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7. 19:45 신앙/교회
2년전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의 안과밖의 경계선에서 떠날 채비를 했었다. 결국, 수많은 생각들과 고민끝에 교회에 남기로 결정했지만, 그 이후의 시간속에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있었는가 물어야 한다. 2018년 5월부터 시작된 고민이 공식적으로 9월에 끝났다. 그러고나서 다시 나와의 대화가 201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후로 나들이, 10주년 기념행사 등 교회의 굵직한 행사들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경계선에서 서성였다.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고해서 제3자로 방관했던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다시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했을뿐이다.
2019년을 지나 2020년을 맞이했다. 중국 우한으로부터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이 이어졌고, 3월부터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다. 온라인 예배가 장기화되면서 몸과 마음이 점점 교회와 멀어져가는 듯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서 다시, 마지막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2013년에 주님의교회로 발걸음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역사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백주년기념교회를 가는 길에 주님의교회은 생각나게 하셨고, 마침 2호선을 타고 있었던지라 신도림역에 내려서 주님의교회를 찾아갔다. 서울에서의 삶과 주님의교회 신앙 생활을 같은 시간속에서 흘러간다. 대학원 생활, 졸업, 취업준비, 그리고 취업.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속에 주님의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의 발자취도 함께 남아있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발자취를 같이 해왔다고 해서 앞으로 계속 같이 가야하는가이다. 궤도를 달리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생각의 시작점이 과연 불순한지 또는 악의적인지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교회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더 좋은 신앙생활을 위하여 교회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차악(次惡)으로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 묻고 싶다. 다른 교회에 가도 지금과 똑같은 행동으로 일관할 것인가...그건 다른 교회에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다시,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지만 생각의 쳇바퀴에 빠지지 않으려면 정답이 없는 질문을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 어찌되었든, 남아있을지 아니면 떠날지만 확실하게 정하고 그에 따라 지혜롭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분명히 믿는 것은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는 것이다. 그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안에 내 삶의 역사도 개입된다는 사실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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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9. 11:50 신앙/교회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함께 몰려다니는 무리를 유심히 잘 살펴보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상이할 수 있으나, 내면의 가치관과 생각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왜 같이 다니는지 동의되는 부분이 꽤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일반적인 교회에서도 '유유상종'은 통용될 수 있다.
요즘 나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한다. 나는 그들과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을까. 비슷한 가치관, 유사한 믿음, 또 어떤 삶의 방향성. 여러가지 측면에서 비슷한 면이 많을거라고 예상된다.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측면에서 참 기쁘다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안타까운 지점은 있다.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세월이 지나 믿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을 보면 나 또한 그들과 비슷한 종교적 가치관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한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나도 믿음을 버릴거라는 추측은 어찌보면 허무맹랑한 소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적으로 공유한 것들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왜 신앙적 가치관을 바꾸거나 내버렸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생각하는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반영된 삶의 일부이자 연장선이지 않은가. 오늘도 곰곰히 다시 생각해본다. 내 생각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은 다 모를 수도 있어도 분명, 나는 내 시꺼먼 속내를 알지 않는가.
잃어버린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다시 되돌아본다.
