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2022. 4. 28. 20:56 신앙/기도(祈禱)

 

만물의 창조자이시자 구원자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나아옵니다. 

나의 노력과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사오나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다 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한대 나는 내게 아주 작은 해를 입힌 자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저 욕하고 비난할 뿐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구원받은 자라면, 아니 '가치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진 은혜'를 아는 자라면 내게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야 할텐데, '용서'를 흉내내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자를 미워하고 증오할 뿐입니다. 밀어내고 모른척 할 뿐입니다. 

나의 하나님, 간절히 구하옵기는 제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내게 해를 가한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은 자가 마땅히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깊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악의 구렁에서 건져주시고,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나를 붙드시며, 선한 것을 따르는 의지와 결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연약하오나 나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관자이자 통치자이십니다. 그 주님을 의지하오니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그 길을 이끌어주시옵소서. 

날마나 그 은혜에 감격하게 하시고, 그 은혜만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나의 모든 일상을 돌보시고 이끄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드리오며, 모든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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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당신이 오해하는 하나님의 사랑 _ 조너선 리먼

2021. 8. 2. 11:34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서론

17쪽

"매체가 곧 메시지다"(The medium is message)

 

20쪽

단지 '교회'가 복음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메시지의 당연한 결과는 특별하고 구별된 형태의 교회이다. 등록 교인 제도와 권징은 인위적으로 세워진 구조가 아니다. 이 둘은 새 언약의 은혜 위에 더해진 법률적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부터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이끄는 복음의 부르심으로부터 유기적,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지역교회 교인의 권리를 상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을 하거나, 이웃을 사랑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거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부르심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참된 신자라면 지역교회에 헌신해야 한다. 이는 마치 참된 신자가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지역교회에 등록하거나 헌신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의로운 삶을 거부하는 자이다. 이런 행위는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22쪽

교회론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죄책감에 빠진 인류, 그리스도의 흠 없는 삶과 희생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 죄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누리는 삶 등에 관한 모든 지식을 반영해야 한다. 

 

26쪽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질 때, 사랑하고 용서하고 돌보고 거룩하며 의로운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그림 역시 모호해진다. 그러나 이 모호한 경계선은 또 다른 모호한 경계선, 즉 거룩한 창조주와 타락한 피조물 사이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과 맹신하는 사람 사시의 경계가 모호해진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물이다. 이것은 오늘날 덜 '제도화'되고 덜 '경계화'된 지역교회의 개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초월하시는 하나님보다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선호하고, 성자 예수보다 인간 예수를 선호하며, 거룩한 성경보다 인간저인 성경을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시사한다. 

 

35쪽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거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전혀 희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슨 의미일까? 사랑이 가장 큰 선이며, 사랑이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무엇이, 또는 누가(!) 사랑을 정의하는가?

 

18세기와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제도보다는 사랑에 의해, 외부적인 구속보다는 내적인 열정에 의해, 이론적인 추론보다는 즉흥적인 감동에 의해, 사실보다는 감정에 의해, 효율과 질서보다는 아름다움과 자유에 의해, 생기 없는 신학 서적 탐독보다는 고된 삶에서 땀 흘리며 얻은 지혜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했다. 나는 이와 유사한 충동들이 포스트모던 서구사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제도라는 단어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43쪽

그러나 이 책이 다루려는 것은 제도주의의 위협과 권위의 남용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오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 사이에 훨씬 더 만연한 오류로, 서구문화의 반제도적, 반경계적, 반윤리적, 반권위적, 세계관과 욕구들이다. 또한 이 책은 반권위적 비경계주의의 위협과 불복종의 위협에 대해 다룬다. 타락한 세상에서 이러한 논의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지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49쪽

어떤 저자들은 등록 교인 제도가 오늘날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무익하며, 시대상황과 맞지 않으므로 포기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저자들은 등록 교인 제도의 배타적인 경계선이 복음을 왜곡하므로 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자들 사이에 '제도주의 축소' '진정한 공동체 확장' '조직 축소 및 사랑 확대' 등의 용어들이 반복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마가톨릭교도들과 자유주의 개신교 저자들 중에도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후로는 그 수가 더 많아졌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ㅇ과 소위 탈복음주의자들도 지난 10~20년 사이에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제 "제도주의는 악하고,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다"라는 주장이 거의 주문처럼 되어버렸다. 

 

52쪽 

이 책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셔서 경계를 긋게 하시고, 그 경계를 통해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시고,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시며, 어떤 사람들이 이미 교회에 들어와 있다면 그들을 내보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교회가 사랑이 정확히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내는 데 유익하도록 이러한 경계표를 사용하게 하셨다. 

 

1부 잘못 정의된 사랑

64쪽

사람들은 교회를 둘러싼 경계선을 긋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할 때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정말 성격적일까?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대체로 (1)개인주의적 이라고 평가한다. 그들은 또한 개인주의와 함께 (2)소비주의, (3)일반적인 헌신의 부재 그리고 (4)모든 절대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참고]

소비주의 세계관은 처음에는 상대적이었던 선-소비-을 결국 절대적인 선으로 대체한 관점이다. 소비주의는 부와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축적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소비를 절대화한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모든 필요는 물질적 소비로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많은 욕구가 채워진다. 욕구 충족이 구원의 핵심내용이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주의는 세속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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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ROMA, 2018) - 진정한 사랑은 희생과 진심에서 비롯된다

2019. 1. 12. 17:17 삶을 살아내다/일탈(逸脫)

