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 하버드 회복탄력성 수업 _ 게일 가젤

2021. 9. 17. 17:38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21쪽

회복탄력성은 인생의 역경과 도전에 맞설 때 마음의 원천에서 필요한 자원을 끌어올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을 말한다. 

 

24쪽

호스피스 환자, 트라우마 생존자, 의사 등 수천 명을 만나본 뒤에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생물학적, 환경적 요인과는 무관하게 회복탄력성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본성적인 자질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내면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회복탄력성이 높으면 내 인생의 작가가 되어 과거에 벌어진 일과 상관없이 새롭게 엔딩을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도 배우지 못했다.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존중하는 것이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유익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27쪽

회복탄력성의 핵심은 뇌가 효과적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위협에 반응하는 방식을 강화하는 데 있다. 지금 당신의 스트레스 대처 습관이 불완전하더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대 과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 가운데, 특히 '뇌의 자기 재조직화 역량에 관한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연구를 통해 우리는 뇌가 자신의 기능을 스스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뇌의 학습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도구를 갖추기만 하면 얼마든지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있다. 

 

28쪽

심한 스트레스 자극이 들어오면 감각계(눈, 귀, 코, 입, 피부)가 뇌의 편도체('공포와 경보 중추'라고도 한다)라는 부위에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편도체는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킨다. 위험 반응에 초점이 맞춰진 교감신경계의 신경들은 몸 이곳저곳으로 생리적 반응을 촉발시켜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투쟁하거나 도망치거나 얼음이 되게 만든다. 

 

30쪽 

그 다음은 회복탄력성이 등장할 공간이 생긴다. 위협을 감지하면 투쟁/도망/얼음 반응을 일으키고 전두엽이라는 뇌 영역도 활성화된다. 말 그대로 뇌 앞부분에 있는 전두엽은 복합적 사고, 성격 발현, 의사결정, 사회적 행동 조절 등 모든 행동의 감독과 역학을 한다. 또한 전두엽은 단기적 목표보다 장기적 목표에 입각해 행동하게 만든다. 

 

31쪽

투쟁/도망/얼음 반응이 일어나면 코르티솔cortisol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출된다. 코르티솔은 위험에 대처할 때 자원을 끌어온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괜찮다. 가빠진 호흡과 심장 박동이 신속하게 피와 산소를 근육에 공급해 우리가 위협과 싸우거나 도망치게 한다. 그러나 자주 스트레스를 받아 코르티솔이 누적되면 심신의 건강을 망가뜨릴 수 있다. 코르티솔에 오래 노출되면 불안, 우울, 불면증, 무기력, 집중력 저하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략>

20여 년 전만 해도 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청년기부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의 뇌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상은 정반대다. 뇌의 구조와 기능은 '말랑말랑'하고, 일생에 걸쳐 쉬지 않고 변하는데 이러한 능력을 '신경가소성'이라고 부른다. 생각, 행동, 경험의 변화에 적응해 회는 계속 변한다. 

 

32쪽

반복된 활동으로 강하게 연결된 특정 신경망은 생각과 행동의 동선이 된다. 반복된 생각과 행동이 그 동선을 심화하는 것이다.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실행하고 반복하면 또 다른 뇌의 사고 프로세스가 생겨난다. 

놀랍게도 우리가 훈련하는 것이 진짜 우리 현실이 될 수 있다. 긍정적 경험이나 강점, 성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생각하면, 관련된 신경 연결 회로가 자라나고 뇌는 긍정성에 집중한다. 반면, 원망과 불만이 가득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비난면 부정성을 키우는 셈이 된다. 

 

33쪽

뇌에서 동일한 신경 경로를 따라 반복적으로 활성화가 일어날수록 뉴런의 연결과 조직화는 더 강해진다. 다시 말해, 한 묶음으로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는 한 묶음으로 회로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회복탄력성 계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35쪽

너그러움과 공감이야말로 회복탄력성의 주춧돌이다. 자신에게 지원군이 되어주어야 한다. 

 

40쪽

완벽한 인생은 없다. 이 책을 읽을 때 제발 자신에게 관대해지길 바란다. 당신에게 맞는 정보는 무엇이든 흡수하되, 맞지 않는 정보를 억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복탄력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필요는 없다.사실 '완벽'이라는 건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회복탄력성을 계발하는지 명심한다. 현재 많은 일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부디 분주한 시간에서 벗어나 인생을 성찰하고 쉼을 얻는 기회로 삼길 바란다. 시간을 내는 것이 정 어렵다면 회복탄력성 계발을 '인생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 보자. 이 책은 인생을 새롭게 보게 하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어떤 사건이 가장 힘겹게 다가왔는가?

- 나는 어디에서 필요한 자원을 얻었는가?

- 어떻게 역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가?

- 현재 어려움 속에서 나 자신에 관해 배운 점은 무엇인가?

 

42쪽

어떤 길을 가든 늘 희망은 있다.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회복 탄력성이 말라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라도 여전히 내면에는 생존이 필요한 양분이 들어 있다. 아무리 인생이 암담해도 회복탄력성은 바닥나지 않는다. 내 삶에서, 내가 만난 환자나 내담자의 삶에 거듭 목격할 진실이다. 

 

69쪽

한 사람은 "왜 이런 일이 계속 나에게 벌어질까?라며 불만을 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불행 속에서 행운을 찾아 긍정적인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다. 

 

71쪽

 '1차 화살'은 사건 그 자체다. 우리는 이 화살을 통제할 수 없다. 톰의 이야기에서 1차 화살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실직이다. 이런 경험에는 두려움, 염려, 불안이 따라온다. 인생은 실직, 질병, 사고처럼 힘겨운 사건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운 감정이 나온다. 

 '2차 화살'은 이미 벌어진 일에 우리가 만든 스토리를 더한 것이다. 스토리에는 자괴감과 불운과 억울함이 담길 수 있다. 2차 화살은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더해 과거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거나 유추한다. 이 때문에 두려움, 분노, 불안, 근심, 초조, 심지어 우울중에 사로잡힌다. 

 이 반은은 이미 뿌리내린 사고 패턴, 다시 말해 우리가 닳도록 오갔던 신경 경로에 기반한다. 톰의 경우처럼 2차 화살은 자신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목소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톰에게 실직 그 자체도 충분히 나쁜 일이지만, 가혹한 자기판단이라는 2차 화살이 이 경험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래서 가족과 명졀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다. 

 

72쪽

 2차 화살을 보면 어떻게 선입견을 근거로 근심과 불안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다. 다른 가능한 해석을 생각해보자. 인간 관계의 갈등이 그저 사람과의 교류에서 나타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건강 문제가 생각보다 덜 심각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면 어떤가? 사람들이 당신의 노고를 어떻게 평가할지, 상사가 그 프로젝트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는지 사실을 당신을 잘 알지 못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누구도 완전히 알 수 없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바로 그 결론이 우리를 괴롭힌다. 

 

74쪽

 회복탄력성 계발에 중요한 도구들을 사용하려면 먼저 '마음챙김' 훈련이 필요하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마음챙김은 현재의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서사와 내가 직접 경험한 실재를 구별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말하는 죄책감, 수치심, 원망의 이야기가 실제로는 허상임을 알게 된다. 마음챙김을 수행하면 과거를 곱씹거나 허무맹랑한 소설을 쓰는 일을 멈출 수 있다. 무엇보다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마음챙김을 연마할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명상'이다.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연구 결과, 매일 인간의 뇌는 무려 2만 개에 달하는 생각을 생산해낸다고 한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면 몇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우리의 생각은 반복된다. 시키지 않아도 제자리를 계속 맴돈다. 둘째, 대부분의 생각이 부정적이다. 저건 싫어, 난 너무 뚱뚱해, 오늘 하루도 끔찍할 거야, 마치 주변의 상황과 사람과 끊임없이 생중계하는 해설자가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파도치는 생각의 밀물과 썰물은 진짜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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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죽음의 수용소에서 _ 빅터 프랭클

2021. 9. 12. 20:01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1쪽 

옮긴이 서문

연단에서 떠는 환자에게 '더 떨어 보라'라는 그의 역설 기법은 나의 대인 공포 클리닉에서 사용하는 핵심 치료 기법이다. 

