 생기는 더 심각한 위험은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이 이뤄 낸 선한 일들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온전하고 균형 잡힌 성경의 가르침은 오로지 크리스천이 한 일이나 전문직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며, 오히려 인간의 모든(특히 탁월하게 해낸) 노동에 하나같이 높은 가치를 둔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되는 통로로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선망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스스로 하는 일을 인정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능숙하게 해내는 일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상대가 예수님을 믿든 말든 가리지 않는다. 

 

237쪽

하나님의 지혜와 달란트, 아름다움과 재주를 은혜로, 다시 말해서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베푸신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환하게 밝히며, 잘 보존하기 위해 나눠 주시는 선사품인 셈이다. 원칙대로라면 죄를 범한 인류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가 현재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형편이 그토록 악화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일반 은총이라는 선물 덕분이다.

 

244쪽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주일 하루와 평일 저녁에 그것도 신앙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시간으로 국한된다. 주중에 어떤 핵심 가치에 따라 시간을 보내고 삶을 꾸려 가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볼 꿈초자 꾸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서' 일하며 생활하는 동안은 자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과학기술, 개인의 자유,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특성 따위를 포함해 현대 문화의 배경을 이루는 갖가지 가치 기준과 우상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원론의 첫 번째 유형이 세상과 나눠 가진 공통점의 중요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은 복음적인 세계관(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판을 복음에 비추어 새로 짜는)이 가진 차이점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다. 

 이원론의 대척점에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도 우상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252쪽

 크리스천들은 솔직하고,  따뜻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손익분석에 뿌리를 둔 윤리는 일반적으로 대가를 기대한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설계를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그런 처신 탓에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 하지만 성경학자 브루스 월키의 말마따나,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 하듯 하지 말라(골 3:23)

 

284쪽

 

 도로시 세이어즈는 유사 열정이 일의 동력이 있음을 알려 준다. 「신조인가, 혼조인가」(Creed or Chaos?)라는 책에서 글쓴이는 '해태'(acedia)를 비롯해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인습적인 죄를 열거했다. 해태는 흔히 '나태'(sloth)로 번역되는데, 세이어즈는 올바른 풀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으름(나태라는 단어에 담긴 통상적인 뜻)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작가는 해태란 '무엇이 내게 보탬이 될까?'만 생각하는 손익분석에 이끌리는 삶의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어디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야 할 까닭도 없기에 그저 살아 있을 따름인 죄다. 

 

287쪽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 보라).

 로마서 12장은 이 진리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라는 말로 서두를 연다. 여기에 쓰인 표현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이다. 사도는 제물을 들고 제사를 드리러 온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기르는 가축들 가운데 튼튼하고 흠이 없는 놈을 골라서 제물을 불태우는 번제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제가 가진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주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열정의 표현인 셈이다. <중략>

 본문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다. 첫째로, '열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래 '긴급'과 '성실'이 결합된 의미다. 초점과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급박한 마음만 남으면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긴박감이 없이 성실하기만 하면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서두르되 질서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열심을 품고"라는 말씀은 원문에 비춰 볼 때 "펄펄 끓는 심령으로" 쯤으로 직역할 수 있다. 따라서 감성과 훈련, 긴박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하는 일 속에서 산 제물이 되는 임무를 수행해 나가라는 뜻이다. 열정을 품고 살라는 주문이다.

 

298쪽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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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 ) _ 팀 켈러

2020. 12. 13. 16:09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 : 2~3

 

 

세상 사람이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그들 각자에게는 꼭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열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그 바라거나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만족으로 채워줄 거라고 믿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취업준비생에게는 들어가고자 하는 직장이 우상일 수 있으며, 연애를 갈망하는 자에게는 연애 상대자가 우상일 수 있다.  그것만 있으면 우리가 정말 행복해질거라는 착각속에서 우상을 쟁취하기 위해서 힘쓴다. 단언컨대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다. 과연 그 모든 것이 우리의 필요와 갈망을 채워줄까? 세상 사람들의 우상은 차치하고서라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우상의 문제는 과연 간단한 것일까?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우상에 관한 이야기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인 하나님으로만 진정한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하는 대상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23쪽). 저자는 신자가 숭배할 수 있는 우상으로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에 대해 설명한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형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생각하면서, 신자인 자신은 우상숭배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책에서 언급하는 우상은 구체적으로 눈에 잘 띄는 '표면적 우상'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은밀하게 원하고 갈망하는 '근원적 우상'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하지 못하며 다른 어떤 것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야곱에게도 라헬이 우상이었으며, 요나에게도 사역의 성공과 이스라엘의 국익이 우상이었다. 우상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지극히 복잡한 개념이라서 지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범주를 모두 아우른다. 우선 개인의 우상으로는 로맨틱한 사랑과 가정, 돈, 권력, 성취, 속한 분야의 인맥, 타인이 정서적으로 의존하기를 기대하는 것, 건강, 몸매, 탄력적인 외모 등이 있다. 
24쪽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245쪽). 저자가 가짜 신을 식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첫째,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속으로 기쁨과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둘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두고 있는 것에 돈을 쓰기 때문에 돈의 사용처를 점검해보면 우상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로는 독실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지녔으며 교회에 꾸준히 나가는 신자들에게 유용한 방법이다. 겉모습은 독실한 신자이지만,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지, 진짜 구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248쪽). 

