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 21:3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출처: https://m.blog.naver.com/seungmiart/221192843862
어젯밤 아내의 소변에서 핏빛이 비쳤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직 태중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내심 두려웠다. "어쩌면... 아닐거야..." 발생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하는 건 불안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순간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욥기의 고백이 떠올랐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1)
10월까지 자연 임신이 되지 않으면 시험관을 시도하려고 했다. 근데 때마침 조그마한 생명체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아이를 보내주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우리가정에 새생명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그저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음파로 아기의 집을 실제로 보고나서 혹시나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했다. 불신앙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창조자이자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 우연이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선하신 것을 베푸신다는 그저 믿으면 되는 것이다.
이른 아침,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마음 속 불안함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다시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기억하며 별일 아닐 거라고 속으로 되뇠다. 다행히, 아내의 상태도 크게 나쁘진 않았다. 병원에 진료 접수를 하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만을 기다렸다. 20분쯤 지났을까, 아내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아내를 따라 진료실에 들어갔다. 선생님께 지난밤 소변에서 핏빛이 비쳤다고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초음파로 한번 검사해보자고 말씀하셨다. 아내와 함께 초음파 화면을 응시했다. 선생님께서 초음파 장치로 이곳 저곳을 만지니까 서서히 아기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번때 보이지 않았던 난황과 아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다. 선생님께서는 심장박동 소리도 들을 수 있겠다면서 아기쪽으로 초음파 장비를 가지고 가셨다. "쿵쾅쿵쾅" 조그마한 생명체의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불안이 절정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면서 다시 생각한 것은 나의 연약함이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빨리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는지, 얼마나 자주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내는지, 신앙의 불편한 민낯을 직면했다. 다시 소망하는 것은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나의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의 위대함과 전능하심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욥의 고백이 나의 진정한 고백이 되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긴장하면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삶이 안쓰러웠다 (0) | 2023.09.29 |
---|---|
비극 속에서 맞이하는 한 줄기의 이파리처럼 (0) | 2023.06.11 |
아무래도 미루어두었던 일은 다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0) | 2022.09.29 |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0) | 2021.08.28 |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2023. 9. 29. 16:03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지난 목요일부터 왼쪽 눈썹 옆에 조그마한 두드러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포진으로만 생각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의 두통과 함께 얼굴 한쪽 면이 화끈거렸다. 인터넷에 증상을 검색해보니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과 비슷해 보였다. 대상포진은 초기에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생긴다는 네이버 글에 덜컥 겁이 났다. 퇴근하고 급히 마취통증의학과 병원을 방문했다. 늦은 시간이라 병원은 한산했고 환자는 나 혼자였다.
의사 선생님은 내 증상을 보고 현재로선 띠 모양의 포진이 아니라서 대상포진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대상포진의 가능성이 있으니 예방 차원에서 치료를 잘 해보자고 나를 안심시켰다. 주된 치료은 근육 주사 치료였다. 주사를 맞기 전에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초음파 치료와 물리 치료를 병행했다. 물리치료사가 몸의 근육을 풀어주면서 목 근육이 일반 사람보다 매우 딱딱하다고 말했다. 손가락으로 근육을 눌러도 근육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등과 목 근육이 많이 경직되어 있으며 몸 전체 근육의 긴장도도 높다고 말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물리치료사의 말에 나는 궁금했다. 내 근육은 왜 평상시에도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다. 제대하고 나서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찾던 시절, 삶의 여러 부분에서 경직되어 있던 20대가 떠올랐다. 실수가 잦았던 스무살 청년의 때에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실수를 할 때마다 자책하면서 말과 행동을 점검했고, 다시 실수하지 않을 때까지 스스로 몰아 붙였다. 자기검열과 자책으로 점철된 20대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잠 못드는 날도 많았다. 스스로 삶을 지키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져 버릴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도 마음 저변에 깔려 있었다. 결국,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나를 항상 긴장하게 하지 않았을까. 되돌아보면 긴장하면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삶이 안쓰러웠다.