다시, 마지막을 생각한다 (0) | 2020.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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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6. 17:02 신앙/교회
#2 나를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나 자신과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명확한 사실 앞에서 내가 왜 추춤거리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내세웠던 명분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왜 그런 명분을 내세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스스로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다시 악순환일뿐이다. 매번 느끼지만 나를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한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묵혀있는 감정도 처리해야한다. 몇년간 묵혀온 감정들이 이번에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감정의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 근데 감정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진 않다. 스스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묵혀온 감정들이 많은 탓에 그 시작점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감정의 시작점을 추정해볼 수는 있다. 지난 사태를 야기한 감정 상태는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있다. 첫째 권위에 대한 반감, 둘째 부당함에 대한 절규이다. 권위에 대한 반감은 가부장적인 아버지한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는 어떠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다짜고짜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가장의 권위에 대한 반감은 성장기에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부당한 권위로 힘을 행사하거나 억압하면 강한 반감이 들었다. 때론 반감때문에 튀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부당함에 대한 절규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했다. 다만 절차가 왜곡되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 부당함의 주체에 대한 반감이 일어난다. 첫번째 권위에 대한 반감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권위나 부당함에 대해 무조건 반박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권리와 이익이 위협받는다고 예상되면 권위에 대한 적대적 행동은 소극적으로 변한다. 권위에 대항하느니 차라리 쉬쉬하면서 이 상황을 넘기겠다는 심산인것이다. 권위에 모순적인 행동양태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풀어내야할 생각의 실타래가 아직 많이 남았다. 맘을 놓기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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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0. 13:35 신앙/교회
늦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머리가 아프고 또 아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더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고 되뇌였다. 교회를 떠나느냐 남느냐를 결정하는 일이 고된 일이겠지만 혼자 끙끙 앓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아프지 않으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끝을 보고 싶었다. 극단의 선택만 존재할 뿐 애당초 중도는 없었다. 처음엔 쉽게 마무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삼주면 끝날 줄 알았던 대화가 두 달간 지속되었다. 대화는 날 선 언어로 가득 채워졌다. 어느 단어 하나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나의 언어가 되레 내 목줄을 조일 수도 있다. 단어의 정의와 맥락적 이해의 반복,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대화가 끝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친 몸으로 방에 기대어 헛구역질만 내뱉다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지랄같은 흙탕물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대화의 끝을 알 수 없었고 대화는 이미 내 영역을 벗어났다.
결국 사달이 났다. 감정이 뒤틀린 채로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번복하긴 싫었다. 완강한 고집이었다. '마지막'이란 단어를 가슴 깊이 새겼다. 마음은 이미 멀어졌으니 미련따윈 없었다. 떠나려고 했던 그 날, 예상치 못했던 한가지 변수가 있었다. 설교 말씀이었다. 큰 결정을 내릴 때 매번 날 돌이키게 했던 것이 말씀이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말씀 앞에 나의 행동과 언어와 생각을 비추어봤을때 어느 것 하나 떳떳할 수 없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다시 돌이킬 수밖에...
돌아섰지만 돌아서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돌아서겠다고 말했지만 돌아설 수 없었다. 경험에 근거한 완고한 생각이 좀처럼 부서지지 않았다. 땅을 딛고 있다는 경험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만, 믿음의 영역에서 경험에 의존할 수만 없다는 것도 분명한 일이었다. 벌어진 생각의 틈에서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생각이 제자리를 맴도는 것은 돌아서겠다고 말한 이전과 다를바 없었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지금의 싸움은 나와의 싸움이었다. 또다른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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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2. 17:28 신앙/교회
[#2 교회와 나를 생각한다 _ 정회원 제도]
그럼 두번째 주제, 정회원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난번 정회원 제도에 대한 포스팅(교회에 대한 생각의 실타래, http://kangsy85.tistory.com/623) 에서 두 가지 한계을 지적했다. 첫째, 정회원과 준회원, 그리고 방문자를 나눔으로써 각 회원의 역할과 참여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회원이 정회원답지 않게 행동함으로써 정회원과 준회원의 실제적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대안으로서 아래와 같이 세가지를 제안했다.
- 정회원의 기준을 상향조정한다.
- 정회원들에게 강제적 의무를 부과한다.
- 정회원의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 자격을 박탈한다.
그러면 정회원제도에 대한 생각들을 자문자답 형식으로 정리해보자.
Q.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전에 물어야 할 게 있다. 5월 19일 진행되었던 정회원 임시공동의회 결정사항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정리되었는가?
A. 불편한 마음을 정리되었다. 다만, 임시공동의회 최종 결정 과정에서 회원들의 의견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점이 아쉬울뿐이다.
Q. 정회원제도가 시행된 목적이 무엇인가?
A. 두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존 교회의 무너진 세례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로서 준회원이 정회원 입회식하기까지 약 1년간의 과정을 통해 세례 받은 자인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것이다. 둘째, 공식적으로 세례받은 자임이 확인된 자들로 모인 정회원들을 구축으로 정회원 중심의 교회를 꾸려가기 위함이다.
Q. 현재 정회원 제도가 잘 시행되고 있는가?
A. 교회의 측면에서 보자면 잘 시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측면에서 정회원 입회를 하는 명확한 기준과 시기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불분명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알고 있는 선에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일련의 교육 과정(복음의 기초, 교회론)을 거친 준회원을 대상으로 교회 생활에 대한 추가적인 부분들을 다시 점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다음, 정회원 입회식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될 즈음 목사님과 집사님이 포함된 카톡에 참여하여 기도와 말씀묵상에 대한 것들을 점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략 준회원에서 정회원이 되는 기간은 약 1년이다.