로마(ROMA, 2018) - 진정한 사랑은 희생과 진심에서 비롯된다


감독 : 알폰소 쿠아론, 주연 : 얄리차 아파리시오, 마리나 데 타비라



 영화는 물로 바닥청소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상은 여유롭고 평화롭지만, 그 삶 가운데 가정의 불화가 존재하며 시대의 혼란은 가중된다. 영화는 1970년대 멕시코 시티내 로마지역을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삶의 거친 파도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꿋꿋이 헤쳐나아간 여자들의 흔적이다. 파도에 휩쓸려 바다속으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파코와 소피를 구하러 풍파속으로 뛰쳐 들어간 클레오의 나아감은 위태롭지만 위대하다. 아이들을 구한 클레오와 울먹거리는 아이들을 힘껏 껴안는 소피아는 남성를 대체하는 시대의 가장이었다. 남자들은 다 형편없다. 가족들을 버려두고 바람을 피는 안토니오, 클레오를 임신시켜 놓고 도망가버린 페르민. 남자들은 다 터무니없이 형편없었다. 그러했기에 여성들이 더욱 빛났던 영화이다. 


영화을 보면서 생각난 것들이 있었다. 



1. 개똥


 영화 초반에 주차장에 개똥이 널려 있다. 안토니오 차를 주차시키려고 할 때 똥은 자꾸 거슬리기만한다. 안토니오가 집을 장기간 떠나려고 할 때 똥에 미끄러질뻔 한다. 소피아가 술에 취해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올 때 여전히 개똥은 널려있다. 

Q. 영화 감독이 개똥을 통해 관객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2. 동병상련


"누가 뭐라고해도, 우린 늘 혼자야"

- 영화 속 소피아 대사중에서


 소피아는 남편 안토니아에게 버림받았다. 클레오도 발가벗은 채로 무술을 선보이던 페르민에게 버림받았다. 소피아가 클레오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소피아는 클레오를 해고시키지 않았다. 클레오와 함께 병원에 가서 클레오가 임신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소피아가 매번 클레오에게 다정하게 대해준 것은 아니지만, 분명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는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클레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둘은 함께 있었기에 역경속에서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경험의 공유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3. 결국, 진정한 사랑은 희생과 진심에서 비롯된다

 

 파코와 소피는 바다 얕은 곳에서 놀라는 엄마 소피아의 말을 듣지않고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점점 파도에 휩쓸려 바다 더 깊은 곳으로 밀려 떠내려간다. 클레오는 파코와 소피에게 시선을 두면서 페페를 돌보기위해 육지로 나온다. 육지에서 조금 더 나왔을 때 클레오의 시선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 클레오는 다급하게 바다로 뛰어든다. 어쩌나... 그녀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파도는 거세고 점점 물은 깊어져만 간다. 그러나 클레오는 파고와 소피를 구하기 위해서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클레오는 거친 파도를 꿋꿋히 헤쳐나가 죽을뻔한 파코와 소피를 구한다. 하마터면 모두 다 죽을뻔했다. 그렇다. 희생없는 사랑은 없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영화가 끝난 후 한참동안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클레오가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해 육지로 나와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소피아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뛰어나온다. 그때 클레오는 그동안 속앓이만 해왔던 이야기를 소피아와 아이들에게 털어놓는다. 


"전 아이가  태어나지 않길 원했어요"


그 말을 하고서 클레오는 서글프게 운다. 소피아는 클레오와 네 아이들을 함께 안으면서 진심어린 위로를 건넨다. 아이들도 클레오를 뜨겁에 안는다.


"우리는 널 정말 사랑한단다, 클레오"





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어 추운 날씨에 마음만은 따뜻하기만 했다. 올 한해 늘 마음은 따뜻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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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장 - 마지막 때

2016. 10. 23. 23:23 신앙/말씀 묵상(默想)



베드로전서 4장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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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참고,

2015. 8. 22. 12:53 삶을 살아내다


사랑은 오래참고.





지인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오래참는거라고, 말했다. 난,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주신 그 사랑을 체감하지 못한다. 성경에서는 말하는 그 사랑이 감정적으로 느껴야만 되는 사랑은 아니다. 항상 감정적으로 느낄수도 없는 노릇이고. 성경에서 죄인을 위한, 타락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이이야기는 아주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고통은 명확하게 개별적이다. 하지만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내 머릿속에, 늘 돌아다니는 말이다. 각 개의 삶에서 직면하는 고통은 개별적이지만, 그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깊이는 더 깊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어떠한 경험은 하나의 사건을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경험해봤다면, 좀 더 쉽게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미워도 다시 봐야 하는 쉽게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 참고 기다려주는 사랑을 경험해봤다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싶다. 삶을 되돌아보건대, 누군가를 참고 기다려 주는 사랑은 못 해봤다.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준 적이 없었다. 상대방이 마음에 안들면 아주 교묘하게 관계의 울타리에서 밀어냈고, 밀어낼 수 없을 것 같으면, 관계라는 틀 자체를 부숴버렸다. 관계가 호전되어 인내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하는, 그만큼, 나는 개인적이고, 나 중심적인 사람이다. 남을 이해하려하기보다, 내가 이해받기를 원하는, 그리고 상대방의 답답함은 배제하고, 어떠한 사건, 말, 행동이 이해되기까지 입을 닫아버리는 그러한 사람이다. 



사랑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든,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서 삶의 안정성과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연인들이 말하는 그 '사랑'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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