 

하나님이 각 사람의 심령을 향해 던지시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네 마음의 신뢰, 몰두, 충절, 섬김, 두려움, 기쁨에 대해 사실상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나 뭔가가 있느냐? 사람의 우상체계는······질문을 통해 표면으로 일부 드러난다. '삶을 지속시켜 줄 안정과 안전과 수용을 얻고자 네가 의지하는 대상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인생에서 네가 정말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냐? 무엇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느냐? 무엇이 있으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겠느냐? 너는 어디서 권력과 성공을 찾고 있느냐? 이런 비슷한 질문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지 우상을 섬기는지, 구원을 그리스도께 바라는지 거짓 구주에게 바라는지 결국 알아낼 수 있다.
249~250쪽, 데이비드 폴리슨

 

우상을 발견했다면 그 우상을 해체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 우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책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좋은 문장]

 

14쪽

절망은 슬픔과 다르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달리 의지할 만한 대안이 없다. 그야말로 기운이 꺾인다. 

 

70쪽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76쪽

야곱이 바로 그랬다. 라헬은 그에게 단순희 아내가 아니라 '구세주'였다. 그녀를 어찌나 애절하게 원하고 필요로 했던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봣따. 그래서 라반의 속임수에 쉬이 넘어갔던 것이다. 

 

80쪽

우리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대개 성경을 일련의 단절된 이야기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각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일한 이야기다.

 

84쪽

사랑하는 상대를 그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흠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우려 한다. 자기 존재가 헛되지 않다고 정당화하려 한다. 다른 아닌 구원받으려 한다. 물론 상대는 인간이므로 이것을 줄 수 없다.

 

115쪽

우리 마음의 죄성은 동기적 욕구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우상숭배로 변질시킨다. 바로 이것이 '근원적 우상'이다.

 

198쪽

오늘날 초월과 의미에 대한 욕구는 개인의 자아와만 관계될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과는 모두 무관하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익 우선'의 옛 사고방식은 젊은이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제 삶의 관건은 공동체의 제약을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자아를 창출하는 데 있다. 

 

206쪽

결국 요나는 왜 도망갔을까? 답은 역시 우상숭배인데 이번에는 아주 복잡하다. 우성 요나 개인의 우상이 있다. 요나를 빚어낸 문화적 우상도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니느웨 사람들의 영적 유익보다 이스라엘의 국익을 앞세웠다. 끝으로 요나의 종교적 우상이 있다. 그는 무조건 자신이 도적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악한 이교도인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우월감을 느꼈고 그들이 구원받는 게 싫었다. 

 

225쪽

나는 우상으로 힘들 때면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진해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순복하신 그분을 떠올린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 앉으셨기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것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기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께 있음을 나는 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과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어도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다. 

 

245쪽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답은,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사람의 인정, 평판,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 <중략>

우상숭배란 단지 예배 의식의 한 형태가 아니라 유한한 가치에 기초한 정서와 생활 방식 전체이며, 피조물을 신처럼 절대화하는 일이다. 