 

15쪽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 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17쪽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니체 - 

 

32쪽

정신 의학에는 소위 '집행 유예 망상 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51쪽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67쪽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72쪽

만약 어떤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 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 석양비층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 정상을 바라보는 우리 얼굴을 보았따면, 그것이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ㅡ 어쩌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ㅡ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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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기독교 강요 _ 존 칼빈

2021. 9. 1. 23:0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15쪽

A. 믿음과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만을 돌아보고 우리가 지닌 가치만을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선한 희망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죽음과, 하나님께로부터 내던져진 채로 당하게 될 틀림없는 재앙만이 우리 것이 되고 만다. 

 

116쪽

결과적으로 우리 영혼의 소용을 위한 것이든 육신을 위한 것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사실, 그리고 성경이 그분에 대해 약속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 또 예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심을 의심치 아니하는 사실, 이런 사실들로 인해 우리는 설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119쪽

믿음이란 것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거나, 여러 다른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만을 향하는 것이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분과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실로부터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만일 많은 수의 믿음들이 있다면 하나님도 역시 많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123쪽

사람들은 때때로 믿음과 의에 대해 논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지 이해하는 사람을 많지 못하다. 여기에 우리가 첨가시켜 생각해야 할 것은, 의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요,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의이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의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가를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았다고 말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본래 의로운 것이 아니라, 전가되어 의롭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가 얻기만 하면 전가에 의해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이 사실이 이렇게 간단하고 복잡스럽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159쪽

제3장 기도(주기도문 해설 포함)

올바른 기도의 첫 번째 규칙은, 우리가 자기 영광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지각을 던져버리는 것, 우리의 자기 확신을 모든 내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두렵고도 겸비한 자세로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겠다. 

올바른 기도의 두 번째 규칙은, 우리가 자신의 불충분함을 진정으로 자각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와 우리 유익을 위해 정말 필요로 한다는 것을 순수하게 생각하고, 그분께 구하는 것마다 그로부터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겠다는 것이다. 

166쪽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토록 크고 풍성하게 쏟아 붓는 하나님의 은택에 거의 압도당했고, 또 우리가 보는 곳마다 발견할 수 있는 그의 많고도 능력 큰 기적들에 압도당해서, 우리에게는 찬양과 감사를 위한 이유와 경우가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 이런 일들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도록 하자. 왜냐하면(앞서 이미 충분하게 증거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소망과 부요는 하나님에 안에 놓여 있어서 우리 자신이나 또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들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결코 번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또 가진 바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다(참고. 약 4:14-15). 그래서 우리가 결정하고 말하고 행하는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그의 손과 뜻 아래에서, 한 마디로, 그의 도우심의 소망 아래에서 결정하고 말하고 행하도록 하자.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신뢰를 두고 스스로의 계획대로 생각하고 실행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또 그를 부르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맡아 시작하려고 하는 자들을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은 자들도 선포되어졌다(참고. 사 30:1; 31:1)

 

167쪽

바울이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은(살전 5:17~18;참고 딤전 2:1, 8), 모든 사람이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에서든지 만사를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모든 일로 그를 찬양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기를 그가 바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우리가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 간구하도록 신뢰할 만한 이유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172쪽

먼저, 바로 첫 문턱에서부터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사실, 곧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사실과 접하게 된다. 어떤 기도든지 다른 이름으로 드리도록 명한 일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은혜의 자녀로 그리스도께 합하지 못하였더라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확신있게 부를 수 있었겠는가? 누가 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함부로 부여할 수 있었겠는가?

 참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우리의 형제로 주셔서, 그에게 본래부터 속한 것들이 양자의 은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우리는 이 큰 축복을 확실한 믿음으로 그저 감싸 안기만 하면 된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요 1:12).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시고 우리에게서 그 같이 불리어지기를 뜻하셨다. 이렇게 감미로운 그의 이름으로써 그는 우리를 불신앙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에서보다 더 큰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173쪽

 또 우리의 죄의식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아버지 - 비록 친절하고 부드러우시긴 하나 - 를 불쾌하게 만든다고 하여 우리가 무기력하게 되지는 말도록 하자. 사람들 가운데도, 아들 자신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탄원하는 겸손한 자세로 그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는 것보다 더 나은 변호자를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가질 수 없고, 잃어버린 아버지의 총애를 되찾아 줄 더 나은 중재자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아들의 그런 태도를 보고서 그의 아버지는 동정심을 감추지 못할 것이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참고 고후 1:13) 그분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아버지의 긍휼과 친절을 의심해서 자기를 도와줄 다른 어떤 대변자를 구하기보다는, 바로 자신이 눈물과 탄신으로 간청하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그분이 귀 기울이시지 않겠는가?(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행동을 특별하게 권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넘치는 아버지로서의 긍휼을 한 비유에서 생생히 나타내 주신다(눅 15:11-32절)

 한 아들이 그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13절), 아버지에게 심히 죄를 쌓았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그를 감싸 안고, 그가 용서를 구하러 오기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기꺼이 뛰어나가 맞으며(20절), 그를 위로하고, 자애롭게 그를 받아준다(22-24절)

 

340쪽

 첫째,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칭의에 대한 확신을 찾는데 있어서 일체의 율법적 의를 잊어버리고, 율법을 넘어서야 하며 그 범위를 능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데서 설명했듯이, 율법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모든 칭의에의 희망으로부터 끊어지든가 아니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를 논의할 때는, 율법에 대한 언급은 배제하고 행위에 대한 고려도 모두 버려두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붙잡고, 자기 자신들로부터 눈을 돌려 그리스도말 바라보아야 한다. 

 

341쪽

 그리스도인들의 전 삶은 경건의 연습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성결을 위하여 부름받았기 때문이다(살전 4:7; 참조. 엡 1:4; 살전 4:3).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분에 대해 상기시켜서, 경건과 순결을 추구하도록 일깨우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호출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무엇이라고 응답할까, 그리고 어떤 확신으로 설 것인가를 고민할 때, 거기에서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고려하지 말고 율법의 완성을 초월하신 그리스도만을 의로써 내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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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버티는 삶에 관하여

2021. 8. 13. 19:0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6쪽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 다른 훌륭한 분들과는 달리 제게는 성공의 해법이나 어른이 되는 빠른 길에 관하여 달리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버티어내는 삶의 자세가 세대와 계급을 초월해 모두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참 별거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주 가끔 숭고해질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그 버티어내는 자세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버티는 삶이란 웅크리고 침묵하는 삶이 아닙니다. 웅크리고 침묵해서는 어차피 오래 버티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 는 것입니다.

 

17쪽

그래서 또한 동시에, 나는 그녀에 대해 늘 근심하고 연민을 느꼈다. 안타깝고 슬펐다. 나는 지금도 엄마의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챙겨주려는 말들이 귀찮게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나 사이에 얽혀 있는 감정들이 새삼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꾸 내가 엄마를 다그치고 거꾸로 훈계조가 되는데, 이건 서로를 위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 가족의 신화에 대해 모든 신뢰를 잃었다. 그보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대하는 방법을 더디게 배워왔다. 

