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등대 3 _ 박 준

2019. 2. 12. 16:1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세상 끝 등대 3

 

 

                                                              박  준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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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p _ 박 준

2019. 2. 11. 17:03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84p

 

                        박  준

 

 

받아놓은 일도

이번 주면 끝을 볼 것입니다

 

하루는 고열이 나고

이틀은 좋아졌다가

 

다음 날 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삼일열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젊어서 학질을 앓은 주인공을 통해

저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서른 해 정도를 더 살다 갑니다

 

자작나무 꽃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암꽃은 하늘을 향해 피고

수꽃은 아래로 늘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입니다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놓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창밖으로

겨울을 보낸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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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_ 박 준

2018. 11. 21. 20:2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honey83.tistory.com]



미신


                      박   준



올해는 삼재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학생도 그만하고 

어려지는, 어려지는 애인을 만나 

잔디밭에서 신을 벗고 놀았다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나는 빈 가위질을하면

운이 안 좋다 하거나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도 

뒤편에 王 자를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클로버를 찾는 

애인의 작은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 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은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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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17. 20:00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2박 3일 


                    박  준



한 이삼 일

기대어 있기에는 

슬픈 일들이 제일이었다


그늘에서 말린

황백나무의 껍질을 

달여 마시면 


이틀 안으로 

기침이 멈추고 

열이 내렸지만


당신은 여전히 

올 리가 없었다


오늘은 나와 어려서 

함부로 입을 대던 아이의 

연담(緣談)이 들려와


시내로 가는 길에 

우편환을 보낼까 하다 

나서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흐려지는 

내 버릇도 

조금 고쳐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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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ㅡ금강_ 박 준

2018. 6. 30. 14:16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http://news20.busan.com>




저녁

금강


 

                         박  준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든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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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부르는 이름 _ 박 준

2018. 6. 23. 16:0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 http://www.10x10.co.kr>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박 



방에서 독재()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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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_ 박 준

2018. 6. 16. 13:0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환절기 



                                     박  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

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

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

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

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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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_ 박 준

2018. 6. 9. 09:03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눈을 감고 



                     박  준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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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반달 _ 박 준

2018. 6. 2. 01:1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인천 반달 



                                박  준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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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_ 박 준

2018. 5. 1. 23:1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  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로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가다 며칠은 먹

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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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x you _ Coldplay

2018. 4. 23. 20: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Fix you 


                                          Coldplay



When you try your best but you don't succeed

When you get what you want but not what you need

When you feel so tired but you can't sleep 

Stuck in reverse


And the tears come streaming down your face

When you lose something you can't replace

When you love someone but it goes to waste

Could it be worse?


Lights will guide you home 

And ignite your bones

And I will try to fix you 


And high up above or down below

When you're too in love to let it go 

But if you never try you'll never know

Just what you're worth


Lights will guide you home 

And ignite your bones

And I will try to fix you 


Tears stream down your face 

when you lose something you cannot replace

Tears stream down your face

And I


Tears stream down your face

I promise you I will learn from my mistakes

Tears stream down your face

And I


Lights will guide you home

And ignite your bones 

And I will try to fix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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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세상 _ 박 준

2018. 4. 7. 13:1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당신이라는 세상



                                         박 준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

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

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는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

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

에는 옷()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한 하는 것도 능사가 아

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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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남한강 _ 박 준

2018. 3. 25. 17:53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문병

―남한강  



                                박 준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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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자랑이 될 수 있다 _ 박 준

2018. 3. 24. 19:4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  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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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의 말 _ 나희덕

2018. 3. 20. 21:37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어떤 나무의 말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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