불확실했던 20대와 고되었던 30대를 지나 불혹(不惑)의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청년의 삶의 끝자락에서 중년을 맞이해야할 때다. 그러니 이제는 몸에 힘을 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적절한 에너지의 안배가 중요하다. 모든 곳에 에너지를 쓸 수도 없다. 평소에 힘을 좀 빼고 살아야 다시 힘을 줘야할 때 힘차게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그동안 각박한 삶을 사느라 몸에 온 힘을 주고 살아온 나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라 (0) | 2023.12.02 |
---|---|
비극 속에서 맞이하는 한 줄기의 이파리처럼 (0) | 2023.06.11 |
아무래도 미루어두었던 일은 다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0) | 2022.09.29 |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0) | 2021.08.28 |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2023. 6. 11. 21:3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비극으로 끝날 뻔한 우리의 여행이 희극으로 바뀌면서 낯설었던 집안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한동안 방치되었던 반려 식물이었다. 몬스테라의 한 줄기에서 새로운 이파리가 눈에 띄게 자라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자그마한 이파리가 줄기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곧 자라겠구나' 무심하게 생각하며 집을 떠났었다. 집을 비운 며칠 새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성큼 자라버린 새로운 이파리를 보면서 비극 속에서 희극을 꿈꾸던 나를 생각했다.
지난 여름, 몬스테라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러가지 일에 치여 몬스테라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저러다가 곧 죽는 게 아닐까' 라는 비관적인 물음이 내 마음을 붙잡기도 했지만 이내 모른척 하고 쌓인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바쁜 일이 끝나고 숨쉴 틈이 생겼을 때 메말라가는 몬스테라를 발견했다. 기어코 죽지만은 않겠다는 몬스테라의 자그마한 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몬스테라를 살려보겠다고 분갈이를 하고 주기적으로 물을 주면서 온갖 애정을 다 쏟아 부었다. 몬스테라도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다시 힘을 내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줄기에서 조그마한 이파리가 생겨나 점차 컸고 뿌리에서 또 다른 줄기가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 한 개의 이파리에서 두 개의 이파리가 되었고, 다시 세 개의 이파리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이파리가 자라나고 있다. 몬스테라도 죽어가는 비극 속에서 자신이 살아날 희극을 꿈꾸었을 것이다.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말이다. 마침, 나도 몬스테라의 비극 속에서 소망을 꿈꾸었고, 참담했던 비극은 희극으로 전환되었다. 생각해보건대, 몬스테라가 다시 희극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비극 속에서 희극을 꿈꾸지만, 그렇다고 희극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비극과 희극의 총집합이 아니던가. 비극도, 희극도 다 극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함에도 몬스테라와 나의 삶이 희극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비극 속에서 맞이하는 한 줄기의 이파리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라 (0) | 2023.12.02 |
---|---|
긴장하면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삶이 안쓰러웠다 (0) | 2023.09.29 |
아무래도 미루어두었던 일은 다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0) | 2022.09.29 |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0) | 2021.08.28 |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2022. 9. 29. 23:03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우리해리와 함께 떠난 첫 파주 헤이리 마을 여행.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여행 일정을 갑자기 정한 탓인지, 미뤄두었던 일들이 눈에 밟히었다. 늦잠을 잔 탓도 한몫했다. 부리나케 온라인 위탁 교육을 듣고, 서둘러 전세보증금 대출 여부도 확인하고, 미루어두었던 혼인신고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바쁘다. 마음은 바쁜데 시간이 없다. 떠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아무래도 미루어두었던 일은 다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채 집을 나섰다. 파주로 향하는 차안에 무거운 침묵만이 우리와 마주하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도착한 헤이리 마을. 마을로 들어서자 차를 타고 지나온 파주시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나무와 가지, 예쁜 건물, 그리고 여유로운 사람들. 예약한 모티프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맘은 한결 가벼웠다. 떠나는 자의 자유와 낯선 곳의 새로움이 기분을 다시 좋게 만들었다.
모티프원 안내 직원을 도움을 받아 suite-black 방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가을 햇살이 우리를 맞아주었고, 싱그러운 녹색의 식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어쩜 이렇게 예쁜 것인지.
분주했고, 서둘렀던 모든 마음들이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망설였던 마음도 이제는 지나간 일이다. 잔잔하게 흘러 퍼지는 음악과 따스히 내리쬐는 햇볕이 이 공간을 꽉 채운다.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온라인 교육을 듣게 해주려는 우리해리의 따뜻하고 예쁜 마음이 더 고마웠다. 우리해리가 아니었다면 나 혼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툴툴거리는 나를 이곳까지 데려와 준 우리해리의 손을 잡고 다시 이곳을 방문해야겠다는 마음도 슬며시 맘 한켠 자리 잡았다.