 

35쪽

'어두워졌다'고 평가되는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서 이와 같은 화두는 더욱 본격화된다. 「두더지」에서 「시가테라」「심해어」「낮비」에 이르기까지, 후루야 미노루의 주인공들은 더 나은 인간, 공동체게 필요한 사람, 최소한 평범한 어른, 아니 평범한 어른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골몰한다. 혹자들은 후루야 미노루의 근작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남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여자에게 구제되는 이야기의 동어반복이라고 비판한다. 확실히 그런 혐의가 있다. 다만 후루야 미노루가 방점을 찍는 건 그녀에게 구제되는 그, 가 아니다. 이것은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으면서 스스로를 구제하는 나, 의 이야기다. 

 

37쪽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어른이란, 바로 그런 과오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책임이다. 그것을 짊어지지 않고 도망가려는 자들 때문에 상처받았던 주인공이다. <중략> 

 서두를 반복하자면, 인간은 그러니까 어차피 과거를 생각할때마다 조금씩 죽는 것이다. 그 과거의 크기에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짊어질 수 있는 꼭 그만큼씩을 가지고 살아나가면, 그것이 평범한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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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_ 박민영

2021. 8. 13. 16:0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7쪽

대학을 흔히 '상아탑'이라고 부릅니다. 상아탑은 '현실과 거리를 둔 정신적 행동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현실과 거리를 둔다는 것은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 거리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거리를 둬야 현실을 객관적으로 대상화해서 응시할 수 있으니까요. 

 

25쪽

프랑스의 철학자 미셜 푸코는 "텍스트란 작가 개인이 아니다. 사회의 힘에 의해 써지는 사회적 작업니다"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텍스트가 세계 속에, 세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두 글쓰기의 사회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38쪽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그에 대해 글을 쓰면 필연적으로 사건이 벌어진 당시 상황을 '대상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도 탐구하게 됩니다. 대상화란 쉽게 말해 '떨어뜨려 놓고 보기'입니다. 자신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고통과 상황을 떨어뜨려 놓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대상화가 사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만들어 냅니다. 

 

39쪽

지적 도약을 이루면, 고통이 일정 부분 줄어듭니다. 고통이 자기 성장의 땔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란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 성장할 것이냐, 고통 속에서 죽어 갈 것이냐 하는 중대 기로, 즉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상태에 놓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정신적 성장을 요구합니다. 정신적으로 성장해야만 견디면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그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줍니다. 그것을 치유라고 부를 수 있다면, 글쓰기는 자기 치유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42쪽

 글은 기본적으로 자기 정신의 표현입니다. 글만큼 자기 정신을 표현하는 최적의 도구는 없습니다. 독일을 철학자 니체는 독서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나를 다른 사람의 혼속을 거닐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바꿔 보면, 글을 쓰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 혼 속을 거닐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글쓰기는 한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48쪽

글을 쓰다 보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 위상이 강화됩니다. 개인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진화합니다. 글쓰기가 사회 참여를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발표한 글이 사회에 일정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도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의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53쪽

 글쓰기와 독서의 관계는 파고 들어가면 좀 묘합니다. 열혈 독자중에서 필자가 나오는 것은 맞지만, 반대로 글을 쓰려고 마음먹으면 더 많은 독서를 하게 된다는 것과 맞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려면 많은 지식과 참고문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글을 쓰면 책을 안 읽던 사람도 읽게 되고, 책을 읽던 사람은 더 많은 책을 보게 됩니다. 글쓰기와 독서는 상호 되먹임 관계에 있습니다. 글쓰기가 독서를 부추기고, 독서를 통해 아는 게 많아지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생깁니다. 

 

69쪽

메모는 '깊이 읽기'의 시작이면서 글쓰기의 시작입니다. 저는 글쓰기 강의를 할 때면 "메모를 하면 글을 쓰고, 메모를 안 하면 글을 못 쓴다"고 단언합니다. 거의 모든 작가는 메모광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메모를 습관해해야 합니다. 메모의 내용이 결국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 

 

79쪽

자료와 메모가 충분하면 머리를 쥐어짤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쓸 것들이 생각나니까요. 충분한 자료와 메모는 인문적 글쓰기에서 논리와 근거를,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상상력을 제공해 줍니다. 소설 같은 것을 쓸 때도 자료와 메모가 충분하면, 스토리가 저절도 생각납니다. 글을 쓰고 싶은 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제까지 읽은책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부터 정리해 보세요. 

 

81쪽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내 생각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잘 알아야, 남에게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밑줄 그은 내용을 컴퓨터로 정리하면, 내 생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밑줄 그은 내용은 대부분 자신이 동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내용을 컴퓨터 파일에 모아 놓으면, 자신이 어떤 내용에 주로 동의하는지 확실해집니다. 

 

83쪽

정리하자면,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부분을 컴퓨터로 정리해놓으면 글감이 생기고, 자기 철학이 확고해지며, 놀리와 근거가 치밀해집니다. 또한 문장력이 좋아지고 어휘량도 늘어납니다. 어떤가요?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가 거의 해결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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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당신이 오해하는 하나님의 사랑 _ 조너선 리먼

2021. 8. 2. 11: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서론

17쪽

"매체가 곧 메시지다"(The medium is message)

 

20쪽

단지 '교회'가 복음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메시지의 당연한 결과는 특별하고 구별된 형태의 교회이다. 등록 교인 제도와 권징은 인위적으로 세워진 구조가 아니다. 이 둘은 새 언약의 은혜 위에 더해진 법률적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부터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이끄는 복음의 부르심으로부터 유기적,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지역교회 교인의 권리를 상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을 하거나, 이웃을 사랑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거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부르심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참된 신자라면 지역교회에 헌신해야 한다. 이는 마치 참된 신자가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지역교회에 등록하거나 헌신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의로운 삶을 거부하는 자이다. 이런 행위는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22쪽

교회론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죄책감에 빠진 인류, 그리스도의 흠 없는 삶과 희생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 죄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누리는 삶 등에 관한 모든 지식을 반영해야 한다. 

 

26쪽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질 때, 사랑하고 용서하고 돌보고 거룩하며 의로운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그림 역시 모호해진다. 그러나 이 모호한 경계선은 또 다른 모호한 경계선, 즉 거룩한 창조주와 타락한 피조물 사이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과 맹신하는 사람 사시의 경계가 모호해진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물이다. 이것은 오늘날 덜 '제도화'되고 덜 '경계화'된 지역교회의 개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초월하시는 하나님보다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선호하고, 성자 예수보다 인간 예수를 선호하며, 거룩한 성경보다 인간저인 성경을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시사한다. 

 

35쪽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거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전혀 희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슨 의미일까? 사랑이 가장 큰 선이며, 사랑이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무엇이, 또는 누가(!) 사랑을 정의하는가?

 

18세기와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제도보다는 사랑에 의해, 외부적인 구속보다는 내적인 열정에 의해, 이론적인 추론보다는 즉흥적인 감동에 의해, 사실보다는 감정에 의해, 효율과 질서보다는 아름다움과 자유에 의해, 생기 없는 신학 서적 탐독보다는 고된 삶에서 땀 흘리며 얻은 지혜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했다. 나는 이와 유사한 충동들이 포스트모던 서구사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제도라는 단어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43쪽

그러나 이 책이 다루려는 것은 제도주의의 위협과 권위의 남용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오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 사이에 훨씬 더 만연한 오류로, 서구문화의 반제도적, 반경계적, 반윤리적, 반권위적, 세계관과 욕구들이다. 또한 이 책은 반권위적 비경계주의의 위협과 불복종의 위협에 대해 다룬다. 타락한 세상에서 이러한 논의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지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49쪽

어떤 저자들은 등록 교인 제도가 오늘날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무익하며, 시대상황과 맞지 않으므로 포기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저자들은 등록 교인 제도의 배타적인 경계선이 복음을 왜곡하므로 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자들 사이에 '제도주의 축소' '진정한 공동체 확장' '조직 축소 및 사랑 확대' 등의 용어들이 반복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마가톨릭교도들과 자유주의 개신교 저자들 중에도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후로는 그 수가 더 많아졌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ㅇ과 소위 탈복음주의자들도 지난 10~20년 사이에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제 "제도주의는 악하고,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다"라는 주장이 거의 주문처럼 되어버렸다. 

