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 19:2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을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이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 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퀵배달 직원에게 예상된 배송시간보다 오래 걸렸다고 배상을 촉구하고,
직원말고 사장과 이야기 하고 싶다며, 핏대 세우며 고객의 권리를 찾으려는.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전화상으로 비웃은 이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 내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꼼꼼하게 증명한 뒤,
그 때 왜 웃었냐고, 당신 이름이 뭐냐고, 매섭게 쏘아붙이는.
권리와 자존심을 그리도 내세우는 자가,
어찌 을의 입장에 있을 때는 그리고 처절하게 아무소리 못하는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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