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조나단 에드워즈 저) - 죄인들을 향한 경고와 은혜의 메시지

2017. 2. 4. 22:05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조나단 에드워즈 저) - 죄인들을 향한 경고와 은혜의 메시지]







하나님의 진노는 곧 '그분의 거룩함에 반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이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는 '의'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 즉 '하나님의 의'에 근거하여 인간을 판단하시고, 그에 따른 보응을 하신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면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본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죄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은혜의 메시지이다. 책은 신명기와 에스겔의 본문을 설교한 내용이다. 저자는 '죄인들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13쪽)'고 강조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자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이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아직까지 인내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죄인을 벌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손에 붙잡고 있는 그들을 놓아버리는 순간, 그때부터 죄인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영원토록 죄인에게 부어지는데, 너무나 안타깝게, 지옥에서 죽음은 없다. '억겁의 세월동안(50쪽)' 고통을 계속 느껴야한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절망스럽게도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저자는 죄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완고한 '고집'과 '오만'을 버리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방편에서 마련하신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저자도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그 큰 긍휼, 사랑, 은혜는 번 말해서 무엇하랴! 저자가 말하듯이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맹렬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이 진리는 저자가 말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일관되게 제시하는 은혜의 메시지다. 믿음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공로는 전혀 없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은혜이자 복음이다. 


 책을 통해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의 무서움을 실제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통인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 책속의 문장들 


p. 13

악인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합니다. (중략) 그런데 그 칼이 그들을 내리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뜻이요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의 손길 때문입니다. 


p. 27

간단히 말해 그들에게는 피난처도, 붙잡고 매달릴 만한 지푸라기도 전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대노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뜻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약으로 맺어진 것도 아니요 어떤 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닌, 오직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p. 33

하나님께서 그 손을 놓으시는 날이면, 즉시 수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물결이 순식간에 우리를 덮치고 말 것입니다. 그 물결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맹렬한 기세로, 그 어떤 것으로도 저지할 수 없을 만큼 전능한 세력으로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p. 43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옥에 떨어져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래서 여러분의 불쌍한 영혼이 그 고통에 못 이겨 끝없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을 때, 여러분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진노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실 것이며 그 진노를 조금도 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p. 50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맹렬한 진노는 한 순간만 당해도 끔찍한 일일텐데, 회심치 않은 자들이 당해야 할 그 무서운 비참함은 끝이 없습니다. (중략) 그때 여러분은 이제 억겁의 세월 동안 전능하신 분의 무자비한 보복과 싸우며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처럼 오랜 세월 싸우며 지낸 후에도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즉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그 형벌은 정말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뿐입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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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2017. 1. 27. 00:42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며칠 전 잠실역에서 잠실새내역으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차내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지만, 불안감을 느낀 시민들은 스스로 지하철 문을 열고 긴급 대피했다. 차내 방송이 그 당시 상황에 적절했느냐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사태를 초래한 논리는 하나다.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다.' 세월호 사건이 국민들에게 남긴 트라우마다.   


 
 

 『눈먼 자들의 국가』는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여러 가지 시선이 담긴 책이다. 자기만 살겠 다고 뛰쳐나간 인간쓰레기 같은 선장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국가 때문에 순진무구한 어린 생명들은 차가운 바닷물에 서서히 숨을 잠식당했다. 박민규 작가는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56쪽)이라 정의한다. 그러하다. 사고는 우연에 의해 자주 발생한다면, 사건은 의도적으로 발생한다는 차이가 있다. 세월호 7시간 동안 박근혜가 무엇을 했는지 정치 공방이 치열하다. 내용이 어떠하든 박근혜는 확실히 무능했고, 국가는 철저히 무책임했다. 아직도 박근혜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고 부끄러워하지 않는(25쪽) 그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 박근혜 정부를 대표하는 두 가지 단어, '무능'과 '오만', 역시 맞는 말이었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지 약 3년이 지났건만, 세월호 선박은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다. 세월호 인양은 계속 미뤄지기만 한다. 행동 없는 말들만 무성하다. 도대체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야 하는가. 정유년에도 헬조선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으라'는 기득권의 거짓말에 놀아 나서는 안 된다.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 책속의 문장들


p. 10

사고 첫날, 외국 언론에서 조난자의 수온별 생존시간을 따져보는 사이 한국에서는 사망시 보험금을 계산했다. 사람들은 권력이 생명을 숫자로 다루는 방식에 분개했다. 


p. 25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은 그 맨얼굴은 그 자체로 폭력과 상처가 되었습니다. 


p. 205

 세월호 참사와 신자유주의 사이에는 분명 눈에 보이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세월호처럼 낡고 구조상 전혀 안전하지 않는 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운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과 같은 규제 완화의 정책기조나, 해경이 실질적인 구조활동을 포기하면서까지 사기업에 자신들의 공권력과 임무를 이전한 것과 같은 공공 부분의 민영화는 신자유의적 사유화의 가장 잘 보이는 표면을 이룬다. 


p. 207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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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한강 저) -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2017. 1. 25. 12:0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한 강 시인의 「유월」의 첫 글귀다. 희망이 병균이라면 우리는 삶을 비관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시는 희망이 병균과 같다며 시작하지만, 홀씨 흔들리는 핀 꽃을 보며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끝을 맺는다. 한 강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라면, 아픔과 고통을 솔직하게 직면하면서 담담하게 뱉어내는 언어가 어둡지만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음산하고, 침울하고, 어둡다. 그러함에도, 지리멸렬할지라도 끈질기게 삶을 붙들라고 당부한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면 할수록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면 내가 글을 뱉어내는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들을 읽는다. 


 
 

그녀의 소설 『흰』을 읽은 이유도 이해받고 싶어서였다. 소설이긴 하지만, 시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글을 읽다가 자주 멈춰선다. 멈춰선 탓에 글의 흐름을 놓치곤 한다. 한 단어에 매여 다음 단어를 읽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말일게다. 음산한 언어들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떻게든 살라고 매달린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제발 죽지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 한 강, 『』, 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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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엔도 슈사쿠 저) - 하나님의 침묵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부의 신념.

2017. 1. 25. 11:26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침묵(엔도 슈사쿠) - 하나님의 침묵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부의 신념] 






"인간은 가장 경솔한 신념의 동물이며 반드시 뭔가를 믿어야만 한다. 

신념에 대한 좋은 토대가 없을 때에는 나쁜 것이라도 일단 믿고 만족해 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인간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이도 있다. 영화 『헝거』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고,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드러낸다. 더욱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에게 신념의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그리스도의 침묵과 신자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종교 박해가 심한 17세기 일본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에 잠입한다. 종교적 박해가 극에 달했지만, 아직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발각되어 관리들에게 쫓기게 되고, 결국 배교자 기치지로에 의해 잡힌다. 하지만 더 절망적인 것은 그곳에서 배교한 페라이라 신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는 일본 이름을 부여받았다. 사와노 추우안. 그는 하나님의 침묵때문에 배교했다는 변명을 내뱉는다. 로드리고는 배교 신부의 변명이 패배자의 자기기만이라 단정 지었다(231쪽). 하지만, 결국 그도 자신 때문에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는 농민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성화를 밟는다. 배교 신부가 된 것이다. 