방 중간에 가만히 앉아 오랜만에 집어든 시집을 찬찬히 읽었다. 다시 시집을 집어 들었다는 것이 기쁜 일이었고, 가을의 한 지점에서 시를 읽고 있다는 것은 더욱이 기쁜 일이다.
일상을 분주함을 내려놓고 찾아온 헤이리 모티프원. 아마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추억될 것이다. 우리해리와 함께 보냈기에 더 행복했고 더 따스했던 어느 가을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다.
"암술에 도착한 꽃가루란 하나의 기적이다 / 다시 해볼 것도 없이"
- 이현승, <은유로서의 질병> 중에서 -
긴장하면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삶이 안쓰러웠다 (0) | 2023.09.29 |
---|---|
비극 속에서 맞이하는 한 줄기의 이파리처럼 (0) | 2023.06.11 |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0) | 2021.08.28 |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낡은 집에 대한 불편함도 한몫한 것 같다 (0) | 2021.08.13 |
2021. 8. 28. 22:1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출처 : JTBC 뉴스
1년의 해외 선교를 다녀와서 무기력한 상태로 몇달간 지냈다. 선교에 대한 회의와 의문만 남긴채 현실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다시 남은 대학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한국에 2월에 입국했고, 3월에 대학생으로서 새학기를 시작했다. 2년간 휴학하고 다시 복학하니까 대학교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하고 학교를 떠난 상황이었다. 전공공부를 하려면 동기가 있어야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는데 아는 친구들이 없으니 스스로 더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간 전공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다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감도 컸다.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벽기도에 나가서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두려움과 걱정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해서 내가 해야할 공부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와서 바로 김밥 한줄을 후다닥 먹고 바로 학교 도서실로 향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오전시간을 이용해서 배워야 할 공부를 예습하고 못했던 전공 레포트를 작성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몸이 피곤했던 탓에 도서실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적도 많긴하다. 그때는 꾸준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그냥 목표였다. 4학년 1학기에 새벽기도를 하고 학교에 가는 생활 습관을 어렵게 지키냈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4년 대학생 기간 중 가장 좋은 학점을 얻을 수 있었다. 스스로도 놀랐지만 심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좋은 성적을 거둔 나 자신이 기특했다.
다시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면서 힘들때마다 마음 속으로 되뇌였던 문구가 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솝우화에 나오는 문장인데, 이 말의 요지는 상황을 탓하지 말고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마다 내가 맞닥뜨린 상황을 탓하지 않고 어떻게 이겨내서 앞으로 나아갈까 생각했다. 결국 이러한 태도가 내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누구나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삶에서 힘든 일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 자체에 매몰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처한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와 나를 딛고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다.
비극 속에서 맞이하는 한 줄기의 이파리처럼 (0) | 2023.06.11 |
---|---|
아무래도 미루어두었던 일은 다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0) | 2022.09.29 |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낡은 집에 대한 불편함도 한몫한 것 같다 (0) | 2021.08.13 |
그저 잘 살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이다 (0) | 2021.04.16 |
2021. 8. 24. 21:4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성난 목소리로 나를 위협했던 민원인이 다시 찾아온다는 전화를 받고나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발생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며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다. 지난번 민원인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탓에 목소리를 높이는 민원인을 만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다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봐 지레 겁먹는다. 겁먹은 탓에 상스러운 말로나를 몰아부치는 민원인에게 굳이 맞대응하지 않는다. 근데 알량한 자존심일까. 물러서지 않고 굳이 버티고 앉아있는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아닐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뭐, 어쩔 수 없는 겁쟁이인가 보다.
혼자서 불안해하는 나를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굳이 그래봤자 민원인한테 멱살 잡히기밖에 더하겠어?' 그래, 막연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그 상황이 발생하면 정신적으로 좀 힘들 수 있겠지만, 그 상황이 아주 최악은 아니다. 불안한 마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마음은 한결 편해진다.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내게 해를 가한 민원인을 완전히 용서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맞대응하지 않았고 분내지 않았다. 당황해서 아무런 대응도 못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성적으로 잘 대처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도 신자로서의 삶을 조금 더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내하고 견디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십자가로 인한 고난은 아니지만, 충분히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갈 좋은 기회이긴 하다. 잘 헤쳐나가기를 스스로 응원한다.
