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타락 구속-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기초 _ 알버트 윌터스

2016. 10. 15.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창조 때에 형성된(formed) 것이 역사적으로 죄에 의해 왜곡(deformed)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reformed)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 145 -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범죄로 인해 타락되었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속사가 시작되었다. 창조부터 구속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은 각각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구속사에 포함된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다. 따라서 전체적인 과정을 동일한 관점으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창조, 타락, 구속》은 올바른 세계관을 바탕으로 어떻게 현상들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또한 모든 상황이나 현상을 '구조'와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고, 그에 올바른 개념을 설명한다. 책을 통해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함과 동시에 이 시대에서 개인과 사회, 교회의 역할을 다시 상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래는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참고하면 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절 


# 창조 

 하나님은 말씀으로 6일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직접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통치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 27) 사람이 죄를 짓기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했다.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딤 4:4) 


#타락

 하와는 뱀의 간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죄를 짓는 순간, 창조된 모든 것은 타락의 영향을 받게 된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의 육체는 그대로 있었으나 그들은 벌거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다. 땅도 외형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수고로이 땀을 흘려야지만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있었다. 본래 창조된 땅과 비교했을 때, 어떤 측면에서 땅은 척박해졌다. 여자가 자손을 낳아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가겠지만, 여성에게 해산의 고통이 더해졌다. 만물의 모든 것이 타락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속성이 완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도 말살되지 않는다."(p. 100)


 
 


# 구속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타락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폐하시려고 하지 않는다. 타락의 영향을 받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신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그에 따른 대가는 치뤄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 만물을 타락시킨 인류의 모든죄(원죄를 비롯한 모든 자범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하나님의 단 한번의 피의 제사를 통해 인류의 구속사를 시작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창조 세계는 '회복'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쿨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D-day와 같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은 V-day와 같다. 이제 우리는 두 시기 사이에 살고 있어서,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치열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P. 134


 그렇다. 신자는 결정적으로 승리할 그 날을 고대하며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뤄야 한다. 만약 신자의 삶이 그저 편하고 쉽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닐 수 있으며, 결국에는 마지막날 하나님은 그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며 외면하실 것이다. 



책에서 좋은 문장들


개정판 추천사


창조로 형성된(formed) 구조가 타락으로 인해 방향이 왜곡되었고(deformed) 그것을 구속으로 변혁한다(reformed)는 성경적 비전의 핵심을 제시한다.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과 행동의 관계를 이렇게 파악하는 견해에 대해 많은 사상가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의 행동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계급적 이해 관계라고 주장한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세계관을 인도의 주체가 아니라 인도의 객체로 본다. 즉 세계관이란 실제로는 우리 정서의 역학에 의해 통제되는 행동을 합리화한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환경의 물리적인 자극에 의해 조건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실 인간의 행동은 매우 복잡해서 계급적 이해 관계, 조건화, 억압된 감정의 영향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 양식에서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달려 있다. 즉 이 문제 자체가 세계관의 문제다. 


세계관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거의 모든 교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세속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광범위한 영역과 구분하여 기본적으로 '거룩한' 혹은 '종교적'인 영역, 즉 신학이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에만 국한시키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성경이 우리의 신학(신학적 윤리를 포함해서)을 형성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치, 예술, 학문 같은 세속적인 일에는 기껏해야 간접적으로 관여할 뿐이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세계관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교회관이나 신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원래의 선한 창조, 죄로 인한 창조 세계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한 창조 세계의 회복.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조 교리가 가장 핵심적인 교리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구원의 핵심은 바로 죄로 타락한 창조 세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창조


이신론은, 우주라는 시계가 일단 그 태엽이 감기고 시계추가 흔들리기 시작한 다음에는 신의 창조 행위 없이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이다. 


매일 세계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사역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한마디 주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고, 주님의 명령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다"(시 33:9, 새번역)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2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무질서의 상태 즉 질서의 반대(이 해석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해석으로서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근거를 둔다)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략> 혼돈하다는(formless) rjtdms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니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의 보존에 깊이 관여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을" 뿐만아니라, "만둘이 그[예수님] 안에 함께 선다"(골 1: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를 통하여 모든 세상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신다(히 1:2, 3). 만들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은 또한 그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창조의 법의 전 영역에 깊이 참여하신다. 그는 창조와 재창조 모두의 중보자이시다. 


정의와 신실성, 청지기직과 경외에 대한 창조 규범을 하나님이 분명한 언어로 주신 적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규범적인 행동 기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창조 규범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음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양심이다. 