 
 

 저자의 서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설에 담긴 사상, 즉 배교에 대한 합리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이해의 결핍,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아래의 주관적인 의견을 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배교에 대한 합리화다. 신념은 행위로 드러난다. 배교를 강요하는 일본 관리들은 로드리고에게 성화를 밟는 그 자체가 형식적이라며 그를 회유한다. 형식적이라면 왜 그에게 성화를 강요하겠는가. 그는 성직자로서 마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가 배교하면 신부들이 전한 복음을 의지하고 따랐던 농민들은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신부가 전한 복음과 그 행위가 다르다... 아니 이면적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명확하고 그에 따른 행위는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다. 로드리고가 성화를 밟기 전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267쪽)" 문맥상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우리(신자)에게 밟히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배교하면서 겪는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이요, 신자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고난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침묵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야 55:9).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인생 가운데 밀접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도 있고, 금식할 수도 있으며,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주권자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신자라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잘 분별하길 바라는 바이다.  



# 책 속 문장들


p. 861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기치지로의 어리석은 원망에 그러한 물음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p. 112

그가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배교한 자들이 관리의 앞잡이로 이용된다는 것은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배교자는 자신의 비참함과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동료를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같은 운명 속으로 끌러넣으려고 합니다. 


p. 157

"가라, 가서 너희가 이룰 일을 이루어라." 그리스도조차 자신을 배신한 유다에게 이와 같은 분노의 말을 던졌다. 신부에게는 오랫동안 그 말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모순된 것처럼 생각되어 왔지만, 웅크리고 앉아서 지금 개처럼 겁먹은 표정을 가끔 드러내고 있는 이 남자를 보자 전신에서 잔혹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가라, 가서 네가 행할 일을 하라'라고 그는 마음에서부터 격렬하게 꾸짖었다. 


p. 162

강한 햇빛이 우묵한 눈꺼풀에 예리한 칼처럼 와서 꽂혔다. 


p. 180

인간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인간까지 그리스도는 찾아 구원하셨던 것일까? 문득 신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악인에게는 또한 악인으로서의 강함과 아름다움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치지로는 악인의 가치도 없다. 


p. 181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 중 그리스도가 찾아 다녔던 것은, 사람들에게 돌을 맞은 창녀나 가버나움의 혈루병 여인처럼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들이었다. 매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 182

다만 밟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다, 밟았다 해서 마음속의 신앙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쪽도 거기까지 나무랄 생각은 없다, 우리의 명령에 따라서 성화에 가볍게 발을 얹어 놓으면 즉시 여기서 나가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p. 186

이윽고 내가 죽임을 당하는 날도 여전히 바깥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갈 것인가. 내가 죽임을 당한 뒤에도 매미는 여전히 울고 파리는 졸음을 재촉하는 날개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닐 것인가. 그렇게까지 영웅이 되고 싶은가.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남모르게 죽는 참된 순교가 아니라 허영을 위한 죽음인가. 신도들에게 칭송받고 기도받고, 그리고 저 신부는 성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인가.'


p. 212

나는 저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끌려서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민은 결코 행위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연민은 정욕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p. 261

"내가 배교한 것으 말야, 듣고 있나? 들어 주게나. 그 뒤,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p. 267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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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구속-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기초 _ 알버트 윌터스

2016. 10. 15.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창조 때에 형성된(formed) 것이 역사적으로 죄에 의해 왜곡(deformed)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reformed)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 145 -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범죄로 인해 타락되었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속사가 시작되었다. 창조부터 구속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은 각각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구속사에 포함된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다. 따라서 전체적인 과정을 동일한 관점으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창조, 타락, 구속》은 올바른 세계관을 바탕으로 어떻게 현상들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또한 모든 상황이나 현상을 '구조'와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고, 그에 올바른 개념을 설명한다. 책을 통해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함과 동시에 이 시대에서 개인과 사회, 교회의 역할을 다시 상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래는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참고하면 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절 


# 창조 

 하나님은 말씀으로 6일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직접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통치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 27) 사람이 죄를 짓기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했다.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딤 4:4) 


#타락

 하와는 뱀의 간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죄를 짓는 순간, 창조된 모든 것은 타락의 영향을 받게 된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의 육체는 그대로 있었으나 그들은 벌거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다. 땅도 외형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수고로이 땀을 흘려야지만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있었다. 본래 창조된 땅과 비교했을 때, 어떤 측면에서 땅은 척박해졌다. 여자가 자손을 낳아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가겠지만, 여성에게 해산의 고통이 더해졌다. 만물의 모든 것이 타락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속성이 완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도 말살되지 않는다."(p. 100)


 
 


# 구속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타락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폐하시려고 하지 않는다. 타락의 영향을 받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신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그에 따른 대가는 치뤄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 만물을 타락시킨 인류의 모든죄(원죄를 비롯한 모든 자범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하나님의 단 한번의 피의 제사를 통해 인류의 구속사를 시작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창조 세계는 '회복'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쿨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D-day와 같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은 V-day와 같다. 이제 우리는 두 시기 사이에 살고 있어서,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치열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P. 134


 그렇다. 신자는 결정적으로 승리할 그 날을 고대하며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뤄야 한다. 만약 신자의 삶이 그저 편하고 쉽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닐 수 있으며, 결국에는 마지막날 하나님은 그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며 외면하실 것이다. 



책에서 좋은 문장들


개정판 추천사


창조로 형성된(formed) 구조가 타락으로 인해 방향이 왜곡되었고(deformed) 그것을 구속으로 변혁한다(reformed)는 성경적 비전의 핵심을 제시한다.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과 행동의 관계를 이렇게 파악하는 견해에 대해 많은 사상가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의 행동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계급적 이해 관계라고 주장한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세계관을 인도의 주체가 아니라 인도의 객체로 본다. 즉 세계관이란 실제로는 우리 정서의 역학에 의해 통제되는 행동을 합리화한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환경의 물리적인 자극에 의해 조건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실 인간의 행동은 매우 복잡해서 계급적 이해 관계, 조건화, 억압된 감정의 영향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 양식에서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달려 있다. 즉 이 문제 자체가 세계관의 문제다. 


세계관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거의 모든 교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세속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광범위한 영역과 구분하여 기본적으로 '거룩한' 혹은 '종교적'인 영역, 즉 신학이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에만 국한시키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성경이 우리의 신학(신학적 윤리를 포함해서)을 형성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치, 예술, 학문 같은 세속적인 일에는 기껏해야 간접적으로 관여할 뿐이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세계관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교회관이나 신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원래의 선한 창조, 죄로 인한 창조 세계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한 창조 세계의 회복.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조 교리가 가장 핵심적인 교리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구원의 핵심은 바로 죄로 타락한 창조 세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창조


이신론은, 우주라는 시계가 일단 그 태엽이 감기고 시계추가 흔들리기 시작한 다음에는 신의 창조 행위 없이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이다. 


매일 세계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사역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한마디 주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고, 주님의 명령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다"(시 33:9, 새번역)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2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무질서의 상태 즉 질서의 반대(이 해석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해석으로서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근거를 둔다)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략> 혼돈하다는(formless) rjtdms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니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의 보존에 깊이 관여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을" 뿐만아니라, "만둘이 그[예수님] 안에 함께 선다"(골 1: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를 통하여 모든 세상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신다(히 1:2, 3). 만들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은 또한 그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창조의 법의 전 영역에 깊이 참여하신다. 그는 창조와 재창조 모두의 중보자이시다. 