 

52쪽 

이 책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셔서 경계를 긋게 하시고, 그 경계를 통해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시고,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시며, 어떤 사람들이 이미 교회에 들어와 있다면 그들을 내보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교회가 사랑이 정확히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내는 데 유익하도록 이러한 경계표를 사용하게 하셨다. 

 

1부 잘못 정의된 사랑

64쪽

사람들은 교회를 둘러싼 경계선을 긋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할 때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정말 성격적일까?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대체로 (1)개인주의적 이라고 평가한다. 그들은 또한 개인주의와 함께 (2)소비주의, (3)일반적인 헌신의 부재 그리고 (4)모든 절대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참고]

소비주의 세계관은 처음에는 상대적이었던 선-소비-을 결국 절대적인 선으로 대체한 관점이다. 소비주의는 부와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축적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소비를 절대화한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모든 필요는 물질적 소비로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많은 욕구가 채워진다. 욕구 충족이 구원의 핵심내용이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주의는 세속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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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GETTING MORE)_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2021. 6. 3. 21:32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P 30

협상에서는 절대 상대방을 이기려 들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힘의 우위에 기반을 둔 협상 전략의 문제를 계속 지적할 것이다. 

 

P 31

"혹시 제가 도가 지나치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거든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즉시 세 가지 효과를 볼 수 있다. 첫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솔직한 모습을 통해 나에 대한 신뢰감을 높인다. 셋째,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지나치게 소심한 성격이라면 이렇게 말하자.

"제가 저도 모르게 양보를 너무 많이 하면 나중에 상황을 되돌리게 될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P 32

협상은 상대방이 특별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P 34

다음은 내 협상론을 함축하는 세 가지 질문이다.

1.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2. 상대방은 누구인가?

3. 설득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P 35 

앞으로 상대방과 갈들이 생기면 다음 사항들을 자문하라. 

- 나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 상대방은 어떻게 인식하는가?

- 둘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있는가?

-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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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_ 박경철

2021. 3. 28. 23:06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0쪽

어떤 경우에도 원칙을 보면 답이 보이지만, 현상만 바라보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물론 이 책이 원칙도 아니고 정답도 아니지만 그나마 독자 여러분들이 원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판단을 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저자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31쪽

노후와 은퇴에 대한 준비는 기본적으로 나의 자산가치에서 '잉여 부분', 즉 나머지를 덜어내고 모으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은퇴 후에 현재가치로 10억 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월 350만 원의 수입을 올리는 현재의 경제 수준을 노후에도 유지하겠다는 의미이고, 은퇴 후에 5억 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월 175만 원의 수입을 올리는 현재의 경제적 상황을 기준으로 노후를 준비하면 된다.

 

33쪽

재테크의 세 가지 기준

첫째,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부자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앞에서 부자란 " 더 이상의 부를 확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따라서 재테크의 첫번째 단계는 내가 더 이상 늘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의 총량이 과연 얼마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때 재테크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나의 만족도를 기준으로 하는 절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남이 얼마를 가졌든 상관없이 내가 만족살 수 있는 목푤르 먼저 정하자.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평생 돈의 노예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둘째,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 자산가치를 높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개 사람들은 재테크라고 하면 화페로 교환이 가능한 것들을 모으는 데만 집착한다. 그러나 나의 자산은 통장의 예금이나 부동산 같은 고정자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와 나의 생산성이야말로 중요한 자산가치를 형성한다. 따라서 가능하면 안정적이고, 오래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능력과 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여서 부자가 되는 것이 자신의 부가가치가 낮은 상태에서 재태크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윗길이다.  

셋째, 은퇴 후 노후자금은 투자수익률을 올리는 비율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자산가치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비율의 개념으로 은퇴 후 노후자금에 접근하도록 하자

 

44쪽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실물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면 장기적으로 그 가치는 항상 증가하는 반면, 종잇조각에 불과한 화폐의 가치는 이 실물자산의 가치 증가분만큼 하락하게 되는데 이게 곧 인플레다. 

 

46쪽

부자란 더 이상 돈을 벌 생각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은 돈을 더 벌려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면, 이쯤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부자란 이자율을 기준으로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 '부자가 아닌 사람은 경제적 결정에서 이자율보다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해도 별 무리가 없다. 

 

64쪽

앙드레 코스톨라니라는 전설적인 투자자는 '토스톨라니의 달걀'이라는 주식투자 모델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왜 주가가 정점에 있을 때 주식을 사들이고, 주가가 바닥에 이르면 주식을 파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중략>

먼저 금리가 과열 단계를 넘어 A국면(금리 정점)에 이르면(서서히 경기 연착륙, 경착륙에 대한 논쟁이 붙기 시작하고 장기 금리가 하락하게 된다) 통화당국은 금리 인하를 고려하기 시작하지만, 이때 예금에 투자한 자금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자처를 잃어버린다. 

그저 은행에 돈을 맡기기만 하면 많은 이자를 지급하는 고금리 환경은 돈을 벌기보다 지키는 데 익숙한 부자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구간이다. 이때 은행 예금은 예금자들에게 절대 손실을 입지 않고 돈을 불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막상 금리가 하락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동안 보장받았던 안전 수익(금리 수익)이 쪼그라들면서 자산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뙤면 부자들은 다른 안전자산을 찾아 나선다. 그 결과 B국면에서는 예금보다는 약간 불안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하고 금리 인하에 영향을 받지 않는 확정금리(채권)에 투자하게 된다. 

사실 부자들의 속성에 가장 맞지 않는 것이 주식시장이다. 부자들은 얼마나 더 버느냐보다는 자신의 자산을 얼마나 안전하게 지키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하는 주식은 삼성전자, 포항제철, 국민은행, 현대차, 한국전력 등 결코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초우량기업이나 배당수익률은 충분히 보장하는 주식으로 제한된다. 그래서 부자들의 자금이나 법인들의 뭉칫돈이 시장에 들어오면 우량주의 상승이 이루어진다. 부자들이 부동산에 투자할 동안 주식시장에서 수익을 올린 개인투자자들은 그들에게 적당한 중소형 종목이나 변동성이 큰 종목에 투자하는 데 익숙해 있다가 이렇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한다. 

 

73쪽

당신이 보수적인 투자자라서 지금 금리투자를 한다고 해도 그 선택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반면 당신이 자산 운용에 자신이 있어서 지금이라도 주식이나 부동산투자에 나선다고 해도 그 역시 잘못은 아니다. 이제는 바야흐로 자산 운용에 있어서 백화제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만 이때 문제가 되는 사람은 돈만 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인플레만큼의 자산가치를 까먹고 있는 사람이다. 

 

77쪽

당신은 아는가? 다른 사람이 망하는데 혼자 안 망하는 기쁨을. 시장이 폭락하는데 현금만 보유하고 있을 때의 기쁨이 내가 보유한 주식만 오르고 다름 사람이 보유한 주식은 오르지 않을 때의 기쁨보다 10배쯤 된다는 것이 투자의 본질이라는 것을. 

