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영화 _ 허문영 지음

2016. 10. 13. 17:47 책과 글, 그리고 시/서평(書評)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 카너멋, 『생각에 관한 생각』 중에서 



 관객은 영화를 본다. 그러나 모든 관객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앞의 문장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 전제 해야할 것이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장면을 보는 것,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생각하는 것,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영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다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중략> 완수의 만족감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영화들이 대다수다 하더라도, 영화의 힘은 보는 것과 읽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완결되지 않는 긴장에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 책 7쪽 - 


 상업 영화일수록 보여지는 장면 그 자체가, 감독이 의도하는 바일 가능성이 크다관객의 시각을 자극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상업영화의 주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업 영화가 표면적 의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에 따라 표면적 의도와 이면적 의도가 공존할 수 있다. 반면에, 저명한 감독의 예술적 영화나 난해한 주제를 가진 영화에서는 관객이 주의깊게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장면속에 감춰진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영화는 시각적인 건과 언어적인 것, 광학적 시점의 주체와 이야기하기의 주체가 분열하고 중첩되고 엇갈리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 기댈 만한 확정적인 논의는 없다. 하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광학적 시점의 주체는 언제나 카메라이며(등장인물의 시점 숏에서조차도), 그 카메라를 통제하는 것은 감독이다. 또한 이야기를 데쿠파주하고 촬영된 장면을 편집해 내러티브를 결정하는 주체 역시 감독이다. 따라서 영화의 최종적 화자는 결국 감독이다

- 책 257쪽-


 장면 전후의 단순한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영화에 숨겨진 의도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영화는 시대의 배경, 인물, 관계 등의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재구성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는 영화평론가 허문영 씨가 영화에 내포된 의미와 주제의식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부분들을 알려주기 때문에 책을 읽음으로써 영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에 소개된 영화는 보지 않았던터라 저자가 서술한 장면들을 읽고 이해하는데 그쳤다는 것이다.  




책에서 생각해 볼 문장들


영화, 폭력, 폭력 이미지에 대한 단상 1 - 아덴만의 미혹


 우리가 솔직하다면, 폭력에 반대한다는 상식화된 우리의 신념이 매우 연약한 지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 지반이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를 최근의 '아덴만의 여명'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전쟁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또한 해적들이 요구한 것이 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폭력적으로, 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면 살육 작전으로 대응한 것이다. 한국 군대가 이 정도 규모의 살육 작전을 벌인 것은 적어도 '광주' 이후 처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살육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환호하고 있다.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 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무한도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웃음과 놀이, 혹은 비예술에서 배우기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김병욱 옮김, 청년사, 1994) 밀란 쿤데라의 유머에 대한 정의는 이러하다. "인간사의 상대성에 대한 도취; 확실한 것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야릇한 쾌감."


 <무한도전>에서는 아무리 해도 그 정도까지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의 확인에 방점이 있다. 이것은 자괴감이나 연민에 가깝다. 미션 수행을 실패했고,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무한도전>은 미션 수행이 완결될 때 그것을 성취로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버텨낸 무능력자들의 안쓰러운 발버둥. 그에 대한 연민과 자기 연민이 그 결말의 배움이 된다. 


영화와 죽음에 대한 단상 1 - 시신 이미지를 넘어


 누군가 죽어서 비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극의 성립을 위해서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에서 분노가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충동이 분노를 조성하는 것처럼, 이 경우엔 죽음이 슬픔을 낳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터트리기 위해 죽음을 조성하는 것이다.


 변호인(2013, 양우석) - 살균과 표백 


 이 영화가 노무현과 우리 시대를 다루는 한, 창자자의 취사 선택을 물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은 선택된 것들이 어떻게 배열되고 어떻게 작동되는가, 라는 평자의 질문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라는 연루자의 질문이다. <변호인>은 '젊은 날의 노무현'의 이야기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변호인>은 '영웅적 결단'의 즉각적이고 강력한 감화를 위해 중요하지만 논쟁적인 사실들을 모두 버린다. 간단하게 물어보자. 1981년의 부림사건을 다루면서 왜 1982년의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다루지 않는가. '노변'이 역시 변호인단으로 참여한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미국이 묵인한 데 대한 항의로 문부식 등이 벌인 사건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한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대의와 무고한 희생의 충돌 앞에서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변호인>은 그 딜레마를 질문하지 않는다. 

 

 <변호인>이 시대와 인물을 그리는 이분법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국가주의자의 폭력적인 이분법과 대중 서사의 순진한 이분법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잔혹하고 폭력적인 권력 대 순박하고 가련한 민중, 혹은 사악한 저들 대 순수한 우리, 혹은 오염된 세상 대 순결한 나. 대중 서사가 오래 사랑해온 이 도식이, 노무현과 우리 시대라는 절박한 질문의 사실들로부터 빚어진 서사에 작동할 때, 우리는 이것마저 창작자의 선택으로 존중해야 되는 걸까. 


노예 12년(2013, 스티브 맥퀸) - 진실이 폭력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일기를 쓸 때조차 완벽하게 솔직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하루의 사건들에 낮은 층위에서라도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취사선택, 과장 혹은 미화의 과정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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