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 일터신학 _ 폴 스티븐스

2023. 3. 1. 21:5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21쪽

 비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은 그에 따른 결과, 즉 봉급, 지위 혹은 선교의 기회를 얻기 위해 하는 일이다. 이에 비해 본질적 가치를 지닌 일은 그 자체로 선한 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위 세속적인 일은 비본질적 가치밖에 없고, '사역'과 '사람을 돕는 일'은 비본질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 모두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22쪽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천사가 되는 것이거나 종교적이 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사람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인간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열방을 축복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28쪽

 나는 부끄럼 없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할 터인데, 이 책이 사업을 더 깊고 성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길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이 제공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터에서의 활동에 대한 신학적 틀

 - 기업 문화와 문화 계발에 대한 이해 

 - 신앙이 일터에서의 업무 및 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일에 영구적이며 만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한 설명 

 - 영성이 지친 일꾼을 대상으로 한 동기 유발의 수단에 불과하지 않고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의 근원임을 보여 주는 것 

 - 까다로운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데 필요한 동기 중심적 관점

 - 아주 힘겨운 일을 하면서도 성찰하며 사는 길

 

30쪽 

 개신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당신은 당신이 가진 업무와 도구의 수만큼 많은 선생을 갖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요즈음에는 그 도구가 목판과 술통에 국한되지 않고 컴퓨터, 정산표, 직원회의, 중역실까지 포함한다. 

 

53쪽

 "'부르심'이란 주제 아래서 바울은 그들의 '영성'을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려 한다. 그들은 자기 부름 받았을 때 사회적 위치가 무엇이든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사회적 위치를 아주 상관없이 만들 만큼 그 위치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나 저란 상태 모두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61쪽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주님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신다. 절대적으로 또 아무 조건도 없이. [그러므로] 세상의 일터에 몸담은 교회의 모든 성도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주 되심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다.                       

-레슬리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69쪽

 칼뱅과 루터는 모든 사람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모든 신분이 신의 재가를 받고 있다는 것, 누구든 자기 소명을 가볍게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에 서로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소명의 목적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루터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라고 소명을 주신다고 한 반면에, 칼뱅은 세상의 혼란을 방지하고 적절한 질서를 유지하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72쪽

 소명이란 것이 자기가 택한 직업, 곧 제자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반적 헌신 없이 그저 자기가 수행하는 직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개신교 신학의 일부 측면, 특히 후기 칼뱅주의가 부지중에 소명의 세속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리처드 히긴슨은 세속화 단계들을 이렇게 요약한다. 

 -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자기 노력으로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려는 유혹이 몰려왔다. 

 - 열심히 일하는 것이 극단적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것이 강박관념이 되고 말았다. 

 - 남을 위해 일한다는 동기가 서서히 강력한 자기중심적 이데올로기로 대치되었다. 

 - 청지기 직분이란 개념은 강하게 남아 있었으나, 그것이 철저하게 이행되지 않을 때는 이기심을 가리는 가면이 되었다. 

 - 종교적 신앙과 관행이 점차 약화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게 되었다. 소명은 일이나 직업의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 '소명'(vocation)이란 단어가 살아남은 경우에도 그 적용범위가 갈수록 좁아졌다. 옛날 중세식의 구별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사업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19쪽

 개신교 노동 윤리는 여러 면에서 여가를 반대하는(anti-leisure) 태도를 가졌다고 비난받아 왔다. 이른바 노동만이 선하다는 칼뱅주의적 정서 때문이다. <중략>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개신교 노동 윤리는 다음과 같은 신념들을 포함한다. 게으름은 죄된 것, 근면함을 종교적 이상(ideal), 낭비는 악한 것, 검소는 미덕, 여가는 일로 획득하는 것이자 일에 대한 준비, 안일함과 실패는 금지된 것, 야망과 성공은 하나님의 총애의 확실한 징표, 부는 하나님의 총애의 특별한 징표 등. 

 이 가운데 일부는 개신교 종교개혁에서 직접 나온 것들이다. 행정관과 같았던 종교개혁자들-루터와 칼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알게 되는 방식을 '개혁'했을 뿐 아니라, 특히 세상과 노동에 대한 태도까지 개혁했다. 루터주의는 일꾼들에게 자신의 경제활동을 하나의 소명으로 생각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막스 베버에 따르면, 세상에서의 소명 혹은 신분에 대한 루터교의 신념에는 그것을 열심히 섭렵하고 합리화하고 혁신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베버의 견해처럼, 신자가 기업가 정신을 갖도록 그 열정을 끌어 올리려면 무언가다른 것이 필요했다. 

