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_ 김경미

2015. 8. 15. 20:37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김경미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포플러나무가 떠밀고 

시외버스가 부추기는 일이다 


읍내 우체국 옆 철물점 싸리비와 

고무호스를 사고 싶다 

청춘의 그 방과 마당을 다시 청소하고 싶다 

리어카 위 잔뜩 쌓인 붉은 생고기들

그 피가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고 

청춘에 배웠던 관계들 

언제나 들어오지 마시오 써 있던 풀밭들

늘 지나치던 보석상 주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

머리 위 구름에서는 언제나 푸성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차도 시간이 가지 않던 

시간이 오지 않던

하늘에 1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건 

좌절과 실패라는 것도 청춘의 짓이었다 


구름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개가 부러졌던 스물셋

설욕도 못한 스물여섯 살의 9월

새벽 기차에서 내리면 늘 바닷속이었던 

하루에 소매치기를 세 번도 당했던 

일주일 전 함께 갔던 교외 찻집에 각각

새로운 연인과 동행했던 것도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외면했던 것도 언제나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서른 한 살에도 서른 여섯 살에도 

계속 청춘이라고 청춘이 계속 시키며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다 청춘의 짓이다 

어느덧 불 꺼진 낯선 읍내 

밤의 양품점 앞에서 

불 꺼진 진열장 속 어둠 속 마네킹을 구경하다가 

검은 마네킹들에게 도리어 구경 당하는 것도 

낯선 읍내 심야 터미널 시외버스도 

술 취해 옆 건물 계단에 앉아 우는 남학생도 

떨어져 흔들리는 공중전화 수화기도 

다 청춘이 불러낸 짓이다. 


그 수화기 떨어지며 내 청춘 끝났다 절규하던 목소리도 

그 전화 아직 끊기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얼른 받아보라고 

지금도 시키는 것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31살, 청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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