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식 변명 _ 마종기

2021. 4. 1. 21: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다시 가게 된 것은 조바심 때문이었다.

나이는 들어가고 겁도 늘어나고 

돌아보아야 점점 좁아지는 세상에서 

높고도 더 높은 유정천의 하늘을 만나

보이는 것이 끝일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 

고집도 늘어가고 트집거리도 늘어가고

주위로 막아선 높은 벽들은 가슴을 조이고 

내 힘으로는 두들겨 깰 수도 없으면서 

무엇이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알고 싶었다. 

 

주위가 허전해져서 채근이라도 하고 싶었다. 

파타고니아의 정상은 화산 연기를 뿜어내며

나를 보지도 않고 화가 나서 묵묵부답인데 

무섭고 겁이 나도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다냐고, 여기가 다냐고 묻고 싶었다. 

 

매일 저녁 구워 먹었던 일곱 살짜리 양, 

내 손자보다 어린 양이 눈으로 조롱했다. 

인연의 끈들이 구름같이 다 풀어지는 

파타고니아의 하늘에서 내리는 굵은 빗줄기, 

올가미로 느껴지던 질긴 관계들을 끊어버린다. 

비를 맞으면 흐르는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를 헤집어 상처만 주는 주위의 풀잎, 

칼 같은 풀잎이 가슴까지 찌른다. 

아무도 거두지 않은 죽음들이 

오래 젖어서 천천히 일어서는 땅, 

지상의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도 잊고 

굵은 비에 가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시간, 

약속해준 그 용서만 나를 아프게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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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날 _ 마종기

2021. 4. 1. 21:33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갔다. 

저희들끼리 자라고 저희들끼리 

날아다니다가 짝을 찾아

여러 모양의 열매를 맺었다.

 

그 후에는 방문 두드리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들리다 말다 한 소리는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들이었다. 

모두가 필요 없다며 버린 인연들.

어느 날 저녁부터는 주위가 작아지고

흥얼거리는 박자인지, 누가 오는 건지 

밤새도록 속삭이는 음성이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밤과 눈을 부지런히 섞고 있었다. 

 

보이는 게 다 흐렸지만 고백하자면

그것이 바로 내 질긴 평생이었다. 

그래도 끝이 흰색이라는 게 좋았다. 

체세포에 묻은 인내는 무게만 있는 건지

한 발 두 발 걷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참는 법을 몰라 헤매던 날들을 떠났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후회들이 모여 눈이 되었겠지, 

맨몸을 감는 겨울밤이 오히려 정답다. 

겨울의 끝은 저만치에 오고 있지만 

그 뒤에 오는 날들은 누구의 진정인가, 

숨이 끝나도 한동안 귀는 열려 있다지. 

나이 든 후부터 자라난 힘든 물음들이 

다 되살아나 내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안에 나를 부르는 정든 목소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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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Étranger by kangsy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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