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순간 _ 스벤 브링크만

2020. 3. 28. 16:51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스벤 브링크만 지음 / 강경이 옮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왜 뭔가를 바라거나 행해야 하는가? ······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나를 기다리는 필연적인 죽임이 앗아 가지 못할 그런 의미 말이다'
- 톨스톨이 -

 

철학은 막연하게 어렵고 재미없게만 느껴진다. 중·고등학생 때 윤리 수업 시간에 고대 철학자들의 복잡한 사상과 이념을 공부하면서 ‘이 사람들의 사상과 개념이 내 삶에 무슨 소용인가’라는 불만과 푸념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철학은 과연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의 저자 스벤 브링크만은 철학은 우리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은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삶에는 어떤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더 실존적인 의미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놀이, 사랑, 윤리 같은 가치는 쓸모없을 때, 그러니까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일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22쪽).

 

 다른 시대에 살았던 고대 철학자들의 10가지 관점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책에서 다루는 10가지 관점은 '선, 존엄성, 약속, 자기, 진실, 책임, 사랑, 용서, 자유, 죽음'이다. 단어만 봐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저자는 각 관점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대표적인 명언과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실용적인 교훈을 전달해준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철학적 사고의 기반을 마련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다시 읽어볼 문장들 

 

저는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한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은 구원이라는 종교적 목표를 자아실현으로, 또 고해성사와 성직자의 조언을 치료와 코칭으로 바꾸었지요. 

 

제가 심리학을 비판항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다양한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자기 자신을 찾고 계발하도록 돕는 일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을 윤리적, 사회적으로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중략> 심리학은 우리가 자기 계발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 적어도 심리학의 일부는 우리 사회의 도구화 현상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더 나아가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을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합니다. 

 

19세기 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종교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진 '신의 죽음'이라는 현상과, 그로 인한 의미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응답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1강.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효용성과 즐거움을 토대로 한 우정은 진정한 의미의 우정이 아닙니다. 오로지 도구적인 관점에서만 그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고귀한 우정은 효용성이거나 즐거움 같은 이익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달리 말해, 고귀한 또는 진짜 우정은 그 자체로 좋습니다.

 

윤리적인 삶이 이윤만 좇는 삶보다 더 옳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성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이지요(생각해볼 점: 근거가 무엇인지...)

 

2강.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존엄성이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내가 자유의지를 발휘애 처음 할 행동은 자유의지를 믿는 일이 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존재가 당신의 도덕법칙 안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3강.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발달심리학은 타인에게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사살이 아이를 책임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4강.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우리는 자아발달 과정에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반성적 자아가 기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기 성찰만 해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성적 관계로서의 자기 개념이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여기에 자기 관계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강조한 테일러의 의견까지 결합하면, 우리는 자아의 도구화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방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의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미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5강.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이었지만 놀랍게도 개인적으로는 악마 같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으며, 자신은 그저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동기는 악의가 아니라 사유 없는 복종이었던 것입니다. 

 

6강.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로이스트루프가 '도덕적 요구'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는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근원적인 윤리적 요구에서는 그 어떤 사법적, 도덕적, 인습적 규칙도 끌어낼 수 없다. 그것은 침묵한다···. 사법 절차나 도덕, 인습은 윤리적 요구가 통과해 퍼져나가는 프리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인습은 윤리적 요구를 보여주는 동시에 굴절시킬 수 있다. "

 

7강.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세상을 헐벗고 의미 없는 '즉자존재'와 인간의 의식을 가리키는 '대자존재'로 분리했습니다. 즉자존재란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는 존재를 말하고, 대자존재란 대상을 의식하고 그렇게 의식하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는 존재 방식을 뜻합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하는데요. 우리가 즉자존재로서 이미 정해진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대자존재로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삶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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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닉(Chronic, 2015) _ 삶과 죽음에 대하여

2016. 4. 21. 23:35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감독: 미셸 프랑코 

출연: 팀 로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없다. 삶의 마지막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가진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을 아주 실제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크로닉(Chronic)이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죽음을 앞에 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다. 영화에서 데이비드가 돌보는 첫 번째 환자는 사라이다. 그녀는 그와 모든 일상을 함께 살아간다. 사라가 데이비드 앞에서 벗은 몸을 드러내고, 데이비드가 그녀의 몸을 아주 세밀하게 씻겨주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여자로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광경이지만, 그녀는 온전히 그를 의지하는 것 같았다. 사라가 데이비드의 도움 없이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둘의 사이는 그저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로서 지탱되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몇번의 장면이 흘러가고, 그녀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다. 데이비드는 사라의 장례식에 찾아가고, 드러나지 않게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리고 화면은 술집에 있는 데이비드에 집중한다. 약혼한 남녀가 술집에 앉아있는 데이비드에게 약혼한 기념으로 술을 대접하고, 자신들의 약혼사실을 자랑한다. 그리고 데이비드에게 결혼여부를 묻고, 데이비드는 결혼하였다고 말하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이야기하며, 그녀의 이름이 ‘사라’라고 말한다. 


 

 

 

‘아내의 이름이 ‘사라’라고... 좀 전에 죽은 환자의 이름이잖아... 뭐지...‘


 


 

혼자 궁금증을 안고, 계속 영화를 지켜봤다. 데이비드는 두 번째 환자는 존이다. 존은 쓰러진지 며칠 되지 않았으며 건장한 체격을 가진 노인이다. 존이 데이비드를 간호하고 나서, 그는 서점에 들러 자신이 건축과 관련 책을 사고, 서점 주인에게 자신을 건축가라고 소개하며 실용적이고 작은 건물들을 설계한다고 말한다. 

 

 


 


‘뭐야? 데이비드는 간호사잖아...’

 




데이비드가 서점 주인에게 한 말은 그가 서점이 오기 며칠 전 존이 데이비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렇다. 데이비드는 그들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하여 자신의 삶을 환자의 삶과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시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는 간호사로서 온전히 환자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타인으로서 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헌신의 삶임은 분명했다. 어찌됐든, 데이비드, 그의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존의 삶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모습은 존의 가족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데이비드의 헌신과 희생을 ‘성추행’으로 오인하고 그를 고소한다. 그는 그 가족들에게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지만, 가족들은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쫓겨난다.    


 

데이비드가 맡은 세 번째 환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과부다. 그녀는 데이비드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며, 일정한 선 밖에 서 있다. 그녀는 병세가 악화되면서 자신이 추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호전되지 않는 병을 위해서 화학적 치료를 받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안락하게 약물로 죽는 방법이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데이비드가 자신의 아들에게 행했던 것이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이전 환자의 가족으로부터 고소를 당했기 때문에 그의 이력들을 조사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그가 그의 아들을 안락사 시킨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그녀는 데이비드도 자신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데이비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결국 그녀의 요청을 들어준다.



다시 데이비드는 네 번째 환자를 맡게 되는데, 평상시 하던 조깅을 하다가 달려오는 차에 치인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그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세명의 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삶을 내던지고, 오로지 환자들을 위한, 환자들에 의한 삶을 살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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