정의와 신실성, 청지기직과 경외에 대한 창조 규범을 하나님이 분명한 언어로 주신 적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규범적인 행동 기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창조 규범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음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양심이다. 


그리스도인들로 창조의 법의 인식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사물의 창조적 구조가 타락으로 인해 변화되었거나(혹은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게 되었거나) 예술, 경제,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인간의 인식 능력이 부패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불변성(혹은 창조 세계의 계시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우리의 분별 능력을 회복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능력을 과소평가한다. 


인간 문화의 광대한 전 영역은 변덕스런 진화가 빚어낸 임의적인 변종들로 이루어진 장관도 아니고 자율적인 자아가 창의적으로 이룩한 파노라마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이로운 지혜와 세상에서 우리가 맡은 중요한 임무가 서로 합해져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 사역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걸작품을 위한 청사진에 따라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그분의 조력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선한창조 


범죄 이전의 창조세계는 전적으로 명백히 선하다는 성경의 가름침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그처럼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류가 그것을 더렵혔을 때 그것을 폐기하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 치러 그것을 다시 새롭고 선하게 만들기로 하셨다. 하나님을 잡동사니를 만들지 않으셨으며 또한 만드신 것을 폐기하지도 않으셨다. 


인본주의는 사람을 자유라는 개념을 통해 규정하고, 자유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떤 법에도 따르지 않는 자율성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 종교는 그 반대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종의 신분으로 규정되고 종의 신분은 창조주의 법을 순종하는 타율성으로 규정된다. 인본주의는 법을 자유의 부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법을 자유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인류 전체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아담의 실패에 연루되어 있다. 죄의 영향은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친다. 창조된 사물 그 어느 것도 원칙상 타락의 파괴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점을 더욱 분명히 하자면, 죄와 악은 언제나 풍자 만화와 같은 성격을 띤다. 즉 일그러지긴 했지만 어떤 사물의 모습인지는 알 수 있는 그림과 같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그 인간성이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동물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다. 인본주의 학교도 여전히 학교이며, 손상된 관계도 여전히 하나의 관계이며, 혼란스런 사고도 여전히 사고다. 각 경우 타락한 창조 속에 어떤 것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창조의 영구적인 선함, 즉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창조된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킨다.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도 말살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두 '질서'의 맥락에서,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구조는 창조의 법, 달리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그 근거를 둔다. <중랴> 반면에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창조세계의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방햐응로 나갈 수 있다. 이런 이중적인 방향은 개인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공학이나 예술 그리고 학문과 같은 문화현상과, 노동 조합이나 학교, 회사와 같은 사회제도, 그리고 감정과 성, 합리성과 같은 인간 기능에도 적용된다. 


구조와 방향이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아무리 서로 얽혀 있을지라도, 이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지적해야겠다. 


죄를 범하는 행위가 사탄의 속박 아래에서 이루어지지만, "마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사탄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가 변질되어 신음하도록 만든 책임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문제처럼 여기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경에 나오는 타락 이야기에서 사탄의 역할을 살펴보라. 뱀(천상계의 타락한 천사가 뱀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인데)이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할 때, 지상계는 아직 악으로 오염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이 범죄할 때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선한 지상계가 허망함과 속박에 매이게 된다. 사탄은 먼저 인류를 조종해야만 선한 지상계에 재난을 몰고 올 수 있다. 지상계의 상태는 인간의 책임 아래 있으며 인간의 책임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근본적인 신앙 공백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구속은 회복, 즉 창조에다 어떤 것을 첨거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선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회복은 창조 세계의 어떤 영역에 국한되기보다 창조 세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온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지상의 모든 악의 근본 원인(즉 인간의 범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치유되고 극복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그의 구속은 죄의 모든 영향도 제거한다. 선한 창조의 왜곡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런 왜곡의 범위는 무제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회복의 가능성을 제공하신다. 만일 창조 세계 전체가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면, 창조 세계 전체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먼저 나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 보통 '나라'로 번역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basileia)의 일차적 의미는 '왕권' 즉 '주권', '통치', '지배'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영역 혹은 지역을 지칭한다기보다(물론 이것도 부차적으로 의미하는 바이지만) 왕이 자기 직무를 역동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강조점은 왕으로서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예수님의 기적은, 구속이란 창조 세계가 죄와 악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피조물의 삶으로 복괴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 즉 회복의 사역은, 타락한 창조 세계에 그 나라가 침투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나라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을 성서로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와 시간」(Christ and Time, 나단 역간)이라는 저서에서 스위스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전의 1944년 노르망디 상륙에 관에 쓰고 있다. 'D-Day'에 감행된 그 상륙 작전은, 'V-day' 즉 최종적이고 완전한 승리를 실제로 누리는 날 이전에 반드시 있어야 했다. 쿨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D-day와 같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은 V-Day와 같다. 이제 우리는 두 시기 사이에 살고 있어서,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치열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은 창조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하나님과 그 대적 사이에 심각한 전쟁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확실히 '영적' 전쟁이다. 


5 구조와 방향의 구분


구조란 창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방향이란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 성경에서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용어들(예컨대 성전, 제사, 제사장, 분향)이 신약에서 그리스도 혹은 그의 몸인 교회의 모든 삶으로 전이된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이처럼 개혁은 일차적으로 성화를 의미한다. 개혁의 두 번째 특징은 이 성황의 방법이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갱신이라는 점이다. 


구조라는 개념은, 모든 상황이나 조건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법을 통해 자기 피조물에 제공한 개발 가능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인간의 가장 지독한 왜곡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규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든 일부 요소는 보존될 가치가 있다. 반대로 모든 사물은 종교적 방향성을 갖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죄의 왜곡에 감염되어 있으며 종교적 갱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병든 교회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그 교회 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좋은 것을 붙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한다. 여거서도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롬 12:9) 한다.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를 왜곡하는 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는 주어진 영역 안에서 규범을 왜곡 하는 것이며(국가에서의 불의나 가정에서의 어린이 학대, 사업체에서의 임금 착취 등), 다른 하나는 한 영역의 권위를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은사의 중요도나 화려함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들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화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다면, 모두 똑같이 '카리스마적'이며 '영적인'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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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산다는 것-공동체를 유지하는 네 가지 실천 _ 크리스틴 폴

2016. 10. 14. 17:26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완벽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오늘 당신의 공동체를 충분히 누리라. 

-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Community and Growth, 성바오로 출판사)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동일한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사회 공동체와 비슷한 유형의 공동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회 공동체와는 다르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예수님를 교회의 머리로 삼아 만물위에 세우셨다(엡 1: 22-23). 교회의 본질적인 위상은 현재 추락한 교회의 실상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교회 그 자체로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다. 



이 시대의 악한 권세들은 교회 공동체들이 올바르고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악한 권세들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위상을 실추시킬 수는 없지만 교회 안의 사람들을 이용해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 왜냐면 교회로 모인 사람들도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악한 세력의 유혹과 꾀임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성도는 영적으로 새롭게 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도는 주일 예배 성경공부에서 배우거나 깨달은 것을 삶으로 증명해내려고 노력해야한다. 즉, 배운바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고 올바르게 세워 나가기 위한 중심이 '실천'이라고 설명한다(p. 13). 책에서는 서로 약속을 지키는 것, 진실하게 살고 진실하게 말하는 것, 감사를 표현하는 것, 남을 대접하는 것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실제 예시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다만, 이 책이 아쉬운 것은 실천만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책의 앞 부분에 실천을 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들이 나오긴 하지만, 내용이 다소 빈약하다. 교회의 올바른 '이해'와 '앎'을 바탕으로 한 실천, 즉 믿음의 행위가 있을 때 교회가 이 시대의 빛(요 8:12)으로서 세상을 밝힐 수 있다.   