그리스도인들로 창조의 법의 인식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사물의 창조적 구조가 타락으로 인해 변화되었거나(혹은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게 되었거나) 예술, 경제,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인간의 인식 능력이 부패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불변성(혹은 창조 세계의 계시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우리의 분별 능력을 회복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능력을 과소평가한다. 


인간 문화의 광대한 전 영역은 변덕스런 진화가 빚어낸 임의적인 변종들로 이루어진 장관도 아니고 자율적인 자아가 창의적으로 이룩한 파노라마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이로운 지혜와 세상에서 우리가 맡은 중요한 임무가 서로 합해져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 사역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걸작품을 위한 청사진에 따라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그분의 조력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선한창조 


범죄 이전의 창조세계는 전적으로 명백히 선하다는 성경의 가름침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그처럼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류가 그것을 더렵혔을 때 그것을 폐기하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 치러 그것을 다시 새롭고 선하게 만들기로 하셨다. 하나님을 잡동사니를 만들지 않으셨으며 또한 만드신 것을 폐기하지도 않으셨다. 


인본주의는 사람을 자유라는 개념을 통해 규정하고, 자유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떤 법에도 따르지 않는 자율성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 종교는 그 반대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종의 신분으로 규정되고 종의 신분은 창조주의 법을 순종하는 타율성으로 규정된다. 인본주의는 법을 자유의 부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법을 자유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인류 전체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아담의 실패에 연루되어 있다. 죄의 영향은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친다. 창조된 사물 그 어느 것도 원칙상 타락의 파괴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점을 더욱 분명히 하자면, 죄와 악은 언제나 풍자 만화와 같은 성격을 띤다. 즉 일그러지긴 했지만 어떤 사물의 모습인지는 알 수 있는 그림과 같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그 인간성이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동물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다. 인본주의 학교도 여전히 학교이며, 손상된 관계도 여전히 하나의 관계이며, 혼란스런 사고도 여전히 사고다. 각 경우 타락한 창조 속에 어떤 것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창조의 영구적인 선함, 즉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창조된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킨다.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도 말살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두 '질서'의 맥락에서,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구조는 창조의 법, 달리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그 근거를 둔다. <중랴> 반면에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창조세계의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방햐응로 나갈 수 있다. 이런 이중적인 방향은 개인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공학이나 예술 그리고 학문과 같은 문화현상과, 노동 조합이나 학교, 회사와 같은 사회제도, 그리고 감정과 성, 합리성과 같은 인간 기능에도 적용된다. 


구조와 방향이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아무리 서로 얽혀 있을지라도, 이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지적해야겠다. 


죄를 범하는 행위가 사탄의 속박 아래에서 이루어지지만, "마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사탄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가 변질되어 신음하도록 만든 책임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문제처럼 여기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경에 나오는 타락 이야기에서 사탄의 역할을 살펴보라. 뱀(천상계의 타락한 천사가 뱀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인데)이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할 때, 지상계는 아직 악으로 오염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이 범죄할 때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선한 지상계가 허망함과 속박에 매이게 된다. 사탄은 먼저 인류를 조종해야만 선한 지상계에 재난을 몰고 올 수 있다. 지상계의 상태는 인간의 책임 아래 있으며 인간의 책임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근본적인 신앙 공백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구속은 회복, 즉 창조에다 어떤 것을 첨거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선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회복은 창조 세계의 어떤 영역에 국한되기보다 창조 세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온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지상의 모든 악의 근본 원인(즉 인간의 범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치유되고 극복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그의 구속은 죄의 모든 영향도 제거한다. 선한 창조의 왜곡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런 왜곡의 범위는 무제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회복의 가능성을 제공하신다. 만일 창조 세계 전체가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면, 창조 세계 전체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먼저 나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 보통 '나라'로 번역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basileia)의 일차적 의미는 '왕권' 즉 '주권', '통치', '지배'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영역 혹은 지역을 지칭한다기보다(물론 이것도 부차적으로 의미하는 바이지만) 왕이 자기 직무를 역동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강조점은 왕으로서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예수님의 기적은, 구속이란 창조 세계가 죄와 악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피조물의 삶으로 복괴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 즉 회복의 사역은, 타락한 창조 세계에 그 나라가 침투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나라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을 성서로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와 시간」(Christ and Time, 나단 역간)이라는 저서에서 스위스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전의 1944년 노르망디 상륙에 관에 쓰고 있다. 'D-Day'에 감행된 그 상륙 작전은, 'V-day' 즉 최종적이고 완전한 승리를 실제로 누리는 날 이전에 반드시 있어야 했다. 쿨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D-day와 같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은 V-Day와 같다. 이제 우리는 두 시기 사이에 살고 있어서,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치열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은 창조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하나님과 그 대적 사이에 심각한 전쟁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확실히 '영적' 전쟁이다. 