 "세상의 현실을 실험을 장으로 바꾸고, 개인을 그 장에서 역동적인 계획을 세우며 끊임없이 일하는 '온통 긴장된 존재'로 변모시키는 종교적 비전만이, 유일하게 그런 감화력을 제공했다고 말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가 그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노박은 막스 베버가 지성사에서 불멸의 자리를 획득한 이유가 적어도 두 가지 있다고 말한다. 

 첫째, "그는 경제사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으며... 경제의 도덕적, 종교적 차원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둘째, 마르크스주의가 설명 이론으로서 또 낙원의 비전을 제시하는 면에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대에 앞서 암시했다. 그 철저한 유물론은 인간의 정신을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베버의 논제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부흥하려면 격렬한 활동과 구원의 명령이 모두 필요하다. 이 두 가지 정신의 발흥은 칼뱅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전자와 관련하여, 수도문의 문이 닫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입증할 수 있는 길이 막히자 열렬한 신자는 세상에서 소명으로 받은 일을 격렬하게 수행해 스스로를 입증하라는 명을 받았다. 후자와 관련하여 칼뱅주의는 자기부인과 자기희생, 곧 자본을 축적하는 데 필수적인 이른바 욕구 충족의 연기(延期)를 가르쳤다. 베버에 따르면, 이에 필요한 신학적 토대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예정론이라는 칼뱅주의의 쌍둥이 교리가 제공해 주었다. 이 교리들은 신자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활동하고 그 과정에서 선택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첫째 교리는 "긴장을 끌어올리고", 둘째 교리는 "신자에게 세상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게" 만든다. 

  자기의 소명을 꼭 붙들라는 사도들의 권면이, 힘겨운 일상생활 가운데··· '자신의 선택과 칭의에 대한 확신에 도달하라'는 일종의 의무로 해석되었다.···그와 같은 자기 확신에 이르기 위해 격렬한 세상 활동이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추천되었다. 오직 그것만이 신앙적 회의를 없애 주고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준다.

 포기는 "그래서 칼뱅주의 신자의 모든 윤리적 달걀들은 자기 소명이란 바구니에 담겨졌다"라고 주장한다. 한편 베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명 안에서 노동의 열매로 부를 성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징표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적 소명 안에서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체계적으로 일하는 것을, 가장 고도의 금욕주의의 수단으로 여기는 동시에 중생과 참 신앙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여기는 종교적인 가치 부여는,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르는 삶의 태도를 확장하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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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저자 오스기니스) - 소명과 재능에 관하여

2020. 9. 18. 21:15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보통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에 부합하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재능의 목적은 청지기직과 섬김이지 이기심이 아니다.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게서든 좀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찬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우리는 개별적인(혹은 특정한) 소명과 공동체적(혹은 일반적)소명을 구별해야 한다.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직은 양자를 모두 존중한다. 개별적인 소명이란 우리 각자가 독특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개별적인 소명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동체적 소명이란 우리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거룩한 자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미덕이다. 

 

 

- 오스 기니스, <소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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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The Call) _ 오스 기니스

2016. 10. 10. 19:4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소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지, 즉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찾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삶을 출발할 수 없다. 


부르신 이 없이 소명(부르심)만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소명을 붙잡고 사는 삶이 쉽지만은 않다. 왜나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작점이 개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자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공존할 수 없다. 나를 버리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부르심이 어떠한 대가를 치른 것인지', 확실하게 이해한다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명》은 소명의 정의를 바탕으로 포괄적인 범위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부르심에 마땅한 삶을 알려주고 있다. 소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자라면, 큰 유익이 있을 것 같다. 



  



1. 소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 땅에 살아 남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파괴하게 될 거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것(존재 목적을 찾는 일)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일기』-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이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경계하라. 그분에 대한 헌신의 최대의 경쟁자는 그분을 섬기는 활동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지 그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


 어떤 접근들은 영적인 은사와 천부적인 재능을 모두 발견하려고 시도하지만 재능의 발견을 예배와 귀기울임-이것이 소명의 본질인데-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린다. 그결과 재능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지만 그것이 청지기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이기심으로 흐르게 된다. 

<중략>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서든 좀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차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다."

-몽테뉴(Montaigne)-


"인생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북극성만을 기준으로 삼아 방향을 조정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코 사람의 호의나 미소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당신에게 미소 짓고 계시다면 사람의 미소나 찡그림에는 상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찰스 고든(Charles Gordon) -



12 소명의 공동체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 모든 현대적 추세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부르심은 불가피하게 공동체적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대중의 '회합'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세속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원은 '불러내어진'(called out)이란 의미가 있고 구약 성경의 관점으로는 '불러내어진 백성'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결국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그분께 속한 그분 백성의 회합이다.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따라서 독특하게 개인적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인 신자들의 무더기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한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교회의 공동체성은 기관을 통해 생존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간의 신비로운 연합의 문제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부름받은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교만에 특히 약한데, 그 이유는 군중의 인간적인 칭찬을 멀리하고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살려는 소원 때문이다. 

