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몹시도 따가웠던 아프리카

2019. 2. 28. 14:03 삶을 살아내다/당신과 함께

 

 

 

 

햇볕이 몹시 따가웠던 아프리카에서 1년. 사역을 마칠 즈음 방향을 잃고 헤맸다. 떠날 때 품었던 희망의 끈을 놓은 채 한국 땅을 밟았다. 1년간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허나, 잃어버린 것이 많았기에 다시 채우기 위해 발버둥쳤다.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아픈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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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2016. 9. 20. 21:35 신앙/선교(宣敎)



아프리카의 첫날밤도 외롭고 두려웠다. 18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그 곳에서, 스스로의 선택에 묻고 또 물었다. 가지고 갔던 인생의 고민들은 해결하지 못한 채 무성한 질문만 더 가지고 한국땅을 다시 밟지 않았던가. 그렇게 간절했던 한국땅은 낯설었다. 그 때의 기억들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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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Tanzania)에서 장기거주 시 집(compound) 선택

2013. 11. 3. 00:08 신앙/선교(宣敎)


 아프리카에서 장기 거주를 위해 집을 알아 볼 경우, 가장 고려해야 할 것중에 하나가 안전입니다. 제가 1년동안 거주했던 탄자니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서 덜 위험한 편이지만최근들어 무장강도들이 현지 선교사님들 집에 들이 닥친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안전한 집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탄자니아에서 한국 선교사님들이나 외국인들이 오랫동안 살기에 가장 적합 한 곳은 컴파운드입니다. 컴파운드(compound)는 한 담장 안에 여러 가구가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명의 경비원이 컴파운드를 지킵니다. 총을 들고 있는 수위도 있습니다. 경비원 주된 역할은 컴파운드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며, 그외에 컴파운드의 정문을 열어주거나 정원관리마당 청소, 세차 등 여라가지 일을 합니다. 집세에 경비원월급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제가 살았던 집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집은 한달에 $250 (2011년 기준) 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빨간색을 경계로 우측이 제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집 내부에는 콘크리트벽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는 안 나와 있지만 좌측에 파란색 동그라미를 표시한 곳에 또 다른 현관문이 있습니다. 제 집 좌측에는 미국에서 수학(修學)한 지식인 탄자니아 부부가 살았었습니다그리고 제 마당에는 야자수 나무가 아주 많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집은 방 두개, 거실, 부엌,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2. 거실





3. 부엌






4. 화장실









이 정도 크기면 혼자 살기엔 크고, 둘이 살기엔 적당한 공간입니다.

 


아프리카, 탄지나아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물이 안 나올 때 였습니다. 탄자니아는 상하수도 시설이 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집집마다 물탱크가 지상에서 5~6m 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동펌프를 이용해 지하에서 물을 끌어 올려 탱크에 저장시켜 놓습니다. 자동펌프는 전기로 작동됩니다. 그런데 전기가 수시로 장시간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기가 나가버리면, 자동적으로 펌프는 작동되지 않습니다. 탱크에 저장되어 있던 물을 다 쓰면 근처 물을 구할수 있는 곳에 양동이를 들고가서 물을 길러 와야 합니다. 현지 적응을 못해 물을 어디 구해야 되는지 몰랐을 때는 4L양동이 하나로 이틀을 버텼다는. 설거지를 못해서 냄새가 좀 나고, 못 씻어서 몸 구석구석이 가렵고 찝찝해지만, , 견딜만 했습니다.

 

한국보다 기반시설이 조금 덜 갖춰진 환경에 맞춰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 할 뿐 아무 지장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경험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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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지하수 오염 실태(불소, fluoride) - 동, 서 아프리카

2013. 6. 1. 01:12 자료공유/물,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

 

 

 

 

 아프리카 지하수 오염 실태

 

 

 

 

 

 

1. 아프리카 지하수 오염

 

1) 두 가지 주요 유입경로

 

   ➀ 대수층

   ➁ 지하수 개발 할 때, 잘못된 설계로 인해 지반이 약화된 토질

 

 

2)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인자

 

   ➀ 가축의 분뇨

   ➁ 묘지근처 시체의 독성이나 악영향을 끼치는 액체

   ➂ 무분별한 쓰레기 처리로 인해 토질 및 지반 오염

 

 

 

 

2. 서 아프리카 지하수 오염 현황

 

1) 서 아프리카 지하수는 아프리카 시골 대부분의 물을 공급해주는 자원이었음.

2)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로 현재는 화학적 물질로 오염된 곳이 많음.