      


책의 좋은 문장들


 우리는 생명력과 신실함과 돌봄이 있는 공동체를 꿈꾸기 때문에 계속 교회를 세우고 회복해 나간다. 함께 있음을 누리고 기쁨을 나누며 은혜와 사랑으로 어려운 시간을 헤쳐 나갈 때 그러한 공동생활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 있도록 지음받았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풍요로워지고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몇 가지 실천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생동감 있고 건강한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에는 특정한 관계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약속을 지키는 것, 진실하고 살고 진실하게 말하는 것, 감사는 표하는 것, 남을 대접하는 것 등이다. 이 실천들은 임시로 만들어진 그룹이 아니라면 지속성이 있는 거의 모든 그룹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성경과 함께 신학적, 도덕적 전통의 자료들을 검토하고 몇 권을 책을 중심으로 폭넓은 대화를 나누면서 지혜와 격려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보고서에 적힌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실천과 그 왜곡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황적인 요인들이 어떻게 실천들을 강화시키거나 약화시켰는지, 그리고 실패에 대해 건설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은 무어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감사의 실천을 다룬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감사로 시작하고 약속과 진실함으로 유지되며 손대접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단선적이거나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로 나타나는데 그 사실은 손대접의 실천을 끌어내고 강화시킨다. 우리의 약속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충실하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우리의 진실함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2장 감사하는 마음 


 값비싼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실제로 이해할 때 우리가 드릴 것은 오직 감사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렇게 표현했다. "[은혜와 감사는] 하늘과 땅처럼 한 쌍을 이룬다. 목소리가 메아리를 부르듯 은혜는 감사를 부른다. 번개 뒤에 천둥이 오듯 은혜 뒤에 감사가 온다." 하나님의 본질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의 본질은 감사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감사란, 견딜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을 때도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분이시며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시 13). 어려운 때에 감사하려면 우리가 이야기 전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우리 삶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 충실한 사람들의 고마움을 깨달아야 한다. 감사가 있을 때 죽음과 멸명은 우리의 결말이 될 수 없고 우리를 궁극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감사할 줄 아는 능력은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지 아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몇 년 전 폴 투르니에는 "모든 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어떤 선물도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존엄성이나 평등의식과 연결 지을 때는 권리가 건강한 개념일 수 있지만, 그것이 확장되면 오히려 끊임없는 불만과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 태도를 낳는다. 


 우리는 계약 관계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권리와 자격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지만, 계약의 상대편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계약 관계가 깨졌을 때 매우 졸렬하게 행동한다. 불쾌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듯 말이다. 문제 상황에서 은혜의 마음가짐이란, 불편함에 대해 감사를 느껴야 한다거나 항공사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모든 정황속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3장 감사의 어려움들


 아무런 반응도 없고 고마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계속 사랑과 인내로 섬기려면, 우리가 하는 일이 먼저 하나님께 드려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진실한 공동체로서 짐의 강점뿐 아니라 자신의 약점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짐을 섬김을 존중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존재를 소중히 여겨 주었고, 짐이 감사하지 못하고 권리의 문제로 힘들어할 때 곁에 있어 주었다. 때로는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그들은 계속 신의를 지켰다. 결국 그들은 짐의 장점뿐 아니라 상처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4장 감사를 약화하는 것과 강화하는 것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비교 의식이 얼마나 심해지는지 나는 알고 있다. 바로 나에게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남들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할 만한 조건은 수없이 많다.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는 사람, 더 좋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 공부 잘하고 주목받는 자녀를 둔 사람, 의견을 내면 더 잘 수렴되는 사람, 당신보다 일찍 결혼 상대자를 찾은 사람 등등 수많은 사람이 떠오른다. '불공평함'이라는 괴물이 매일 저녁 식탁 주변을 서성이며 당신을 노려본다. 그토록 치열한 공동생활에서 비교는 위태롭게 분열을 일으키며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 크리스 라이스, 《은혜가 중요하다-


 공동체는 불평이 큰 쟁점으로 떠올랐을 때, 문제점을 정확하게 다루고 불만과 해결책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솔직하게 불만을 털어놓는다면 그 불평이 타당한 것인지 모두가 명확히 볼 수 있다. 서로에게 충실하고 진실한 환경에서는 문제의 건설적인 해결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다. 18세기 초, 신학자 윌리엄 로(William Law)는 매일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개인적인 작은 부활이라고 묘사했다. 


 "아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누리게 하시고 세상의 새로운 문을 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루의 첫 예물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새로운 삶의 기쁨으로 매일을 맞이하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며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라. 마치 우리를 위해 새롭게 지으신 것처럼 태양과 만물을 바라보라. 놀라운 축복속에서 선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창조자를 기쁨으로 찬양하라."


5장 약속들, 약속들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정체성을 지킬 수 없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한길사)


 성경에서 우리는 약속과 감사의 연관성을 쉽게 볼 수 있다. 감사는 충실함에서 나오는 행위이기도 하고 충실함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언약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소망과 믿음과 감사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깨진 약속과 불성실함에 연결된다.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불평하는 것은 언약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표현이거나 언약의 관계를 깨드리는 것은 해석된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언약은 조건이 없으며 예수님이 죽음으로 그것을 인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반응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 없이는 언약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목표 중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성이 있으며 참된 상호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에 달려 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의 약속을 공개적으로 되짚어 보는 교회 전례를 통해 중요한 약속들을 재현하고 기억할 수 있다. 세례식은 약속들과 약속하기로 채워진 전례다. 우리는 세례식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들을 기억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 혹은 유아 세례자의 부모는 그에 응답하여 약속을 한다. 세례를 통해 사람들은 교회 가족의 일원이 되며 특정 교회의 신실한 구성원이 되어 어디에 있든 교회와의 친교를 추구하기로 약속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얻는 새 생명으로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 


6장 약속 지키기의 어려움들


 결혼을 예로 들면 계약과 서약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전통은 결혼을 부부 두 사람과 그들의 가족, 교회, 하나님을 포함하는 서약으로 보았다. 결혼 서약이 한쪽이나 양쪽 모두의 과실로 회복이 불가능한 만큼 훼손될 수도 있지만, 이 서약에는 평생 충실하고 서로 책임을 질 것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서로의 앞에서 맺은 서약, 약속, 맹세는 때로 힘든 시간을 함께 지나느 동안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끈이 되기도 한다. 


 어떤 환경과 어떤 사람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시련과 갈등도 견뎌 낼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교회와 공동체에 들어왔다가 뿌리를 깊이 내리기 전에 떠나간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는 개념과 소비자적 사고방식이 결합하면,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질 때 쉽게 떠날 가능성이 높다. 