5 구조와 방향의 구분


구조란 창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방향이란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 성경에서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용어들(예컨대 성전, 제사, 제사장, 분향)이 신약에서 그리스도 혹은 그의 몸인 교회의 모든 삶으로 전이된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이처럼 개혁은 일차적으로 성화를 의미한다. 개혁의 두 번째 특징은 이 성황의 방법이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갱신이라는 점이다. 


구조라는 개념은, 모든 상황이나 조건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법을 통해 자기 피조물에 제공한 개발 가능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인간의 가장 지독한 왜곡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규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든 일부 요소는 보존될 가치가 있다. 반대로 모든 사물은 종교적 방향성을 갖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죄의 왜곡에 감염되어 있으며 종교적 갱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병든 교회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그 교회 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좋은 것을 붙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한다. 여거서도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롬 12:9) 한다.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를 왜곡하는 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는 주어진 영역 안에서 규범을 왜곡 하는 것이며(국가에서의 불의나 가정에서의 어린이 학대, 사업체에서의 임금 착취 등), 다른 하나는 한 영역의 권위를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은사의 중요도나 화려함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들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화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다면, 모두 똑같이 '카리스마적'이며 '영적인'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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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_ 추가설명

2016. 3. 8. 12:37 책과 글, 그리고 시/작문(作文)

 

필자가 작성한 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http://kangsy85.tistory.com/590)"의 문장이나 단어에 대한 질문이 있어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출처: http://m.blog.daum.net/apologist/13

 

 

 

1.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수 있는 가능성'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이며, 절대로 우리의 공로나 행위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주의자들과 성경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성을 사용하여 '종교적 진리'는 물론 역사와 우주를 취급하는 성경을

탐구할 수는 있다"

 

- 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 p. 67 -

 

 

필자가 작성한 '가능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속성들을 아직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 타락, 구속은 각각 불연속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관성이 있는 연속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타락'이라 단어를 전체적인 틀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야한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절망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부분을 포함한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이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성이 왜곡되었긴 하지만, 동물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다. 손상된 관계도 여전히 하나의 관계이고, 잘못된 사고과정도 하나의 사고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타락한 창조 속에 선한 어떤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각주:1]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말살되지 않는다" 

-알버트 윌터스, 《창조, 타락, 구속》, p. 100 - 

 

 

 

2.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인한 '어느정도' 회복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말미암아 존재론적 관점에서 완전 회복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왜 '완전한 회복'이란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자유의지'란 주제와 함께 썼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 회복하지 않았다.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모두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고 있기에, 항상 올바른 선택만은 할 수 없는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의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9~20 

 

 


그러므로 이미(초림으로 이루어진)와 아직(재림으로 완성될)사이에 살아가는 신자는 연약한 육신을 입은 존재이기에 날마다 악과 단호히 맞서서 싸우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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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버트 윌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홍병룡 옮김, IVP, p.1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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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구속.

2016. 1. 18. 22:05 신앙/창세기 묵상



출처: blog.daum.net


참된 성경적 신학은 창조, 타락, 구속 세가지 원리를 균형있게 견지해야 한다.

 창조된 모든 실재가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왔고 본래부터 선했다는 것, 

죄로 인해 모든것이 손상되고 오염되었다는 것, 

그러나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되고 회복되고 변혁될수 있다는 원리다.


- 낸시 피어시, 《완전한 진리》, p. 187-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걸작품이 한순간에 타락하게 만든건 바로 라는 것이다. 죄의 파괴성과 그로 인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창세기 3장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난 다음,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타락한 그들은 숨어버렸다. 어둠은 빛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결국, 그들은 악한 행위에 대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지음받은 존재로 회복할 수 있는 복음을 제시하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시복음(창 3:15)이다. 원시복음에서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서 뱀(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나타난다고 이야기 하는데,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씨를 통한 자연적인 잉태과정을 거치지 않은 동정녀 탄생[각주:1]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아담과 하와는 깨닫지 못했겠지만, 하나님의 그들을 위한 구속의 역사를 미리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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