3) 서 아프리카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대표적인 화학물질은 불소임. 세계보건기구가 1.5mg/L 불소수치를 상회하는 지역도 여러 곳 있음.

4) 높은 불소 검출 지역과 수치

 

                                             <출처: Perspectives in Water Pollution>

 

 

  ➀ 동아프리카: 요르단 계곡으로부터 수단, 에디오피아, 케냐 그리고 탄자니아를 포함하

      는 Rift 계곡지역

    

      □ 케냐: 불소 수치가 5mg/L보다 크게 검출되는 지역과 8mg/L 이상 검출되는 지역으로 나뉨

      □ 탄자나아

         ▻음용수로 사용되는 물의 30%에 불소 함유량이 1.5mg/L을 초과.

         ▻탄지니아 곳곳에 버려지는 막대한 쓰레기로 인한 지하수 오염이 심각함.

 

 

                            

<그림 1> 지하수 오염을 유발하는 탄자니아 쓰레기 배출량

 

서 아프리카:

    ▢ 남아프리카 공화국, 말라위: 지하수의 불소 함유량이 1.5mg/L을 초과함.

 

 

 

 

 

 

 

 

참고 문헌

1. Groundwater Contamination in Tanzania

2.  Perspectives in Water Pollution:

    Chapter 4  Ground Water Contamination with Fluoride and Potential Fluoride

    Removal Technologies for East and Southern A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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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나 마타타 _ 여행자로서의 시선이 거북하다

2013. 3. 9. 20:14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작가는 오소희다. 동아프리카를 여행한 흔적들을 책으로 엮어냈다. 한 달의 시간동안 그녀와 그의 아들이 낯선 풍경들 속에서  바라본 본 것들은 사실일까? 거짓일까? 정처 없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 곳을 바라보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감상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진 않았을까.

 

 

 

 내가 아프리카에 가 보지 않고서, 색감이 잘 조화된 사진들이 곁들어진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아프리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난 지금 동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약 1년간 생활했었다. 그곳에서 현지인들의 시선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순 없었지만, 동네 한 주민으로 주위의 환경들이 익숙해 졌었고 그들의 생활환경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생각했다. 허나, 그 익숙함이 아프리카를 신선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떠나보지 않고 여행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덧붙여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살아보지 않고 어떤 도시의 어떠한 것도 사실화 시키지 말라고. 한 달이란 시간은 아프리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짧다. 탄자니아는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고 그 엇갈림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짧은 시간동안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들리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무작정 믿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 의심 없이 마냥 받아들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솔직히, 책에 대한 감흥이 없다. 책의 첫장을 넘겼을 때, 생겼던 기대감이 점차 사라진다. 구속되지 않은 여행자의 자유와 나태함, 그리고 여유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그 심적 상태가 그리 반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 자신의 이야기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 남의 이야기라서 별 흥미가 가지 않는 것일 수도.

 

 

 

 내가 보고, 듣고, 부딪히리라. 내가 직접 느끼지 않고서 무엇을 안다고도, 이해한다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 생각한다. 작가의 모든 말이 진실이라 생각지 말길 바란다. 단지 한 개인이 바라본 아주 주관적인 팩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느끼고 싶으면 직접 떠나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적어라.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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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_마종기

2012. 9. 11. 21:0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첫날밤

                                      

                                         마종기

 

 

일시 귀국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밤,

지구 반바퀴의 시차 때문이었겠지만

새벽 세시에 잠이 깨었다.

밖에는 늦봄의 빗소리 들리고

다시 잠들지 못 하는 몇 시간,

밤이 어둡고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내일 당장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다는,

늙어가는 내 희망을 짓눌렀다.

그랬었다, 내가 처음 외국에 도착했던

삼십 년 전 밤에도 비가 왔었다.

사정 없는 외국의 폭우가 무서워

젊은 서글픔들이 오금도 펴보지 못하고

어두운 진창 속에 던져 버려졌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신을 포기하던 첫날밤에도

나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시간이 타고 있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내 불을 끌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화상의 상처를 다 가릴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맨 마지막 장을 뒤집어야 할 때,

푸르던 희망은 창밖으로 날아가고

시차를 넘어서는 한 사내의 행방을 찾아서-

 




 

# 단돈 90만원 들고 대구로 올라갔다. 월 15만원인 첫 자취방에서 첫 날밤, 가을 스산함이 꺼질 수 없었던 외로움을 불태워 홀로 울음을 삼켰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그 때의 아픔들이 되살아나 시에서 한 동안 눈을 뗄수 없었다. 첫 날밤, 나 또한 잠들었다 깨기를 몇 번, 다시 잠들지 못하는 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했고 그 모를 무거움이 내 몸을 짓눌렀다.