7장 약속을 약화하는 것과 강화하는 것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관계를 저버리고 공동체를 서서히 무너뜨린다는 의미다. 작은 배신들은 종종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해를 입히고 다른 실천들까지 병들게 한다. 진실의 자리에는 속임수가, 환영의 자리에는 부재가, 감사의 자리에는 불평과 질투가 끼어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배신에 반응하고 어떻게 사랑을 지속하는가 하는 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성숙을 시험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자신을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며 책임의 무게에 눌려 있다. 이 사람들이 가진 어려움은 어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것일까? 치러야 할 대가는 점점 많아지고 공동체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때조자 그들이 '일을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점점 더 많은 역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중요한 약속이자 삶을 변화시키는 헌신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는 교회 생활에 소비자의 태도로 임하지 않을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을 오래 할수록, 중요한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들과 끈기 있게 사는 것을 배우는 일임을 더 분명히 알게 된다.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을 갖고 통찰력과 충실함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문제들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는 다른 문제가 늘 생겨날 것이다!"


 바울은 초대 교회를 향해 더 깊은 화합과 성숙으로 나아가라고 편지하면서, 사랑과 진리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의 핵심이다(엡 4:1-5). 진실함이란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뿐 아니라 온유함과 겸손과 인내로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말은 확실하다"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그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며 정직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의 확실성은 약속을 지킬 때 잘 나타난다. 약속을 지킴으로써 그는 신뢰할 수 있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진실하고 충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키르케고르가 지적했듯이 "당신이 약속한 것을 행하지 않을 때 진실로부터 훨씬 더 멀어지는 것이다"는 필연적인 결과다. 


 겹치는 것이 많고 가까운 공동체에는 다른 어려움들이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서로에 대한 진실을 알 필요가 있는데, 이처럼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은 때로 위험하다. 크리스 라이스는 《은혜가 중요하다》에서, 자신의 공동체가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혔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결점과 약함을 드러낼 때 어떻게 하면 우정을 깨뜨리지 않고 더 돈독히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잘못이 너무 두르러지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빛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9장 진실함의 어려움들


 진실을 말하거나 혹은 비밀을 지키는 데 있어 우리의 동기를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질문들이 있다. 이 진실은 누구에게 유익한가? 이것이 밝혀지거나 숨겨졌을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 누가 상처를 받는가? 나는 왜 그것이 알려지길 원하는가? 진실을 말하는 궁극적 목적이 사람들과 공동체가 그리스도께로 자라가도록 돕는 것이라면, 우리의 동기들은 그 중심에 선함과 경건함으로 사람들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진리와 빛을 밀접한 관계로 그려낸다. 에베소서 5장 8-9절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도록 초청받는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빛의 열매를 맺는 삶 말이다. '빛'이 되는 것과 '빛의 자녀들'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투명하고 공동체의 시선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밀리에'하는 일이 거의 없이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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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영화 _ 허문영 지음

2016. 10. 13. 17:47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 카너멋, 『생각에 관한 생각』 중에서 



 관객은 영화를 본다. 그러나 모든 관객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앞의 문장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 전제 해야할 것이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장면을 보는 것,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생각하는 것,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영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다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중략> 완수의 만족감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영화들이 대다수다 하더라도, 영화의 힘은 보는 것과 읽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완결되지 않는 긴장에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 책 7쪽 - 


 상업 영화일수록 보여지는 장면 그 자체가, 감독이 의도하는 바일 가능성이 크다관객의 시각을 자극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상업영화의 주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업 영화가 표면적 의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에 따라 표면적 의도와 이면적 의도가 공존할 수 있다. 반면에, 저명한 감독의 예술적 영화나 난해한 주제를 가진 영화에서는 관객이 주의깊게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장면속에 감춰진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영화는 시각적인 건과 언어적인 것, 광학적 시점의 주체와 이야기하기의 주체가 분열하고 중첩되고 엇갈리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 기댈 만한 확정적인 논의는 없다. 하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광학적 시점의 주체는 언제나 카메라이며(등장인물의 시점 숏에서조차도), 그 카메라를 통제하는 것은 감독이다. 또한 이야기를 데쿠파주하고 촬영된 장면을 편집해 내러티브를 결정하는 주체 역시 감독이다. 따라서 영화의 최종적 화자는 결국 감독이다

- 책 257쪽-


 장면 전후의 단순한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영화에 숨겨진 의도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영화는 시대의 배경, 인물, 관계 등의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재구성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는 영화평론가 허문영 씨가 영화에 내포된 의미와 주제의식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부분들을 알려주기 때문에 책을 읽음으로써 영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에 소개된 영화는 보지 않았던터라 저자가 서술한 장면들을 읽고 이해하는데 그쳤다는 것이다.  




책에서 생각해 볼 문장들


영화, 폭력, 폭력 이미지에 대한 단상 1 - 아덴만의 미혹


 우리가 솔직하다면, 폭력에 반대한다는 상식화된 우리의 신념이 매우 연약한 지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 지반이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를 최근의 '아덴만의 여명'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전쟁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또한 해적들이 요구한 것이 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폭력적으로, 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면 살육 작전으로 대응한 것이다. 한국 군대가 이 정도 규모의 살육 작전을 벌인 것은 적어도 '광주' 이후 처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살육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환호하고 있다.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 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무한도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웃음과 놀이, 혹은 비예술에서 배우기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김병욱 옮김, 청년사, 1994) 밀란 쿤데라의 유머에 대한 정의는 이러하다. "인간사의 상대성에 대한 도취; 확실한 것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야릇한 쾌감."


 <무한도전>에서는 아무리 해도 그 정도까지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의 확인에 방점이 있다. 이것은 자괴감이나 연민에 가깝다. 미션 수행을 실패했고,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무한도전>은 미션 수행이 완결될 때 그것을 성취로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버텨낸 무능력자들의 안쓰러운 발버둥. 그에 대한 연민과 자기 연민이 그 결말의 배움이 된다. 


영화와 죽음에 대한 단상 1 - 시신 이미지를 넘어


 누군가 죽어서 비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극의 성립을 위해서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에서 분노가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충동이 분노를 조성하는 것처럼, 이 경우엔 죽음이 슬픔을 낳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터트리기 위해 죽음을 조성하는 것이다.


 변호인(2013, 양우석) - 살균과 표백 


 이 영화가 노무현과 우리 시대를 다루는 한, 창자자의 취사 선택을 물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은 선택된 것들이 어떻게 배열되고 어떻게 작동되는가, 라는 평자의 질문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라는 연루자의 질문이다. <변호인>은 '젊은 날의 노무현'의 이야기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변호인>은 '영웅적 결단'의 즉각적이고 강력한 감화를 위해 중요하지만 논쟁적인 사실들을 모두 버린다. 간단하게 물어보자. 1981년의 부림사건을 다루면서 왜 1982년의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다루지 않는가. '노변'이 역시 변호인단으로 참여한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미국이 묵인한 데 대한 항의로 문부식 등이 벌인 사건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한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대의와 무고한 희생의 충돌 앞에서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변호인>은 그 딜레마를 질문하지 않는다. 

 

 <변호인>이 시대와 인물을 그리는 이분법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국가주의자의 폭력적인 이분법과 대중 서사의 순진한 이분법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잔혹하고 폭력적인 권력 대 순박하고 가련한 민중, 혹은 사악한 저들 대 순수한 우리, 혹은 오염된 세상 대 순결한 나. 대중 서사가 오래 사랑해온 이 도식이, 노무현과 우리 시대라는 절박한 질문의 사실들로부터 빚어진 서사에 작동할 때, 우리는 이것마저 창작자의 선택으로 존중해야 되는 걸까. 