 

81쪽

다시 주제를 가볍게 해보자. 지금까지 당신이 일단 이자율이 안전하고 크든 작든 돈이 되는 재테크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물론 복리냐 단리냐, 이율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자율의 움직임이 바로 '보유 자산의 안전성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재력가들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잣대가 된다.'는 전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90쪽

금리, 즉 돈의 흐름을 꿰뚫지 못한다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투자행위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투자자라면 매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금리 이상의 수익을 올릴 자신이 있는가?"라고 말이다. 

 

98쪽

그 이유는 나의 기준으로 투자자란 '스스로 투자의 철학이 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고, 투기꾼은 '왜 투자를 하는지 이유를 모르면서 아무 때나 투자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0쪽

주식이나 부동산이 오르고 내리는 데는 경기와 실적, 금리 등의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지만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수요/공급이라는 가장 중요한 경제 원리의 중심축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면 아파트 10채를 사든, 100채를 사든 당신은 그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경제는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따라서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정확히 읽고, 그것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움지이면 투자가 되고,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남이 한다고 나도 거름을 지고 장에 가면 투기가 되는 것이다. 

 

118쪽

 투자 결정의 대부분은 평균값에 수렴한다. 평균값에서 멀어질수록 그 결정은 오류가 될 가능성이 크고, 평균값에 가까울수록 기대손실과 기대이익의 수준은 낮아진다. 

 

126쪽 유용한 정보에는 네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내가 가진 정보는 다른 사람이 가진 정보와 달라야 한다. 둘째, 내가 가진 정보는 다른 사람의 정보보다 정확해야 한다. 셋째, 내가 가진 정보는 좀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넷째, 유용한 정보는 시의성이 있어야 한다. 

 

129쪽  부동산 역시 마찬가지다. 호가가 상승하고, 거래가 부진하면 '팔지 않겠다'는 사람들만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사겠다는 사람은 초조하고 팔겠다는 사람은 여유롭지만, 가격이 좀더 오르면 사겠다는 사람이 철수하고 팔겠다는 사람이 초조해진다. 이때 누군가가 팔겠다고 나서면 갑자기 시장은 모두 '팔자'로 돌아서고 거래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하락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거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인지부조화 상황을 경계하라. 내가 가장 합리적이고 내 판단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라. 만약 내가 항상 옳다면 나는 지금 굳이 이 거래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가진 정보를 평가하라. 그 정보의 유용성을 평가해서 그것이 독점적이지 않다면 그 정보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살피는 돋보기로 활용하라.  셋째, 다른 사람의 판단을 주시하라.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라. 다만 이때 들은 이야기는 상대의 예측을 이해하고 수를 읽는 힌트일 뿐 그것을 따라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넷째, 거래 자체를 주목하라. 거래란 매도자와 매수자가 존재해야 하고 거래가 많다는 것은 곧 어떤 상황이 크게 변할 수 있는 신호임을 기억하라. 

 

134쪽

 부동산 투자의 철학은 주식과 달리 인플레가 부동산 가격 상승률을 앞서 나가면 서서히 관심을 떼고, 그 격차가 커지면 매수해서 부동산 가격이 인플레를 따라잡고 능가할 때까지 투자한 다음, 그 시점에서 이익을 실현하고 다시는 부동산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136쪽

 주식시장이 인플레보다 더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이 배당금 때문이다. 즉, 주식의 가격은 장기적으로 인플레 성장률과 흡사하게 증가하지만 사실상 그동안 배당금의 형태로 지급받는 것만큼은 고스란히 과외소득이다. 

 만약 당신이 KT, KT&G, SK텔레콤처럼 금리 이상의 배당을 받을 수 있고 어지간해서는 망할 가능성이 없는 배당주식에 투자해서 10년 후 그 기업이 망하지 않고 주식의 가격이 인플레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랐다면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 돈을 예금에 넣어도 마찬가지 결과로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즉, 당신은 해마다 받은 배당금으로 상당한 추가 수익을 올린 것이며, 만약 배당금을 복리예금에 재투자했다면 연 단위의 추가 복지 수익까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139쪽

 장기투자는 이익을 낼 확률이 크지만 이때의 전제 조건은 기업이 내가 투자하는 동안 최소한 존속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존속하는 한 확률상 실적의 부침 속에서도 인플레 이상의 가치를 유지할 것이고, 배당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141쪽

 모든 자산을 장기간 관찰해보면 놀랍게도 적절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고 공급의 한계국면에 이르면 대체물을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수요가 한계에 이르면 공급이 줄어든다. 

 

179쪽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월 100만 원씩 70년 이상을 모아야 10억 원이 가능하다는 명제는 한편으로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금 100만 원의 저축은 인플레를 감안하면 10년 후와 20년 후, 30년 후에는 그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기 때문에 현재 월 100만 원이라는 개념도 인플레를 감안한 미래가치로 수정되어야 한다. 

 

182쪽 

 인간의 욕망은 과학과 산업의 발달을 가져왔지만, 결국 성취는 인간을 소외시켰다. 미디어의 발달은 체온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산업의 발달은 근육을 배제한다. 결국 생산물의 잉여는 인간 자체를 잉여 상태에 빠지게 하고 그 결과 인간의 개체도 줄어든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화살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온다. 

 

184쪽

 과도하게 집중된 부는 은퇴를 고민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적절히 분배되고, 부의 획득에 대한 정당한 질서가 강조되며, 빈부의 사회적 균형이 중시되면 넘치는 부는 사회안전망과 복지의 확대에 쓰인다. 

 

197쪽

 사실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고생도 하고, 허리띠도 졸라매고, 가끔은 식당에서 구두끈도 맸다 풀었다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천장에 굴비를 매달고 간장으로 밥을 먹기에 앞서 당신의 존재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최소한의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계산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수입에서 비용을 제하면 얼마나 저축할 수 있는 지를 계산해보고, 다음으로는 당신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치를 정하자.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목표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의 종잣돈이 필요한지를 결정하자. 

 

206쪽

 리스크를 감안하더라도 수익률을 높이고 싶다면 종잣돈 마련을 위해 다음의 은행 상품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대표적인 상품으로 ELD(주가지수연동예금)가 있다. 이것은 가장 전통적인 파생상품으로 은행이 고객의 원금을 정기예금에 넣고 그 이자를 주식이나 옵션 등의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이다. 증권사의 ELS(주가연계증권)가 원금 보장 없이 고수익 고위험을 지향한다면, ELD는 원금이 보장되는 대신 기대수익을 낮춘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297쪽

 재테크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수단 중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까다롭고 예민한 제도라는 점을 기억하라. 재테크란 좀 과장하여 생각하면 인간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벌어들인 자산을 두고 서로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마지막 전쟁터다. 1차 전선인 노동에 의한 부가가치 창출에도 실패한 사람이 그것을 다투는 2차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298쪽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라. 당신이 주식투자를 하건, 부동산 투자를 하건 혹시 그 매매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잃은 자신감을, 또 지금 당신이 정말 노력해야 하는 부분에서 태만한 자신을 자위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재테크에 나서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을 위해 재테크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299쪽

 지금 당신이 거래하는 주식에는 증권거래세와 수수료가 붙고, 사고파는 부동산에는 양도세, 취득세가 붙으며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에는 재산세가 붙는다. 그리고 중개업자 몫의 수수료가 더해진다. 채권을 투자하면 소득세와 중개 비용이 든다. 물론 보험도 마찬가지다. 

 

338쪽

<주역>의 <계사전>에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지속된다는 뜻이다. 

 

339쪽

 지금 막혔다는 생각이 든다면 즉시 변화를 모색하되 그 변화의 시점은 반드시 해가 중천에 이를 때가 되어야 한다. 아직 아침도 오지 않은 여명기에 햇살이 더디다고 석양을 준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고 어둠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무모한 일이다. 

