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Social Network Service)의 숲에서, 자유롭고 싶다.

2013. 10. 12. 00:10 삶을 살아내다





SNS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지만, 진정 그들과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 궁금하다.

SNS를 통해 구축된 그들과의 관계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난, Facebook에 매일마다 올라오는 일상의 흔적들에 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당신이 어디서 누구와 만났는지, 난 궁금하지 않단 말이다. 

더욱이, 잘 포장되고, 잘 꾸며진 사진들과 표정들에서

'내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알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나 또한, SNS에서 사진이나 글을 올릴 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잘 수정된 글과 잘 나온 사진들만 선별해서 올리니, 내 삶의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블로그를 통해 방문자들에게 정보를 공유하지만, 정작 난 허무하다.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탓이 큰 것 같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 대가없이 도움을 주려는 내 마음자체가 거짓이었나 보다.



자꾸만 확인하게 되는 블로그 투데이수와

자꾸만 염탐하게 되는 Facebook의 하찮은 일상들.




무수하게 이어져버린 네크워크의 선을 끊어버리고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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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개발론 수업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섭리,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13. 9. 2. 23:5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2010년 학부 시절, 국제개발협력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국제관련학과 교수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그 교수님은 나의 무모한 열정을 좋게 봐주시면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정답은 아니었지만, 장황한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해주셨다.

 


 그렇게 상담을 끝내고 교수님 방을 떠날 때, 코이카로부터 받은 '국제개발협력의 이해'란 책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국제개발협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라는 말과 함께. 시간날 때 읽어야지, 하면서 아직까지 내 책장에 장식처럼 꽂혀있다. 







 4년이 지난, 오늘 사회복지학과의 '국제사회개발론'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실에 들어가니, 담당강사님은 먼저 와서 조교랑 이야기하고 계셨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분이었다. 갑자기 떠올랐다. 그 분은 코이카 제안서를 준비할 때, 내가 찾던 주제와 관련된 것이 많아서 한참을 살펴보았던 블로그의 주인, 전 네팔외교관이자, 코이카 이사 홍승목씨였다. 그때 국제개발협력에 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메일을 보내볼까 고민했다가, 내 생각이 정리가 안돼서 보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분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느낌이 이상했다. 신기하기고 했고, 조금 벅차기도 했다. 그보다 더 날 가슴벅차게 했던 것은, 수업 주 교재가 4년 전에 국제학과 교수님한테 받았던 '국제개발협력의 이해' 란 것이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시간의 타이밍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퍼즐의 조각처럼, 딱 맞아 떨어졌다. 순간, 너무나 벅찼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너무 놀랐다. 




 첫 수업에 들어가서, 수강할지 말지 결정하려고 했는데, 이제 고민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다시, 내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감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다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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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에 대한 트라우마 _ 머리에 피가 나다, 그리고 계속된 두통

2013. 8. 3. 01:21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책상 서랍의 모서리에, 머리를 찍혔다. 상처를 직접보진 못하였고, 음푹 패였다는 말만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거니, 하고 편하게 맘을 먹었다. 피는 시간이 지나 멎었고, 상처부위도 만지지만 않으면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다. 머리가 약간 아팠다. 경미하긴 했지만, 간간히 계속 아팠다. 지끈거리기도 했다. 뇌출혈에 대한 무서움을, 눈으로 직접 본지라,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뇌에 출혈이 생기면 사람이 순식간에 죽는다고, 누군가의 그 의미심장한 말이 계속 메아리 쳤다. 하지만, 아닐거야, 계속 내 상태를 부인하며,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 스스로 위로했다. 다시 잠들었다. 



 이틀이 지났다. 다시 눈을 깼을 때, 머리가 짜증나게 지끈거렸다. 이상한데, 아닐거야. 허나,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계속되는 두통에 걱정은 점점 더해갔다. 박사님들께서, 머리를 다쳤을 때는 경과를 지켜보는게 아니라고, 빨리 병원에 가서 CT를 찍어 확인해보라고 강권했다. 괜찮다고, 참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는, 뇌출혈에 대한 그 무서움을 알기에, 고집피우지 않았다.



 응급실로 바로 갔다. 모서리에 머리를 찍혔는데, 피가 났고, 계속 두통이 있어서 CT를 찍으러 왔다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내 의식상태를 점검하는 몇 가지 테스트가 있었고,  나는 무사히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리고 CT를 찍었다. 



