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_ 한 강

2016. 11. 29. 17:5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유월



                      한 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胃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山川,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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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들은 노래 3 _ 한 강

2016. 11. 24. 20:4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 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 강 시인의 시는 가슴 아프다 못해 처참하다... 시를 읽고 있으면, 왜 이리 가슴이 아플까. '더 피 흘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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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이야기 12 _ 한 강

2016. 11. 24. 08:14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몇 개의 이야기 12


                                                  한 강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

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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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날들 _ 한 강

2016. 11. 23. 14:0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조용한 날들 



                          한 강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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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 이상화

2016. 11. 23. 01:2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은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과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루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봄은 왔다. 그리고 봄은 반드시 다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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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_ 신경림

2016. 10. 24. 19:3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

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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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_ 정호승

2016. 10. 16. 23:0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wizztour.com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에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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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사랑하지 않아 _ 어반자카파

2016. 10. 11. 14:3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널 사랑하지 않아 



                                 어반자카파



무슨 말을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개만 떨구는 너 

그런 날 바라보는 너 

그 어색한 침묵



널 사랑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눈물 흘리는 너의 모습에도 내 마음

아프지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 달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이게 내 진심인거야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눈물 흘리는 너의 모습에도 내 마음

아프지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 달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이게 내 진심인거야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 달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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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_ 이소라

2016. 9. 29. 22:58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밀려온다 

머리는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 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향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해 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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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속도-도둑고양이 3 _ 김주대

2016. 8. 26. 13:4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rara1733.tistory.com]





슬픈속도-도둑고양이 3



                                  김주대 




새벽

아버지의 칼을 피해 도망치던 어머니처럼

고주망태 아버지의 잠든 틈을 타 칼을 숨기던 형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녀석의 그림자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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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_ 마종기

2016. 8. 25. 20:01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uecys.tistory.com>




기적



                             마종기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고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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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골증 _ 마종기

2016. 8. 23. 19:2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http://m.blog.naver.com/fliesbegone/90194182193>



골다골증 



                           마종기 




1


당신의 골수를 열 달이나 받아먹고

어머니, 내가 생겨났습니다. 

동생들도 당신 뼈에 구멍만 뚫어 

해 지난 갈대같이 속 빈 육신, 

골다골증으로 늙으신 어머니. 

당신 뼈가 얼마나 가벼워졌으면

바람까지 들락거리는 큰길 사이로 

먼 데 어디 날아가실 준비까지 하시는지. 



2


     나는 덱사 스캔과 간단한 숫자 계싼으로 수많은 

골다골증을 진단해주고 돈을 벌었다. 당신의 뼈에는

5천 개의 구멍, 당신의 살에는 8천개의 구멍. 당신은 

구멍 난 풍선이나 타이어처럼 매일 몸이 줄어들고 목

숨의 생기도 빠져나간다. 정신이 누추해져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뼈들은 답답해서 자기 가슴에 구멍을

뚫고, 신산한 세상살이의 대못과 시달림. 아파서 못을 

뺀 자리에 남아도는 피투성이 구멍들.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 나도 모든 것을 덮을 때가 되었다. 

돌아보면 구멍 많은 당신도 가엾고

바닥 터진 내 지난날도 가엾다. 

숨지 마라, 죄지은 지상의 모든 구멍들

암, 다시 보면 세상에 가엾지 않은 게 없지. 



벌거벗은 뼈들이 추위를 더 느끼는가. 

의과대학 해부학 시간 사람의 뼈들

동맥도 정맥도 더 이상 도착하지 않고

내 마른 손바닥만 핏빛으로 적시던

미세해진 그대 몸의 온기 속에서 

빈 뼈가 서로 만나 불 지피던 날들. 



뼈가 운다. 운율 맑은 피리 되어 

비 내리는 어두움에 외톨이로 운다. 

얅고 가늘어진 뼈 대책 없이 부러지고 

안타까웠던 집착도 형별만으로 기억될 뿐, 

더 기다릴 명분도 신음 소리 하나로 떠나고 

뼈를 태워 재가 되어 내가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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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일기 2-파티마 성지에서 _ 마종기

2016. 8. 23. 19:05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og.naver.net/limestreet11>



포르투갈 일기 2

- 파티마 성지에서 


                                 마종기 



기적이 보고 싶어 

찾아간 것은 아니다.