 성공을 꿈꾼다며 철저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결과 지금 자신이 막혀 있다고 여겨지면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매너리즘이다. 

 요즘 화두가 된 블루오션 역시 막히면 변하라는 이치와 같다. 지금 당신이 막혀 있다면 무엇이 변해야 할지를 생각하라. 단, 당신의 변화는 막힘에 대한 부정이지 도피를 위한 변명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당신이 막힌 이유가 나태함이라면 성실을, 자만이라면 근면을, 부족함이라면 단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부정이 전제되지 않은 변화는 도피일 따름이다. 

 주변에서 성실히 살았음에도 여의치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사실 그것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해 열심히 산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변화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란 성실과 근면에 버금가는 중요한 덕목이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막혔다고 여겨지거든 변화하라. 

 

340쪽 

"살아남으려면 변화하라. 

막히면 막힐수록, 잘나가면 잘나갈수록 더 많이 변화하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바로 나'라는 생각으로 죽을만큼 정진하라."

 

347쪽

 한 인간의 가능성을 살펴볼 때 필자처럼 여러 가지 잔재주는 많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한 가지도 매듭을 잘 짓지 못하는 사람과, 우직하지만 한 가지에 끝까지 매달려 결국 극 이치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공은 당연히 후자의 몫이다. 

 

396쪽

 그들은 증권시장이 급락하면 그 이유를 말하고, 지지선과 목표가를 이야기하고,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면 부동산 시장의 전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족집게 부동산 도사는 왜 스스로가 그 땅을 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사라고 하는 것일까? 주식에 도통한 전문가들은 왜 사람들에게 투자유망종목을 추천하면서 스스로는 그것을 사지 않는 것일까? 이미 그들이 충분한 부자이기 때문일까?

 아쉽게도 그곳에 돈의 논리가 숨어 있다. 앞서 말했듯이 가격은 예측 불가능하다. 어떤 종목, 어떤 대상이라도 가격을 예측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가격이란 당시 사람들의 심리의 반영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가격을 예측할 수 있고, 실제도 그것이 항상 들어맞는다면 기본적으로 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 시장이란 대상물을 사고파는 행위로서 존재한다. 또 대상물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의견차이가 가격이다. 이때 누군가가 상승과 하락의 방향을 모두 맞힌다면 시장은 그 사람이 장악하게 된다. 복리효과를 감안한다면 누군가가 거래에서 연속적으로 100번 이상 방향을 맞힌다면 그 사람은 지구를 살 수도 있다. 시장이나 가격은 예측 불가능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397쪽

 전문가란 이러한 방향성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랜 경험으로 "시장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지금 시장의 방향성을 설명하고 바람이 남쪽으로 불면 파란 깃발을, 북쪽으로 불면 빨간 깃발을 든다. 줄곧 북풍이 불다가 지금 남풍이 불면 10분 후에도 남풍이 불 것이라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1분 후에 동풍으로 바뀌면 그때는 다시 노란 깃발을 들면 된다. 

 

399쪽

 실제 투자에서 전문가의 생각이 일부라도 유용하다면 그것은 전문가가 현자이거나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에 매몰된 사람과 직업상 그것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다. 

 

403쪽

"도전하는 사람이 되라"

리더가 되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안목을 기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발전하기 위한 가장 큰 바탕은 옳은 판단이고, 옳은 판단은 탁월한 안목을 필요로 한다. 안목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사물을 보아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철학적이다. 

 

406쪽

 하루에 잠은 여덟 시간 이상을 자는 것이 좋다는 망발을 잊어버려라. 지금부터 당신의 삶을 관리하고 자신을 단련할 준비를 시작하다라. <중략>

 그 방식은 무엇이라도 좋다. 지금 당장 맨발로 땅 위를 걷는 운동을 시작해도 좋고, 모차르트 전집을 사서 음률을 다 외울 때까지 음률을 다 외울 때까지, 그것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선율로 들리고 오르가즘을 느낄때까지 그것만 들어도 좋고, 황동규의 시집 <풍장>을 사서 소리 내 읽으며 외워도 좋다. 아니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집어 들고 이를 악물고 읽어도 좋다.

 그냥 지금과 달라지면 된다. 내일은 오늘과 달라지고 모레는 내일과 달라지면 된다. 

 

408쪽

 통찰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스스로를 개발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통찰이다. 진정 성공하고 싶다면 먼저 도전하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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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습관의 힘(Atomic Habits) _ 제임스 클리어

2020. 12. 6. 15:51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우리의 행동은 습관의 연속이다. 하나의 행동에 일상의 습관이 배여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업무에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집에 와서 옷을 벗고 치우는 것도 미룰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일상의 효율이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좋은 습관이나 나쁜 습관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좋은 습관을 더 발달시키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는 네가지 법칙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만드는 방법과 나쁜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첫번째 법칙은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적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할 일은 자신이 일상을 점검하고, 현재의 습관에서 새롭게 만들고 싶은 좋은 습관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퇴근 후 외출복을 벗는 것이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이라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외출복을 벗고 나서 바로 운동복으로 갈아 입는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미 매일 하고 있는 현재의 습관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그 위에 새로운 행동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 쌓기'다. 
103쪽

 

 두번째 법칙은 새롭게 하고 싶은 좋은 습관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방법은 원하는 것과 해야하는 것을 묶는 것이다. 예를 들면, SNS를 확인하고 싶은데 운동을 해야 한다면, 잠깐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치워두고 턱걸이나 팔굽혀 펴기를 10개나 20개 정도 하고 나서 SNS를 하는 것이다. 유혹 묶기 전략은 현재의 습관을 우리가 원하는 어떤 대상과 연결시켜 습관을 강화하는 방식이다(152쪽). 

 세번째 법칙은 새로운 습관을 만들때 접근하기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3번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고 싶을 때, 운동할 때마다 1시간씩 해야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면 1시간을 해야된다는 부담감때문에 운동 자체를 꺼리게 된다. 따라서 하루에 1분 운동이라는 목표를 잡으면 부담감 없이 실행할 수 있고, 실행하고 나면 성취감을 얻을 수있다. 이러한 성취감은 다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저자는 변화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2분 규칙'을 사용한다. 즉, 새로운 습관을 만들 때 그 행동을 2분 이하로 하라는 것이다(211쪽). 예를 들면, 매일 책을 읽는 습관을 만들고 싶으면, 책 한페이지부터 읽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듯이,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가야 한다. 첫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네번째 법칙은 만들고자 하는 습관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새로운 습관을 통해 만족이나 보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새로운 좋은 습관을 만드려고 할 때,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운동을 하루 했다고 해서, 몸이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다. 책을 하루 읽었다고 해서, 사고하는 힘이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좋은 습관을 긍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는데, 이를 과학자들은 '지연된 보상 환경'(delayed-return environment)이라고 부른다(238쪽). 그래서 좋은 습관을 만들 때, 그 행동 자체로 만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 꾸준하게 행동하고, 그 행동들을 기록하거나 표시함으로써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습관 추적은 ① 우리에게 행동을 일깨우는 시각적 신호를 만들어내고 ② 자신의 발전을 눈으로 보고 이를 되돌리고 싶지 않다는 내적 동기를 일으키며 ③성공적으로 습관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순간순간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아가 우리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 간다는 시각적 증거를 하나씩 쌓아나감으로써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본질적인 만족감을 준다.
252쪽

 

 위에 말한 좋은 습관을 만드는 네가지 법칙을 반대로 적용하면 나쁜 습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표나 방향성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은 강화시키고, 나쁜 습관은 버리는게 맞다. 저자가 알려준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오늘부터 저녁을 먹고나서 2분 운동부터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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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_ 막스 베버

2020. 10. 31. 20:47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해제 9쪽

이 "자본주의 정신"은 16세기와 17세기에 영국과 네델란드와 식민지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칼뱅주의, 감리교, 침례교, 메노파, 경건주의, 퀘이커교 등과 같은 개신교가 지니고 있던 "윤리"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12쪽

시장에서 재화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환, 기업 활동과 가사 활동의 분리, 복잡한 회계방식의 발달, 노동과 작업장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근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자유민이고, 조직된 기업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상시적으로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15쪽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개개인들만으로는 이 거대하고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동력에 의해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고 노동과 자본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지적한다. 