 검사결과, 사진상으론 아무 이상이 없다고, 의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보지 않고선 못믿겠더라. 의사에게 사진을 보고 싶다, 이야기했다. 눈으로 확인을 해야, 안심이 될 듯 했다. 사진을 봐도 잘 알진 못하지만, 의심가는 곳이 있으면 왜 그런지 물어봤고, 의사는 부딪힌 것과는 상관없다, 다시 무덤덤하게 말했다. 



 참, 다행이다. 계속 두통이 있긴 했지만, 두통을 대하는 내 태도는 달라졌다. 뭐, 두통 그까짓거 사라지겠지라고. 아무튼,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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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오지랖 _ 대학원 진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말았어야지.

2013. 7. 11. 07:54 삶을 살아내다

 


 2012년 12월쯤부터 대학원 진학에 관한 포스팅을 한 후, 대학원 진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메일을 받았다. 그들 중 대부분이 2013년 후기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 성심성의껏 답변했으며, 내가 가진 정보를 아무 대가없이 공유했다. 



 2013년 4월 중순 후기 대학원 지원접수가 시작됐고,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6월초 대학원 합격발표가 났다. 대학원 진학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 중 대다수가 각 해당 학교 및 학과에 지원해서 지필고사 및 면접을 거쳤을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도움을 요청한 그 사람들에게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대학원 진학에 관한 의견조사지를 작성해서 문의를 해왔던 사람들 중 후기 대학원 지원에 관심이 있다고 한 19명에게 의견 조사지와 함께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 중 답변이 온 사람은 고작 2명이었다. 답변을 온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았노라고. 




 처음부터 그들에게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내 메일에 아무런 답장도 없는 그들에게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대학원 진학에 실패했어도 정보는 공유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진학을 안했으면 안했다고, 답장 정도는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후덥지근한 날씨에 왠지 모를 짜증이 났다.












 뭐, 내 오지랖이 넓었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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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무료함, 그리고 관계의 상실.

2013. 6. 29. 23:0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브뤼겔의 회화 <게으름뱅이의 천국>

 

 

 

 

# 1

바빴던 몇 주간의 일정이 끝났으니, 잠시 게을러지겠다는 나태함토요일의 무료함이 이성적인 사고를 감상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한 때의 무료함이, 배움의 궤도에 충실히 순행하고 있는 구심력을 약화시키고, 소위 '일탈'을 시도하게 만드는 원심력을 가중시킨다.

 

# 2 

사람과의 관계에 충실하지 못하고 진실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문제점을 나에게서 찾으려하지 않고 괜한 피해의식으로 타인의 무정함을 탓하고 있다. 관계의 상실은 남을 이해해서 받아들이려 하기보다 나와 너의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서 들어옴과 나감이 없는 소통의 단절로 인한 것이다. 또한 관용의 미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개인을 더 개인화시키고, 버려야 할 '우월감'과 '거만'을 키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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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노래]_ 김훈작가의 글이, 날 글 쓰게 했다.

2013. 6. 29. 19:4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 1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글의 울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훈 작가의 직설적이지만 아득한 문체가 맘에 들었다. 며칠을 베껴쓰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난, 글을 쓰고 싶었다.

 

 

 

 

응어리 진 것들은 글로써 내뱉고 싶었다. 글이 가볍지 않았으나, 글의 깊이는 없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얕았다. 글이 나이기에, 내뱉어진 것들이 내가 감당할 수 없어 토해 내었던 것들이기에 역하고 비렸다.

 

 

 

 

# 2

 

 그의 글들에서 '말(言)이 높다'는 구절을 배웠고, '날 것의 비린내'란 구절을 익혔다. 글로만 알고 있었으나, 높아져버린 말의 벽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체감했고, 성숙되지 못한 것들이 내뱉는 말과 글들에서 비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 3

 

 나도 글을 쓴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 글의 논리가 없다. 하지만 글을 쓴다. 그러러면 글을 읽어야 한다. 느껴야 한다. 써야 한다. 글을 읽고, 쓸때는 고독해야 한다. 그리해야 글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보니,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고민해서 글을 썼다. 쓴 글을 읽어보니 엉망이다. 더욱이, 명문가들의 글 앞에서, 초라하기 그지없다.

 

 

 

 써왔던 글들을 죄다 찢어 버리기도 몇 번.

 

 

 

 욕심을 버렸다. 글이 수려하지 않아도, 글이 나를 드러낼 수 있으면 된다. 글이 내 진정성을 더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쓴다. 그리고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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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바둑의 논리로 인생을 이야기하다.