 

252쪽

우상보다 예수님이 당신의 머릿속에 더 아름다워지시고 당신의 마음속에 더 매력 있어지셔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가짜 신이 대체될 수 있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 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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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습관의 힘(Atomic Habits) _ 제임스 클리어

2020. 12. 6. 15:51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우리의 행동은 습관의 연속이다. 하나의 행동에 일상의 습관이 배여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업무에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집에 와서 옷을 벗고 치우는 것도 미룰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일상의 효율이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좋은 습관이나 나쁜 습관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좋은 습관을 더 발달시키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는 네가지 법칙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만드는 방법과 나쁜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첫번째 법칙은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적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할 일은 자신이 일상을 점검하고, 현재의 습관에서 새롭게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퇴근 후 외출복을 벗는 것이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이라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외출복을 벗고 나서 바로 운동복으로 갈아 입는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미 매일 하고 있는 현재의 습관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그 위에 새로운 행동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 쌓기'다. 
103쪽

 

 두번째 법칙은 새롭게 하고 싶은 좋은 습관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방법은 원하는 것과 해야하는 것을 묶는 것이다. 예를 들면, SNS를 확인하고 싶은데 운동을 해야 한다면, 잠깐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치워두고 턱걸이나 팔굽혀 펴기를 10개나 20개 정도 하고 나서 SNS를 하는 것이다. 유혹 묶기 전략은 현재의 습관을 우리가 원하는 어떤 대상과 연결시켜 습관을 강화하는 방식이다(152쪽). 

 세번째 법칙은 새로운 습관을 만들때 접근하기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3번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고 싶을 때, 운동할 때마다 1시간씩 해야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면 1시간을 해야된다는 부담감때문에 운동 자체를 꺼리게 된다. 따라서 하루에 1분 운동이라는 목표를 잡으면 부담감 없이 실행할 수 있고, 실행하고 나면 성취감을 얻을 수있다. 이러한 성취감은 다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저자는 변화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2분 규칙'을 사용한다. 즉, 새로운 습관을 만들 때 그 행동을 2분 이하로 하라는 것이다(211쪽). 예를 들면, 매일 책을 읽는 습관을 만들고 싶으면, 책 한페이지부터 읽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듯이,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가야 한다. 첫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네번째 법칙은 만들고자 하는 습관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새로운 습관을 통해 만족이나 보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새로운 좋은 습관을 만드려고 할 때,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운동을 하루 했다고 해서, 몸이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다. 책을 하루 읽었다고 해서, 사고하는 힘이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좋은 습관을 긍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는데, 이를 과학자들은 '지연된 보상 환경'(delayed-return environment)이라고 부른다(238쪽). 그래서 좋은 습관을 만들 때, 그 행동 자체로 만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 꾸준하게 행동하고, 그 행동들을 기록하거나 표시함으로써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습관 추적은 ① 우리에게 행동을 일깨우는 시각적 신호를 만들어내고 ② 자신의 발전을 눈으로 보고 이를 되돌리고 싶지 않다는 내적 동기를 일으키며 ③성공적으로 습관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순간순간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아가 우리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 간다는 시각적 증거를 하나씩 쌓아나감으로써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본질적인 만족감을 준다.
252쪽

 

 위에 말한 좋은 습관을 만드는 네가지 법칙을 반대로 적용하면 나쁜 습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표나 방향성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은 강화시키고, 나쁜 습관은 버리는게 맞다. 저자가 알려준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오늘부터 저녁을 먹고나서 2분 운동부터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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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_ 막스 베버

2020. 10. 31. 20:47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해제 9쪽

이 "자본주의 정신"은 16세기와 17세기에 영국과 네델란드와 식민지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칼뱅주의, 감리교, 침례교, 메노파, 경건주의, 퀘이커교 등과 같은 개신교가 지니고 있던 "윤리"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12쪽

시장에서 재화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환, 기업 활동과 가사 활동의 분리, 복잡한 회계방식의 발달, 노동과 작업장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근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자유민이고, 조직된 기업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상시적으로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15쪽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개개인들만으로는 이 거대하고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동력에 의해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고 노동과 자본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지적한다. 

 

17쪽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을 "종교"에서 찾은 것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한 번 시도해 본 것이 결코 아니었고, 도리어 당시 독일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던 견해, 즉 종교적인 신념은 삶 전체는 물론이고 노동 습관과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19쪽

중세 가톨릭은 상인과 기업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기보다는 이윤 추구를 통한 부의 축적을 더 중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위태롭게 한 자들이었고, 형제애를 명하는 기독교 윤리를 어기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상인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중략>

루터는 하느님은 개개인의 삶과 소명을 미리 확고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서 재화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죄악된 것이라고 보았다.