Q. 더 나아가 보자. 준회원이 정회원이 되고난 후 어떠한가?
A. '어떠한가'란 질문에 대답하면 비판과 판단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정회원 입회식을 거치고 난 후가 애매한 지점이다. 왜냐면 정회원 입회식을 통해 세례받은 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후에는 정회원 제도가 입회식을 통과한 자의 삶을 강제적으로 규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한몸이 된 것을 믿어 정회원이 된 후부터는 세례받은 자로서 합당한 행동을 자발적으로 보여야 한다. '실제적으로 그러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한다.
Q. 정회원이 정회원답다고 생각하는가?
A. 일단 정회원인 나부터 말하자면 정회원답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교회 선교의 방향성에 동의하지 못하고 제 3자로 교회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세례받은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직시하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나는 왜 교회의 방향성과 제도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하자면 2014년 정회원 제도가 시작되면서 검증을 거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회원제도가 시작되면서 나와 함께 정회원이 된 자들 중 일부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Q. 정회원 제도를 통해 정회원답지 않은 정회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A. 지난번 공동의회를 통해 권고 정회원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교회의 제도와 사역에 의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고 참여하지 못할 때, 그 회원의 정회원으로서의 권리와 참여를 제한한다. 그런 다음 그 회원이 다른 교회에서 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교회를 옮길 것을 권하는 제도이다.
Q. 준회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정회원 제도가 진행되면서 교회를 떠난 준회원들이 몇몇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A.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정회원임을 생각할 때 준회원들은 교회의 주축이 아니다. 그러므로 준회원이 정회원이 되는 점검의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못하거나 제도나 방향성에 동의하지 못할 때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ㄱ 형제 : 결혼에 대한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지 못했다. 갑자기 다른 교회로 옮겼다.
ㄴ 형제 : 교회의 제도나 사역에 불만을 표출했고, 관계적인 면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ㄷ 형제 : 교회안에서 자매와 교제를 하다가 헤어졌고, 그 뒤로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ㄹ 자매 : 다른 지체들을 비판하거나 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교회됨을 해치는 부분에 대하여 개인적인 권면을 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교회의 권징과 치리의 과정으로 넘겨졌으나 돌이키지 못했다.
종종 '사람들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다시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사람들을 잃어버렸다기보다 자신들이 교회를 나갔다고 하는게 맞는 말일 것 같다.
Q. 그러면 정회원 제도를 통해 주님의교회로 성경적 교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A. 정회원 제도를 통해 정회원을 중심으로 성경적 교회를 이루기 위한 구심력은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회원간 응집력이 강해진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시로서의 교회, 한몸으로의 교회, 가족으로서의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정회원으로서 교회의 권리를 다른 회원들보다 더 주장할 수 있다는 지점이 세상의 기득권층이 가진 특권의식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정회원으로 구성된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Q.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보자. 그런데 왜 당신은 3자로 남아있는가?
A. 지난번 질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첫째, 선교의 불일치, 둘째, 정회원 제도에 대한 고민들. 첫번째 이유는 합당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인정한다. 두번째 이유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해야 하나. 정회원제도의 한계점은 인식하나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지금 필요치 않다. 진보를 위한 비판이기 위해서는 비판을 딛고 나아갈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 나한테 없다. 근데 '마냥 제 3자로 서 있는 것이 옳은가?'란 질문에도 머뭇거리고 있다.
Q. 성경적 교회를 위해 실제적으로 어떠한 부분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A. 교회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각 개인들의 역동성 및 자발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오랫동안 섬겨온 예배팀과 학습법팀에서 자발성과 역동성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번 팀을 모아서 이야기도 해봤고, 카톡에서도 행동을 권장했으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자발적인 그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Q.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자. 목사님과 대화에서 무엇을 질문하겠는가?