2013. 6. 11. 23:21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미생'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저자 윤태호

 

 

 

 

 오랜만에 '미생'이란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미생은 현재까지 꽤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으며, 최근에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 제작되었다. 책 읽으면서 느낀바, 미생을 단순한 만화책으로 치부해버리기엔 그 내용이 진중했고, 이야기의 구성이 정교했다. 내가 함부로 판단할 책이 아니구나.

 

 바둑의 논리로 인생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필력에 한 번 놀랐고, 이전에 놀랐던 바둑이란 세계의 정교함과 치밀함에 두 번 놀랐다.

 

 

 

"누구나 각자의 바둑을 두고 있다.

 원 없이 자기가 구상한 최선의 수로 판을 짜고 싶을 것이다. 최선의 수로 판을 짠 사람은 결과에 비교적 만족할 수 있지만, 허겁지겁 상대의 수를 따라 두다 망친 사람은 변명조차 할 입이 없다. 그것도 자신의 판에 쳐들어온 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수십개의 눈들이 보는 자리에서"

 

 

 

 만화책을 읽으면서 가슴 울리는 문장들 앞에서 자주 멈춰섰다. 계속 읊조리며, 일기장에 정성들여 받아적었다. 그 때 마침 내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겼고, 책에서 배운 '묘수'를 던지고 상황을 지켜봤다. 과연 만화책의 이론이 실제와 들어맞을까.

 

 

 

 

내가 던진 묘수가 빛이 났을까.

 

 

 

 

 

"판이 안 좋을 때 위험을 감수하고 두는 한 수, 국면전환을 꾀하는 그 한 수를 바둑에서는, 묘수 또는 꼼수라 부른다. 따라서 묘수가 빛나는 바둑이란 그동한 불리한 바둑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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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착함에 대한 단상

2013. 6. 4. 00:4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성품중에 하나는 착함이다. 성경에서도 "너희 착한 행실이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착하게 행동해야 한다거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부탁이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에서 'Yes'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고서 그 일을 처리할 때는 자신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부족함자책할 수 있다. 또한 아무 죄 없는 상대방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착함'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말이다.

 

 

 

 착함이나 선함에 지혜로워야 한다. 모든사람들의 요청과 부탁에 " Yes"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종종 착하다고 불리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Yes"라고 말하는 이유가 "No"라고 말하면 자신을 선하지 않다, 착하지 않다고 생각할까봐 그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람은 착한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거절하는 것은 나쁜 행동도, 틀린 행동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부탁받았을 때, 상대방의 상황을 최대한 배려하되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좋다. 무조건 "Yes"만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No"라고 말하는 것이 쉽진 않으리라 생각된다. 처음부터 쉬운것이 어디 있으랴.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감당할 수 있는 적정선을 인지하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자신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면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지혜로운 착함이다.

 

 

 

 무조건 남의 의견과 부탁에 수긍하고 따라가는 것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우둔함이다. '내가 진정 감당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고 현명한가' 라는 질문에서 깊게 고민하여 지혜로운 착함을 삶에서 배워가길 진정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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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극복하다 - 현실을 직시하고, 남과 나를 용서한 다음, 실제적 행동을 하라.

2013. 6. 1. 00:24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트라우마 극복기

 


# 정신적 고통

 

 싸움의 패배와 코뼈의 부러짐으로 인해 형성된 트라우마는 약 4년간 지속되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싸우는 꿈을 많이 꿨다. 꿈에서 내 주먹은 고무처럼 물렁거려서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지 못했고, 나는 계속 맞기만 했다. 잠에서 깼을 때 기분은 더러웠다. 또 졌다는 '패배'굴욕감이 나를 휘감았다.


 누군가가 코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도 움찔거렸다. 남들이 내 코뼈 부러진 것을 알까봐 두려웠다. 슬쩍 자리를 피하곤 했다. 매체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장면이나 소리를 들으면 그 때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코뼈 골절로 인한 외관상 휘어짐은 거울을 보지 못하게 했다.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때의 사건으로 돌아가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책하며 스스로 고립됐다. 코 가운데 연골(비중격)이 휘어서 비염이 심해졌을 때, 한쪽 코는 완전 막혔고, 그로 인한 두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참을 헤맸다. 자초한 일이기에,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 생각했다. 그리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4년을 버텼다. 결국,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때, 다시 일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평생 트라우마에 갇혀 살 순 없잖아넘어서야 해.”