 

20쪽

청교도는 체계적인 노동, 부의추구, 덕 있는 행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활동이 아니라 섭리적인 활동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노동을 신성시한 것이었다.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노동이 삶의 목적이라고 설파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유명한 청교도 성직자였던 리처드 백스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공리로 받아들여서, 노동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일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노동이 아니라 일생 동안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행하는 노동을 하느님이 "명령했다"고 설파했다. 또한, 직업 노동은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고, 모든 이기적인 욕망도 다스려 줌으로써, 삶 속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의 실천에도 큰 유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예정론에 수반되는 지나친 의심과 불안과 도덕적인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고, 자신이 구원받은 자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직업 노동은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22쪽

 16세기와 17세기에 금욕주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예정론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있는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지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예정이 아무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자신이 구원으로 예정한 자들에게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베풀고 도울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구원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다음과 같은 것들을 구원을 표지들로 규정하게 되었다. 

 첫 번째 구원의 표지는 "조직적인 노동"이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이미 아주 중요하고 신성한 것으로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신자가 "택함 받은 자"로서 구원으로 예정된 자임을 보여주는 표지와 관련한 논의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보장받았다. 조직적인 노동이 구원의 표지라는 사상은 불안감에 어쩔 줄 모르는 신자들을 지도해야 했던 목회자들이 직면한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생겨났다. 직업 노동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해내게 위해서는 비상하고 극단적인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었는데,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신앙을 갖고 있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단한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는 노동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략>

 두 번째 구원의 표지는 "부의 축적과 성공적인 이윤 획득"이었다. 청교도 성직자였던 벡스터는 "부의 획득이 직업 소명 안에서의 노동의 열매일 때는 하느님의 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손길이 경건한 자들에게 역사해서 만들어 낸 열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임을 보여주는 표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역사해서 열매를 맺은 것이라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런 이유에서 당연히 사업가나 상인인 신자들은 이윤 추구를 통해 물직적으로 성공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신이 택함 받은 자라를 것을 확인받고자 했다. <중략>

 세 번째 구원의 표지는 "성화된 삶과 덕 있는 행실"이었다. "덕 있는 행실"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죄에 끌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어려운 일임이 분명했다. 육체의 욕망들을 다스려서 변함없이 하느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절제가 요구되었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하느님을 기쁘게 할 만한 "덕 있는 행실"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미 예정된 구원이나 멸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스터를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그러한 "덕 있는 행실"로 이미 예정된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런 행실을 하려면 하느님의 은혜와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런 행실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구원 받은 자가 틀림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명령들에 따라 자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지족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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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골든아워2 _ 이국종

2020. 10. 20. 20:3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47쪽

실상은 답답하고 지루한 긴 호흡으로 환자를 살펴야 하고, 그런 중에 더없이 비루한 현실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외상외과의 일이다. 

 

112쪽

나는 80미터 고도에서 장비를 짊어진 채 점 하나를 향해 뛰어내렸다. 중력과 하향풍에 의해 가중된 장비의 무게가 강하용 하네스를 감싼 벨트를 따라 어깨뼈로 파고들었다. 오른쪽 어깨가 비명을 질렀고, 통증은 어깨뼈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부서진 어깨를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 훈련을 시작해서는 안 됐다. 나는 머리끝과 발끝으로 번져가는 통증을 없는 것으로 삼았다. 내 뒤를 따라 김태연이 뛰어내렸다. 

 

127쪽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다지기 위한 의과대학 시절의 교육 과정은 살인적이다. 학업의 양마저 주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에 의과대학 시절은 한계에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 값으로 삼아 겸손해져야 하는 때다. 

 

190쪽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사하다는 반응은 기대하면서 외상외과 의사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위기에 빠진다. 그저 먹고살려고 하는 일일뿐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242쪽

의사라면 말술을 먹고 정신을 놓아도 다른 의사에게 함부로 욕하지 않는다. 거짓과 비방으로 가득 찬 그을 공개적으로 뿌려대는 짓 또한 하지 않는다. 의료계 바닥은 신문지 한 장 펼쳐놓은 것마냥 좁아서 그 같은 짓을 아무에게나 잘못하면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술기운은 술기운을 발휘할 만할 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기 좋은 상황에서 발휘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욕설을 들으며 내 비루한 위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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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골든아워1 _ 이국종

2020. 10. 14. 21:5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33쪽

내과와 외과를 구분 짓는 이유가 무엇이든, 외과를 업으로 삼는 우리의 일상은 갈라지고 짓이겨진 살과 부서진 뼈와 장기들, 끊어진 신경과 어긋난 조직, 솟구치는 핏물 속에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는 수술이 좋았고 수술방에 감도는 서늘한 감촉을 사랑했다. 