 

 

 



 

# 탄자니아, 먼 이국땅에서 사역의 고단함과 일상의 무료함이 엄습했을 때, 이 시를 꺼내들어 읊조렸다. 내일 당장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다는. 단어 하나 하나가 가슴팍을 쳤고, 그 울림은 날 잠 못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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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루쇼토 #4 Inrente View point

2012. 9. 2. 23:43 자료공유/여행

 Inrente Farm 에서 느긋한 오전을 보내고 있을 때,

 근처에 사는 청년 한 명이 놀러왔다. 그는 내게 관심을 보였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름 가물가물하다. 그냥 그 녀석이라 하자. 훗.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다가 그 청년에 Inrente view point 에 안 가느냐고 물었다. 오후에 갈 생각이라고 했더니, 녀석 자기가 가이드 해주겠단다. 자신은 이곳에 산지 오래됐고, Inrente Farm 에서 온 많은 여행객들의 가이드를 해주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하지만, 난 혼자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고사했다.

 

 점심때가 다가왔고, 가방과 캠코더를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까지 그 녀석은 계속 Inrente Farm 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숙소를 나와 숲속 길로 나섰을 때,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뒤를 따라왔다. 녀석은 내게 가이드 가격을 흥정했고, 뭐 기왕 가는 거 혼자보다 둘이 낫다 생각되어 적정한 가격에 합의하고 함께 view point 로  떠났다. 녀석이 말하길, Bigger view point small view point 가 있다고 했고, 먼저 Bigger view point로 안내 해주겠노라 했다. 뭐,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나그네 마음으로.

 

 

 

 

 가기전에 녀석의 집에 잠깐 들렀다.

 

 

 

 

 

 

 

그 녀석이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찍어달라길래  한 컷 찍었다.

 

 

 

 

 

 

 

 

 

view point 가는 길에 염소 한 마리.

 

 

 

 

 

 

View Point 로 가는 길은 무난했고, 솔직히 그렇게 눈여겨 볼 만한 곳은 없었다. 흥!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Bigger view point 에 다다랐다. 산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방인으로 낯선 땅, 푸르름과 맞서고 있다는 산뜻함이 나를 기분좋게 했다.

 

 

 

 

 

 

 

 

 

 

 

 

인터넷에서 루쇼토를 검색할 때 보았던 사진이 떠올라, 나도 따라 해봤다. 근데, 신발이 완전 거지꼴이구나.

 

 

 

 

 

 

 

 

 

점심도 안 먹고 나선 등산 길이라 몹시 허기졌다. 다시 1시간 이상 산을 내려가야 한다니, 허걱. 그래도 다시 가야지.그리 배고픔을 달래며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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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루쇼토 #2 우분고 정류장 _7시간의 기다림

2012. 8. 6. 16:32 자료공유/여행

 2011. 12. 24

 

 07시.

 우분고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출발시간 7시 30분이니,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갔다. 표를 끊을 때 여행사 직원 사라가 가르쳐준 장소로 가서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버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탄자니아 사람들 성격이 느긋하니까 출발시간도 늦혀질 수 있겠다 생각하고 마냥 기다렸다. 그런데 시계는 7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쉬고 있는 차장들을 찾아가서 티켓을 보이며 차가 언제오냐고 물었다. 기다려 보란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고 불안은 가중됐다.

 

 그러나 그 버스가 떠났다고 확신하는 차장 한명을 만났고, 나는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분고 정류장 안을 1시간동안 바쁘게 뛰어다녔다. 확인한 결과, 버스는 떠난게 확실했다. 분노를 삭히며 마음을 추스렸다. 버스만이 날 루쇼토로 데려다 주는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차도 나를 루쇼토로 데려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버려야 했고 재정도 손해 봐야 했다. 무엇을 먼저 해야 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허둥대다 표를 끊어준 사라를 만났다. 다짜고짜 항의 했다.

 

"어떻게 된거야! 아침 7시부터 네가 가르쳐준 버스 타는곳에서 기다렸는데 버스가 안 나타났어!"

 

사라 왈

 "분명 거기서 7시 30분에 떠났는데..."  

 

 "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하는거야! 허튼 소리하지마!"

 

사라가 거짓말 한다고 생각되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언성을 높이면서 항의 했지만, 옆 여행사나 현지인들은 다들 나를 외면했다.