노예 12년(2013, 스티브 맥퀸) - 진실이 폭력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일기를 쓸 때조차 완벽하게 솔직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하루의 사건들에 낮은 층위에서라도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취사선택, 과장 혹은 미화의 과정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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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만남 _ 마종기, 루시드폴

2016. 10. 12. 00:05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출처: www.daum.net>




마종기 시인은 의사이다. 가수 루시드폴은 공학박사이다. 공존할 수 없는 두가지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 받았다. 루시드폴의 첫번째 편지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루시드폴이 마종기 시인의 시를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 그의 음악은 마종기 시인의 시와 닮아있다. 


나는 마종기 시인의 '첫날밤'을 읽고나서, 그의 그리움을 좋아했다. 그가 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쓸쓸함과 고독함이 편안했다. 오랜시간 그의 시를 좇아다녔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루시드폴도 그 정서에 빠져들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어쨌든 그는 용기내어 마종기 시인에게 첫번째 편지를 쓴다. 그리고 마종기 시인은 답장한다. 그렇게 2년간 서로 주고받은 57개의 편지를 엮어 만든책이 『아주 사적인, 긴만남』이다. 편지를 주고 받는동안 서로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마종기 시인은 루시드폴의 음악을 귀기울여 들었고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의 시를 자주 읽었다. 편지를 통해 예술과 과학, 고독과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나이와 지역을 초월한 우정을 엿볼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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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The Call) _ 오스 기니스

2016. 10. 10. 19:4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소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지, 즉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찾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삶을 출발할 수 없다. 


부르신 이 없이 소명(부르심)만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소명을 붙잡고 사는 삶이 쉽지만은 않다. 왜나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작점이 개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자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공존할 수 없다. 나를 버리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부르심이 어떠한 대가를 치른 것인지', 확실하게 이해한다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명》은 소명의 정의를 바탕으로 포괄적인 범위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부르심에 마땅한 삶을 알려주고 있다. 소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자라면, 큰 유익이 있을 것 같다. 



  



1. 소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 땅에 살아 남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파괴하게 될 거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것(존재 목적을 찾는 일)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일기』-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이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경계하라. 그분에 대한 헌신의 최대의 경쟁자는 그분을 섬기는 활동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지 그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


 어떤 접근들은 영적인 은사와 천부적인 재능을 모두 발견하려고 시도하지만 재능의 발견을 예배와 귀기울임-이것이 소명의 본질인데-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린다. 그결과 재능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지만 그것이 청지기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이기심으로 흐르게 된다. 

<중략>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서든 좀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차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다."

-몽테뉴(Montaigne)-


"인생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북극성만을 기준으로 삼아 방향을 조정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코 사람의 호의나 미소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당신에게 미소 짓고 계시다면 사람의 미소나 찡그림에는 상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찰스 고든(Charles Gordon) -



12 소명의 공동체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 모든 현대적 추세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부르심은 불가피하게 공동체적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대중의 '회합'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세속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원은 '불러내어진'(called out)이란 의미가 있고 구약 성경의 관점으로는 '불러내어진 백성'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결국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그분께 속한 그분 백성의 회합이다.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따라서 독특하게 개인적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인 신자들의 무더기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한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교회의 공동체성은 기관을 통해 생존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간의 신비로운 연합의 문제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부름받은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교만에 특히 약한데, 그 이유는 군중의 인간적인 칭찬을 멀리하고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살려는 소원 때문이다. 

<중략>

 "진짜 사악하고 음흉한 교만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멸시하고 그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 C.S. Lewis -  


 우리 각자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죄, 즉 홀로 뽐내는 단단한 '자아'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런 은혜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나태함은 또한 무기력하게 소파에 파묻혀 있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나태함은 육체적인 게으름 이상의 것이다. 사실상 나태함은 무기력 상태로 쉽게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극단적인 활동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뿌리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 선, 미의 본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상태, 곧 노골적인 영적 낙담 상태를 의미한다. 나태함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내적으로 낙담한 상태로서, 결국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빠져들게 된다. 


 현대적인 나태함에는 세 가지 주요한 측면이 있는데, <중략> ... 첫 번째는 철학적인 측면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상태, 따라서 영원과 불멸에 대한 믿음도 상실한 상태는 삶 자체의 생명력 고갈로 치닫게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현대 세계의 세속화 과정을 '마법 풀기'라고 묘사했다.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되었던 삶의 마술과 신비가 조직적으로 축소되고 파괴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명에는 성/속, 고상한/저급한, 완전한/허용된, 관조/활동의 구별이 없다. 소명은 심지어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조차 없애 서로 평등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름심에 반응하여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삶을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3.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소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1546년경 미켈란젤로는 성지에 가까운 귀족 친구인 비토리아 콜로나(Vittoria Colonna)를 위해 연필로 "피에타"를 그렸다. 천사가 마리아의 발 앞에서 죽은 예수의 몸을 부축하고 있고, 마리아는 미켈란젤로의 다른 피에타 그림에서처럼 아들을 흔들어 재우는 대신 말없이 경이감에 싸여 두 눈과 손을 하늘로 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똑바로 선 십자가 기둥 위에 단테의 「천국」에서 따온 문장, "얼마나 많은 피를 대가로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를 새겨 넣었다. 이것이 이 그림의 묵상 주제다. 

 얼마나 많은 피가 대가로 지불되었는지, 누구의 피인지, 왜 흘렸는지 등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멈추어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래서 간음을 일삼던 여인은 용서를 받고는 입맞춤과 향수와 눈물로 온통 예수님의 발을 적셨던 것이다. 분수에 넘친 그녀의 헌신은 그보다 더 분수에 넘친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반응이다. 시몬드 베이유가 훌륭하게 표현했듯이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아무것도 당연시 말도록,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도록, 모든 것이 은혜로 넘치도록."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우스운 짓이며,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자기 보호를 포기하는 것은 부조리한 행위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은 신인이신 조롱받은 메시아의 제복을 입기 위해서 선택하는 명백한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은 기쁨도 없이 찡그린 얼굴을 한 금욕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쁨이 충만한 얼굴로 죽어간 사람, 고난받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찬송하며 살아 간 사람들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킨다. 



복음는 우리가 느긋해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대립(antithesis)이 있고,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제자도의 대가가 있으며, 우리가 은폐해서는 안 될 순종에 대한 도전이 있고, 우리가 결코 증발시켜서는 안 될 믿음에 대한 스캔들이 있다. 그러한 진리에 충실하다가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도 좋다. 



 우리는 타이밍에 대한 모든 주장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모든 시대는 도덕성이 타락하고 있다고 느낀다. 학자들은 자기 주장을 ' 큰 분수령'이라고 과정해서 말한다. '위기'는 현대의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항존하는 특징이자 상투어가 되었다. 흔들리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넘어지지는 않으며, 여러 가지 '미래의 만조'는 자그마한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다. 큰 소리로 '전환점'이라고 외쳐지던 것들이 대부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지 못하고, 전환점 운운하는 논의에는 함정이 즐비하다. 



 우리는 '부름받은 존재'다. 누가 감히 이 숭고한 비전에 반하여 우리를 '속박받는 존재'라고 모욕하며, '용기 있는 존재'라고 뻔뻔스럽게 말하거나 '타고난 존재'라는 숙명론을 제기하는가? 하나님의 음성은 들렸으나 형태는 보이지 않았던 그 장엄한 시작에서부터 최후의 부르심 때 그분의 모든 자녀를 향한 계획을 밝히실 절정에 이르기까지, 소명의 특성과 목적은 가장 귀가 멀고 둔감한 자를 제외한 모든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마음과 영혼을 전율케 한다. 