 


 
 

첫번째 단계: 과거를 버렸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했다.

 

 

"그 날 화장실에서 녀석과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그 녀석이 시비만 먼저 안 걸었더라면……."

"그 때 그 주먹을 피했더라면 코뼈는 부러지지 않았을 텐데……."


 

 무수한 후회와 미련들이 현재를 과거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과거의 일들에 매여 후회만 할 순 없었다. 먼저 매여 있던 과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미 모든 상황은 벌어졌다는 것과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스스로 연민하며 자책하고 있음 또한.

 


두번째 단계: 먼저 그 녀석을 용서했고, 나를 껴안았다.


Forgive him

 

 녀석에 대한 미움은 커져 증오로 발전한 상태였고, 그 증오감은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다. 녀석을 용서하기로 했다. 용서하겠다고 다짐한다 해서 바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의식적인 어떤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를 놓고 기도했다. 녀석의 안녕(安寧)과 행복을 위해서. 차츰 증오의 족쇄가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녀석을 용서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Don't beat yourself.

 

 한 번의 패배가 인생을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갔다. 한 번 싸움에 졌을 뿐인데, 삶의 모든 부분에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스스로 껴안아야 했다. 

 

 

   "넌 단지 그 싸움에서 졌을 뿐이지, 네 인생에서 실패한 게 아니야."

 

"넌 괜찮은 녀석이야"

 


 계속 토닥였다. 추상적이긴 했지만, 회복하는데 꽤 도움이 됐다.

 



 
 

세번째 단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다

 

 

 심적인 고통도 상당했지만, 코막힘에 의한 두통도 그에 못지않았다. 두통으로 인해 하루 일과가 흐트러졌고 집중도는 현격하게 떨어졌다.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지만 모든 행동에 따른 책임을 져야한다는 가치관이 날 꼼짝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금 융통성을 가져보기로 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아픔을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다.

 

 휘어진 비중격으로 인해 코막힘이 점점 심해지는 것이 확실했으니, 비중격 만곡증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수술 당일, 심적으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술에 의해 코막힘 증상이 완전히 해소될 지 확신하지 못했다. 수술 내내,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떨었고, 의사는 재차 나의 심리상태를 확인했다. 뻔뻔하게 괜찮다고 했다. 재발의 두려움이 떨림에 한 몫 한 것 같다. 수술 2 주후, 코막힘이 점차 사라지면서 두통에 시달리는 날도 줄어들었다. 차츰 마음도 안정을 찾았다.

 

 

 


 

# 거울을 보다.    

 

 수술이 끝나고 정신적 고통이 사라지면서 거울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내 눈에는 코뼈가 조금 휘었다는 것이 인식되지만, 남들은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코뼈가 휘어졌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이목구비에 따라 외모의 우열이 결정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는 외모란 이목구비와 함께 좋은 인상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거울 앞에 서서 머쓱하게 웃기도 하고, 미친 척 크게 웃기도 했다. 연습할수록, 웃는 것이 익숙해졌다. 치켜 올라가서 매섭게만 보이던 눈매가 조금씩 내려오면서 인상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계속 방치하면 곪는다. 더욱 아프다.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처 난 부위를 정확히 바라보고 소독약을 이용해 세균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치료를 해야 한다. 찢어졌으면 꿰매야 하고, 부러졌으면 뼈를 제대로 맞춰서 고정시켜야 한다. 치료에 따른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한 번의 치료로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여러 번의 치료를 거쳐야 상처는 완전히 아문다 

 


 

 

그렇게 해서 남은 흉터는 아프지 않다단지 기억될 뿐이다.

 


 

 트라우마는 내게 마음 속 흉터 하나를 남겻다. 누가 건드려도 이제는 아프지 않다. 아팠었노라고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다. 아픔이 날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난 지금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들에 감사하고 있다. 또한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음에 더욱 감사하다.

 




 트라우마는 극복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처절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치료는 고통을 수반한다.

회복이 더딜 수도 있겠으나,

 언젠가 반드시 치료된다는 것만 믿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그러했듯,

당신도 극복 할 수 있으리라 난 확실히 믿는다.

You can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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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ld one has gone, the new one has come.

2013. 5. 16. 23:38 삶을 살아내다

 

 

 

 

 

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다.  진리의 말씀은 빛이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은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갓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임을,

밝게 세상을 비추는 말씀 앞에서 분명히 깨닫는다.  