 

 "이미 버스는 떠났으니 다시 15,000실링을 내고 다음 버스를 타"

 

 사라는 선심쓰 듯 말했고, 다른 방도가 없었던 나는 알았다며 그 다음 버스가 몇시에 떠나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다음 버스는 오후 12시에 떠난다고 했다.

 

 4시간이나 기다리라고, 장난치냐! 이런! 망할놈의 시키들. 

 

 더 이상 말을 해봤자 내게 득될 게 없었다. 사라 손에 쥐어져 있던 이미 떠나버린 버스표를 다시 집어들고 정류장 안으로 들어갔다.

 

 

 09시.  

 루쇼토로 가는 사람들 속에서 다른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9시에 떠나는 버스 직원에게 나도 좀 끼워달라며 애걸복걸도 해보고 9시에 다른 버스가 없는지도 수소문 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고 있던 루쇼토로 가는 승객 한명이 경찰을 한 번 찾아가 보라며 은근히 부추긴다 

 

                                     그래,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가보기나 하자.

  

 바로 경찰을 찾아갔다. 흥분한 탓에 영어가 마구 뒤섞힌다. 그는 알아 들었을까? 나를 정류장 터주대감 되는 아저씨에게로 데려갔다.  

 

날 살려준 차장 아저씨

 

 

 내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부탁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그렇게 해주겠다며 오후 1230분 버스를 타라고 한다. 고마운 마음보다는, 3시간 더 버스정류장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극도의 짜증이 먼저 치밀어 올랐다. 경찰이 그런 나를 보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내 뱉었다.

 

 

 

 

 

 

 

 

 

 

 

 

 

 

 

 

 

 

 

 “Too far, but no way"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3시간을 버텼다. 차 시간이 다가 올수록 나는 수험생처럼 몹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차를 놓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날 엄습했다. 그 창피함, 나의 실수들이 나를 잡아 삼킬 것만 같았다. 안절부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예민한 장이 자꾸 트러블을 일으켰다.

 

 12시.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가서 힘을 다해 대변을 본 후 버스를 기다렸다.

 

 1230분. 버스가 오지 않는.

 

 1240분. 버스는 나타나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1250분.  

 차장을 만났다. 버스가 곧 올거라고 기다리라고 했다. '나를 놔두고 가버리는 것은 아닌가.' 잡 생각들이 날 더 불안하게 한다.

 

  오후 1시 30분.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 지났지만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

 

  어쩌나. 진짜 집에 돌아가야 하나.

 

 오후 2시.

 버스가 내 눈앞에 들어왔다. 앗싸!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2시라도 와준 네가 너무나 고맙구나. 그러고서 앞자리에 죽치고 앉았다.

 

 

험상 궂은 현지인들.

 

 

 

 험상 궂은 아저씨들이 무어라 소리쳤다. 3시간 전에 차장아저씨가 이미 쓸모없는 표로 차를 태워준다고 했지만 경찰이 없는데서 딴소리를 할까봐 난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버스가 빨리 떠나 나를 내리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상황은 순조롭게 돌아갔고, 나는 이미 쓸모없게 된 표를 가지고 그 버스의 승객이 되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말이다!

 

그렇게 떠난 버스는 8시간 30분이 지나서여 루쇼토 정류장에 도착했다.

 

* 참고

 버스 티켓에 표기된 다레살람(우분고)~루쇼토까지의 소요시간은 6시간이었다.

 

 

 루쇼토엔 어둠이 짙었다. 어두움은 원래 두려움을 조장하지. 루쇼토 지리를 전혀몰랐던 탓에 두려움은 증폭됐다. 짙은 어둠을 더듬거리며 그저 이름만 알고 있는 게으트 하우스 'Irente farm' 만을 계속 머리에 되새겼다. 한 10분을 서성였다.  한 명의 택시기사가 다가왔다. " Inrente farm" 앞뒤 다 자른 외마디 단어를 냉큼 받아든 택시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10,000실링을 요구했다. 대낮이었으면 흥정했겠지만, 늦은 밤이라 마지못해 타는 척 하고 이렌테 팜으로 향했다. 버스를 놓쳐 여행 일정은 늦쳐졌지만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음을 틀림없는사실이다.

 

 

 

 

 

 

 Don't blame anyone else, if things go w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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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루쇼토 #1 떠나는 첫걸음

2012. 7. 15. 22:16 자료공유/여행

 탄지나아에서 생활한 지 10개월이 넘어서고 있을때, 2주간의 방학이 주어졌다. 탄자니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렝게티 국립공원, 응고롱고로 분화구, 킬리만라로 산 등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외에도 유명한 곳들이 많다. 그런데, 난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홀로 배낭을 메고 멀리 떠나고 싶었을뿐. 