아무래도 미루어두었던 일은 다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0) | 2022.09.29 |
---|---|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0) | 2021.08.28 |
낡은 집에 대한 불편함도 한몫한 것 같다 (0) | 2021.08.13 |
그저 잘 살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이다 (0) | 2021.04.16 |
요나의 박넝쿨과 나의 합숙소 (0) | 2021.04.03 |
2021. 8. 13. 16:42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버스를 오랜시간 탔기 때문일까. 경주 집에 도착했을 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3개월만에 부모님을 뵈었지만 내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아버지는 저녁식사를 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반찬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큰 방에 앉은 뒤 계속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부모님과 별 대화도 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서 TV 화면만 응시했다.
경주 집에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내 방이 없다. 주로 어머니가 계시는 방에서 쉬긴하는데 뭔가 편안하지는 않다. 낡은 집에 대한 불편함도 한몫한 것 같다. 몇해전 돈을 보태줄테니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라고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날 대화는 결국 내 결혼 이야기로 점철되었다. 부모님 걱정하지 말고 나부터 먼저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 뒤로는 이사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몇개월 전 아버지는 갑자기 전화오셔서 무작정 몇백만원을 빌려달라고 말씀하셨다. 돈의 용도를 물었으나 아버지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고 돈이 있으면 빨리 빌려달라고 재촉하였다. 자다 일어난 탓에 돈의 용도와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고, 피곤해지기 싫어서 아버지에게 돈을 보냈다. 며칠 뒤 안 것이지만 결국 그 돈은 아무 쓸모 없는 데 사용되었다. 아버지가 돈을 어디에 쓰는 지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돈을 빌려준 내가 어머니와 누나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웃긴(?) 상황도 발생했다. 그 뒤로 아버지에게 그 돈에 대해 묻지 않았다.
집이란 본래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본가를 떠난 지 오래된 탓인지 경주에 가면 언제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내야 한다. 어제도 오늘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누워서 텔레비전만 보다가 집 근처 바닷가에 바람을 쐬러 외출했다. 밖에 나와서 책을 읽고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지만, 몇시간동안 연락되지 않는 엄마와 외출하기 전에 본 아버지의 굽은 등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예민한 탓일까, 부모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것일까. 자꾸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르지만, 답이 없는 질문은 결국 머리만 아프게 할뿐이다. 본가에서 지낸 며칠동안 불만과 짜증만 가득 쌓인채 결국 개운하지 않은 감정만 남기고 다시 떠나야만 할 것 같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0) | 2021.08.28 |
---|---|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그저 잘 살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이다 (0) | 2021.04.16 |
요나의 박넝쿨과 나의 합숙소 (0) | 2021.04.03 |
이제서야 숨 돌림 틈이 생겼다 (0) | 2021.02.27 |
2021. 4. 16. 21:52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30대 초반부터 여자 사람 친구들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 여자를 전처럼 마냥 친구로 대할 수 없었다. 친구라면 일상을 편하게 나눌 수 있어야할텐데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 사람 친구에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왜, 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하는가란 질문에 마땅히 대답할 거리가 없다. 우리는 다른 길에 들어섰고 이제 서로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결혼하는 여자 사람 친구와의 관계를 끝내는 시점은 결혼식이다. 서글프긴하지만 그간의 정든 관계를 축의금으로 마무리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물질주의로 환원시키는 우둔함이긴 하나, 어차피 멀어질 관계이니 미리 정리하겠다는 심산이 크다. 코로나시대의 청첩장에는 신랑, 신부의 계좌번호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결혼하는 여자 사람 친구에게 미리 축의금을 보냈다. 어차피 많이 모일 수 없는 시기이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니 미리 축의금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내 손을 떠나버린 축의금을 다시 돌려받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잘 살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 친구야, 네 삶의 길에서 잘 살면 되는거야. 부디, 몸 건강히 잘 지내길 바랄뿐이다.