 

 

 

 

 

 

 

Stand firm in God's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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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를 알고 있니.

2013. 4. 1. 21:55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었다. 오래 전 나의 율법적인 가치관과 행동들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고, 한 친구가 자신이 알고 있는 나에 대해 말했다. 난, 그 순간 그가 말하는 '나'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추상적인 동사의 구체적인 뜻을 알고 싶었다.

 

 

 

 "네가 알고 있는 나는 누구니?"

 

 

 

 혹자는 나를 융통성이 없다 이야기 한다. 혹자는 날, 소신있다고 있다고 한다. 또 어떤이는 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나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들 기억 속에 박힌 내 이미지를 바꿀 생각도 없다. 그런 가치 없고 소모적인 일은 애당초 접어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누군가 나의 일면을 보고 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어리석은 인간에게 할 말은 없다. 


 

  어찌됐듯,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스스로 말문이 막혀버려 간혹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한다. 극도로 예민해지면, 그 누구보다 차가워진다. 이성이 감정을 눌러버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주 정없게 느껴지기 일쑤다. 어찌됐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간격이 존재 한다. 만약 당신이 과거의 나를 말하고 있고 나는 변화된 나로서 삶을 삶아내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그 틈 사이에서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내 관점에서 생각할 때 난, 아직도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기 두렵다. 섣불리 친하다는 말을 쓰지도 않는다. 관계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아서일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정 선을 넘어버리면, 사람 사이에는 적정선은 있어야 한다 한 발짝 물러난다. 그러고서 관계의 선을 그어 그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아주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상처받기 싫고, 상처 주기도 싫으니까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할 평생의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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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함 앞에 서다.

2013. 3. 22. 21:40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2009년 기숙사 생활을 할 때, 내가 살던 1층에는 전산실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소규모 그룹실이 있었다. 하지만 그룹실 내에 컴퓨터는 한 대도 없었다. 그룹실은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내 방 맞은편에 있었다. 도서관에서 밀린 과제를 마무리하고 기숙사에 들어오면 대략 오후 11시 정도였다. 말끔히 씻고 나서, 자정이 다 될 무렵 책 몇 권을 들고 그룹실로 향했다. 학기 중에 새벽녘까지 공부하는 학생은 없었기에, 그룹실엔 아무도 없었다. 그룹실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근처에 있어서 늦은밤 귀가하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와 수다소리가 이따끔 들려오긴 했다.

 

 

 그룹실은, 혼자 쓰기엔 꽤 큰 방이었다. 10평 남짓되었다. 무거운 적막함이 텅 빈 공간을 채웠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내 딛고 있는 땅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새벽의 적막함이 좋았다. 새벽 3~4시까지 글과 마주했다. 그 때, 독서 삼매경에 빠져 전공공부는 뒷전이었다. 김훈 작가의 '공무도하'를 읽으면서 책 속의 "문장력 좋구나, 씨발놈"이란 문장을 계속 읊조렸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을 읽고, 존재와 생존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욕지거리 몇 번 내지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때 마주했던 적막함은, 잊을 수 없다. 나를 압도하는 그 무언의 강렬함, 느껴보지 못한 자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 때의 추억이 날, 적막함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 같다. 아마, 그 적막함으로 형성되어 온 가치관들이 군중들의 맹목적인 선동을 혐오하게 만들었으며, 무리들의 겁없는 행동을 가엾게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 적막함 앞에서 몸서리 칠 개개인들이지 않은가.

 

 

 

 오늘도, 적막함 앞에 선다. 흐트러진 나를, 바라본다. 무뎌진 이성의 날을 세워야 함과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적막함, 좋아하는 이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 삶과 뗄 수 없는 한 영역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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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이 멀다.

2013. 3. 9. 19:19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한참을 둘러서 오다 이제야 목표점을 잡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헌데, 갈 길이 멀다. 걸어온 길이 뚜렷하게 보일만큼 얼마오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한 것이 고작 이 한 걸음이었다 할지라도, 퇴보하지 않았으니, 난 웃으리라.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결과만 좋다면 그 어떠한 과정도 용서되는 세상이긴 하지만둘러가야 할 길을 가로지르지 않았고, 걸어가야 할 길을 나만 바쁘다고 뛰어가진 않았다. 앞선 자의 등을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경쟁자와의 격차에서 비롯된 상대적인 열등감에 무수한 날들을 아파하기도 했다. 앞날의 불투명함 때문에 심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러나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으로부터 한 짝 비켜서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비교를 통해 실질적인 진보를 꾀할 참이다.