희고 밝은 호흡의 감촉이 

내게는 벌써 기적들이었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광장에서 무릎을 꿇었다. 

뜨겁고 두려웠던 모든 열정이 

긴 사연을 간곡히 말하기에

내가 켠 촛불은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 숙인 내 부끄러움의 비명, 

당신밖에 들은 사람은 없다. 



젊어서는 아무나 좋아했고

나이 좀 들어 조국을 떠난 뒤부터는

왠지 하나씩 자꾸 잃기만 했다. 

주위가 추워지고 창백해지면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 여기 왔다가 간다. 

의지와 표상의 세상은 벌써 가뭄에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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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꿈 _ 마종기

2016. 8. 9. 23:09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blackjack0919.deviantart.com>




개꿈

- 친구 김치수의 부음을 들은 뒤 


                                          

                                        마종기 



가까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서둘러 문상 가는 길에 길을 잃었다. 

헤매 다니다가 날이 어느새 어둡고 

캄캄 칠흑 같은 밤에 길도 안 보이는데 

풀 죽어 내 쪽으로 오는 다른 친구를 만났다. 

좋은 글을 쓰는 말수 적은 이 친구는 

문상 대신 배를 타고 이민을 간단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 가방을 지고 있다. 

한밤에 더구나 비까지 내리는 이 시간에 

어디로 왜 이민을 가느냐고 막아섰더니 

친구들 하나 둘 죽고 돌아가며 아파서 

가슴이 시려 살기가 힘들어서 간단다. 

목이 답답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개꿈 속에서 개 모습으로 한숨을 쉰다. 




이민 가는 친구가 사라진 어두운 쪽에서 

눈에 익은 대머리 한 사람이 다가온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리운 내 아버지다. 

반가운 아버지는 나를 보자 매를 내리신다. 

젋었던 날 자주 맞았던 그 대나무 담뱃대로 

반가운 마음 때문인가, 매가 아프지 않다.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얼굴이지만 

밤새도록 매를 내려주셨으면 좋겠다. 

친구 하나 살리지 못하는 네가 무슨 의사냐, 

이민 가려는 가까운 이를 말리지도 못하는 게 

무슨 벗이고 무슨 시인이더냐. 

아버지 말씀이 매보다 더 아프고 슬프다. 

매를 맞아도 아프지 않고 춥기만 하다. 

어느 틈에 아버지도 안 보이고 친구도 없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생각해보아도 모르겠다. 

모두가 떠난 것인가, 답답해 소리쳐본다. 

귀가 없어진 것일까,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 




어릴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어머니는 키가 자란다고 위로해주셨는데 

그게 사랑 안의 개꿈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머니가 안 계셔서인지 

요즘은 꿈을 꾸면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만나는 사람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개꿈도 많이 늙고 힘이 빠져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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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생애 _ 마종기

2016. 8. 9. 22:52 책과 글, 그리고 시/시에 울다


                          <출처: chulsa.kr>




가을의 생애



                                마종기 



젊은 날 실패한 긴 언약이 

가을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던 

한바탕 구절초 꽃 더미로 왔다. 

오늘은 그새 나이든 꽃을 만나 

술 한잔 나누며 간청하리. 



어쩌다 절벽에 서서 센 척도 했지만

불길의 속내를 힘써 다듬기도 했다고 

내 증인으로 나서달라 애걸하리. 

화사했던 밤들도 허영만이 아니었고 

때때로 실수처럼 향기도 품었다고 

확실하게 증언해달라 부탁하리. 



서로를 뒤돌아볼 나이도 되었으니 

이제는 함부로 손댈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 묻어나던 은근한 향기, 

구절초도 회오리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키를 낮춘 

가을이 알려준다.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꽃, 

언덕이 비어 있어 떨고 있지만

네 살이 살아 있어 추운 거다.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예술만이 마지막까지 

죽음과 맞선다고……

한판 승부까지 간다고……



꽃이 가슴을 진하게 잡으며 

말을 남기려다 쓰러진다. 

꽃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었다. 

속사정 알고 있는 구절초 얼굴이 

두 겹 세 겹의 물결로 보이고 

친하던 수호천사가 미소하면서 

가을의 끝막에서 깨어난다. 



몇 줄의 언어가 머리를 털며 

홀연히 내 앞에서 빛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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