 

17쪽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을 "종교"에서 찾은 것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한 번 시도해 본 것이 결코 아니었고, 도리어 당시 독일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던 견해, 즉 종교적인 신념은 삶 전체는 물론이고 노동 습관과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19쪽

중세 가톨릭은 상인과 기업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기보다는 이윤 추구를 통한 부의 축적을 더 중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위태롭게 한 자들이었고, 형제애를 명하는 기독교 윤리를 어기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상인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중략>

루터는 하느님은 개개인의 삶과 소명을 미리 확고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서 재화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죄악된 것이라고 보았다.

 

20쪽

청교도는 체계적인 노동, 부의추구, 덕 있는 행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활동이 아니라 섭리적인 활동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노동을 신성시한 것이었다.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노동이 삶의 목적이라고 설파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유명한 청교도 성직자였던 리처드 백스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공리로 받아들여서, 노동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일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노동이 아니라 일생 동안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행하는 노동을 하느님이 "명령했다"고 설파했다. 또한, 직업 노동은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고, 모든 이기적인 욕망도 다스려 줌으로써, 삶 속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의 실천에도 큰 유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예정론에 수반되는 지나친 의심과 불안과 도덕적인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고, 자신이 구원받은 자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직업 노동은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22쪽

 16세기와 17세기에 금욕주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예정론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있는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지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예정이 아무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자신이 구원으로 예정한 자들에게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베풀고 도울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구원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다음과 같은 것들을 구원을 표지들로 규정하게 되었다. 

 첫 번째 구원의 표지는 "조직적인 노동"이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이미 아주 중요하고 신성한 것으로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신자가 "택함 받은 자"로서 구원으로 예정된 자임을 보여주는 표지와 관련한 논의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보장받았다. 조직적인 노동이 구원의 표지라는 사상은 불안감에 어쩔 줄 모르는 신자들을 지도해야 했던 목회자들이 직면한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생겨났다. 직업 노동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해내게 위해서는 비상하고 극단적인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었는데,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신앙을 갖고 있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단한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는 노동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략>

 두 번째 구원의 표지는 "부의 축적과 성공적인 이윤 획득"이었다. 청교도 성직자였던 벡스터는 "부의 획득이 직업 소명 안에서의 노동의 열매일 때는 하느님의 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손길이 경건한 자들에게 역사해서 만들어 낸 열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임을 보여주는 표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역사해서 열매를 맺은 것이라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런 이유에서 당연히 사업가나 상인인 신자들은 이윤 추구를 통해 물직적으로 성공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신이 택함 받은 자라를 것을 확인받고자 했다. <중략>

 세 번째 구원의 표지는 "성화된 삶과 덕 있는 행실"이었다. "덕 있는 행실"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죄에 끌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어려운 일임이 분명했다. 육체의 욕망들을 다스려서 변함없이 하느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절제가 요구되었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하느님을 기쁘게 할 만한 "덕 있는 행실"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미 예정된 구원이나 멸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스터를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그러한 "덕 있는 행실"로 이미 예정된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런 행실을 하려면 하느님의 은혜와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런 행실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구원 받은 자가 틀림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명령들에 따라 자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지족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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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골든아워2 _ 이국종

2020. 10. 20. 20:3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47쪽

실상은 답답하고 지루한 긴 호흡으로 환자를 살펴야 하고, 그런 중에 더없이 비루한 현실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외상외과의 일이다. 

 

112쪽

나는 80미터 고도에서 장비를 짊어진 채 점 하나를 향해 뛰어내렸다. 중력과 하향풍에 의해 가중된 장비의 무게가 강하용 하네스를 감싼 벨트를 따라 어깨뼈로 파고들었다. 오른쪽 어깨가 비명을 질렀고, 통증은 어깨뼈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부서진 어깨를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 훈련을 시작해서는 안 됐다. 나는 머리끝과 발끝으로 번져가는 통증을 없는 것으로 삼았다. 내 뒤를 따라 김태연이 뛰어내렸다. 

 

127쪽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다지기 위한 의과대학 시절의 교육 과정은 살인적이다. 학업의 양마저 주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에 의과대학 시절은 한계에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 값으로 삼아 겸손해져야 하는 때다. 

 

190쪽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사하다는 반응은 기대하면서 외상외과 의사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위기에 빠진다. 그저 먹고살려고 하는 일일뿐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242쪽

의사라면 말술을 먹고 정신을 놓아도 다른 의사에게 함부로 욕하지 않는다. 거짓과 비방으로 가득 찬 그을 공개적으로 뿌려대는 짓 또한 하지 않는다. 의료계 바닥은 신문지 한 장 펼쳐놓은 것마냥 좁아서 그 같은 짓을 아무에게나 잘못하면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술기운은 술기운을 발휘할 만할 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기 좋은 상황에서 발휘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욕설을 들으며 내 비루한 위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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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골든아워1 _ 이국종

2020. 10. 14. 21:5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33쪽

내과와 외과를 구분 짓는 이유가 무엇이든, 외과를 업으로 삼는 우리의 일상은 갈라지고 짓이겨진 살과 부서진 뼈와 장기들, 끊어진 신경과 어긋난 조직, 솟구치는 핏물 속에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는 수술이 좋았고 수술방에 감도는 서늘한 감촉을 사랑했다. 

 

181쪽

늘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난 그 개별적인 죽음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221쪽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극도로 나쁠 때 의사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환자가 살아나도 공은 제 몫이 되지 않고, 환자가 명을 달리하면 그 책임은 마지막까지 환자를 붙들고 있던 의사가 오롯이 져야 한다. 그것이 이 바닥의 오랜 진리다. 석 선장이 살 가능성은 희박했고, 최악의 경우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301쪽

사람을 죽이고자 한 칼이 살을 가르고 들어간 끝에, 사람을 살리려는 칼이 닿지 못하면 수술은 깨끗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환자는 죽는다. 자상의 범위와 깊이가 심해 기관지를 뚫으면 그 역시 환자의 숨은 쉽게 달아나고 만다. 

 

344쪽

탈락 소식이 있은 다음 날 한 보직교수가 나를 불렀다. 보직교수의 굳은 표정 위에 낭패와 침통함이 흘렀다. 이마의 미세한 주름에는 노기가 서려 이었다. 아주대학교병원의 탈락은 그의 임기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무의미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탈락'이 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나는 듣기만 했다. 창가에 늘어진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는 높이가 맞지 않았다.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회식빛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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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살고 싶다는 농담 _ 허지웅

2020. 10. 3. 13:39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4쪽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21쪽
그 밤을 지나 보내고 나서 나는 살아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에는 확실히 야심처럼 보였다. 하루 하루 지날수록 야심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서야 정말 우연히 나는 그 털모자를 떠올렸다.

28쪽
무엇보다 모멸감이 든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다.

33쪽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34쪽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년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테니 바보같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마흔 두 살의 나는 점점 '그때의 나라면 지금 이렇게 안 할텐데 바보같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과 같다.