 

181쪽

늘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난 그 개별적인 죽음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221쪽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극도로 나쁠 때 의사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환자가 살아나도 공은 제 몫이 되지 않고, 환자가 명을 달리하면 그 책임은 마지막까지 환자를 붙들고 있던 의사가 오롯이 져야 한다. 그것이 이 바닥의 오랜 진리다. 석 선장이 살 가능성은 희박했고, 최악의 경우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301쪽

사람을 죽이고자 한 칼이 살을 가르고 들어간 끝에, 사람을 살리려는 칼이 닿지 못하면 수술은 깨끗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환자는 죽는다. 자상의 범위와 깊이가 심해 기관지를 뚫으면 그 역시 환자의 숨은 쉽게 달아나고 만다. 

 

344쪽

탈락 소식이 있은 다음 날 한 보직교수가 나를 불렀다. 보직교수의 굳은 표정 위에 낭패와 침통함이 흘렀다. 이마의 미세한 주름에는 노기가 서려 이었다. 아주대학교병원의 탈락은 그의 임기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무의미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탈락'이 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나는 듣기만 했다. 창가에 늘어진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는 높이가 맞지 않았다.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회식빛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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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살고 싶다는 농담 _ 허지웅

2020. 10. 3. 13:3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4쪽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21쪽
그 밤을 지나 보내고 나서 나는 살아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에는 확실히 야심처럼 보였다. 하루 하루 지날수록 야심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서야 정말 우연히 나는 그 털모자를 떠올렸다.

28쪽
무엇보다 모멸감이 든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다.

33쪽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34쪽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년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테니 바보같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마흔 두 살의 나는 점점 '그때의 나라면 지금 이렇게 안 할텐데 바보같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과 같다.

천장과 바닥
41쪽
수면제와 진통제를 먹고 침대에 누우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내 삶에 고통을 안긴 사람들의 얼굴이 천장에 투사된다. 나를 배신하고, 기만하고 속였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암을 심었다고 확신했다. 이자들이 천장에 맺혀 나를 내려다본다. 축축하고 무거워진 천장이 천천히 나를 향해 내려온다. 내려올 때마다 그들을 향한 원망과 증오도 한층 더해진다. 수백 번 자세를 바꾸어 외면해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마침내 천장이 코앞까지 전진해오고 질식하기 직전이 되어 나는 겨우 잠이 든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아파서 깨어난다. 다시 천장에 깔려 질식하기를 영원처럼 반복한다. 아침 해가 밝았을 때 나는 거의 죽어 있다.

45쪽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정확히 뭐라고 호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피해의식과 절망과 비탄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애꿎은 주변을 파괴하며 오직 비관과 자조만을 동행 삼아 이 모든 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할 거라고 말이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54쪽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56쪽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57쪽
오늘 밤도 똑깥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을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78쪽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

나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름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냥 좋은 일을 하면 된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_Karl Paul Reinhold Niebuhr

106쪽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연애를 하기 위해 나와 너 사리의 거리를 너무 벌려놓았다. 끊임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끼 때문이다. 너무 믿지 않고, 너무 기대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그럴싸한 말장난이다. 그걸 대체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지난 몇 년간의 연애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완벽한 실패였다.


125쪽
더 이상 삶을 소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바꿀 수 있는 작은 걸 떠올려보자는 생각이었다. 이제 나는 다음 책을 비롯한 사사로운 작업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나와 같은 이십 대를 보내지 않도록 만드는 일에만 집중한다.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138쪽
우리가 삶을 살아내가면서 경험했듯이, 서로 마주하고 아픈 걸 들추어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으로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내는 것. 그것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작이었다. 용산 참사의 진실과 시비를 가리기 위한 첫 단추다.

151쪽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결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니체가 말한 심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돌아보면 내 삶도 다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사소한 인간관계부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업무에 관련된 일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그런 구덩이에 반복해서 빠져왔던 것 같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에 대처하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은 비관과 자조, 그리고 남 탓이었다. 억울하고 분하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은 그에 무엇이든 간에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거짓말이라도 상관없다. 너를 망칠수만 있다면.

152쪽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201쪽
나는 끊임없이 생각-사고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 했고,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이 평범한 것은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thought-defying)이라면 강조했던 바로 그 생각-사고 말이다.

215쪽
모든 글은 내 일상을 사례로 들었다. 되도록 예의를 차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내용에 반박할 수 없는 이들이 주로 태도를 문제 삼는다는 걸 비웃기 위해 태도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으며, 기고를 하든 게시판에 쓰든 SNS에 공유하든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실명을 사용했다. 실명으로 쓸 수 없는 글이란 존재해선 안 됐다. 슬픈 이야기든 웃기는 이야기든 자폭하는 이야기든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든 반드시 실명이어야만 했다. 글을 쓸 때는 반드시 벌거숭이여야만 한다는 것. 위악이었다.