 이것을 깊이 숙고하라. 최후의 부르심이 우리 각자에게 올때 우리가 완전히 소명에 응답했고, 그 도를 좇았으며, 유종의 미를 거둔 모습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진리의 용사'(Valiant-for-Truth)와 같이 마지막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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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_신영복 옥중서간

2016. 3. 15. 22:4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출처: leroy7.com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식어버린 계절...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p. 28. -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다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읽고싶었다. 그 분이 돌아가신 다음 날 책을 주문했다. 요즘 자주 책을 들춰보고, 한참을 읽다가 생각하고, 다시 읽다가 필사한다. 20대에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글의 깊이에 놀랐고, 그리고 글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30대에 다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사고의 깊이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속에서 나는 인생에 대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왔던가. 그 고민과 사유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수확하였는가. 그 물음앞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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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2012) _ 이병률 여행산문집

2015. 10. 29. 17:1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이병률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과 애틋함이 깃든 글을 좋아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책을 사면 설레이는 맘으로 한 장씩 아껴가면서 읽는다. '끌림(2010)'이 그러했고, '내 옆에 있는 사람(2015)'도 그러했다. 한 번에 다 읽기에는 아까웠으므로, 조금씩 글을 곱씹으며 생각하며 읽었다. 



이번에도 설레이는 맘으로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샀고, 아껴 읽을 요량으로 책을 폈다. 근데 어쩌냐. 글들이 잘 읽혀지지 않는다. 글을 읽고 싶었는데, 글이 읽혀지지 않는다, 짜증나게. 그만이 가지고 있는 글의 감성들이 읽혀지지 않는다. 글을 잘쓰는 것과는 별개로, 글을 공감할 수 있게, 나의 이야기인냥 몰입할 수 있게 쓰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병률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이번 책의 58개의 여행 에피소드 중에 쉽게, 물 흘러가듯이 읽혀지는 에피소드가 몇 개 되지 않는다. 



글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병률 작가가 마감기한에 맞춰 글을 짜냈어야 했나, 

자문하면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일념하에 꾸역꾸역 책을 읽다가 마지막 장을 넘겼다. 참, 재미없게 말이다. 건질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만 남긴다.  

 





8# 나를 덮어주는 사람 


이토록 많이 받아서 영영 받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굳어져 버리게 될까 두렵고 어려웠던 사람. 

그렇게나마 내 허술한 빈 곳을 가릴 수 있으니 나에게는 축제 같았던 사람. 




14# 묻고 싶은게 많아서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 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누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외롭고, 목이 마른 이유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당신이겠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45# 여행을 가서 토끼를 기르겠다고 토끼를 샀다.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토끼는 진한 회색이었다. 고급스런 털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 눈에 띄진 않았다. 토끼를 사고 사료를 사면서 당근도 조금 샀다. 이름을 '삼개월'이라 지을 수 없어 '삼월'이라고 지었다. 


<중략>


문제는, 삼월이가 무척이나 외롭다는 생각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삼월이도 그럴 것이었으며, 그러니 내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결국 나는 두 번째 토끼를 또 사고 말았다. 말도 안되게 이번에 산 토끼는 수놈이었다. 좋아하는 11월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이름은 자동적으로 '십일월'이라고 지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전화를 거는데 전화가 먹통이었다. 이빨이 더 나려고 잇몸이 가려웠는지 전화선을 갉아먹은 거였다. "너희들이 끊어놔서 전화가 안 되잖아!"


<중략>


그래, 너희들끼리 잘 해봐라. 나는 그들에게 진정 잘 해주고 싶었으므로 그래 잘 해봐라, 했다. 나는 시 쓰기에 열중했다. 며칠 동안 잡히지 않는 시의 끄덩이를 물고 놓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당근 따위를 씹어 먹으며 지낸 어느 날, 뭔가가 내 발등에 올려졌다. 따듯한 무엇이었다. 몰캉한 무엇이었다. 


<중략>


시를 쓰겠다고 며칠 동안 몰두하는 사이, 아무것도 먹을 것을 챙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게 며칠이 지났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49# 마음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 거기에 누가 손 잡아줄 이가 있나요.


<중략>


- 언제는 나에게 손 잘아줄 사람 있었겠습니까?


라고 까칠한 문자를 하려다 


- 손 말고 모가지 묶어줄 사람 구합니다. 


라고 허튼 문자를 하려다 


- 네, 어떻게든 구해야지요. 


라고 쓸쓸히, 안간힘을 보태 문자를 보낸다. 




57# 이별이었구나 


아, 이별이었구나. 

나는 돌아와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느라 한 번도 뒷일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이별이 아팠구나. 미안하다. 나, 이토록 텁텁하게 살아서, 정말 미안하다. 음식을 만들면서도 음식에다 감정을 담는 것인데 하물며 나라는 사람, 이렇게 모른척 뻣뻣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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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있는 사람(2015) _ 이병률 여행 산문집

2015. 10. 28. 14:28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출처: www.mathplan.com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좋을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치도록 화나고, 분하고, 짜증난다. 늘 좋은 수도, 늘 나쁠 수도 없는게 사람들과의 관계다. 나는 사람한테 잘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잘 실망하지도 않지만, 근데 간혹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붓고, 은근하게 큰 기대를 하다가, 다시 실망하고,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곤 한다.  

  





"사람한테 다정하지만 사람한테 까칠하다. 

자주 숨고 자주 간절하며 자주 미친다."


- 이병률 -





'내 옆에 있는 사람' 첫 장에 쓰여진 이병률 작가에 대한 글구다. 작가의 글구는, 곧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라 깜짝 놀라면서 반가웠다. 사람한테 다정하지만, 사람한테 까칠하다... 특정사람한테 잘해주고, 특정사람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않는, 편애가 심한 나의 인간관계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글구인 것 같다는.  



이 책은 제목처럼 사람에 대한 글이다. 사람 때문에, 사람에 의하여, 즐겁고 슬프고 화나고, 그리고 다시 가슴 뭉클해지는, 이병률 작가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조심스레 떠올렸고, 떠오르는 얼굴에 미소짓기로 했지만, 다시 떠오른 얼굴은 나의 인생가운데 부디 사라져 주길 바라며 얼굴을 내젓기도 했다. 

 



이병률 작가의 글을 읽으면, 늘 느끼는 거지만, 일상의 소재를 아주 맛깔스럽게, 그리고 탁월하게 글로 써내려가는 능력이 있는 듯 하다. 작가라면, 다들 이런 능력이 있겠지만 말이다. 특히 이병률 작가의 그 감성과 약간의 우울함이 곁들여진 글은, 나의 우울함과 맞닿아 있기에, 친근하지만 아프다.


아, 그리고 이병률 작가의 책은 페이지번호 따로 없다는 것을, 이번에 알아챘다는.



가슴에 맺혀서 


                          지키고픈 

                          무엇을 

                          가졌습니까 



온 마음으로 지키고픈 무엇이, 몇몇 날을 길바닥에 누워서라도 안 되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이냐고 울고불고 대들 그 무엇이 가슴 한쪽에 맺혀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걸 지켜내는 데 까짓 두려울 일은 그 무엇일지 당장 알고만 싶어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어진간히 

따로가 


                              아름답겠습니다



살아보니 당신이 보였습니다, 라는 첫 문장으로 편지를 쓰면서 

당신하고는 이토록 소박한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라든가 

어지간히 따로 지내는 것이 아름답겠습니다, 라는 말을 적는 건 어떨지. 