그래,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0) | 2021.08.24 |
---|---|
낡은 집에 대한 불편함도 한몫한 것 같다 (0) | 2021.08.13 |
요나의 박넝쿨과 나의 합숙소 (0) | 2021.04.03 |
이제서야 숨 돌림 틈이 생겼다 (0) | 2021.02.27 |
옛 모습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일 수도 있다 (0) | 2020.10.12 |
2021. 4. 3. 23:07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운좋게 합숙소에서 1년간 혼자 지냈다. 약 25평의 아파트에 혼자 지냈으니 거실과 부엌은 내 공간이었다. 내게 필요한 기구들과 내용물들을 잘 정리해놓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달전 신입이 합숙소에 들어왔다. 혼자 살고 있던터라 신입이 한 공간안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부담되고 불편했다. 굳이 왜 합숙소에 들어오려는 것이냐라는 불만도 내재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원래 합숙소는 내 전용공간이 아니다. 합숙소는 현장으로 발령받은 직원에게 주어진 혜택이며, 모든 직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좋은 기회로 합숙소를 혼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집 전체를 혼자 사용하다가 신입사원이 합숙소에 들어오면서 나의 공간이 줄어든 것에 대한 불평을 터트리는 나를 보면서, 요나가 떠올랐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욘 4:9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자 그들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백성에서 재앙을 내리려고 했던 뜻을 돌이키셨다. 그 상황에 화가 난 요나는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 앉아서 니느웨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봤다. 그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여 그늘을 만들어주어 요나의 머리를 가렸다. 그랬다가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해서 박넝쿨을 다 갉아먹게 하여 박넝쿨이 시들게 되었다. 요나의 머리를 가리던 박넝쿨이 사라졌으니, 해가 뜰때에 강한 햇볕이 요나의 머리를 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통해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메시지와는 별개로, 요나에게 거저주신 박넝쿨과 나의 합숙소를 함께 생각했다. 분명히, 합숙소는 처음부터 내게 거저 주어진 공간이었다. 나란 사람이 어찌 이리 간사한지, 새삼 깨닫는다. 어차피 합숙소는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 나의 공간에서 감사하게 잘 지내면 되는 것이다. 불만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낡은 집에 대한 불편함도 한몫한 것 같다 (0) | 2021.08.13 |
---|---|
그저 잘 살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이다 (0) | 2021.04.16 |
이제서야 숨 돌림 틈이 생겼다 (0) | 2021.02.27 |
옛 모습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일 수도 있다 (0) | 2020.10.12 |
어찌 보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있었다 (0) | 2020.10.04 |
2021. 2. 27. 14:4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갑작스런 실태점검탓에 약 3주간 바쁘게 움직였다. 실태점검 요청자료를 준비하고 관련 자료를 작성하고 또 다시 점검위원을 맞이하여 요청한 자료를 준비했다. 그들은 목적을 가지고 점검을 나왔으니, 어찌되었든 성과를 얻어갈 것이다. 그들은 질문하고 우리는 답변한다. 주로 전체적인 사업을 훤히 알고 있는 과장님께서 답변했지만 듣고 있는 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하루를 분주하게 살았고, 이제서야 숨 돌릴 틈이 생겼다. 바쁜 일상 덕분에 한 숨 돌릴 수 있는 여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다만, 실태점검을 받으면서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다. 실수와 실수, 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대학원 시절, 봉사활동 팀장으로 일을 맡아 진행할 때 교수님의 필요는 맞춰주지 못해 분주히 뛰어다니기만 했던 날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팀에 온 지 1년 4개월이 지났는데 사업의 전체적인 흐름을 모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어떠한 주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할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점이다.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을 할 수는 있지만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내가 너무 내 문제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일, 관계, 일상의 모든 부분과 맞물려 있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태도는 결국 다른 사람의 업무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친구와 대화하면서, 나의 오래된 친구는 지금 나의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성격으로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아마, 세월이 지나면 내 주위에 사람이 별로 남지 않을거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나도 동감하는 바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일이든 인간관계든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될 점들이 많다는 게 요즘 나의 생각이다.
일부터 이야기하자면, 일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효율을 높이려면 일을 체계적으로 해야한다. 일의 순서를 먼저 생각하고 일의 중요도를 살핀 다음, 중요한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면 나중에 모든 걸 정리하려고 하기보다 각 단계에서 일을 살펴보고 중간중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단적인 예로는 일을 하면서 필요한 파일을 바탕화면에 다운받을 때가 있는데 일과 관련된 폴더에 미리 저장해서 진행하면 나중에 다시 파일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순간 일을 빠르게 처리하게 위해서 바탕화면에 다운로드를 받고 바탕화면에서 파일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체계와 효율, 지금 내게 꼭 필요한 두가지다.
