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침묵을 즐기는가.

2018. 1. 29. 22:58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어릴때부터 몸이 야위었다. 명절때마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말랐느냐'며 '밥 먹었냐'보다 더 식상한 인사말을 건넸다. 대꾸는 하지 않고 멋쩍게 웃기만 했다. 마른게, 뭐, 대수라고, 어른들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것일까, 어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마른 몸은 그대로였다. 마른 몸이 싫었다. 마른 몸 때문에 사람 자체도 가볍게보였다. 그때부터인가보다. 말을 줄이고, 언어의 무게를 생각했던 때가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가벼운 언어는 쉽사리 무거워지지 않았다. 불쑥 튀어나오는 쓰레기 같은 언어들이 나를 표현할 뿐이었다. 언어의 무게를 생각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입을 더 굳게 다물기 시작했다.  

반응형

침묵(엔도 슈사쿠 저) - 하나님의 침묵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부의 신념.

2017. 1. 25. 11:26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침묵(엔도 슈사쿠) - 하나님의 침묵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부의 신념] 






"인간은 가장 경솔한 신념의 동물이며 반드시 뭔가를 믿어야만 한다. 

신념에 대한 좋은 토대가 없을 때에는 나쁜 것이라도 일단 믿고 만족해 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인간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이도 있다. 영화 『헝거』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고,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드러낸다. 더욱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에게 신념의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그리스도의 침묵과 신자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종교 박해가 심한 17세기 일본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에 잠입한다. 종교적 박해가 극에 달했지만, 아직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발각되어 관리들에게 쫓기게 되고, 결국 배교자 기치지로에 의해 잡힌다. 하지만 더 절망적인 것은 그곳에서 배교한 페라이라 신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는 일본 이름을 부여받았다. 사와노 추우안. 그는 하나님의 침묵때문에 배교했다는 변명을 내뱉는다. 로드리고는 배교 신부의 변명이 패배자의 자기기만이라 단정 지었다(231쪽). 하지만, 결국 그도 자신 때문에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는 농민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성화를 밟는다. 배교 신부가 된 것이다. 


 
 

 저자의 서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설에 담긴 사상, 즉 배교에 대한 합리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이해의 결핍,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아래의 주관적인 의견을 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배교에 대한 합리화다. 신념은 행위로 드러난다. 배교를 강요하는 일본 관리들은 로드리고에게 성화를 밟는 그 자체가 형식적이라며 그를 회유한다. 형식적이라면 왜 그에게 성화를 강요하겠는가. 그는 성직자로서 마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가 배교하면 신부들이 전한 복음을 의지하고 따랐던 농민들은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신부가 전한 복음과 그 행위가 다르다... 아니 이면적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명확하고 그에 따른 행위는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다. 로드리고가 성화를 밟기 전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267쪽)" 문맥상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우리(신자)에게 밟히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배교하면서 겪는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이요, 신자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고난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침묵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야 55:9).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인생 가운데 밀접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도 있고, 금식할 수도 있으며,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주권자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신자라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잘 분별하길 바라는 바이다.  



# 책 속 문장들


p. 861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기치지로의 어리석은 원망에 그러한 물음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p. 112

그가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배교한 자들이 관리의 앞잡이로 이용된다는 것은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배교자는 자신의 비참함과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동료를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같은 운명 속으로 끌러넣으려고 합니다. 


p. 157

"가라, 가서 너희가 이룰 일을 이루어라." 그리스도조차 자신을 배신한 유다에게 이와 같은 분노의 말을 던졌다. 신부에게는 오랫동안 그 말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모순된 것처럼 생각되어 왔지만, 웅크리고 앉아서 지금 개처럼 겁먹은 표정을 가끔 드러내고 있는 이 남자를 보자 전신에서 잔혹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가라, 가서 네가 행할 일을 하라'라고 그는 마음에서부터 격렬하게 꾸짖었다. 


p. 162

강한 햇빛이 우묵한 눈꺼풀에 예리한 칼처럼 와서 꽂혔다. 


p. 180

인간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인간까지 그리스도는 찾아 구원하셨던 것일까? 문득 신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악인에게는 또한 악인으로서의 강함과 아름다움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치지로는 악인의 가치도 없다. 


p. 181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 중 그리스도가 찾아 다녔던 것은, 사람들에게 돌을 맞은 창녀나 가버나움의 혈루병 여인처럼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들이었다. 매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 182

다만 밟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다, 밟았다 해서 마음속의 신앙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쪽도 거기까지 나무랄 생각은 없다, 우리의 명령에 따라서 성화에 가볍게 발을 얹어 놓으면 즉시 여기서 나가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p. 186

이윽고 내가 죽임을 당하는 날도 여전히 바깥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갈 것인가. 내가 죽임을 당한 뒤에도 매미는 여전히 울고 파리는 졸음을 재촉하는 날개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닐 것인가. 그렇게까지 영웅이 되고 싶은가.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남모르게 죽는 참된 순교가 아니라 허영을 위한 죽음인가. 신도들에게 칭송받고 기도받고, 그리고 저 신부는 성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인가.'


p. 212

나는 저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끌려서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민은 결코 행위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연민은 정욕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p. 261

"내가 배교한 것으 말야, 듣고 있나? 들어 주게나. 그 뒤,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p. 267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Soli Deo Gloria



반응형

Close mouth

2015. 10. 21. 17:59 삶을 살아내다



출처: digiday.com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 삶의 경계선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아니, 그 영역의 극단을 왔다갔다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요즘 혼란스럽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모호하고, 어중간한 삶을 살고 있는가. 