A. 첫째,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방법. 둘째, 정회원 제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방안....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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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 22:08 신앙/교회
[#1 교회와 나를 생각한다 _ 선교에 대한 부르심]
5월 20일부터 시작된 교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을 만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후 바로 생각들을 정리했어야하나 게으름으로 인해 미루어두었다가 이제서야 생각들을 정리한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다. 첫째, 선교에 대한 부르심, 둘째, 정회원제도에 대한 고민. 왜냐면 이 두가지 이유가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판단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지금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 25 : 16∼18
1. 선교에 대한 부르심.
Q. 해외 선교에 대한 명확한 부르심이 있었는가?
A. 명확한 부르심이 있었는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말하자면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사건이 생각한다. 첫번째 사건은 동신교회 비전선포에서 전문인 선교를 가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두번째 사건은 2009년 인도 단기선교를 갔을 때 장기선교를 가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다. 두 사건에서 공식적으로 선교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었다. 그러나 두 사건은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로 부르신 사건은 아니다.
Q. 그럼 다른 질문을 해보자. 아직까지 해외 선교에 대한 마음이 있는가?
A. 솔직히 말하자면 선교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것 같다. 전문인 선교를 꿈꾸며 대학원에 온 시점이 2009년이었다. 이때만해도 선교에 대한 열정과 포부가 가득했었다. 하지만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전문인 선교의 한계를 직시했다.
'과연 비즈니스 선교를 통해 영혼구원이 가능하단말인가?'
'빗물 전문가로 전문인 선교가 가능한가?'
빗물 기술이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로서 유용하나 전문가 선교의 주요한 기술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빗물기술이 선교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Q. 이어서 질문해보자. 해외 선교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나?
A. 직업적 소명의식을 바탕으로한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사회(선교사회)에 나가서 주로 일을 한다. 그 일이 의미있는 하나님의 일이었으면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이웃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웃의 범주가 넓긴 하다. 내 전공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영역을 생각한 것이다.
Q.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A.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 즉 해외에서 전도를 하겠다는 것이다.
Q. 그럼 다시 묻자. 영혼구원이라면 왜 굳이 해외에서 해야하는가?
A. 앞의 질문에 대한 것인데...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했기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Q.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재의 고민은 해외선교에 대한 부르심과 주님의교회가 지향하는 선교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맞는가?
A. 그렇다. 고민의 시작은 선교의 불일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선교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주님의교회에 갓 들어왔을때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과 계획들이 세워져 있던 상태였다. 그렇기때문에 개인적인 관점에서 해외선교와 비교해서 누룩선교, 아나톨레 사역 등의 중요성에 대해서 고민했으며 올바른 선교의 방향성을 생각했다.
Q. 처음 고민은 선교의 불일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은 해외선교에 대한 마음도 거의 없지 않은가. 그러하다면 지금 선교에 대한 고민은 선교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상황을 항변하기 위한 변명이 아닌가?
A. 굳이 말하자면, 선교에 대한 불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만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첫째, 지금의 고민은 선교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둘째, 고민의 시작이 어떠한 근거없이 교회 사역의 방향성에 대한 불만이라면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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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20. 22:14 신앙/교회
왜 갑자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유를 찾아야 한다. 아마 오전의 일이 감정을 뒤틀리게 한 발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제의 토론은 추후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토론 마지막에 의견 수렴에 대한 발표와 함께 다시 토론하자고 했다. 안건에 대한 결정보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전에 주보를 확인해보니 어제의 결론이 최종확정이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마주한 결과는 내가 어제 들은 것을 바탕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어떤 과정이 더 있었던 것인가...'
'내가 잘 못 들은 것이 있는가...'