인간관계에서는 먼저, 현재 주위에 있는 사람부터 잘 챙겨야 한다. 10년지기 친구들, 그리고 5~6년된 친구들까지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에게 다가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써야 한다. 관계에서 떠나가는 사람을 잡아본 적은 한번도 없다. 몇번 연락을 미리 한적은 있지만, 굳이 내가 애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애를 써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힘써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연락하고 관심을 가져주고 신경써주는 것,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은 맞지만,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다. 느리겠지만, 다시 한발씩 나아가보도록 하자. 방향만 옳다면 느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잘 살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이다 (0) | 2021.04.16 |
---|---|
요나의 박넝쿨과 나의 합숙소 (0) | 2021.04.03 |
옛 모습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일 수도 있다 (0) | 2020.10.12 |
어찌 보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있었다 (0) | 2020.10.04 |
되찾아야할 나의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0) | 2020.09.30 |
2020. 10. 12. 22:38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추분(秋分)이 지났다.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추워진 날씨 탓에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걸 즐긴다. 웅크린 채 주로 하는 것은 묵묵히 글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마음의 짐을 덜어내야겠다고 매년 다짐했다. 요즘 그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활자들이 많아질수록 말수는 줄어들고 생각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나의 삶에 대해 다시 묻고 있다. 삶의 여정에서 무슨 연유로 이 공간, 이 지점에 서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정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는 참 오랜만이다. 요즘 답이 정해진 질문에만 답하려고 애를 썼다. 수학처럼 정답이 정해진 인생 길이 편하기도 했고, 나름 고심하며 살았던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정확히 찾아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내딛는 한 걸음에도 온 힘을 다하려고 했던 삶의 끝자락에서 표류했다. 방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몇주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이별과 만남, 그 속에서 언급되는 익숙했던 언어가 다시 나를 흔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옛 모습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일 수도 있다. 어차피 지금의 흔들림이 나아가기 위한 발버둥인지, 아니면 짙어지는 가을에 취한 방랑자의 한때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저녁 가을바람이 차다.
요나의 박넝쿨과 나의 합숙소 (0) | 2021.04.03 |
---|---|
이제서야 숨 돌림 틈이 생겼다 (0) | 2021.02.27 |
어찌 보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있었다 (0) | 2020.10.04 |
되찾아야할 나의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0) | 2020.09.30 |
Good&Angry (0) | 2020.09.04 |
2020. 10. 4. 18:22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올해 초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좋은 어른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어른을 떠올리면서 그간 좋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라도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약 기운에 잠이 들었다. 소개팅에 나가서도 맥락 없이 좋은 어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있었다.
지난 몇개월을 되돌아보면 좋은 어른은커녕 좋은 사람으로 살지 못했다. 말과 행동의 간격이 컸으며, 그 간격에서 나는 몹시도 위태로웠다. 흔들린다는 건 스스로 지탱할 힘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어찌 스스로 굳건히 서지 못하는데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어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 며칠 전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다. 내게 큰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내 기분을 조금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관계의 적정선에서 백 보는 뒤로 물러난 듯하다.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숙해지지 않는다. 성숙해지려는 노력이 없다면 세월이 지나도 철없는 어른에 불과하다. 최근에 아이를 낳아 육아의 고통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후배가 대뜸 내게 형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얘라고 타박했다. 결혼과 출산은 분명 한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 가장의 삶은 희생이란 단어와 맞닿아 있다. 희생을 잘 모르다는 측면에서 나는 아직 어린아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혼과 출산이 인간을 성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자명하다. 그러하기에, 아직 미혼인 현실을 감안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제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서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노력이 존재해야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시, 실수노트를 작성할 예정이다. 20대 후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트에 일상의 실수를 적고, 실수를 개선할 방법을 꼼꼼하게 작성했다. 그때의 노력으로 잦은 실수를 고칠 수 있었다. 언어와 행동을 포함한 일상의 많은 실수 말이다. 그래서 다시, 실수노트를 작성해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려고 한다. 스스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되,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고, 스스로 잘 다독이면서 앞으로 한발씩 나아가보려 한다. 느릴 수 있으나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방향만 옳다면 속도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이제서야 숨 돌림 틈이 생겼다 (0) | 2021.02.27 |
---|---|
옛 모습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일 수도 있다 (0) | 2020.10.12 |
되찾아야할 나의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0) | 2020.09.30 |
Good&Angry (0) | 2020.09.04 |
가끔은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0) | 2020.04.05 |
2020. 9. 30. 13:17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삶의 기로에서 당신을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질문에 대한 자명한 대답들이 내 욕망을 억누를 때가 많습니다. 다분히 자유롭지만 납득할만한 근거를 스스로 제시하지 않으면 그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몇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피곤하긴 하지만, 신념에 기대어 사는 것은 혼란스럽지는 않습니다. 뚜렷한 가치관이나 신념없이 세상의 흐름이나 타인의 말에 휘둘려 중심을 잃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중심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세간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간절함, 선한 동기의 재창조, 행동의 진중함. 되찾아야할 나의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더이상 늦어지지 않게 조금 더 분주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옛 모습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일 수도 있다 (0) | 2020.10.12 |
---|---|
어찌 보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있었다 (0) | 2020.10.04 |
Good&Angry (0) | 2020.09.04 |
가끔은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0) | 2020.04.05 |
언어를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0) | 2020.02.15 |
2020. 9. 4. 10:26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왜 화가 났을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 이주 관리 팀장 때문이었을까. 싸움은 언제나 쌍방이다. 한쪽만 잘못해서는 큰 싸움이 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이주관리 팀장이 언성을 높였는지.