천장과 바닥
41쪽
수면제와 진통제를 먹고 침대에 누우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내 삶에 고통을 안긴 사람들의 얼굴이 천장에 투사된다. 나를 배신하고, 기만하고 속였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암을 심었다고 확신했다. 이자들이 천장에 맺혀 나를 내려다본다. 축축하고 무거워진 천장이 천천히 나를 향해 내려온다. 내려올 때마다 그들을 향한 원망과 증오도 한층 더해진다. 수백 번 자세를 바꾸어 외면해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마침내 천장이 코앞까지 전진해오고 질식하기 직전이 되어 나는 겨우 잠이 든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아파서 깨어난다. 다시 천장에 깔려 질식하기를 영원처럼 반복한다. 아침 해가 밝았을 때 나는 거의 죽어 있다.

45쪽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정확히 뭐라고 호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피해의식과 절망과 비탄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애꿎은 주변을 파괴하며 오직 비관과 자조만을 동행 삼아 이 모든 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할 거라고 말이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54쪽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56쪽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57쪽
오늘 밤도 똑깥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을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78쪽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

나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름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냥 좋은 일을 하면 된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_Karl Paul Reinhold Niebuhr

106쪽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연애를 하기 위해 나와 너 사리의 거리를 너무 벌려놓았다. 끊임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끼 때문이다. 너무 믿지 않고, 너무 기대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그럴싸한 말장난이다. 그걸 대체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지난 몇 년간의 연애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완벽한 실패였다.


125쪽
더 이상 삶을 소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바꿀 수 있는 작은 걸 떠올려보자는 생각이었다. 이제 나는 다음 책을 비롯한 사사로운 작업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나와 같은 이십 대를 보내지 않도록 만드는 일에만 집중한다.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138쪽
우리가 삶을 살아내가면서 경험했듯이, 서로 마주하고 아픈 걸 들추어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으로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내는 것. 그것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작이었다. 용산 참사의 진실과 시비를 가리기 위한 첫 단추다.

151쪽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결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니체가 말한 심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돌아보면 내 삶도 다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사소한 인간관계부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업무에 관련된 일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그런 구덩이에 반복해서 빠져왔던 것 같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에 대처하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은 비관과 자조, 그리고 남 탓이었다. 억울하고 분하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은 그에 무엇이든 간에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거짓말이라도 상관없다. 너를 망칠수만 있다면.

152쪽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201쪽
나는 끊임없이 생각-사고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 했고,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이 평범한 것은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thought-defying)이라면 강조했던 바로 그 생각-사고 말이다.

215쪽
모든 글은 내 일상을 사례로 들었다. 되도록 예의를 차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내용에 반박할 수 없는 이들이 주로 태도를 문제 삼는다는 걸 비웃기 위해 태도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으며, 기고를 하든 게시판에 쓰든 SNS에 공유하든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실명을 사용했다. 실명으로 쓸 수 없는 글이란 존재해선 안 됐다. 슬픈 이야기든 웃기는 이야기든 자폭하는 이야기든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든 반드시 실명이어야만 했다. 글을 쓸 때는 반드시 벌거숭이여야만 한다는 것. 위악이었다.

218쪽
너 혼자서는 세상 못 바꾼다. 청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사한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라. 마케팅이다. 하나의 의견이 공론화의 과정을 밟고 생각이 전혀 다른 집단 사이에 합의를 거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따른다. 그마저도 합의한이라는 것이 누더기일 가능성이 크고, 누더기에 다른 누더기를 보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261쪽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 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274쪽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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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_사랑

2020. 10. 1. 13:2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내가 만든 신_ 사랑

 

사랑에 속고 속다

환멸에 찬 노예가 되었다

 

70쪽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76쪽

야곱이 바로 그랬다. 라헬은 그에게 단순히 아내가 아니라 '구세주'였다. 그녀를 어찌나 애절하게 원하고 필요로 했던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봤따. 그래서 라반의 속임수에 쉬이 넘어갔던 것이다. 

 

79쪽

레아는 무엇을 했는가? 가정의 전통 가치관을 통해 행복과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특히 당대에는 아들을 낳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희망과 꿈을 남편에게 걸었다. '아들을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고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80쪽

우리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대개 성경을 일련의 단절된 이야기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각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을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일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성경은 도덕적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신을 올려놓고 우리게에 '너희도 열심히 기를 쓰고 제대로 살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글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보여 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큰 내러티브이고, 나머지 개별 이야기는 다 그 밑에 속한다. 

 

84쪽

사랑하는 상대를 그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흠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우려 한다. 자기 존재가 헛되지 않다고 정당화하려 한다. 다름 아닌 구원받으려 한다. 물론 상대는 인간이므로 이것을 줄 수 없다. 

 

89쪽

도덕 종교의 신은 기대 이상의 실적으로 성공한 자를 선호한다. 도덕적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 올라가는 사람.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연약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그분과 우리는 왕과 신민의 관계만이 아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만도 아니다. 그분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다.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며 어쩔 줄 모르신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244쪽

바울은 세상에 불행과 악을 초래하는 죄의 목록을 길게 나열하는데, 그 뿌리는 다 악착같이 '신을 만들려는' 인간의 충동이라는 토양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잘못의 원인은 언제나 우상숭배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타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총괄적인 답은 '우리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답은,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사람의 인정, 평판,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 

 

246쪽

첫째로 생각의 내용을 점검해야 한다. 대주교 윌리엄 템플은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에서 실제 신은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을 때 저절로 흘러가는 생각이다. 당신이 즐기는 공상은 무엇인가? 무심코 당신 머릿속을 차지하는 상상은 무엇인가? 승진하는 시나리오를 쓰는가? 이상적인 주택 같은 재물인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인가? 한두 가지 공상이 곧 우상숭배의 징후는 아니다. 그보다 이렇게 자문해보라. 당신이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혼자서 속으로 기쁨과 안락을 얻는 대상은 무엇인가?

 

248쪽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한 우상 식별법이 있다. 당신은 꾸준히 교회에 나가고 있고, 독실한 교리적 신념도 다 갖췄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당신의 진짜 구원은 무엇인가? 당신은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 말고 당신의 실제 신은 무엇인가?

그 답을 아는 좋은 방법이 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희망이 꺾일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된다.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나 서운하고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떨치고 나아간다. 아직 삶이 끝난 게 아니며 그런 것들은 당신의 주인이 아니다. 

 

252쪽

우상보다 예수님이 당신의 머릿속에 더 아름다워지시고 당신의 마음속에 더 매력 있어지셔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가짜 신이 대체될 수 있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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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이성에서의 도피

2020. 9. 30. 22:46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16쪽

아퀴나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will)는 타락하였으나 지성(mind)은 타락하지 않았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에 대한

이 불완전한 견해로 말미암아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다. 인가의 지성이 자율적이 되었다. 인간은 이제 이 한 영역에서만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었다.

 

27쪽

종교개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폰주의의 해석을 거부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대답은 무엇인가? 이들에 의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자라나는 묵은 인본주의와 자율적인 인간으로 풀어 놓아 주는 불완전한 타락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문제점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a total Fall을 인정하였다. 전인이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으나, 지금은 지정의를 포함한 전인이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와는 반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로, 최정적 권위면에서 볼 때 자율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로, 구원 문제에서 인간이 자율적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구언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을 자격을 갖추는 일, 이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0쪽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인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생"할 때 놀라운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훌륭한 존재다. 인간은 타락 이전의 원래 상태 때문에도 소중한 것이다. 

 

31쪽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훌륭하지만 역사의 어느 시공간에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결함이 생겼다고 가르친다. 

 

115쪽

 인간이 타락했다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은 했어도 역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타락했으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이 아니 화가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됨"을 드러내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이 타락한 결과 비뚤어지고 부패하고 버림받았다 하여도 아직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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