아무리 긴 시간을 꾸민다 해도 더이상 같이 지낼 수 없다는 것은 

공기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일 테니.

근사한 말들을 동원해 마술을 보여줄 것도 아니라면

게다가 장엄한 결말을 내기엔 주인공들이 지쳐 보이므로. 


불확실한 것으로 연명하는 것은 어쩌면 죽임이기도 한 것인

안녕, 안녕, 안녕이라고 백번을 말해줄게. 



그토록 

 

                                 무섭고도

                                 지랄맞은

                                 꽃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내부에는 그토록 무섭고도 지랄맞은 꽃이 자라고 있는가. 빛깔은 날카롭고 향은 진하디진한 그 꽃의 씨앗은 어디로부터 스며들었단 말이가.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얼만큼의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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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_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2015. 1. 28. 12:33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저, 이영의 옮김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갈 때, 그 삶의 환경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바뀔수 있다. 

그러한 상황을 몇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자연적인 재해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 아니면 적응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두번째는 타자나 한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된 상황이라면, 그 권력에 순응하는가, 아니면 반대하여 타개해나가는가의 문제에 다다를 수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수용소는 지배급과 피지배급이 명확하게 나누어진다. 피지배층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노동의 산물로 얻어진 이익은 지배층들에게 다 돌아간다. 피지배층의 노동의 대가는, 오로지, 한 그릇의 양배춧국과 빵일뿐이다.  

 
  


하지만 이반은 이러한 불합리한 수용소에서 살아갈 방법을 몸에 아주 잘 익혔으며, 매 순간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비열하게 남의 것에 눈독들이지 않으며, 자신의이익을 위해서 치사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수용소의 상황에 순응하며 몸 상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불합리한 체제에 스스로 순응하여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하는 자의 실존에 대한 문제, 내가 처한 문제이기도 하지 않을까, 묻곤한다.







p.73

어림없는 얘기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반이라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똑같은 반이라도 이반에겐 이반대로, 표트르는 표트르대로 임금을 지불해주는 그런 자유세상에 있는 반하고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 <중략> -

반 전원이 상여 급식을 타먹게 되느냐, 아니면 배를 주리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걸린것이다. 



p. 157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지금까지의 전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p. 170

사람들은 점점 맥이 빠지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이 모든 것은 양배춧국 한 대접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한 그릇의 양배춧국은 얻기 위해서 말이다. 



p.172

그러자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달려와서 쟁반을 빼앗으려 한다. 슈호프보다 약골처럼 보인다. 슈호프가 그 녀석쪽으로 쟁반을 홱 밀자, 그 녀석을 뒤로 쿵 넘어져 기둥에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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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테이프의 편지_C.S. Lewis

2015. 1. 21. 23:5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C.S. Lewis, 김선형 옮김

 출처 : openuri.tistory.com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허락하셨다. 창조주(하나님)가 피조물(인간)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했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하신 것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것들을 향유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을 향하게 되어있었다. 안타깝게도, 창세기에 기록되었듯이 간교한 뱀이 하와를 유혹함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그들 악을 행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타락한 존재가 된다. 모든 의지와 욕구가 자아를 충족시키는데 몰두하는, 이기적인 존재.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긴 했지만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지적체계를 이어받은 존재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 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 -사랑, 온유, 기쁨 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아담의 죄 때문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육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들은 창조 때 지음받은 선한 마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사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탄(Satan)이다. 사탄은 인간이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들며, 타락한 인간들은 현재의 모습과 상황이 자신의 최선이라 여기며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이러한 사탄들의 입장에서 인간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라본것이다. 이 책은 선배 사탄이 후배 사탄에게 인간들을 공략할 전략과 그에 대한 내용들을 편지형식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책에서 사탄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자신을 지은 존재,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인간을 유혹한다. 저자 C.S. Lewis의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사탄들이 인간들에게 원하는 것 -즉,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이 무엇인지 고찰해야 하는 고단함을 무릅쓰고, 사탄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내려 간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책 중간 중간에 사탄의 입장에서 말하는 원수(하나님)의 진리들을 읽을 때면, 짜릿하기도 했도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사탄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또한 각각의 상황에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 옳은 것인지 고민해보면 좋을 듯 하다. 






p.23

교인이 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찾아오는 실망감이나 맥 풀리는 느낌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원수는 인간의 노력이 문턱을 넘으려 할 때마다 이런 실망감이 찾아오는 걸 허용하고 있다. 


p.54

원수가 인간을 사랑한다느니 원수를 섬기는 게 외려 완벽한 자유라느니 하는 말들이 단순한 선전문구가 아니라(우리야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만) 소름끼치는 진실이라는 점은 우리도 직시해야 한다.


p.56

인간이 원수(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 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p.91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일 후손의 행복의 위해 일한 다음(그 일이 자기 소명이라면), 그 일에 관한 생각을 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 채 그 순간에 필요한 인내감사의 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다.


p.168

비겁하게 만들까? 아니면 용감하게 만들어서 교만을 유도해 볼까?


p.186

이 순간 나(스쿠르테이프)를 지탱해 주는 것이라곤 얼빠진 헛소리나 사탕발림을 거부하는(어떠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주의가 끝내 승리하고 말리라는 확신뿐.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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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처럼_존 스토트

2014. 8. 8. 00:39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Soli Deo Gloria

 

 

 

                                                        존 스토트 / 이은진 옮김

 

 

 

 '그리스도처럼'은 존 스토트 목사님이 1965년부터 2007년까지 케직사경회에서 설교하신 말씀을 묶어놓은 것이다. 사경회를 하실 때의 본문을 강해 설교하신 것인데, 그 설교는 온전히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1965년의 로마서 5-8장의 강해 설교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5장에서 언급되는 칭의 교리를 통해 신자가 얻게 되는 3가지 유익을 알게 됨으로써, 신자로서 누리고 있는 현재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6장의 연합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합한 신자는 실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뚜렷하게 알게 된다. 죄의 종노릇 하던 무능력한 존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의를 옷 입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오직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존재 자체의 변화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외에도 존 스토트 목사님의 디모데후서, 마태복음, 에베소서.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강해 설교를 통해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p 20

여기에서 칭의의 주요 열매는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은혜',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는 '영광'입니다. 

 

p 53 

그리스도는 자신의 속죄가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지금 하나님께 대하여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p 61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 가운데 거하던 예전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했음을 보여주는 세례를 떠올리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계속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p 87

자기를 혐오하고 자신에게 절망하는 위치에 도달하는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뿐입니다. 

 

p 138

은혜가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라면, 긍흉을 약하고 무력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고, 평강은 안식이 없는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p 288

여러분은 "죄죽임이란 무슨 뜻인가? 어려운 신학 용어 같은데 죄죽임은 어떻게 실천하는 건가?" 하고 물을 것입니다. 보는 것을 통해 유혹이 찾아오거든, 그래서 눈이 너희로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말은 한마디로 보지 마라는 말입니다. 눈을 빼어 내버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맹인처럼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보지 마십시요. 

 

p 298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 같은 행동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인 행동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성한 행동이다.  - 알프레드 플러머 -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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