분노란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잘못 되었다고 느낄 때 적극 반대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그 일에 반대합니다"를 당신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78쪽 -
이주관리 팀장의 언성이 높아진 데는 내가 세대주에게 보상비를 지급하는 근거가 뭐냐고 몰아붙인 탓도 크다. 이주관리 팀장의 입장에서는 본인 이주 전문가이고 늘 해오던 일인데, 갑자기 근거를 이야기하라고 하니 기분이 언짢았을 수도 있다. 언성을 높인건 분명 잘못된 일이나, 그 과정에서 내가 잘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말투가 공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분노의 저변에 깔린 동기를 파악하고 싶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101쪽 -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이주 관리 팀장의 언성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무시하는 말투 때문일까. 감정의 발화 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무시하면서 가르치려는 말투가 나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동등한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이야기하기를 원했던 나로서 가르치려고 드는 태도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평가하는 본성은 다양한 형태의 분노에 존재하는데,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1.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고 '인지'한다.
2. 거기에 '반대 입장'을 치하고 불쾌해한다.
3. '행동'(말 또는 행위)를 취한다.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최소한 장차 행동으로 이어질 만한 암시가 있다.
-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80~81쪽 -
결국, 맘이 상한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언성을 높인 팀장에게 한 소리를 했다. 전화가 끝난 뒤 팀장은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 아까 일은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웬만하면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데, 오늘은 나도 불편해진 감정을 그래도 드러냈다.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고상하지 못하다, 또는 성숙하지 못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불편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생각이 드는 것은 팀장의 언성이 높아졌을 때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다른 이야기를 전개했으면 감정이 더 불편해질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조금 밀려온다. 어찌 되었든,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는 반복되기에 십상이다.
어찌 보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있었다 (0) | 2020.10.04 |
---|---|
되찾아야할 나의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0) | 2020.09.30 |
가끔은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0) | 2020.04.05 |
언어를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0) | 2020.02.15 |
뙤약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0) | 2019.07.27 |
2020. 4. 5. 17:3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의 글
삶을 진지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진지하고도 사소하며 유치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자가 더 편했던 것 같다. 나의 예민함을 감성적인 여자들이 더 받아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난 여자들이 더 편했다. 20대 시절, 이성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시간 지나고 우리가 결혼 적령기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결혼했을 때, 친구였던 우리의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란 질문과 함께 말이다. 멀어지는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며 나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내 아내가 아무리 친구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친하게 지내면 어떨 것인가... 나는 마음이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지극히 나의 관점이긴 하다만, 내가 싫어하는 건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생각 끝에 결론 내린 것은 결혼한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결혼한 후의 관계는 나름대로 정해놓은 적정선 이후로 반드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와의 약속이라면 깰 수 있다만, 관계가 얽힌 약속이라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키는 법이다. 그렇게 많은 이성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과거 관계의 무게는 축의금으로 대신했다. 참, 이해타산적이지만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은 높이 살만하다고 늘 생각한다.
결혼한 이성 친구 중에 연락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있긴 하다. 허나, 내가 먼저 연락하는 법은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나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친구를 잃어갈수록 감당해야 할 고독함이 증가한다만, 선택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늘 생각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되찾아야할 나의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0) | 2020.09.30 |
---|---|
Good&Angry (0) | 2020.09.04 |
언어를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0) | 2020.02.15 |
뙤약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0) | 2019.07.27 |
홀로 고민하다 (0) | 2018.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