<중략>

 "진짜 사악하고 음흉한 교만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멸시하고 그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 C.S. Lewis -  


 우리 각자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죄, 즉 홀로 뽐내는 단단한 '자아'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런 은혜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나태함은 또한 무기력하게 소파에 파묻혀 있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나태함은 육체적인 게으름 이상의 것이다. 사실상 나태함은 무기력 상태로 쉽게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극단적인 활동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뿌리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 선, 미의 본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상태, 곧 노골적인 영적 낙담 상태를 의미한다. 나태함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내적으로 낙담한 상태로서, 결국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빠져들게 된다. 


 현대적인 나태함에는 세 가지 주요한 측면이 있는데, <중략> ... 첫 번째는 철학적인 측면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상태, 따라서 영원과 불멸에 대한 믿음도 상실한 상태는 삶 자체의 생명력 고갈로 치닫게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현대 세계의 세속화 과정을 '마법 풀기'라고 묘사했다.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되었던 삶의 마술과 신비가 조직적으로 축소되고 파괴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명에는 성/속, 고상한/저급한, 완전한/허용된, 관조/활동의 구별이 없다. 소명은 심지어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조차 없애 서로 평등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름심에 반응하여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삶을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3.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소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1546년경 미켈란젤로는 성지에 가까운 귀족 친구인 비토리아 콜로나(Vittoria Colonna)를 위해 연필로 "피에타"를 그렸다. 천사가 마리아의 발 앞에서 죽은 예수의 몸을 부축하고 있고, 마리아는 미켈란젤로의 다른 피에타 그림에서처럼 아들을 흔들어 재우는 대신 말없이 경이감에 싸여 두 눈과 손을 하늘로 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똑바로 선 십자가 기둥 위에 단테의 「천국」에서 따온 문장, "얼마나 많은 피를 대가로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를 새겨 넣었다. 이것이 이 그림의 묵상 주제다. 

 얼마나 많은 피가 대가로 지불되었는지, 누구의 피인지, 왜 흘렸는지 등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멈추어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래서 간음을 일삼던 여인은 용서를 받고는 입맞춤과 향수와 눈물로 온통 예수님의 발을 적셨던 것이다. 분수에 넘친 그녀의 헌신은 그보다 더 분수에 넘친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반응이다. 시몬드 베이유가 훌륭하게 표현했듯이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아무것도 당연시 말도록,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도록, 모든 것이 은혜로 넘치도록."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우스운 짓이며,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자기 보호를 포기하는 것은 부조리한 행위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은 신인이신 조롱받은 메시아의 제복을 입기 위해서 선택하는 명백한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은 기쁨도 없이 찡그린 얼굴을 한 금욕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쁨이 충만한 얼굴로 죽어간 사람, 고난받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찬송하며 살아 간 사람들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킨다. 



복음는 우리가 느긋해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대립(antithesis)이 있고,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제자도의 대가가 있으며, 우리가 은폐해서는 안 될 순종에 대한 도전이 있고, 우리가 결코 증발시켜서는 안 될 믿음에 대한 스캔들이 있다. 그러한 진리에 충실하다가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도 좋다. 



 우리는 타이밍에 대한 모든 주장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모든 시대는 도덕성이 타락하고 있다고 느낀다. 학자들은 자기 주장을 ' 큰 분수령'이라고 과정해서 말한다. '위기'는 현대의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항존하는 특징이자 상투어가 되었다. 흔들리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넘어지지는 않으며, 여러 가지 '미래의 만조'는 자그마한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다. 큰 소리로 '전환점'이라고 외쳐지던 것들이 대부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지 못하고, 전환점 운운하는 논의에는 함정이 즐비하다. 



 우리는 '부름받은 존재'다. 누가 감히 이 숭고한 비전에 반하여 우리를 '속박받는 존재'라고 모욕하며, '용기 있는 존재'라고 뻔뻔스럽게 말하거나 '타고난 존재'라는 숙명론을 제기하는가? 하나님의 음성은 들렸으나 형태는 보이지 않았던 그 장엄한 시작에서부터 최후의 부르심 때 그분의 모든 자녀를 향한 계획을 밝히실 절정에 이르기까지, 소명의 특성과 목적은 가장 귀가 멀고 둔감한 자를 제외한 모든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마음과 영혼을 전율케 한다. 

 이것을 깊이 숙고하라. 최후의 부르심이 우리 각자에게 올때 우리가 완전히 소명에 응답했고, 그 도를 좇았으며, 유종의 미를 거둔 모습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진리의 용사'(Valiant-for-Truth)와 같이 마지막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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