218쪽
너 혼자서는 세상 못 바꾼다. 청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사한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라. 마케팅이다. 하나의 의견이 공론화의 과정을 밟고 생각이 전혀 다른 집단 사이에 합의를 거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따른다. 그마저도 합의한이라는 것이 누더기일 가능성이 크고, 누더기에 다른 누더기를 보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261쪽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 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274쪽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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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_사랑

2020. 10. 1. 13:2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내가 만든 신_ 사랑

 

사랑에 속고 속다

환멸에 찬 노예가 되었다

 

70쪽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76쪽

야곱이 바로 그랬다. 라헬은 그에게 단순히 아내가 아니라 '구세주'였다. 그녀를 어찌나 애절하게 원하고 필요로 했던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봤따. 그래서 라반의 속임수에 쉬이 넘어갔던 것이다. 

 

79쪽

레아는 무엇을 했는가? 가정의 전통 가치관을 통해 행복과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특히 당대에는 아들을 낳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희망과 꿈을 남편에게 걸었다. '아들을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고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80쪽

우리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대개 성경을 일련의 단절된 이야기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각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을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일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성경은 도덕적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신을 올려놓고 우리게에 '너희도 열심히 기를 쓰고 제대로 살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글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보여 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큰 내러티브이고, 나머지 개별 이야기는 다 그 밑에 속한다. 

 

84쪽

사랑하는 상대를 그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흠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우려 한다. 자기 존재가 헛되지 않다고 정당화하려 한다. 다름 아닌 구원받으려 한다. 물론 상대는 인간이므로 이것을 줄 수 없다. 

 

89쪽

도덕 종교의 신은 기대 이상의 실적으로 성공한 자를 선호한다. 도덕적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 올라가는 사람.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연약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그분과 우리는 왕과 신민의 관계만이 아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만도 아니다. 그분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다.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며 어쩔 줄 모르신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244쪽

바울은 세상에 불행과 악을 초래하는 죄의 목록을 길게 나열하는데, 그 뿌리는 다 악착같이 '신을 만들려는' 인간의 충동이라는 토양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잘못의 원인은 언제나 우상숭배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타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총괄적인 답은 '우리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답은,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사람의 인정, 평판,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 

 

246쪽

첫째로 생각의 내용을 점검해야 한다. 대주교 윌리엄 템플은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에서 실제 신은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을 때 저절로 흘러가는 생각이다. 당신이 즐기는 공상은 무엇인가? 무심코 당신 머릿속을 차지하는 상상은 무엇인가? 승진하는 시나리오를 쓰는가? 이상적인 주택 같은 재물인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인가? 한두 가지 공상이 곧 우상숭배의 징후는 아니다. 그보다 이렇게 자문해보라. 당신이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혼자서 속으로 기쁨과 안락을 얻는 대상은 무엇인가?

 

248쪽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한 우상 식별법이 있다. 당신은 꾸준히 교회에 나가고 있고, 독실한 교리적 신념도 다 갖췄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당신의 진짜 구원은 무엇인가? 당신은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 말고 당신의 실제 신은 무엇인가?

그 답을 아는 좋은 방법이 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희망이 꺾일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된다.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나 서운하고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떨치고 나아간다. 아직 삶이 끝난 게 아니며 그런 것들은 당신의 주인이 아니다. 

 

252쪽

우상보다 예수님이 당신의 머릿속에 더 아름다워지시고 당신의 마음속에 더 매력 있어지셔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가짜 신이 대체될 수 있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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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이성에서의 도피

2020. 9. 30. 22:46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6쪽

아퀴나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will)는 타락하였으나 지성(mind)은 타락하지 않았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에 대한

이 불완전한 견해로 말미암아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다. 인가의 지성이 자율적이 되었다. 인간은 이제 이 한 영역에서만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었다.

 

27쪽

종교개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폰주의의 해석을 거부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대답은 무엇인가? 이들에 의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자라나는 묵은 인본주의와 자율적인 인간으로 풀어 놓아 주는 불완전한 타락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문제점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a total Fall을 인정하였다. 전인이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으나, 지금은 지정의를 포함한 전인이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와는 반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로, 최정적 권위면에서 볼 때 자율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로, 구원 문제에서 인간이 자율적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구언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을 자격을 갖추는 일, 이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0쪽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인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생"할 때 놀라운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훌륭한 존재다. 인간은 타락 이전의 원래 상태 때문에도 소중한 것이다. 