어제 결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물었고 목사님의 마지막 말에 대해 재차 확인했다. "어제 토론 마지막에 하셨던 말씀이 최종 결정을 말한 것이냐고...?"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였다. 나의 기억에는 토론 마지막에 목사님께서 결정 또는 확정한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 기억은 파편적이다. 기억의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때의 뉘앙스를 생각했을때, 어제의 말과 문장들을 다시 더듬어볼때 분명히 결과확정은 아니었다. 준/정회원들의 기도회가 정회원만의 모임으로 변경된 결과에 대해 다시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들만의 리그가 아닌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생각한다. 도망치듯 멀어져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다시 생각한다. 감정을 뒤틀리게 한 시작점이 결과확정에 대한 의문이 맞는가. 솔직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감정 깊은 곳에 내재된 불만들이 이번 일로 인해 다시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회원은 정말 정회원다운가
정회원제도는 성경적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정말 유익한가
왜 우리는 사람들을 자꾸 잃어버리는가
왜 나는 제3자로 서 있는가
정말 우리는 성경적 교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무수한 질문들에 다시 대답하지 못하고 덮어버릴수는 있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무뎌지고 복잡한 생각도 한결 단순해지니까. 하지만 이 악순환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결코 이 교회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복과 안식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 제발, 그러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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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2. 00:34 신앙/교회
교회적으로 살지 못하는 나에게, 누군가는 그 삶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배운바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한 것이, 뻔뻔하게 보였던 것일까. 그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났다. 나는 더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했고, '부끄러워 해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 성격상,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기에 말을함에 있어서 스스로 평가절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운 것과 삶의 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 잡을 수 있는 '격차'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괴리'라고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근데, 흔하게 '괴리'라고 설명했던 적이 많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교회적으로 살지 못하는 내 삶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교회와 지체를 위해 재정과 시간을 할애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교회적 삶의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의 기준에는 그리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지점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삶이 부끄럽냐, 아님 떳떳하냐는, 아무래도 내가 제일 잘 알테니,
다시 스스로에게 묻고 솔직하게 답해보자.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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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30. 21:17 신앙/교회
조아진, 멍-생각의 실타래, 2013
53.1 x 65.3cm_mixed media <출처: http://blog.naver.com/31910z>
생각의 실타래를 풀자.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따라서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나눠, 교회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것 같다. 자, 시작해보자.
1. 긍정적인 측면
1) 제도
긍정적인 측면은, 무엇보다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교회를 목표로 교회의 한몸됨을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참된교회의 3가지 표지인 말씀의 순수한 전파, 성례(성찬식+세례식)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이행을 준수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회원 제도, 제한성찬, 권징과 치리가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주님이 피로사신 거룩한 교회를 보호하고 한몸된 교회를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회원제도는 현대교회의 무너진 세례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회원(일반적으로 준회원)의 1)신앙고백과 2)삶의 열매를 근거로 정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정회원의 자격여부는 목회자 및 직분자가 판단하며, 준회원이 정회원이 되는 기간은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
2) 성도
복음을 배우려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성도들이 많다는 점과 교회론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성경적 교회를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2. 부정적인 측면
1) 제도
정회원 제도로 인해 우려되는 점은 첫째, 정회원과 준회원, 그리고 방문자를 나눔으로써 각 회원의 역할과 참여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회원들을 주축으로 교회의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지며, 정회원의 특정한 모임에 준회원과 방문자는 참여할 수 없다. 이로 인해 회원간 위화감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회원에게 사역과 역할이 치중됨으로써 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둘째, 정회원이 정회원답게 행동하지 못함으로써 정회원과 준회원의 실제적 차이가 없어지게된다. 그럼으로 인해 정회원 제도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왜냐면 준회원이 정회원답지 못한 정회원의 행동과 삶을 직, 간접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정회원의 기준이 하향되고 그 삶 자체를 희망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안들을 무엇이 있는가.
- 정회원의 기준을 상향조정한다.
- 정회원들에게 강제적 의무를 부과한다.
- 정회원의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 자격을 박탈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들을 정회원제도가 시행된 후 도입할 경우에는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관계가 감시자와 피감시자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고 본다.
