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 이상화

2016. 11. 23. 01:2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은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과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루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봄은 왔다. 그리고 봄은 반드시 다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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