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_ 마틴 로이드 존스

2021. 10. 10. 10:43 책과 글, 그리고 시/좋은 문장

 

218쪽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둘째 아들이 경우에서 대단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그는 싫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그는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분명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자기 계획을 망치는 것에 화가 나 퉁명스럽고 무례하게 "싫소이다."라고 말하고 나가 버렸다가 다시 한 번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이 첫 단계입니다. 당신은 되돌아가 이미 물리쳐 버린 일을 재검토해 봅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바꿨습니다. 전에는 거절했지만 이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 위대한 용어의 뜻들 다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진실로 마음을 바꿉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바꾸면서, 당신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관점과 그 관점으로부터 나온 잘못된 행실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회개에는 분명 이런 후회의 요소 역시 존재합니다. <중략>

 그 다음에 회개에 대단히 중대한 필수적 요소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행동의 변화입니다.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행동은 회개의 일부였습니다. 그 아들이 단지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고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기만 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았거나 자기 친구들과 해변에서 오후를 보내기 위해 나가 버렸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후회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던 일을 행하는 것이 회개의 과정에서 중대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 이런 태도, 사람들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듣고 그에 반응했을 때 생겨나는 새로운 무언가가 회개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231쪽

 회개와 후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참된 회개는 후회와는 달리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으며 그분께 상처를 입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는 우리가 더러워졌으며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슬퍼하시게 만든 죄들을 미워합니다 
그 죄는 하나님을 나의 가슴에서 멀리 몰아냈습니다
- 윌리엄 쿠퍼

 회개는 죄를 없이하고자 하는 열망과 결단을 줍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모함과 활동력과 열심과 벌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팔복 가운데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궁극적인 시금석이며, 후회와 회개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것은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고 점점 더 그분을 닮아 가기를, 의롭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기를 갈망하게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다시 한 번 타락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를 낙담시켰기 때문에 슬퍼하는 그런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후회는 소극적이지만 회개는 적극적입니다. 

 

283쪽
칭의에 대한 로마가톨릭의 견해는 우선 그것이 죄사함의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죄가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서 제거된다고 덧붙입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칭의시에 우리에게 은혜가 능동적으로 주입되며 그 일은 물론 세례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세례 행위에서 은혜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실제로 주입되며, 그것이 칭의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죄사함, 즉 죄가 제거된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시에 적극적인 의가 주입되고, 적극적인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역시 주입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가톨릭은 칭의가 점진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견해에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만일 은혜가 주입된다면 그것을 늘어나고 발전할 것이며, 칭의도 점진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소위 "대죄(mortal sin)"을 저지르면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하지만 칭의를 잃어버렸을 때는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회복하는 과정은 연옥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84쪽

 루터가 깨달은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습니까? 칭의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과 공로에 근거해 의롭게 여기신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의 것으로 돌리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에 의지합니다. 

 

289쪽

 칭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첫 번째를 소극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칭의의 소극적 요소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사함이 우리의 첫 번째 필요입니다. 율법은 우리 모두를 정죄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리고 율법은 "의인은 없나닌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합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롬 3:19) 있습니다. 나는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죄책이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합니다. 칭의의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나의 죄가 가리워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는 소멸되었습니다. 

 하지만 칭의는 죄사함에서 그치지 않습니다(이것이 중요합니다). 칭의와 죄사함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 정확히 말하자면 심지어 복음주의자 중 많은 사람도 - 칭의와 죄사함을 동일시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 강의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들이 가진 속죄에 대한 교리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율법에 소극적으로 순종하시기에 앞서서 적극적인 순종을 하신 것도 속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칭의에는 두 번째 적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 혹은 우리의 계정에 넣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셨고 존중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 의로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292쪽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간략히 설명해 드림으로써 이 사실을 좀더 확실하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시다. 칭의는 앞에서 본 것처럼 성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삼위일체의 복되신 위격들 사이에 이런 역할의 분담이 이루어집니다. 의롭고 합당하다고 선언하시는 분은 성부이십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둘째로, 칭의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법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같습니다. 반면에 성화는 우리 안, 즉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일어납니다. 의롭다 함을 받을 때 나는 법정에 서 있고 재판관이 나에게 자유를 선언합니다. 칭의는 나의 바깥에서 나에 대해 진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화는 내 안에서 역사하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셋째로, 칭의는 죄책을 제거합니다.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정의상 칭의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행동(once-and-for-all act)입니다. 칭의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복될 수도 없고 반복될 필요도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단번에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화는 끊임없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수건을 벗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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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두려움 1

2014. 10. 20. 22:32 삶을 살아내다


2주 전, 잠들기 전에 갑자기 "과연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짧은 순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온 후부터 신자로서 살아온 삶은 되돌아 봤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 아니냐, 유일한 신을 말이다. 그리고 나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었던 기억이 없다. 적절한 자기 타협과 선별적인 순종만 있었을 뿐. 구원을 받기 위한 나의 의만 생각날 뿐이다. 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아찔한, 결론을 내리고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눈을 떴다. 전날 밤 고민한 구원의 문제가 먼저 떠올랐다. 내가 구원을 못 받는다고...구원을 못 받는다고, 두려웠다, 너무나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반적인 두려움과는 또 다른 유형의 두려움이었다. 그러고서 며칠동안 혼자 있을 때 내가 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의 상태를 분석하였다. 





문제의식 하나, "왜 내겐 사랑이 없는가"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있을 뿐, 믿지 않는다.


만약 기독교가 말하는 본질적인 내용,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고 있다면, 나는 지금처럼 팍팍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위해 아무런 댓가없이, 자발적으로 그 목숨을 버렸다. 내가 이 사실, 하나님의 독생자를 버리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했던 그 사랑[각주:1]과, 예수그리스도의 순종[각주:2]을, 아는 자라면, 타인에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도 냉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진정한 회개가 없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려면, 나의 죄인[각주:3]됨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죄를 위해 죽은 예수그리스도는, 나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가 된다. 그래,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었는데, 뭐 어쩌라고, 식의 반문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됨을 인정하지 않고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의식 둘, "왜 소망이 없는가"


1.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없다. 


신자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바라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여, 그 나라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쳐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신자는 이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 등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세의 삶에 대한 의무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자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자이긴 하지만, 현세의 삶을 사람으로서 사회의 책임과 역할과 의무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각주:4]  









  

  1. 요일 4:9-10, 롬 5:8 [본문으로]
  2. 빌 2:8 [본문으로]
  3. 롬 2:23 [본문으로]
  4. 딤전 6:1, 딛 2:9-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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