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저자 오스기니스) - 소명과 재능에 관하여

2020. 9. 18. 21:15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보통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에 부합하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재능의 목적은 청지기직과 섬김이지 이기심이 아니다.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게서든 좀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찬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우리는 개별적인(혹은 특정한) 소명과 공동체적(혹은 일반적)소명을 구별해야 한다.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직은 양자를 모두 존중한다. 개별적인 소명이란 우리 각자가 독특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개별적인 소명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동체적 소명이란 우리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거룩한 자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미덕이다. 

 

 

- 오스 기니스, <소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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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문장들 1 - 보이지 않는 영화

2020. 9. 13. 23: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본 시리즈는 21세기의 최상급 대중영화 가운데 하나다. 세 편 모두 넋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데 물론 그건 심오한 주제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 덕일 것이다. 워털루역 광장에서 쫓고 쫓기는 「본 얼티메이텀」 의 한 장면은 김혜리의 훌륭한 표현대로 사람들의 추격신을 자동차 추격신처럼 찍은, 이 방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세공품이다. 그렇다 해도, 그 테크닉들은 단순한 유혹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절박하게 동시대의 불안과 욕망을 불러들인다. 그 점이 이 시리지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워털루역 광장에서의 추격신이 명장면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저찰과 은혜라는 광학 테크놀로지 전재의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찰의 숏들과 은폐의 숏들의 폭포수 같은 교차편집 끝에 본이 두 눈과 초인적인 지각만으로 빈 공간을 어김없이 찾아낼 때, 그는 진정으로 광학 테크놀로지의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우리 영웅이 되는 것이다.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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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2020. 9. 12. 01:10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고통의 심연,

찰나의 빛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요컨대 의미가 비워져가는 자리를 영화적 기표들의 활력이 채워가는 과정이 홍상수의 서사라면, 이창동의 서사는 오염된 의미들을 끝내 소진시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창동의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재현된 '나'의 손상된 육체나 일그러진 삶을 전시함으로써 가해자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김혜리가 말함 공범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이건 심각한 결단이다. 재현된 폭력을 접해온 우리의 관성으로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밀양」은 유괴도 신앙도 광기도 언급하지만 어느 것도 다루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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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고 싶다 _ 신영복

2016. 11. 5. 23: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 단상메모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 독방에 앉아서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객관적 상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주관적 감정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 니토위에 쓰는 글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고,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 생각을 높이고자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는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첩경을 찾는 낭비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버림과 키움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 피서의 계절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 저마다의 진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떤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 닫힌 공간, 열린 정신 

잠겨 있는 옥방 안에서도 시계는 잘 갑니다. '막힌 공간에 흐르는 시간'......, 흡사 반칙 같습니다. 

 팔목에 시간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간에 각박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차피 무기징역은 유유한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 장기 망태기 

결벽증과 정돈벽이 남보다 덜하지 않았던 제가, 결코 자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징역살이라는 '장기 망태기' 속에서 부대끼는 사이에 어느덧 그것을 버리고 난 지금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정신적 여유와 편안함마저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고'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 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우리들로 하여금 형식을 깨뜨리고 본질에 도달하게 하며 환상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운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 작은 실패 

도대체 역의 오의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는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 계수님의 하소연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그 여인은 "그이와 함께라면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와 일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 나는 걷고 싶다 

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누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 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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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_ 박노해

2016. 11. 1. 16:0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길을 잃었다고 자기를 잃어 버리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쉬이 논하지 마십시오. 쉬이 들뜨지 마십시오.

자기 선 자리에서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모색과 지난날에 대한 정리와

자신을 성찰하는 힘에서 균형감각을 놓치지 마십시오.

상황이 어려울수록 조용한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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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 - 실언

2016. 10. 6. 00:02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출처: www.noisetrade.com>

 

 

영광의 무게 - 실언 

The Weight of Glory _ A Slip of the Tongue

 

 

 제 말은 이런 뜻입니다. 제가 기도를 하고, 경건 서적을 읽고, 성찬을 준비하거나 받을 때 제 안에서 주의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목소리는 제게 주의하라고,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배수진을 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안에 머무는 동안 저는 평범한 생활로 되돌아갈 때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해질 만한 일이 벌어질까 봐 크게 두려워집니다. 

 

 

 어떤 행동에 대해 참회를 한다는 건, 그 일이 죄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풀이해선 안 되는 일이 됩니다. 차라리 애매하게 남겨 두는 편이 낫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범위를 놓고 그분과 계약서를 작성하려고 보면, 이미 자신이 그분을 철저히 섬기기로 서명한 뒤임을 알게 될 것이다."

-토마스 모어- 

 

 

 놀랍게도, 이 주제에 대해 천국과 지옥은 한목소리를 냅니다. 유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심해. 이 좋은 결심,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할지 잘 생각하라고."

 

 

 우리 안에 우리 것이라 주장하는 영역을 여전히 허용하고 합법화하고 묵인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죽기 전까지 이 침입자를 우리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레지스탕스에 속해야지 비시 정부[각주:1]에 빌붙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매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나오는 다음 기도문으로 매일 아침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사오니, 흠 없이 오늘을 시작할 수 있게 하소서 Da hodie perfecte incipere."

 


 

  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부역한 프랑스의 친독 정부.(역자 각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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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c.s. Lewis - 마음에 와 닿은 문장들

2015. 5. 5. 10:5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c. s. Lewis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분별력Prudence'이란 실생활에 적용되는 양식, common sense을 뜻하는 말로서,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방해하는 진짜 문제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 찾아옵니다. 그 순간 그날의 모든 소원과 희망이 맹수처럼 달려들지요. 따라서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을 모조리 밀어내는 것입니다.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며, 좀 더 크고 강하고 고요한 생명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안달복달하며 야단법석을 떠는 자연적 자아에서 물러서야 합니다. 그 세찬 바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분께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다워집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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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윤리와 도덕의 차이

2015. 3. 19. 00:27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윤리라는 말은, 한 공동체가 오랜시간에 걸쳐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시간을 두고 형성해 온 삶의 방식을 통해 이룩된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방식을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의 'ethos' 는 삶의 방식이라는 뜻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지리적 환경과 결부된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도덕은 구체적인 삶의 여건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고려한 채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주로 이성적 관점에서 정신적으로만 접근해 들어가 얻어낸 답을 말한다. 

 

 

구체적인 삶의 여건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은 처음부터 보편성은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윤리는 구체성을 전적으로 포괄하면서 전개되므로 보편성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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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발췌한 글-2

2015. 1. 28. 14:32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영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힌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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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발췌한 글-2

2014. 12. 22. 12:58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살을 에는 듯한 버람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우리의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 배급으로...

 

 <중략>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이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느 강제수용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빅터 프랭클의『죽음의 수용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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