 

31쪽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훌륭하지만 역사의 어느 시공간에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결함이 생겼다고 가르친다. 

 

115쪽

 인간이 타락했다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은 했어도 역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타락했으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이 아니 화가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됨"을 드러내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이 타락한 결과 비뚤어지고 부패하고 버림받았다 하여도 아직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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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저자 오스기니스) - 소명과 재능에 관하여

2020. 9. 18. 21:15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보통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에 부합하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재능의 목적은 청지기직과 섬김이지 이기심이 아니다.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게서든 좀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찬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우리는 개별적인(혹은 특정한) 소명과 공동체적(혹은 일반적)소명을 구별해야 한다.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직은 양자를 모두 존중한다. 개별적인 소명이란 우리 각자가 독특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개별적인 소명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동체적 소명이란 우리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거룩한 자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미덕이다. 

 

 

- 오스 기니스, <소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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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문장들 1 - 보이지 않는 영화

2020. 9. 13. 23: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본 시리즈는 21세기의 최상급 대중영화 가운데 하나다. 세 편 모두 넋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데 물론 그건 심오한 주제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 덕일 것이다. 워털루역 광장에서 쫓고 쫓기는 「본 얼티메이텀」 의 한 장면은 김혜리의 훌륭한 표현대로 사람들의 추격신을 자동차 추격신처럼 찍은, 이 방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세공품이다. 그렇다 해도, 그 테크닉들은 단순한 유혹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절박하게 동시대의 불안과 욕망을 불러들인다. 그 점이 이 시리지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워털루역 광장에서의 추격신이 명장면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저찰과 은혜라는 광학 테크놀로지 전재의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찰의 숏들과 은폐의 숏들의 폭포수 같은 교차편집 끝에 본이 두 눈과 초인적인 지각만으로 빈 공간을 어김없이 찾아낼 때, 그는 진정으로 광학 테크놀로지의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우리 영웅이 되는 것이다.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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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2020. 9. 12. 01:10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고통의 심연,

찰나의 빛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요컨대 의미가 비워져가는 자리를 영화적 기표들의 활력이 채워가는 과정이 홍상수의 서사라면, 이창동의 서사는 오염된 의미들을 끝내 소진시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창동의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재현된 '나'의 손상된 육체나 일그러진 삶을 전시함으로써 가해자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김혜리가 말함 공범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이건 심각한 결단이다. 재현된 폭력을 접해온 우리의 관성으로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밀양」은 유괴도 신앙도 광기도 언급하지만 어느 것도 다루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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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nd you were thinking differently

2020. 4. 5. 16:09 책과 글, 그리고 시/영작(英作)

 

 

 I used to feel nervous when I meet a new person. At that day, I had been feeling nervous since morning. I prepared to go out for a blind meeting. I went out 1 hour before an appointment, and I arrrived at the restaurnat where we met 30 minutes before the appointment. I would rather arrive early for the appointment than on time. 

 

 I was sitting idly with a little nervous. After 20 minutes, a woman who took a mask was walking into the restaurant. I thought that the woman was the very one I waited for. She gave me a simple image at first. As time went, I has got that she had a big smile. We could talk about interesting subjects that we were familiar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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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_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2020. 4. 3. 08:06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이재만 역

 

 

고요한 확실성 안에서 편히 쉬어라

 

 다시 읽는 행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읽는 행위에 더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많은 정보들이 나를 대변해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정보의 축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시간들이 있었다. 분명,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긴 했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가장 큰 유익은 사고하는 힘이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맞추어 보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저자에게는 큰 공감을 얻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저자에게서는 다른 관점의 통찰력을 얻었다.

 

습득한 것을 별다른 노력 없이 유지하는 것과, 단순히 일시적인 시작점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토대 위에 지식을 견고하게 쌓아가는 것은 아주 다르다.  

 

 책을 읽는 행위는 공부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지의 표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부하는 삶》은 다시 책을 읽을 동기를 부여했다. 공부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 되새겼다. 무엇을 위해 공부했는가. 무엇을 위한 지식 습득이었는가. 과연 나는 지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찮은 생각들은 머리만 아프게 하지만, 의미 있는 생각들은 나를 성장시킨다. 책을 읽음으로써 떠오르는 생각들은 분명 유의미하다. 공부하는 자의 삶을 계속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만, 지성인은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함 속에서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으나, 고립과는 무관된 일이다. 