싫고 좋음은 더욱 분명해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시간과 비용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어 꺼리게 되고, 누군가 내 삶의 영역을 침범하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런반면에, 누군가의 도움에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기도 하고, 공동체를 위해 나의 생각을 버릴 때도 있고, 공동체를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그 혼란스러움이 다시 입을 다물게 했다. 생각의 혼란스러움 가운데 쉽게 내뱉어진 말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굳이 그렇게 말을 했어야 했을까. 당분간 다시 입을 다물듯 하다.   







Close mouth




반응형

'삶을 살아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그네 인생  (1) 2015.11.10
카카오톡(kakao talk) 새로운 기능_나와의 채팅  (2) 2015.10.28
I don't care  (0) 2015.10.14
정신을 차립시다.  (0) 2015.10.13
그리움도, 감사히 가져가겠습니다.  (0) 2015.10.03

다시, 침묵.

2015. 6. 20. 00:05 삶을 살아내다



다시 침묵이다. 사람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난, 상황이 어려울수록 입을 굳게 닫는 성향인데, 말을 안하면 평정심을 찾는다고 해야될까, 아니, 맞닥들이는 상황에 대하여 조금은 덜 민감하게, 덜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듯 하다. 그러면서 감정은 메말라가고, 표정은 없어진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포커페이스.  







Keep silent

반응형

'삶을 살아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의 위대함.  (0) 2015.07.09
I'm done  (2) 2015.07.02
Last chance  (0) 2015.06.18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0) 2015.06.16
말과 행동의 가벼움  (0) 2015.06.13

침묵, 관계 그리고 겨울햇살.

2013. 11. 14. 00:06 삶을 살아내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jjhw2121

                                                       




# 1  침묵, 그리고 글쓰기


생각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말수가 줄어들게 된다. 결국엔, 침묵으로 점철된다. 

입으로 내뱉어져야 할 말들이 새어나오지 못하니, 다른 분출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글을 쓴다. 

흰종이에 검은색 글자들이 채워지는 만족감. 

이와 더불어 글을 쓰면서 내 안에서는 정리되는 감정들과 생각들.

그래서 글을 쓴다.



# 2 관계의 재구성


이젠, 새로운 이성과 관계를 맺고, 알아가야 하는 과정이 귀찮다. 

솔로인 놈이, 무슨 그딴 소리냐고, 핀잔줄 수도 있겠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거다

원래 관계에 서툰사람인데, 귀찮으니 뭐, 할말 다했는거 아닌가. 


나를 포장하기 위한 가식이 싫고, 힘빠지는 감정소모가 싫다. 


그리고 굳이 이성관계에서 쓸데없이 친절과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가치관이, 이렇게 확 바뀔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바뀌더라. 





                       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trX&articleno=8569997



# 3 겨울 햇살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가을 점퍼만 걸치고 다니다가, 이제 옷을 세네겹 껴입게 된다. 


낮에는 그래도 햇볕이 따스해서, 마냥 걷기 좋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로 가는 길,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너무 따스했다. 


가로지르면 되는 길을, 빙 둘러 햇살을 맞으면서 걸었다


요즘 한참 듣고 있는 피아노 반주곡, Kiss the Rain을 들으며. 


겨울이어라. 






반응형

예수그리스도의 사명 - 침묵 속에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다.

2013. 6. 8. 23:18 신앙/말씀 묵상(默想)



사명.

 

 

 

 분명한 진리가, 다수의 모함때문에 거짓에 가리어졌다. 그들이 조롱하는 그 모든 일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지만, 예수님는 아무 말로 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정죄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능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인구원'의 사명을 감당해내야 하기에 긴 침묵을 유지하셨다.

 

 

 

누가 뭐라고 지껄이든지 간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출처:http://hyukzak.tistory.com

 

 

 

 예수그리스도는 진정 '난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고백하실 수 있는 분이다.







반응형
반응형

L'Étranger by kangsy85

Notices

Search

Category

First scene (1189)
프로필 (19)
삶을 살아내다 (407)
산업단지 (13)
도시재생 (4)
토목직 7급 수리수문학 (8)
토목직 7급 토질역학 (8)
자료공유 (106)
편집 프로그램 (8)
신앙 (285)
책과 글, 그리고 시 (252)
초대장 배포 (55)

Statistics

  • Total :
  • Today :
  • Yesterday :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Recent Trackbacks

Copyright © Nothing, Everything _ Soli Deo Gloria All Rights Reserved | JB All In One Version 0.1 Designed by CMSFacto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