두 발로 낯선 곳을 딛고 걷고 싶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탄자니아 침엽수 지역인 루쇼토를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나무 몇 그루 덩그러니 심어져 있는 황량한 대지로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검색해보니, 루쇼토는 어딜 둘러봐도 나무가 빽빽한 산림 지역이었다. 아프리카 같지 않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들이 그리 많지 않은 듯 햇다. 별 고민없이 루쇼토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떠나기 삼일 전, 목요일에 우분고 정류장에 갔다. 자신의 여행사 버스로 끌어들이려는 삐끼들이 귀찮게 했다. 줄줄이 이어져 있는 여행사를 직접 찾아가서 가격을 흥정했다. 처음 갔던 곳에서 15,000실링을 불렀다.

'비싼거 같은데...'

 

몇 미터 떨어진 다른 여행사를 찾아갔다. 근데 이 녀석들! 제시한 가격은 무려 18,000실링. 도둑놈들. 첫번째 찾아갔던 여행사로 찾아가서 날짜를 맞춰 봤는데, 내가 떠나고자 하는 토요일 버스가 없다. 이런! 잔머리를 굴려가며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18,000실링을 불렀던 여행사로 가서 첫번재 여행사가격을 거들먹 거리며 가격을 깍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시크한 척도 같이 하기로 했다. 맘은 "제발, 제발, 제발". 근데 이 녀석들 물러설 생각을 않는다. 다른 여행사로 가겠다며 시크한 척 발걸음을 돌린다. 아! 그때 한 녀석 16,000실링을 제시한다. 한 번 눈길을 뒤로 주고 더 시크한 척 하며 두걸음 앞으로 내 딛는다. 녀석들 웃으면서 15,000실링에 주겠단다. 

 

오호라! 그럼 그래야지.

 

티켓을 지갑에 고이 넣어두고,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2011. 12. 24

 요일 새벽 4시 30분, 알람이 울렸고 난 잠에서 깼다. 공복에 장시간 버스를 타게 되면 멀미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밥 몇 숟갈 떴다. 배낭과 캠코더를 챙겨 집을 나섰다. 밖은 짙은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적막한 새벽이었다. 집 앞에서 달라달라(현지 대중교통)를 타고 페리선창장에 도착했다.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붉은 해는 모습을 차츰 드러내고 있었고 새벽녘 쌀쌀한 바닷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었다.  

 

 늘 그렇듯, 어딘가로 떠날 땐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번엔 떠나야겠다는 의지가 두려움을 눌렀다. 그리, 첫걸음을 내 딛었다. 이제 나그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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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선교 간증문

2012. 5. 8. 19:02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무익한 종의 고백

 

선교는 누가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선교를 하는 것일까요? 아님 똑똑한 사람이 선교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이 선교를 하는 것일까요? 선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이 시킨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이 그에게 사례 하겠느냐?”며 종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당연히 종의 역할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탄자니아 선교를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하고, 제 호칭을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 불렀습니다. 맡은바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과 발 맞추어 함께 걷는 법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머리로는 ‘동행’이란 두 글자를 떠올렸지만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갓난아이가 걸음마가 익숙해질 때까지 자주 넘어지듯이,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의식적인 노력 없이 그 분의 뜻을 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건축사역이 시작되면서 건축현장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제게 맡겨진 잡일들을 담당하면서 마음속에 불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들 듯 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이런 잡일 하러 탄자니아에 온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은 않으시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를 섬기면서 살라 하면 그리 할 수 있겠니?저 또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을 계속 던지셨고, 하나님의 따뜻한 손으로 제 지친 마음을 만지시던 날, 전 거실땅바닥에 무릎 꿇어 그리하겠다면서 그저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교현장도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이들을 포용하면 좋겠지만, 저 또한 본성이 악한 사람인지라 맘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현지인들에게 불만을 표하면서 언성을 높였던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제가 감당치 못할 만한 일들이 밀려왔을 때, 그 일을 맞닥뜨려야 하는 고단함이 싫어서 한 발짝 물러서서 방관한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제멋대로인 저를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그 넓은 마음으로 그저 지켜 봐주셨습니다. 1년의 사역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했던 부분들 때문에 마음 한 켠이 많이 무겁습니다. 특히, 제가 맡겨주신 영혼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울 뿐 입니다. 요즘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써 일하고 계신 탄자니아 선교사님들을 자꾸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분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 삶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선교 1년은 하나님의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탄자니아에서의 실질적인 선교는 끝났지만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을 위해 다시 힘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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