현실에서 성경이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를 온전하게 이룰 수는 없다고 본다. 결국 쟁점은 성도 개개인이 한몸된 성경적인 교회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힘쓰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래, 결국 살아내느냐의 문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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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7. 19:44 신앙/교회
출처 : http://m.blog.naver.com/hl1oye/220345268983
교회가 무엇일까. 많은 생각들로 다시 머리가 복잡하다. 교회의 올바른 방향성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져보지만, 현실앞에서 '참된 교회가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된다. 참된 교회로서 드러내야할 표지는 말씀의 순수한 전파, 성례의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이행이라고 배웠다. 학계에서 세번재 항목을 추가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있긴하지만, 일단 배운바대로 받아들이자면 그렇다. 분명 제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참된교회로서 드러내야 할 표지들을 나타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
또 다른 제도적인 측면에서, 떠나는 자와 남아있는 자들이 극명한 차이는 무엇인지. 명백한 죄에 대하여 회개하라는 권고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 떠나는 자들과 남아있는 자들이 나뉘게될 뿐... 남아 있는자에게 참된 신자로서 가지고 있는 특별함은 무엇인지 묻게된다. 그리고 나에게도. 떠난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가족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 우리들만의 리그에 갖혀있는 이 답답함은, 복음과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의 우둔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질문들만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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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6. 21:25 신앙/교회
비판을 위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마음 속 응어리져 있던 것이 질문에 묻어 나왔다. 약간은 흥분했고, 논리는 없었으며, 말은 더듬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권위에 맞선 것이다. 교회의 결정에 불순종하겠다, 선포를 해버린 것인데...떠난 지체에 대한 인간적인 정이 교회의 법과 질서보다 앞선 것은 사실이다. 헌데 어찌하냐, 지금의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니 말이다. 납득이 되어야 움직이는데, 질문에 질문만 무성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무거운 맘으로 교회를 떠났다.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땅은 간간히 젖었으며, 비는 곧 쏟아질 태세였다. 지하철을 타러 갈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생각의 꼬리를 물고, 또, 그리고 계속 생각하고, 교회, 교회, 그 위대한 교회. 교회에 대한 질문들에 오랜시간 고민해왔던 결과가, 고작, 나를 위한 변명이라니.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니, 비는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세차게, 그리고 무섭게 내렸다. 비가 오니, 우산 좀 가지고 오라고 말 할 친구는, 이곳에 없다. 비가 그치길 한참을 기다렸다. 좀처럼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았다. 기분도 울적한데, 비를 맞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세찬 빗줄기 속을 고요히 걸어갔다, 저벅저벅. 나도 불신자인가 보다, 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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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7. 21:09 신앙/교회
지난 금요일 대형교회 기도모임에 참석했다. 이 교회만이 가진 고요함과 적막함은 개인주의적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 같았다.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으나, 서로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이들은 찬송을 아주 경건하게 부르고, 적막한 분위기에서 말씀을 듣고, 남이 들리지 않을 만큼 고상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아무런 인사없이 제 갈길을 갔다.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인가. 이 사람들은 한 성령안에서 한 몸된 지체들이 맞는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느니라"
고전 12:12-13
참된 신자는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한 성령으로 다른 지체들과 한 몸됨을 이루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로써 다른 지체들을 돌보려면 개인주의적인, 그럴듯한 고상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한 지체인 형제나 자매가 아프고 힘든데, 고상하게 위로만 하거나 말뿐인 격려만 할 수가 있겠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몇 달 전까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회의 한 몸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남에게 피해주지 않을 만큼의 관계의 적정선 뒤에서 지체들과 교제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지 알았다.
교회의 한 자매가 지체로서 "질척거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질척거림이라...소위 쿨한 삶을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서 '질척거리는 삶'이란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인간관계의 호불호가 명확한, 나의 삶은, 신자의 삶이 아닌가. 그렇다. 싫으면 관계를 끊어버리고 좋으면 무한정 퍼부어주는 인간관계는 세상 사람 누구나 그렇게 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신자의, 한 몸된 공동체 안에서 지체의 삶이란 결코 고상하거나 쿨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 12: 25-26
교회의 한 몸인 지체로서 다른 지체의 고통과 슬픔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돌아보
면서 질척거리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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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27. 20:23 신앙/교회
도대체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곳에서 에너지고 소모되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 한 번 갔다오면 힘을 받고 와야 되는데, 이건 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들 각작의 가면을 쓰고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왜 이런것일까.
나의 문제일까.
그들이 문제일까.
다른 사람들끼리는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나의 문제지 않을까.
어렵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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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20. 20:38 신앙/교회
그래, 공동체라.
이렇게 말하면 뭐, 너무 극단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좋은 면만 보여주는, 안 좋은 면들은 가려지는. 타의든, 자의든.
다들 각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속내를 더욱이 알 수 없는 듯한.
피상적인 관계들이라 단정지어지는, 공동체.
너와 나의 삶에 대한 아무런 이해없이, 한 곳에서 같은 것을 듣고, 배우는.
그러나 네가 지금 힘들어 하는 것이 무엇이고,
지금 삶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서로를 이해한다는, 나를 이해한다는, 그 겉치레 말들.
그래, 나의 탓도 크겠지. 내어줌이 없었으니, 받아들임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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