 

 

 

 어찌됐든, 난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가리라. 도전한 일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중요하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다. 실패가 분명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앞 뒤 재지 않고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단호함이 필요하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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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인 나의 실수.

2013. 3. 8. 20:33 삶을 살아내다/실수(失手)

 

 

 

 

 

 

 

 

 

 

 전적인 나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들이 몇 번 있었다. 허둥대는 성격과 부주의한 행동 탓에 벌어진 상황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 탓을 하리오.

 

 

#1 차에서 내리면서 한 손으로 문을 닫는데 다른 손의 엄지 손가락이 문 사이에 꼈다. 무지하게, 아팠다. 손가락 사이에선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를 보며 난 울 수 없어서,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2 빨래를 삶으려고 가스렌지 위에 올려 강불로 조절해 놓고, 깜박했다. 한 시간 반 동안 나도 모르게 졸아버렸다. 불 타는 냄새 때문에 잠을 깼다. 시커먼 연기가 주방을 가득채운 다음 거실로 새어나오고 있었고, 빨래는 다 타서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스테인리스 냄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불에 그을려 바닥이 들려있었다. 가스렌지 옆에 놓여진 가스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오분 만 늦었으면, 다 또한 잿더미가 됐을지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3 손목이 삐뚤어졌는지, 쇠 망치로 못을 잡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강하게 때렸다. 아야! 쓸데없는 오기로 한 번 더 망치로 못을 내리쳤는데, 망치가 다시 엄지손가락로 향했다. 어찌 하오리오. 망치와 시퍼렇게 멍든 손가락을 번갈아 봤다. 시간이 지나 아픔은 서서히 줄어들긴 했다. 

 

 

 

참, 나란 놈, 허술한 곳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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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처하는 자세.

2013. 2. 28. 13:02 삶을 살아내다/일상(日常)

                         출처: 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uid=bmpark01

 

 

 

 삶의 여러 길목에서 무수한들을 만난다. 직면하는 대부분의 일들은(모두 문제가 그런 아니다) 회피할 있는 여지가 있고, 도망 칠 기회도 있다. 회피하기 시작하면 일들을 맡아 해결해야 책임감은 점점 잃게 되고, 도망쳐야 변명거리만 더욱 늘어가게 된다  

  이와 반대로 벌어진 일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해결해 나갈 있다.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에 따라 태도는 가지로 나뉠 있다. 소극적으로 방관하면서 그저 일을 끝내는 것 만족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태도로 확실하게 일을 매듭지을 것인가. 어떠한 자세로 문제들을 처리하는가에 따라 결과의 질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청소하라고 시켰다고 하자.  첫째 아들은 청소는 하기 싫지만 하지 않았을 때에 벌어질 상황이 싫어서 궁시렁 거리며 소극적인 태도로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지시에 따라 청소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방일지라도 구석구석 하지 않고 대충 겉보기만 깨끗하게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청소를 대충해놓고 자신은 일을 마무리 지었다고 말할 것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방을 살펴보니 자신도 청소의 필요성 느꼈다. 그리해서 자신의 건강과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 적극적인 자세로 곳곳을 깔끔하게 청소했다. 타인의 지시로 시작된 일이지만 일은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일의 효율성은 당연히 첫째보다 높을 것이고 결과 또한 좋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두 가지 태도로 맡은 역할을 수행할 있다.

하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결과는 크게 차이난다.

 

 

 

 

 

 

 일을 맡아 처리함에 있어, 타의에 의해 일을 떠맡는 수가 많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불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내가 도대체 이걸 해야 하나?’ 여기에 대한 대답에 따라 차후 행동의 방향은 결정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회피 없으니 대충 맡아서 빨리 끝내 버리자 이거나 내가 맡지 않으면 누군가가 맡아 처리 건데 기왕에 내가 맡았으니 일이라 생각하고 확실히 처리하자. 분명 일로부터 배울 점이 있을 거야중에 하나 것이다.  많은 일들 앞에서 전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일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저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이제 후자의 태도로 바꾸어야 시점이다.

 

 

 

 

삶의 태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았다면 다음은 문제점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사람의 습관은 번에 변하지 않는다. 실수하고 깨닫고 실수하고 다시 깨달아서 하나의 행동이 습관이 때가지 의식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리해야 변한다. 그래야 나은 사람으로 성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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