 

고립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 자신의 위대함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감을 느끼면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고 익히는 자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습득한 지식이 단편적인 하나의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맞닿아 실질적인 결과물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11쪽

세르티앙주는 저술에 필요한 노트를 동일한 크기의 메모지에 적어두고, 각각의 메모지에 주제에 상응하는 번호를 매기고, 같은 번호가 매겨진 메모지들을 클립으로 묶어서 분류하라고 조언한다. 

 

13쪽

세르티앙주는 공부를 위해 절제하고, 신체를 돌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27쪽

당신이 빛을 운반하는 사람으로 지명된다면, 신께서 당신이 운반하기를 기대하는 그 어슴푸레한 빛이나 불꽃을 감추면서 가지 마라.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가져오는 삶의 열매를 사랑하라. 공부에, 그리고 공부를 유익하게 쓰는 데에 당신이 가진 시간과 마음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바쳐라.

 

36쪽

공부를 하도록 소명을 받아 성스러워진 지성인은 결코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지위가 무엇이든, 혼자 있든 은둔해 있든 지성인은 개인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고독은 활력을 불어넣지만, 고립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메마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69쪽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은 자기 신체의 적이기에, 머지않아 자기 영혼의 적이 된다. 금욕은 공부에 꼭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도 그라트리 신부가 말한 '선명한 시야의 상태'에 우리를 이르게 할 수 있다. 육욕에 복종한다면, 정신이 되어야만 하는 당신은 육체가 되는 길 위에 서는 것이다. 

 

75쪽

시간과 사유, 자원, 역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과의 그물에 뒤엉키지 마라. 관습을 고분고분 따라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안내자가 되어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 지성인의 신념은 그가 달성하려는 목표와 일치해야 한다. 

 

82쪽

은신처는 정신의 실험실이다. 내적 고독과 고요는 정신의 두 날개다. 세상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위업은 적막한 곳에서 준비되었다. 앎의 개척자, 영감을 받은 예술가, 평범한 사람, 신인, 이들 모두는 고독, 침묵의 삶, 밤에 찬사를 바쳤다. 

 

85쪽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켐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항상 더 왜소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이 생각을 더 밀고 나아가면, 더 왜소한 인간이 되지 않더라도 자아가 더 왜소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군중에 섞일 경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전에 스스로를 붙잡아야 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다수의 이질적인 자아에 짓눌려 자기인식을 잃어버린다. 

 

145쪽

당신은 당신 자신을 공부해야 하고, 당신 삶이 어떤지, 삶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을 촉진하고 배제하는지,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위해 삶이 무엇을 제안하는지 고찰해야 한다. 

 

144쪽

무언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마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력을 다하고, 계속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정력적으로 하라. 반쪽짜리 공부와 반쪽짜리 휴식은 공부를 위해서도 휴식을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 

 

195쪽

「고린토이늘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에서는 신앙이 제일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기도를 하다가 계시를 받았다면 조용히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관한 아퀴나스는 이렇게 성찰한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설령 아주 사소한 가르침이더라도 거부해선 안 된다." 이 성찰은 바울의 다음 조언과 호응한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서로 낫게 여기십시오" 어떤 순간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진리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 빛을 받는 사람이다. 

 

213쪽

지나치게 읽는 정신은 양분을 공급받기는커녕 오히려 둔해지며, 서서히 성찰하고 집중하는 힘을 잃어버려 결국에는 산출하지 못한게 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정신은 내면을 향해 점점 더 외향적이 되고, 밀물 썰물처럼 흐르는 관념ㄴ과 내면의 이미지에 열렬히 집중하며 그것들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무절제한 기쁨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 기쁨은 지성의 기능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유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 혹은 단어, 문장, 장, 책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실려가는 것만을 허락한다. 

 

242쪽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는 것이다. 우리 정신의 임무는 반복이 아니라 이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읽는 것을 '붙잡아야' 하고, 몸으로 흡수해야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 저자를 본받을 수도, 저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 그것을 다시 표현하도록 정신을 재촉해야 한다. 지식의 요지를 우리 자신의 쓸모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287쪽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또 쓰다보면 조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노력하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제와 글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써야 한다. 

 

289쪽

앞에서 글 쓰는 기술은 일찌감치 익히기 시작해 오랫동안 익혀야 하며, 이것이 점차 정신의 습관이 되고 문체를 이룬다고 말했다. 나의 문체, 나의 펜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영원한 진리에 관해 이해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내 존재의 자질, 내면의 성향, 살아 있는 뇌의 기질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진화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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